철의 산 - 1

잔당의역습 2016-08-20 0


철의 산


The mountain of iron





 

 김유정은 잠시 하늘을 우러렀다. 해가 누이에게 자리를 내줄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눈부심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의식하고서도 그녀는 태양을 피하지 않았다.


 얕은 주름마저 새겨질 만치 초췌해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밝아 보였다. 조잡하게 세운 천막이 드리우는 것보다 배나 짙은 그림자로도 가릴 수 없는 희락이 만면에 깔린 까닭이었다.


김유정 관리요원, 맞으시지요?”


 누군가의 갑작스런 부름에 김유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움찔하며 돌아섰다. 대강 변조하다 만 것처럼 잔뜩 뒤틀려 섬뜩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긴장감에 잠시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을 부른 사람을 훑어보았다.


 초로의 거한이 있었다. 정장에 의사들이 흔히들 걸치는 가운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있었지만 너무 큰 몸집으로 말미암아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채였으며, 얼굴에는 뭔가를 가리려는 것처럼 입 아래만 드러낸 금속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단정하게 깎은 수염과, 주름과 분간할 수 없이 빼곡하게 난 흉터들이, 혈관이 도드라진 검붉은 피부 위에 나란히 새겨진 채였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며 답했다.


맞습니다. 제가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 김유정이에요.”


맞게 찾아왔군요.”


그런데 누구시죠?”


 김유정은 말을 꺼내고서야 그의 가운 가슴에 달린 이름표에 시선을 돌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유니온 명찰이었다. 발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깨끗하고 빳빳하여, 마찬가지로 깔끔하지만 낡고 해진 가운과는 놀라울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 …….”


 노인은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내밀었다.


소개하지요. 외과의학 박사, 헤르베르트 아이젠슈타인(Herbert Eisenstein)이라고 합니다. 유니온 측으로부터 초빙되어 의무 담당관으로서 활동하게 되었지요.”


 김유정은 약간 망설이는 것처럼 그의 손과 얼굴을 잠시 번갈아 바라보다가 악수에 응했다. 그의 손이 그녀보다 두세 배쯤 컸기에 악수보다는 아이젠슈타인이 김유정의 손을 쥐고 흔드는 품에 가까웠다.


 악수를 한 손을 놓자 김유정은 손이 얼얼한 듯 다른 손으로 악수한 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다시 소개 드릴게요.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 김유정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 와 주시니 감사해요. 캐롤도 지금 어딜 가 있던 차에…….”


 그녀는 말꼬리를 약간 흐리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식은 들었는데 제가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요즘 한숨 돌리긴 했는데 워낙 정신이 없었어야 말이죠.”


이해합니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경황이 없을 만도 하지요.”


 그는 다시금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김유정은 얼마 전 일이 떠오르는지 쓴웃음을 띄웠다.


사실 제가 올 생각이 든 게 그 때문이었습니다. 전장에는 전사만큼이나 항상 의사가 필요하니까요.”


 말을 잠시 끊은 아이젠슈타인은 왼손에 든 묵직한 왕진가방을 내려놓았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팔짱을 꼈다.


제가 가장 필요할 때 있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그의 시선은 반쯤 부서진 빌딩들과 완전히 무너진 건물 잔해들로 가 있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포크레인과 인부들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가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요원들은 출타 중인 모양이로군요?”


, 애들은 차원종 잔당 소탕 때문에요.”


애들이라…….”


 김유정의 말을 잠시 곱씹던 그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왜 그러느냐고 묻는 대신 천막 아래의 간이 의자를 권했다. 아이젠슈타인은 고개를 저었다. 김유정은 긴 숨을 들이쉬고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한동안 그들은 말없이 한 지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를 등지고 선 그들의 그림자가 더 길어지지 않을 무렵, 김유정이 벌떡 일어서서 반색을 하며 반쯤은 외치듯 말했다.


얘들아! 제이 씨!”


 확연히 달라진 그 품을 본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그늘진 곳으로 물러섰다. 다섯 명의 실루엣이 그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왁**껄한 목소리들은 하나하나 밝고 기운찼다.


 한동안 그가 있다는 티를 내지 않았기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아이젠슈타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순간 그가 천천히 그늘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에야 그들은 그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아이젠슈타인이었다.


임무 수고들 하셨습니다. 다친 곳이 있으시면 말씀하시지요.”


 목소리가 기괴했을지언정 어조는 꽤나 친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내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그와 조금 가까이 서 있던, 분홍 단발머리를 한 소녀였다.


, 누구시죠?”


 그 목소리는 나이답지 않게 의젓했지만 어절의 말미는 살짝 흔들려 있었다. 김유정이 뭐라고 하려는 듯 나섰지만 아이젠슈타인의 말이 먼저였다.


김 요원님께서 제 말씀을 안 하신 모양이군요. 실례했습니다. 본부로부터 위촉된 의무 담당관 아이젠슈타인입니다.”


 간략하게 소개를 한 그는 김유정에게 했던 것과 같이 악수를 청했다. 그 청에 응하는 대신 좀 쉰 남성의 목소리가 물었다.


의무요원이라면 이 쪽에도 있지 않았나, 유정 씨?”


 미약하게나마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이번에는 김유정은 대답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캐롤은 약학 쪽이고, 아이젠슈타인 박사님은 외과 전문의세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캐롤이 자리를 비우기도 했고요.”


 그녀는 대답을 마치고 아이젠슈타인에게로 돌아섰다.


소개 드릴게요, 저희 검은양 팀원들이에요.”


 김유정은 다시금 시선을 돌려 그녀의 팀원들을 보았다. 온정이 흐르는 시선이었다. 분홍 머리 소녀가 먼저 나서 가벼운 경례를 하며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리더 이슬비라고 해요. 이쪽은 이세하구요.”


 이슬비가 한 번 노려보자 검은 더벅머리를 한 중키의 소년은 재빨리 휴대용 게임기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고개를 까딱 숙였다.


이쪽은 유리, 서유리라고 해요.”


, 안녕하세요.”


 밝지만 조금 맹한 표정을 한 소녀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얘는 미스틸테인, 독일에서 왔대요.”


 미스틸테인이라는 말을 듣자 아이젠슈타인은 입가에 살짝 의아한 기색을 띄웠다. 그는 뭔가를 물으려는 듯 보였으나, 그 의문은 접은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 나도 브레멘 출신입니다만. 여기서 동향 사람을 볼 줄은 몰랐군요.”


안녕하세요! 헤헤, 반가워요.”


 꽤나 왜소하고 선이 가는 소년이었다. 미스틸테인은 자기 키보다 더 큰 랜스를 껴안은 채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는 탐색하는 것처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이젠슈타인을 훑어보며, 호기심이 여과 없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국말을 잘 하시네요?”


아아, 원래는 못합니다만, 목에 문제가 좀 있어서 삽관해 둔 장치가 동시통역기를 겸합니다. 요원님이야말로 능숙하게 잘 하시는군요.”


장치요……?”


 이슬비의 물음이었다. 아이젠슈타인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건강상의 문제라서요.”


 그는 지나가는 것처럼 말했으나 선을 긋는 것이 틀림없음을 안 이슬비는 더 묻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 신사분은……?”


 그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선 호리호리한 남자에게 이제야 시선을 돌렸다. 꽤나 키가 컸음에도 그는 아이젠슈타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슬비가 그를 소개해 주려는 듯 손을 들어올렸으나, 그 남자의 놀라움 섞인 말이 먼저였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아이젠슈타인 박사님이시라면 그……”


 남자는 고글을 벗고 눈을 비볐다. 아이젠슈타인을 바라보는 예리한 눈매 속 동공이 휘둥그렇게 떠져 있었다.


전쟁 때 저희 팀을 봐 주셨던 분이 아니십니까?”


뭐라고요?”


 아이젠슈타인도 이제야 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는 마냥 가면을 만지더니, 알겠다는 듯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그래요, 이제 기억나는군요. 제이 요원, 맞지요?”


맞습니다, 선생님. 다시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제이라고 불린 남자가 갑작스럽게 호들갑을 떨며 아이젠슈타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김유정을 비롯한 나머지 검은양 팀의 구성원들은 그가 누군가에게 존대를 한다는 상황 자체가 뜻밖인 듯 이미 얼빠진 표정이었다. 이세하가 자기를 좀 보라는 듯 손을 살짝 들며 물었다.


, 아저씨들 원래 알던 사이세요?”


, 어른들 사이의 일이야, 동생.”


 제이가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그 말을 믿을 뻔했으나 아이젠슈타인이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별 일은 아니고, 저도 연방군(Bundeswehr) 군의관 자격으로 참전했었죠. 그 때 울프팩 팀을 진료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 환자를 잘 잊지 않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울프팩이라는 말에 이세하의 눈이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아닌지, 서유리가 눈동자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연방군……?”


독일군 말이야.”


 이슬비가 지적해 주었다. 노인은 기특해 보이기라도 했는지 옅은 미소를 띄웠다. 김유정도 아이들을 보고 흐뭇하게, 혹은 깊게 웃음을 지으며 아이젠슈타인에게 물었다.


제가 받은 공문에 따르면 자유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그렇습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일단은 여기 있을 계획입니다. 아직 차원종 잔당들이 꽤 남아 있다면서요? 그런 일이 되도록 없으면 가장 좋겠지만, 지금으로서 제가 제일 필요한 곳은 여기 강남이겠지요.”


 그는 말을 마치고 왕진가방을 풀어 이런저런 도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의 확답을 들은 김유정이 반색을 하고 재차 물었다.


그래 주시겠어요?”


물론이지요. , 그리고 이 요원?”


?”


 이슬비와 이세하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아이젠슈타인은 잠시 이해를 못 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세하 요원 말이에요.”


"아."


 이슬비가 머쓱한 듯 짧은 소리를 뱉더니 이세하에게 눈치를 주었다. 소년은 어느 새 다시 잡은 채 온 정신을 쏟던 게임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 . 왜 그러세요?”


 아이젠슈타인은 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왼팔 소맷자락을 가리키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리 오세요, 스친 것 같은데 손을 좀 봐야겠군요.”


?”


 이세하는 자신이 다쳤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던 듯 멍한 얼굴로 그가 가리킨 팔을 들어 바라보았다.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환부에서 흐른 피가 먼지와 엉겨 있어 지저분했다. 이세하는 머쓱한 듯 무심코 머리를 긁적이려다 상처가 머리카락에 닿았는지 펄쩍 뛰었다.


, 따가워!”


, 괜찮아요?”


, 언제 다친 거야? 말을 하지…….”


세하야, 괜찮니?”


 그 말을 듣자마자 김유정과 이슬비와 미스틸테인이 놀라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합창하듯 말했다. 하지만 아픈 것은 잠시였는지 그는 대수롭잖은 일이라는 듯 반응했다.


뭐 이 정도쯤이야…….”


좀 보겠습니다.”


 사무적인 대사를 날리며 어느 새 다가온 아이젠슈타인이 대뜸 그의 손을 잡고 끌어온 의자에 앉히더니 조금 찢어진 장갑을 벗겼다. 그 와중에 장갑이 환부를 살짝 쓸고 지나간 듯 이세하가 감전된 것처럼 뜨끔했다.


……!”


미안합니다. 좀 아플 거예요. 뭐가 많이 묻어서 살짝 닦아내야겠습니다. 작은 파편이 들어갔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말을 끝내고 파편을 집어내고,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마무리로 거즈까지 붙일 때까지 아이젠슈타인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전광석화처럼 일을 해치워냈다. 의료용 테이프까지 깔끔하게 붙인 그는 검붉게 주름진 얼굴에 빙긋 웃음을 띄웠다. 묘한 조화였다. 이세하도 어색하게나마 마주 웃었다.


 아이젠슈타인은 그의 손을 굳게 잡으며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하루 정도는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도록 하세요.”


, . 고맙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늘은 남색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임시로 설치된 조명등이 있었지만 달빛만으로도 그들이 있는 곳은 밝게 비취어져 낮 같았다. 잠시 멀찍이 떨어져 서 있던 김유정이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보더니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 오늘은 이만 다들 쉬는 게 좋겠네요. 얘들아, 오늘 정말 수고 많았고……. 박사님, 고생하셨어요.”


저는 와서 한 일도 없는데 고생이랄 것도 없지요. 요원님들이야말로 애 쓰셨습니다.”


 그가 인사를 건네자 아이들은 마주 인사를 하고 각자 흩어져 갔다. 하지만 김유정과 제이는 자리에 남아 있었다.


 짤막한 시선이 오가고 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시지, 유정 씨?”


여덟 시 반이요. 일 하시는 분들하고 자원봉사자 분들도 다 들어가셨고……. 저희도 이만 가야죠.”


그렇군. 어쩐지 허리가 아프더라니…….”


 제이가 무심결에 고글을 닦던 손을 허리에 가져갔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젠슈타인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 나이에 그 정도로 허리가 아프다니 좀 문제가 심각한데, 치료 받아 볼 생각 없나요?”


허리요?”


 철가면 뒤의 시선은 그의 허리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제이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대답했다.


뭐 그러죠. 유정 씨, 수고했어.”


, 수고들 하셨어요.”


그럼…….”


 아이젠슈타인은 성수대교로 통하는 길로 앞서 걸음을 옮겼다. 제이는 김유정을 슬쩍 돌아보더니 그를 따라 멀어져 갔다.

2024-10-24 23:10:5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