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용서해주세요 - 11. 늑대의 사냥 -

Articulus 2016-08-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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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1

 

  여러가지 이유로 봤을 때, 지금 검은양 팀이 이렇게 카페에 들어와 차를 마시며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때문일 것이다.

 

  이세하.

  스트라이커라는 코드네임을 부여받은 그 자를 체포할 것을 유니온은 신서울지부의 감찰국원들에게 지시했고, 그에 따라 검은양 팀은 5분대기조 형식으로 빠져 예비전력이 된 상태이다.

  현재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라고는 순찰을 하면서 차원종 세력이 출몰할 경우 특경대를 도와 섬멸하는 것이 전부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던 그들이 이렇게 한직(閑職)으로 밀려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이세하와의 교전, 그리고 서유리의 부상으로 이어진 참패가 결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과연 여전히 자신이 알파퀸의 아들임을 과시라도 하듯 이세하의 위상력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출중하였고, 거기에 차원종의 간부로부터 부여받은 제1위상력까지 더해지면서 감히 대적하기조차 두려운 상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그를 검은양 팀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유니온은 그들에게 평시의 정찰 임무만을 부여한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더이상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유리가 세하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그 날, 유니온은 공식적으로 이세하를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다. 만약에 유니온이 정보통제만 성공했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까 라고 슬비는 생각해보았지만, 사실 그것도 힘든 일이었다.

  이미 이세하가 차원종 세력에 가담한 사실은 유니온의 관계자만이 아니라, 아주 일부라도 이미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그저 놔두었다가는 유니온만이 인정하지 않는 공공연한 비밀이 될 뻔 했으니, 이번의 유니온의 대처는 유니온답지 않게 빨랐다고 할 것이다.


  딸랑딸랑.

  카페의 문에 달린 방울들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는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매우 낯이 익은 얼굴인지라, 검은양 팀은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늦어서 미안해요."


  김유정이다.

  신서울지부 요원관리국의 부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녀는 동시에 검은양의 관리요원이기도 했기에, 이렇게 그들을 찾아오는 일은 익숙했다.

  다만 그들이 임무를 담당하지 않는 평시에 관리요원으로 있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그녀는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야할지 망설였다. 이세하의 체포 명령이 내려진 이후, 검은양 팀은 이렇게 계속해서 생기를 잃은채 있거늘, 그녀는 그럼에도 그들에게 다가가야만 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유리의 퇴원과 함께 처음으로 모인 이 자리에서 전해야할 이야기가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다가가기도 예전과 같이 쉬웠다.


  "어서와, 유정 씨. 뭘 마실거야?"

  "괜찮아요, 제이 씨. 저는 딱히 생각이 없네요."

  "그래? 알겠어."


  제이는 일어섰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자신의 앞에 놓인 차가운 녹차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제 유정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인지, 그녀는 먼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유리가 입원하고 처음으로 같이 모이는 자리죠?

  오늘 여러분들에게 모이라고 한 이유는 정도연 박사님에게서 들어온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도 전달해줘야 하기 때문이에요."

 

  정도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유리는 재빨리 반응했다.

  "세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건가요!"

  "……"


  유정은 말이 없었다.

  그것만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세하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어려움이 있음을.


  "위상변환엔진의 원리를 이용해보려고 해."

  "위상변환엔진이요?"

  "응. 세하가 가지고 있는 위상력을 일순간 고갈시켜, 차원종의 위상력을 세하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이 작전의 골자야. 다수의 장치들이 설치된 곳으로 세하를 유인하는데 성공하게 되면, 세하의 위상력이 고갈되면서 동시에 차원종의 위상력도 고갈돼. 그 때 일제 공격을 가해서 차원종의 힘을 세하로부터 분리시키는 거야."

  "그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유리가 기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슬비의 반응은 달랐다.


  "언니, 위상력이 고갈된 상태의 세하를 공격하게 되면, 차원종의 힘이 분리될지는 몰라도 그 순간만큼은 세하도 일반인과 다를바가 없게 되어요. 만약 그런데도 세하를 공격하게 되면…"

  "맞아… 십중팔구 세하는, 생명을 잃게되겠지."

  "네?"


  유리와 미스틸의 눈동자가 부풀기라도 한듯 잔뜩 흥분한 상태로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는 곧바로 유정에게 따지듯이 물어왔다.


  "언니! 이런 위험한 작전 뿐이에요? 다른 작전은요!"

  "누나, 세하 형을 이렇게 포기할 순 없어요. 아무리 세하 형이 차원종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세하 형은 세하 형이에요!"


  두 사람은 확실한 반대의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녀도 이미 예상한 바이지만, 정말로 반대의견이 거셌다. 그녀 역시 이런 작전을 시행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전에 슬비가 이야기해준 칼바크가 말했다고 하던 그 방법대로 할 경우, 슬비가 희생해야만 한다. 그녀는 그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슬비가 희생하게 놔둘 수도 없잖니."

 

  유정의 울음섞인 답을 들은 유리와 미스틸은 그대로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슬비가 희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모두가 희생하지 않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지만, 현실은 녹록치만은 않다.

  다시금 침묵이 그들 사이를 뒤덮었다.


  이곳에서 가장 연장자인 제이는 이 서먹한 분위기를 빨리 풀어**다는 것을 누구보다 실감했다.

  그는 화제를 우선 다른 곳으로 돌리기로 생각하고 물었다.


  "늑대개 팀은 어떻게 활동하고 있지?"

  "그들은…, 아니에요. 그들도 통상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요."


  유정은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말을 돌릴 뿐이었다.


  제이는 그녀가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에게 캐묻지는 않고, '그래?' 라고 되물어주는 것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그녀가 늑대개 팀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도 역시 세하와 관련된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맡은 임무가 그저 세하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욱 과격한 임무를 맡게 되었기 때문에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세하의 갑작스런 습격을 받은 늑대개 팀은 나타의 부상도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임무에 복귀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첩보와 이세하의 처리. 그들은 검은양 팀보다도 더 최전방에서 일하고 있다.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클로저들로서 유니온의 통제 하에 있지만 유니온의 뒷면에서 일하는 존재들로서, 감찰국의 클로저들이 공식적으로 움직이며 이세하를 체포하려 한다면, 이들은 유니온의 어두운 면을 잘 반영이라도 하듯 이세하를 찾아서 처리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유니온은 이세하를 죽일 것을 지시하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그의 체포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유니온의 클로저를 공격하고 부상입힌 자로서, 처리되어야할 대상이 되었다. 그렇기에 유니온은 그들이 벌처스에 있을 적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처리의 임무를 맡긴 것이다.


  다시 한 모금 차가운 녹차음료를 한 모금 넘기면서 제이는 말했다.


  "그들은 어디에 있으려나."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침울한 표정으로 있는데, 슬비만은 냉정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놓아둔 휴대폰을 들고서 잠시 카페 밖으로 자리를 옮긴다.

 

  "전화할 데가 어디에 있다고."


  씁쓸하게 제이는 말했다.




  ◆ 11-2


  "여기는 티나, 목표물을 발견했다."


  어린 소녀의 부드럽지만 동시에 차가운 목소리가 무전기로부터 들린다.

  사나운 인상의 회색 자켓을 입은 남자는 무전기를 들고 말했다.


  "그 상태로 대기해라. 목표물을 절대 시야에서 놓치지 마라."

  "알겠다. 통신 종료."


  소녀의 무전이 끝남과 함께, 트레이너는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지금 강북의 어느 한적한 거리를 함께 걷는 중이었다.


  "티나가 놈을 찾은 모양이다."

  "헹! 그 녀석, 어디서 따로 돌아다니고 있나 했더니만, 제 역할은 하는 모양이군."


  나타가 콧방귀를 끼며 말한다.

  동시에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듯, 그는 허리 뒤로 두르고 있는 쿠크리의 칼날 부분을 스윽 오른손으로 문질렀다. 며칠 전 이세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그에게 있어서 복수는 꼭 필요했다. 이번에야 말로 그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듯 하늘색 머리의 위상능력자는 험악한 미소를 흘렸다.

  그를 제지하듯 약간 얼굴을 찌푸린채 트레이너는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나, 나타. 너 혼자서, 놈을 상대할 수는 없다.

  저번에 네가 죽지 않았던 건, 정말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도록 해라."

  "흥! 말 안해도 알고 있어."


  고개를 휙 돌리고선 나타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평소같았으면 트레이너의 말을 듣고 방방 뛰었을테지만, 며칠 전의 전투로 그도 혼자선 도저히 이세하를 이길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그렇기에 차분한 것이겠지.

  하피가 물었다.


  "트레이너 씨. 그렇다면 놈은 지금 어디에 있는거죠?"

  "흠... 티나가 현재 있는 지점은 수락산 쪽으로 보이는군. 그 근처라고 보아야겠지."

  "수락산? 신서울 북쪽 끝자락에 있는 그곳에는, 도대체 왜?"

  "그거야 알 수 없지. 다만 유니온이 우리에게 의뢰한 것은 최우선적으로 지켜야만 한다. 우리에게 놈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지, 반드시 우리는 놈을 처리해야만 한다."


  트레이너의 눈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 싸늘함에 나타와 레비아, 하피 모두는 떨 수밖에 없었다.

  "늑대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 늑대가 공격할 때면, 언제나 함께지."

  "그 말은…"

  "놈의 목덜미를 무는 건, 유니온 놈들이 아닌, 바로 우리 늑대개다."


  으드득.

  트레이너는 이를 갈며, 북쪽 저 멀리를 바라본다.

  이세하가 있을 그곳을.


.

.

.


  "목표 이동 중."


  조용히 혼잣말을 하며, 사냥꾼의 시선으로 그녀는 목표물 - 이세하 - 를 쫓고 있다.

  단 한 순간도 한눈 팔아서는 안 된다.


  한 때는 악령으로 불렸던 그녀는 지독한 클로저 암살가였다.

  A급 요원인 김기태마저 치를 떨었던 그녀의 악명은 높았다.


  비록 지금은 더 이상 클로저를 암살하는 일은 없지만, 그녀의 처리 실력은 여전히 뛰어난 저격실력으로 그 어떤 처리대원보다 더 뛰어났다.

  트레이너가 가장 신뢰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녀의 인식명은 티나.

  위상력을 발현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안드로이드이자 생명체이다.


 

  목표물과 몇 km나 떨어진 지점에서 노리고 있기에, 목표물인 그가 그녀의 존재를 알아챘을리는 없다.

  전시상황이라도 유효할 정도로 그녀의 위장은 완벽했다. 더욱이 산이라는 지형이므로, 엄폐할 곳은 꽤 많았기에 충분히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목표물과 그녀의 거리는 5km 정도.

  현존하는 대인 저격 소총 중에 그 정도되는 유효사거리를 가진 총은 없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 정도 거리에서도 저격이 가능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위상력을 사용할 수 있기에 가능했다.

  위상력의 보조를 받은 탄환은 아주 먼 거리에서도 깔끔하게 위상능력자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굳이 근거리로 접근할 필요를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조준경에 담김 이세하의 모습은 어딘가 매우 슬퍼보였다.

  감정을 인정한 그녀에게, 그 모습은 정말로 쓸쓸해보인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그녀가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당신은 도대체 왜, 그렇게 된 것인가?"


  그렇게 물으며 그녀는 조준경으로 그의 모습을 계속하여 쫓았다.

 


  ◆ 11-3


  이세하는 너덜너덜해진 유니온의 정식요원복을 벗어버리고, 대신 갑옷과 얼추 닮은 어떤 옷을 애쉬와 더스트로부터 받아 입게 되었다.

  디자인만으로 따졌을 때는 최악이지만, 여러가지 위상력에 의한 공격에 대해서는 유니온의 요원복보다도 더 놀라운 방어효과를 보여주니, 그로서는 좋든 싫든 이것을 입어야만 했다.


  며칠 전 서유리와의 전투에서 그는 여전히 위상력에 의한 공격이 자신에게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과거 전혀 공격이 먹혀들지 않던 아스타로트와는 별개의 문제인듯 했다.

  애쉬와 더스트에게 확인한 결과, 제3위상력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는 무적상태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한 성질의 위상력을 가진 이들의 공격에 의한 피해를 매우 최소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굳이 차원종의 힘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검은양팀 전체가 데이비드에게 죽기살기로 달려들었다면 정말로 피해를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무엇하겠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만약 검은양팀 전체가 나섰을 때라도, 그는 그녀의 안위를 더 생각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 자신과 같이 처하느니, 자신 혼자 처하는 지금의 상황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것이므로, 전혀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는 것이다.


  그는 도봉산 아랫자락의 인파가 없는 곳에서 조용히 산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쉬와 더스트는 이곳에서 데이비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이곳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데이비드의 목숨이었다. 이번에야 말로 놈의 목숨을 거둬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이세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산을 오르던 그는 허리춤에 걸고 있던 건블레이드를 뽑아 들고서 말했다.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위상력을 그렇게 흩뿌리고 다니면, 위장은 하나마나다.

  그렇다면 전투를 위해서 찾아온건 아닐터. 모습을 드러내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말을 꺼내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쌍의 빛나는 날개를 가진 자가 그의 앞으로 날아와 착지했다.

  분명히 마주한 적이 있는 얼굴이다. 아마도 그가 기억하는 바가 정확하다면, 이 위상능력자의 이름은 이리나 페트로브나.


  "용케도 알고 찾아왔군, 클로저 이세하. 아니, 이젠 차원종 이세하인가?"

  "근접전투에 있어서는 나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모습을 드러낸거지? 설마 포기라도 한 모양인가?"

  "너의 그 기분나쁜 위상력은 저 멀리 있다고 하더라도 느낄 수 있다. 음산할 정도로 차갑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분노가 있군. 데이비드에게 복수라도 하려고 온 모양이지?"

  "잘 아는군. 오늘 놈은 내 손에 죽는다. 놈에게로 가는 길을 막겠다면, 너도 똑같이 될 뿐이야."

  "안타깝지만 데이비드는 오늘 아침, 이곳에서 떠났다."

  "뭐라고?"

  "데이비드는 나를 이곳에 남겨, 자신을 찾아올 손님 - 이세하 - 을 되돌려보내라고 했었지.

  데이비드는 자기를 찾는 부질 없는 짓은 그만두라고 했다, 더이상 자신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

  "그의 예상대로 첫 손님으로 네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리고?"

  "예상치 못한 둘째 손님은 저 멀리서 너를 노리고 있는 것인가?"


  이리나의 시선이 이세하를 떠나, 저 멀리의 누군가를 향했다.


.

.

.



  "읏!"


  조준경에 눈을 가까이 데고서 목표물을 계속하여 주시하던 티나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이 먼 거리에서도 이리나는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파악이라도 한 듯, 계속하여 자신을 주목하고 있다. 이미 그녀에게 발각된 이상, 그녀와 싸울 의지가 없어보이는 이세하에게도 발각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임무를 완수할 수는 없게 된다.


  "여기는 티나, 임무 속행 불가능. 발각되었음. B 지역으로 이동하겠다. 이상."

  "발각되었다고? 빨리 자리를 떠라, 티나!"


  트레이너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리기도 전에, 이미 티나는 라이플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를 뒤덮었던 나뭇잎들이 걷어지고, 그녀는 재빨리 자리를 이탈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날 노리고 있었나?"

  "…스트라이커와, 대면."

 

  어느샌가 그녀의 뒤에는 그녀가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리고 있었던 목표가 서서 그녀를 향해 날카로운 검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더 격하게 움직여 자리를 이탈하려 했다면, 알아채지도 못하고 그대로 검에 찔려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기세로 손가락 끝을 방아쇠에 걸어둔 채, 이세하는 차갑게 쏘아보았다.


  "늑대개 팀의 티나였었지. 너 때문에 여러모로 슬비가 작전에 지장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난 명령받은 대로 작전에 임했을 뿐이다. 이슬비는 작전 완수에 있어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임무완수를 위하여 그녀를 공격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어쩔 수 없는 기계로군."

  "난 그저 기계가 아니다, 차원종."

 

  차원종이라는 말이 꽤나 듣기 싫었는지 이세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기계 따위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난 이미 말했다. 나는 그저 기계가 아니다."

  "거슬리는군. 죽어라."


  아무런 감정 없이 이세하는 말을 툭 뱉은 후, 그대로 건블레이드를 찍어 내리듯 티나를 향해 찔렀다.

  방어 동작을 취하지 않으면 티나는 그대로 그의 검에 몸이 꿰뚫려 사망할 것이다.


  하지만 티나는 이대로 자신이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세하의 말에 반박했던 것처럼, 그녀는 그저 기계만은 아니었다. 감정을 자각하고 교관을 새롭게 결정한 이후, 그녀의 태도는 과거와 완전히 달라졌다. 생의 의지, 그것이 그녀를 움직이게 한다.


  무척이나 빠르게 찔러들어온 그의 검을 정면에서 막아내는건 어렵다.

  그렇다면 치고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 애초에 그녀는 뛰어난 저격수, 그렇다면 근거리에서의 접전에서는 이세하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승부가 아닌 회피가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이 그녀의 뛰어난 인공지능이 내린 결론이었다.


  핑.

  칼날에서 날카로운 쇠붙이가 뽑힐 때의 소리와 함께, 짧은 군용 대검을 뽑아든 티나가 이세하의 건블레이드를 쳐내고, 그 칼날을 미끄러지듯이 하여 타고 올라와 이세하의 가슴을 노렸다.

  예상 외의 반격에 살짝 놀란 이세하였지만, 그녀에게 반격의 틈을 내주지 않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고서, 그녀의 공격을 흘려보내듯 피했다.


  이세하가 옆으로 빠지자 티나는 빠른 속도로 이세하에게 접근하여 단검으로 그를 벤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예리한 소리가 두 사람의 근접전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공격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회피하지만, 간혹 깊이 찔러 들어오는 공격은 건블레이드로 쳐내며 그녀와의 근접전을 계속해서 그는 이어갔다.

  체력 소모가 극심한 근접전, 티나는 계속하여 그와의 근접전을 감행할 경우 자신에게 승산이 없음을 계산해내고선, 그를 멀리 쫓아내듯 크게 군용 대검을 휘둘러 그와의 거리를 벌린 후, 단검을 집에 꽂은 뒤 곧바로 등 뒤의 샷건을 뽑아 들어 아주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눈앞의 모든 것을 찢어**는 위력을 가진 산탄총의 탄환이 그대로 이세하를 향해 날아왔다.

  며칠 전만해도 입고 있었던 유니온의 요원복 차림이었다면 아마 너덜너덜하게 되어버렸겠지만, 지금은 위상력을 실은 공격을 당해도 아주 피해가 큰 공격이 아닌 이상 모두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갑주를 온 몸에 두른 상태이기 때문에 걱정할 염려 따윈 없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티나는 그녀의 공격을 피하지 않는 이세하를 보고 자신이 이겼으리라 생각하겠지.


  까아아아앙!

  흩어진 탄환들이 일제히 이세하의 온 몸을 향해 퍼져나갔지만, 모두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튕겨나간다. 그것을 보고 그녀는 혀를 찼다.

  최선의 수를 생각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은 회피책으로 샷건을 그대로 버린 뒤, 어깨춤에 띠로 두르고 있던 자동소총을 꺼내어 이세하를 향해 지향사격을 실시했다. 탄알집 안에 끼어있는 모든 총탄이 무서운 속도로 비워져간다.

  기관단총의 총탄들이 총열을 긁으며 쏘아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소음기도 장착하지 않아 과격한 총소리가 타타타- 여과 없이 그 일대로 퍼져나간다. 분명히 사람들이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더욱이 이 나라는 징병제 국가이다보니 국민의 반 이상은 군대를 반드시 다녀오므로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는 건 더더욱 당연할 것이다.


  티나는 이런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주위의 피해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듯 했다.

  애초에 그녀에게 주어진 목표는 단 하나, 이세하를 쫓는 것이다. 그녀는 늑대개 팀원들과 같이 활동하기보다는 단독활동을 하는데 더 일가견이 있다. 국제공항에서 신서울로 이동할 때부터 트레이너의 지시를 받고 단독행동을 해온 그녀이다. 물론 당시에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데이비드의 추적이었지만, 지금은 지시의 내용이 바뀌어 이세하의 추적을 그 목표로 삼고 있었다.

  여차하면 그를 죽여도 상관없지만 가능한 아무런 상처없이 체포를 원하는 것이 유니온의 입장인만큼 그녀 역시 기존의 방식대로가 아닌 스무스한 방식을 택하였다. 물론 지금같은 상황이라면 그녀가 그를 죽여도 아무도 트집잡지 못하겠지만.


  기관단총의 총탄들이 흩뿌려진다. 아까의 샷건보다는 그 관통력이 현저히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위상력을 띄고 있는 총탄들이기 때문에 한 번에 쏘아지는 샷건보다 여러 번에 나눠서 공격해들어오는 지금과 같은 공격이 이세하에게 있어서는 더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떨어지는 물이 한 자리를 계속해서 치면서 바위를 깎아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가 총탄들을 피해 그녀와 거리를 벌리기가 무섭게, 티나가 수류탄 두 개의 안전핀을 뽑더니 그대로 이세하를 향해 던졌다.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공격에 그대로 이세하는 휘말리게 되었다.

  강한 섬광과 함께 시끄럽게 수류탄이 두 번 폭발한다. 파편과 연기로 자욱한 그 폭발 안에서 이세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겠지만.


  티나는 이세하라면 그 폭발 안에서도 충분히 생존하였을 것이고, 또한 그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이것은 그저 도주를 위한 견제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잠시 번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다는 판단과 함께 그녀는 산 아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도주는 늑대개 팀이 그녀가 있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 11-4


  "경감님, 수락산 인근에서 총소리와 폭발음이 들렸다는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응? 거기는 차원종들이 출몰할 리가 전혀 없는 곳일텐데. 게다가 오늘은 군부대 훈련도 잡혀있지 않았잖아?"

  "네… 하지만 많은 등산객들이 그 소리를 듣고 급히 하산하는 소동이 그 일대에서 벌어진 터라, 특경대가 그 일대로 출동하라는 지시입니다." 

  "에이, 귀찮게시리. 얼마 전에는 남산에서 형상복제자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튀어나오더니, 이번엔 수락산에서 또 이상한 놈들이 나오는 거야? 이야, 정말이지, 클로저 놈들은 뭘하고 있나 모르겠구만."


  불평을 늘어놓는 남성.

  다분히 근육질인 남성은 귀찮음과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옷을 주섬주섬 차려 입었다. 아마도 강북 일대를 관할하는 특경대의 간부인 모양이다. 그는 얼마전 남산 시민아파트 일대에서 발견된 형상복제자 사건과 남산타워 아래의 도로에서 발생한 사고를 수습하느라 꽤나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좀 사건을 마무리하고 쉬려고 하는데,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니 그도 짜증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출동하지 않으면 강남 사태 이후 잔뜩 강화된 감사가 그들을 옥죄일 것이니, 좋든싫든 우선은 출동을 해야만 한다. 불만가득한 그가 주절대면서도 출동준비를 하려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리라.


  "경감님, 왠 사람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에? 무슨 사람들?"

  "그게… 소속을 밝히지는 않았습니다만, 행정부 쪽 사람들 같습니다."

  "엥?"


  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곧 그들로 유추되는 사람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짙은 정장 차림의 세 명이었는데, 모두 공무원증으로 보이는 것을 가슴까지 내려오는 목걸이형 패에 넣고 있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옅은 갈색빛 머리의 남성만 파랑색 넥타이를 하고 있었고, 그의 뒤에 있는 이들은 넥타이는 따로 하지 않은 차림이다.


  맨 앞의 남성이 찾아와 손을 내밀었다. 아마 악수를 청하는 모양이다.

  "정현수 경감님 되시지요? 반갑습니다, 한재민 입니다."

  "반갑습니다. 공무원들로 보이시는데, 어디 소속이십니까?"


  정현수 경감의 눈은 지긋이 그가 패용한 공무원증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공무원증의 앞면은 증명사진, 이름과 함께 소속된 부처의 이름이 크게 적혀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부처는 대한민국 정부라고만 적혀있다. 그가 아는 선에서는 대한민국 정부라고만 적힌 공무원증은 없다. 혹시나 위조된 공무원증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누가 감히 위조된 증을 가지고 경찰을 직접 만나러 오겠냐는 생각에 그런 의심은 접어놓는다.

 

  "아, 저희 소속은 모르셔도 됩니다. 다만 중앙정부 산하에 있다는 것은 알려드리죠."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특경대가 지금 수락산 일대로 출동하려고 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출동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이보쇼, 가뜩이나 강남 사태 이후로 감사가 강화된 마당에, 신고를 접수하고도 출동하지 않으면 징계받는 건 우리 아니오? 바쁘니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경감님, 움직이지 마시죠. 경고합니다."

  "경고는 개뿔, 중앙부처 나부랭이 따위가."


  코웃음을 치면서 그를 지나치려던 찰나, 그의 뒤에 있던 이들 중 남자가 정권지르기 식으로 정현수 경감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이 결코 닿는 일이 없었는데도 그는 갑자기 뒤로 밀려가듯이 날아가 벽에 그대로 부딪혔다.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가 무섭게, 사무실 안에 있던 특경대원 몇 명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조차 곧 멈추었다.


  "여러분들도 저렇게 되기 싫다면 조용히 계시죠. 가만히 계시면 아무런 폭력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다, 당신들… 도,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어떻게 위상력을!"


  마른 기침을 연거푸 하던 정현수 경감에게 자신을 한재민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당신들, 곧 기억이 소거될테니까 말해주죠.

  우리는 행정부 산하에 비밀리에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니온이 아닌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위상능력자들의 기관이랄까… 명칭으로 이능력자관리개발원이라고 이능원이라는 기관명이 있긴하지만, 사실 그것도 알려지지 않았으니. 뭐, 저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는 유니온에 파견근무를 나가 있어 그쪽에 소속된 사람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원래 소속된 기관으로 돌아갔죠.

  아참, 중앙부처 나부랭이라고 하셨는데, 나이는 어리지만 이래뵈도 4급입니다."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다.

  행정부 직급으로 따졌을 때, 저 사람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높은 직급이기 때문이다.

 

  "저는 비록 위상능력자가 아니지만, 제 뒤의 두 친구들은 위상능력자이니 조심히 행동하는게 좋을 겁니다. 아, 어차피 이대로 기억을 소거하면 다 잊어버리니 상관 없으려나."


  웃음이 잘 어울리는 남자는 뒤의 두 사람에게 무어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의 지시를 받은 두 사람 - 아마도 남자와 여자로 보인다 - 은 선글라스를 착용하더니 자켓 안의 주머니에서 기다란 무언가를 꺼내어,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마치 카메라의 플래시와 같은 빛이 터지더니, 그 빛을 본 사람들은 멍한 표정을 지은채 그대로 자리에 쓰러진다.

  벽에 부딪혀 아픈 허리를 이끈채 일어나려고 하던 정현수 경감은 어느새인가 자신 앞에 다가온 갈색 머리의 남자를 보았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묻기도 전에 그는 눈 앞에서 반짝이는 섬광을 보았고,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사무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있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모두 선글라스를 벗는다.

  "하여간 특경대 놈들, 행동하는 것만큼 머리도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련지.

  나현 씨, 현우 씨, 슬슬 정리합시다. 나현 씨는 신고기록 자료들 전부 파기시키고, 현우 씨는 사무실 좀 정상으로 만들어놓고."

  "예."

  "네."


  두 남녀는 짧게 대답하고서 갈색 머리 남자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

  어느 의자에 걸터앉은 갈색 머리 남자는 잠시 천장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놈들, 잘 처리하려나."




  ◆ 11-5

  전 속력으로 도주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세하는 끈질기게 티나의 뒤를 쫓았다. 능선을 따라 계속해서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도주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바윗돌들과 엉켜있듯 곳곳에 흩어져있는 나무들은 간간이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도주 경로를 잘못 설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녀가 이 길을 택한 것은 가장 최단 경로이며, 또한 늑대개 팀과 합류하기로 트레이너와 암묵적으로 약속한 B 지역이 이 길을 따라가다보면 있기 때문에, 그녀는 반드시 이 길을 따라서 내려가야만 했다.

  그녀를 뒤쫓는 적은 앞의 장애물을 모조리 분쇄하듯 쳐내고 파괴하면서 그녀의 뒤를 쫓고 있다. 정말로 무시무시한 힘이다. 자신을 쫓아오는 적의 얼굴을 보고 있지는 않지만, 이 흘러넘치는 위상력과 얼음처럼 차가운 살기는 그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영혼이 있음과 감정이 있음을 인정했으므로, 이런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미 터득한 후였다. 하지만 몇 번이고 이런 감정이 들 때마다 그녀의 기분은 결코 좋지 않았다. 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참으로 부정적이기에.

  그녀는 현재 자신의 위치를 GPS 시스템을 통해 파악한다. B 지역까지는 앞으로 1km. 얼마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도망친 후 거기에서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충분히 이세하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늑대개 팀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올 것이라는 걸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된다.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그 때, 그녀의 뒤를 쫓던 살기어린 위상력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그 위상력의 기척을 잊어버린 것이다. 바로 자신의 뒤에 있어야할 그것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척이나 불길한 예감이 그녀에게 치솟았다. 불길한 예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껴본 그녀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했다.

  잠시 멈추어서려던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앞쪽에 보랏빛 섬광이 크게 빛났다.
  무척이나 눈부신 그 광경을 제대로 ** 못하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런 섬광은 여러번 본 적이 있다. 분명히 상위급 차원종이 출현할 때, 차원종의 위상력을 통해 차원의 균열을 강제로 발생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섬광이다. 이 섬광이 보랏빛인 것은 차원종의 위상력이 자색에 가깝기 때문이겠지.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적중한 것을 눈치챈 그녀는, 정말로 육감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로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양 손에 들고 있는 자동소총을 위로 밀어올려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내려쳐지는 무언가를 막아낸다.

  까앙!
  크게 울리는 격철음이 시끄럽게 운다.
  강화 플라스틱 재질인 자동소총의 총신이 적의 날선 무기를 겨우 막아내고 있다.

  내려치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티나의 팔이 얼얼할 정도이다. 물론 그녀의 팔은 기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정도로 크게 다칠 위험은 없지만, 아마도 작은 손상은 감수해야할 것이다. 나중에 정밀검사를 받아보아야 어떤 상태인지 알겠지.
  기기깅 거리는 기분나쁜 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긁는다. 이세하의 힘은 예상 외로 셌고, 이것을 막아내고 있는 그녀의 팔 힘은 그의 팔 힘에 비하면 약하다. 특히 그는 위상력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시키고 있었고,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버틸 수 없음을 의미한다. 더 나쁜 것은 그녀의 자동소총이 아무리 강화 플라스틱 재질이라고 해도 일반 군용 소총과 다를바가 없기 때문에, 위상력을 사용하는 병기 앞에서는 그 내구도가 심히 취약하다. 아마도 이대로 가다간 총신이 먼저 두동강나버릴 것이다.

  "잘 막아내는군. 하지만 넌 여기에서 죽는다."
  "난 죽을 수 없다, 내 교관의 의지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부질 없어. 죽어라, 기계."

  이세하의 칼날에 푸른 위상력이 깃는다. 아마도 위상력을 해방시키려는 모양이다.
  이 정도 거리에서 그의 위상력을 직격받게되면 분명히 그녀는 죽는다. 지금의 이세하라면 아마도 트레이너 개인보다 더욱 강할테니까. 트레이너와 맞붙어도 이길 수 없는 그녀가 지금의 이세하를 이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녀에게 다가온 감정은 공포였다.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이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며 그녀는 눈 앞의 학살자를 쳐다만 볼 뿐이다.

  까앙!
  그녀의 자동소총이 두동강 나버린다. 내려치는 힘으로 그대로 그녀를 죽일 줄 알았던 그였지만, 그는 처형의 시간을 도리어 늦추었다.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티나는 왠지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왜 이세하가 바로 자신을 죽이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겨우 고개를 들어 눈 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정말로 기분 좋게, 소리 하나 없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것일까?
  지금까지 그녀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것은 어쩌면 이세하의 막강한 힘이 아니라, 그의 광기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이세하는 이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변한 이유, 그녀는 단 한 마디로 결론지었다.

  "당신, 차원종의 의식에, 지배당하는건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 대신 돌아오는 것은 그녀를 향해 내둘러지는 날선 무기. 그대로 그녀의 목을 날려버릴 속셈인지, 그녀의 목의 높이에 맞춰서 그의 검이 휘둘러지고 있었다.
  회피해**다는 사고가 머리에 가득했지만, 왜 일까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정말로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엎드려라, 티나!"

  하지만 그의 날붙이가 완전히 다가오기 전에 들린 정겨운 목소리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그대로 몸을 숙이자 이세하의 칼날은 보기좋게 허공을 그었고,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그는 곧바로 자신에게 무언가가 직격했음을 느끼고, 고통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그를 날려버리고 그녀의 앞에 어느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사뿐히 섰다.
  아마도 그녀에게 엎드리라고 명령했던 그 남자이겠지, 라고 티나는 생각하고 눈 앞의 구원자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한대로, 그 남자였다.

  회색 코트를 입은 험상궂은 인상의 중년 남성이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
  "어디 다친데는 없나?"
  "없다, 트레이너. 하지만 무기가 많이 소모되어 막강한 화력지원은 힘들 것 같다."
  "여기서부턴 뒤로 빠져 있어라. 놈을 상대하는 건 나와 다른 팀원들이 하도록 하겠다."

  그의 주위로 두 명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타와 하피다.
  그리고 곧바로 또 다른 모습이 내려앉았는데, 레비아다.
  늑대개 팀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저 녀석 저번이랑 똑같잖아? 또 이성을 잃어버린건가?"
 
  나타가 힐끔 이세하를 쳐다본 후 말했다. 그의 판단대로이다, 이세하는 현재 이성을 잃어버렸다.
  군단의 의지를 공유하게 됨으로써, 그는 인간을 적대하는 차원종의 의식에 잠식되어가는 중이다.
  상황의 흐름을 읽은 트레이너가 지시를 내린다.

  "그녀의 아들이 이렇게 손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꽤 실망이군.
  놈은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놈의 사정을 절대 봐주지 말아라, 그리고 놈을 물어뜯어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타와 하피가 앞 다투어 저멀리 날아간 이세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리 이세하라고 하지만 1대 1의 상황이 아닌 1대 다의 상황에선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그의 안위에 대한 걱정보다 더 큰 가치로 작용하였다.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날선 위상력을 칼날의 형태로 흩뿌렸다.

  나타는 그대로 정면돌파하듯 위상력의 칼날을 모두 쳐냈고, 하피는 공중으로 크게 도약하여 이세하의 상공을 점유했다.
  앞과 위에서 일방적인 공격을 받는 처지에 놓인 그는 먼저 고공에 있는 적을 처리하기로 생각한 것인지, 건블레이드 안에 담겨있는 두 발의 총탄을 모두 쏘았다. 총탄이라고 하기에는 화염을 쏘아내는 대포처럼 생긴 두 발의 불꽃이 하피를 노리고 쏘아졌다. 하지만 이 정도 공격이야 아무 것도 아니게 피할 수 있는 그녀였기 때문에 여유넘치는 모습으로 몸을 내뺐다.

  바로 그 순간, 언제 자신의 곁에 다가온 것인지 느끼지도 못했는데, 이세하는 바로 그녀의 옆으로 도약하여 다가와 있었고, 그 사이에 또 다른 총탄의 재장전이 마무리된 것인지, 그는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총구를 겨눈 후 방아쇠를 당겼다.

  또 다시 쏘아진 두 발의 불꽃. 하나는 회피했지만,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쏘아진 또 하나의 불꽃은 미처 피하지 못헸고, 총탄은 그녀의 오른쪽 다리를 스쳤다.
  다리로 몰려드는 엄청난 고통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상처를 감쌌지만, 그녀의 무방비한 상태를 노린 이세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검날을 박아넣을 준비를 했다. 물론 그의 생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운 격철음이 귀를 쩌렁쩌렁 울리며, 곧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잊지말라고!"

  나타다.
  나타의 날선 쿠크리가 날아들어온다. 정면공격이기 때문에 쉽게 쳐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이세하는 그대로 받아쳤지만, 사실 그것은 나타의 함정이었다. 십중팔구 그의 공격은 이세하의 생명을 노리고 들어오지만, 그는 얼마전 이세하와의 1대 1의 전투에서 엄청난 실력차를 체감하며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공법은 그에게 있어 무리라고 생각한 그는, 이세하의 목숨을 끊으라는 유니온의 지시를 받은 그 직후부터 늑대개 팀과의 작전 회의를 통해 한 가지 역할을 맞게 되었다.

  늑대개 팀원 중에서 평시 전투력으로는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이 트레이너다.
  그렇기 때문에 주된 공격은 트레이너가 감당한다. 나타와 하피는 근접공격으로 이세하의 틈을 만들고, 그 틈을 비집고 트레이너가 공격을 한다. 레비아는 광역 공격을 담당하기 때문에 정밀한 조준보다는 파괴력을 극도로 끌어올린 공격을 하기 때문에, 그녀는 이 상황에서 이세하의 움직임이 봉인된 이후에서야 효율적인 공격을 할 수 있게 된다.
  접근하는 나타와 하피, 둘 중 한 명이 이세하의 움직임을 봉하는데 성공하게 된다면 바로 다음 수순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나타는 그의 쿠크리들을 연결한 쇠사슬로 이세하의 건블레이드를 완전히 속박했고, 이제 레비아의 공격이 이어진다.

  무척이나 꺼려하는 표정이지만, 무어라고 그녀는 작게 중얼거리며 지팡이를 내질렀다.
  그리고 사악할 정도로 짙은 차원종의 위상력이 그 끝으로 집중되었다. 어지간한 2층 건물 하나는 그대로 삼켜버릴 정도의 크기를 가진 위상력의 구체가 생성되어, 그녀의 지시에 맞추어 이세하에게 쏘아진다. 움직임이 속박당한 이세하는 그것을 미처 피할 수 없었고, 위상력의 구체가 다가오자 나타는 쿠크리를 거둔 후 이세하만을 버려두고 뒤로 빠진다.

  과거 헤카톤케일과 싸울 때, 그리고 플레인게이트에서 악몽의 아스타로트와 조우했을 때, 그는 이런 느낌의 공격을 접한 적이 있었다. 넓은 범위를 위상력의 폭풍에 휩싸이게 하여 그대로 사람의 목숨을 갉아먹어버리는 공격이었다. 지금 그녀의 공격이 이와 매우 흡사하다. 저 위상력의 응축체 안에 들어갔다가는 결코 좋은 꼴로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기에, 그저 최소한의 피해만 입기를 바라며 이세하는 몸 주위를 자신의 위상력으로 둘러 보호하는 방법을 택했다.

  쿠과광, 하고 위상력이 휘몰아치는 구형의 폭풍이 이세하를 집어삼킨다.
  멀리 떨어진 나타가 순간 빨려들어갈 뻔 했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더 뒤로 물러섰다. 그 정도로 강력한 폭풍이었다. 차원종의 위상력이 몰아치는 폭풍이기에 그런 것일까, 눈에 보이는 색상은 이세하의 눈빛을 닮은 자색이다.

  위상력의 폭풍은 중심의 핵으로 계속해서 몰아쳐서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크기가 가운데로 축소가 되어가면서, 위상력의 밀집도가 무척이나 높아진다. 아마 이대로 가다간 저 구체는 맹렬한 폭발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으로 빨려들어간 이세하 역시 결코 좋은 꼴은 ** 못할 것이다. 최대의 결과는 사망, 최소의 결과는 중상. 그들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콰앙!
  시끄럽게 위상력의 구체가 폭발한다. 그 어떤 폭발음보다 더 크게 고막을 때리는 굉음은 일반적인 폭탄의 폭발력을 뛰어넘은지 오래다. 이 정도면 적어도 미사일이 직격하여 폭발한 것과 비슷한 화력이리라.
폭발로 인해 그 일대가 엉망진창이 되었기 때문에 이세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공격을 그쳐선 아니 된다. 만에 하나 그가 살아남았다면 도주할 시간을 주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트레이너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흙먼지와 파편이 흩날리는 그곳으로 달려들어갔다.

  "흐읍!"

  그가 기합을 넣자 그의 오른손 일대로 푸른 위상력이 맴돌았다. 이세하가 차원종이 되기 전의 위상력의 컬러와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기운이다. 그가 손을 내뻗기가 무섭게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일제히 끌어당기는 강력한 푸른 구체가 형성된다. 비록 먼지 때문에 완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푸른 빛은 확실하게 보였다.

  이 먼지 속 어딘가에 있을 이세하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올 모양인 것일까? 확실히 그의 의도대로 이세하는 현재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지쳐있기도 했고, 그에 따라 저절로 트레이너의 공격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에 위상력을 흘려서 마치 보호막처럼 둘러싸게 하여 위상력의 폭풍으로부터 겨우 몸은 지켜냈지만, 이 남자의 위상력만큼은 그가 견뎌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그 정도로 트레이너의 공격은 그가 느끼는 만큼 강할 것이다.

  트레이너의 앞에 있는 푸른 색의 구체 안으로 자색의 눈을 하고 있는 이세하가 들어왔다.
  소리없이 입꼬리만을 치켜올린 트레이너는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자평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다. 이세하는 몇 번이나 땅을 구르며 빨려들어와 트레이너의 바로 앞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의 눈을 본 트레이너가 말했다.

  "이성을 되찾은 모양이군? 자네도 이대로 차원종이 되는걸 원하지는 않을터, 그렇다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는게 너나 우리,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좋다."
  "주…, 죽어?"

  무척이나 힘들게 말하는 이세하.
  그의 말대로 이대로 죽으면 편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어떤 압박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에 앞서 그의 머릿속에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것은 가족도 아니고, 친구들도 아닌, 바로 그의 연인이다.

  자신이 이 길을 걸어갔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찾고있을 그 멍청한 여자.
  그 여자 때문에 그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하…"
  "응?"
  "하, 하하하. 못, 죽어. 절대!"
  "읏!"

  탁한 위상력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인간의 위상력도 아니고, 차원종의 위상력도 아니다. 그 두 개가 하나로 뒤섞인 매우 기분나쁜 에너지였다. 이것을 몇 번이고 체험해본 적이 있는 트레이너이기에, 그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 3위상력?"
  "흐아아아아아앗!"

  쏴아-
  마치 바람이 흩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이세하를 끌어당기고 있던 트레이너의 위상력이 만들어낸 구체가 사라졌다. 절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트레이너는 얼굴을 찌푸렸다.
 
  "강제로 철거시킨건가."
  "하아아아압!"

  큰 소리를 내지르며 이세하는 그의 건블레이드를 크게 휘둘렀다, 그의 위상력을 담아서.
  이 정도의 거리라면 아무리 강한 클로저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상처를 입는다. 애초에 그의 무기는 찌르기보다는 베기에 좀 더 특화된 무기이다. 뭉툭한 무게와 날카로운 날부위의 조화는 그의 무기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꽤나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이세하는 아주 가볍게 그것을 휘둘렀다.
  수없이 많은 적을 쓰러뜨리면서 그만의 노하우가 생긴 것일까? 그렇기에 이 검날이 트레이너의 몸에 닿는데까지는 채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 찰나와 같은 순간을 이세하는 결코 놓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터엉.

  터무니 없는 소리와 손 끝으로 전해져오는 느낌은 세하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게 하였다.
  그의 검은 트레이너의 오른팔에 부딪혔다. 분명히 검날 부분으로 베었음에도, 왜 일까 뭔가 강철과 같은 딱딱한 무언가를 친 느낌이다. 뭔가를 베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 어떻게…"
  세하는 눈을 흘려 검날 주위를 바라보았다.
  트레이너의 피부를 뚫고 그의 왼팔을 절단했어야할 그의 검이 뭔가에 의해 트레이너의 팔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가 입고있는 코트의 팔 부분조차도 베지 못했다. 바로 그 앞에서 푸른색의 무언가가 날선 무기의 접근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의 정체는 아마도 매우 조밀하게 몇 겹으로 두른 위상력일 것이고.

  "자신의 위상력을 몸 주위로 흘려보내서 레비아의 공격을 막아낸 너의 놀라운 기지에는 박수쳐주마.
  하지만 그건 네 어미가 18년 전 사용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입 **! 엄마와 날 비교하지마! 엄마 이야기, 꺼내지말란 말이야!"
  "흠. 그러면 이건 어떻게 넘길텐가?"
  "뭇…?"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험한 인상의 남자는 자신의 오른손에 또 다른 위상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세하는 트레이너가 어떻게 위상력을 활용하여 싸우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지식도 없다. 그에 반해 이 남자는 자신이 어떻게 싸우는가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그의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내었다. 엄청난 패널티일 수밖에 없다.

  짐작하건대 지금 그는 또 다른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방금 전보다 더 흉악하다고 할 정도로 날선 위상력이 마치 불꽃의 형태로 그의 오른손에서 시작하여 그의 온 몸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세하가 읽어낸 것처럼 트레이너의 오른팔에 모인 푸른 빛의 위상력은 마치 퍼져가는 불꽃의 형태를 이루었다가, 그가 오른팔을 허공으로 쳐냄과 동시에 온 몸으로 불이 옮겨붙듯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이세하를 향해 아주 천천히 걸어만 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행동에 아주 잠깐 의문을 품었지만, 곧 그 의문은 저절로 풀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온 몸을 두르고 있는 불꽃은 작은 구체의 불꽃들로 수없이 나뉘어 하나씩 때로는 몇 개씩 이세하를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비록 작은 구체의 형태이지만 저 안에 응축된 위상력은 하나만 몸에 닿아도 커다란 바람 구멍을 내기에 충분할 정도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소름이 돋는다.
  두려움이 앞섰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세하의 몸이 잠깐 떨리는 것을 본 것일까, 트레이너는 소리죽여 웃었다. 그의 눈은 정말로 살기가 가득한 늑대와 다를바가 없었다.
  아무리 강한 양이라고 할지라도, 늑대 앞에서는 양일 뿐이다. 양은 언제나 늑대로부터 도망친다. 그처럼 세하 역시 트레이너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몇 개의 구체가 도망치는 이세하를 미처 맞추지 못하고 곳곳의 땅과 충돌하여 폭발한다.
  정통으로 공격을 맞지 않았음에도, 폭발의 기운은 이세하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놓기에 충분했다. 뒤를 ** 못하고 도망친다는 것이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그녀의 아들이라고 해서 기대를 했지만, 볼품 없군."
  "쓰읍…"
 
  아랫입술을 깨물어 터져 나오는 분노를 겨우 참아낸다.
  계속해서 도망치며 그는 고개만 뒤를 돌아보았다. 늑대 - 트레이너 - 는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기만 할 뿐, 더이상 위상력의 구체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큰 공격을 하나 뿌려준 후, 이차원으로 도주하기에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다.

  그가 뒤쫓지 못하도록 이 일대를 화염지대로 만들어버리면 끝이다. 그러면 그는 더이상 자신을 뒤쫓지 못할 것이고, 그 틈에 차원의 균열을 발생시켜서 도주하면 끝난다.
  비록 적을 두고 도주하는 것을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작전 상 후퇴라는 말로 정당화시키듯 그는 자기최면을 걸었다. 이제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달리는 것을 멈추고 이세하는 그대로 땅에 건블레이드를 박아넣었다.
  그리고 위상력을 검에 흘려보내 땅의 곳곳으로 퍼져가게 만들었다. 이제 이 일대는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화염지대가 되어 그 어떤 누구의 접근도 불허할 것이다. 이제 도주할 차원의 균열만 발생시키면 끝나는데.

  텅.
  세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느새인가 저 멀리에서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트레이너가 그의 건블레이드의 검 등에 구둣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짓눌러 검을 눕히자, 검의 끝은 저절로 땅에서부터 빠져나왔다.
 
  "이 자식!"
  "흠. 무기가 없으면 싸움도 제대로 못하는건가? 정말로 실망이다, 스트라이커."
  "으으으아아아아아!"

  세하는 짓누르는 그의 발의 힘으로부터 건블레이드를 빼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 그리고 순조롭게 빠져나오나 싶더니, 검의 한 중간에 걸터선 트레이너의 구둣발에 더욱 큰 압력이 걸린다. 위상력으로 근력을 강화시킨 것이리라. 그러더니,

  쨍그랑.
  마치 유리가 깨져버리는 소리처럼 그의 건블레이드의 한 중간이 갈라지며 깨져버렸다.
  무기를 잃은 상태에 처한 것이다.

  그대로 손잡이 부분을 땅에 떨구고 세하는 뒤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섰다.
  그러다 무언가가 뒤를 막았다. 아마도 이 느낌은 커다란 나무다.
   
  앞으로는 천천히 트레이너가 살기어린 눈빛을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고, 레비아의 공격의 후폭풍으로 몰아친 먼지들이 천천히 걷히면서 다른 늑대개 팀원들도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그가 도망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파아아아-
  차원의 균열이 열리며 몇 마리의 차원종들이 그 안에서 쏟아져나왔다. 저마다 A급 이상의 차원종들이다. 그것들은 늑대개 팀을 향해 곧바로 달려들었고, 그대로 늑대개 팀과 이세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 틈을 타, 이세하는 바로 차원의 균열을 또 다시 만들어냈고, 그 사이로 급히 도망치듯 사라졌다.

  늑대개 팀이 몇 마리의 차원종을 처리하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차원종의 사체가 빛의 조각이 되어 사라지며 방금 전까지 이세하가 있었던 장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없었다. 이미 이차원으로 도주한 것이다.


  ◆ 11-6

  사건의 경과를 보고서,
  트레이너는 아깝다는듯 혀를 찼다.

  "운이 좋았군."
  "이봐 꼰대, 정말 놈을 죽일 생각은 있었던 거 맞아? 꼰대답지 않게 봐주던 것 같던데."
  "언제부터 내 공격에서 진심의 여부를 읽을 수 있게 된거지, 나타?
  우리가 비록 지금은 유니온의 명령에 따라 이세하를 죽여야 하지만, 우리의 진짜 목표는 놈이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재인식해뒀으면 좋겠군."
  "뭐? 저 녀석을 죽이는게 아니었어?"
  "그렇다. 유니온에게는 안타깝겠지만, 누군가의 부탁이 있었거든."

  그는 말을 마치고 휴대폰을 꺼내어 들고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다. 놈은 도주했다. 무기까지 박살냈으니, 당분간 이차원에서 함부로 나오지는 못하겠지.
  물론 생명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으니, 걱정할 건 없다."
 
.
.
.

  "고마워요, 트레이너 씨."
  "고맙긴. 나타를 살려준 것에 비하면 작은 성의지."

  강남의 거리에서 가장 높은 빌딩의 옥상에 앉아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던 분홍빛 머리의 소녀가 웃음을 지었다. 전화하고 있는 상대 역시 웃음을 지었으리라.
 
  전화는 오래가지 않아 끊어졌다.
  그리고 소녀는 휴대폰의 배경화면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마지막 데이트를 하던 날, 벚꽃나무 아래서 찍었던 사진이다.

  결코 바꿀 수 없는 이 배경.
  그녀는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와 새로운 사진을 찍게 된다면 그 때에서야 바꾸겠노라고.

  그의 연인이었던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기다려줘. 금방 갈테니까."

  다짐같은 말을 하고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옥상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위상능력자이기에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염동력을 이용하여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다.
 
  강남 GGV 뒷골목에 내려앉은 그녀가 향하는 곳은 과거 헤카톤케일이 묻혀있었다던 강남의 지하거리.
  그곳은 검은양 팀이 국제공항으로 향하기 전, 외부차원으로의 탐사 작전을 벌였던 곳이다.

  내부 차원과 외부 차원을 연결해주는 문과 같은 장치가 있는 바로 그곳,
  플레인게이트로 그녀는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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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오랜만에 11화로 뵙습니다.
  이미 단편으로 몇 번 뵈었지만, 단편은 단편이고 본편은 본편이니까요 ㅎㅎ

  감사합니다.
  이 말씀밖에는 무엇이라 드릴 말이 없어요.
  다음 화도 기다려주시기 바라며, 다음 화로 찾아뵙겠습니다.
 
  P.S. 중간에 외전(번외편)이 있을 수도 있어요.



2024-10-24 23:10:3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