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용서해주세요 - 6-2. 벚꽃길 끝에서 -

Articulus 2016-04-1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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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4


  "아하하! 그게 진짜야?"

  "정말이라니깐요, 누나! 아저씨가 유정 누나한테…"

  "예끼, 이 녀석! 어린애가 무슨 말을 하는거야!"


  솜사탕을 하나씩 들고서 제이는 유리와 미스틸과 함께 한강변의 강변길을 걷고 있었다.

  비록 벚꽃 구경을 할 정도로 벚꽃이 피어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이곳도 아름다웠다. 이 근방의 길은 신강고에 파견되었을 때 차원종을 처치하던 성수대교 근방인지라, 출입이 자유롭게 되었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드물었다.

 

  처음 유리의 생각으로 그들이 갈 곳은 서초구에 있는 어느 강변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하루종일 수색으로 지친 제이의 몸 상태로 인해서 강남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꽃구경을 가야만 했다. 찾다찾다 결국 이곳에 온 건데 나름 나쁘지 않다.

  미스틸은 시민아파트 수색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유리 앞에서 풀어놓으면서 분위기메이커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은 제이가 김유정과 통화를 나눌 때의 모습을 미스틸이 따라한 것인데, 유리는 그것을 보면서 너무나도 재미있는지 깔깔 웃어대고 있고, 제이는 민망한 것인지 부끄러운 것인지 미스틸의 이야기를 제지하려고 한다.

  이러한 화기애애한 모습만 보아도 검은양 팀의 매우 가까운 관계를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제이가 미스틸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그 때, 과거에 한창 유행이었던 철 지난 가요가 제이로부터 울려퍼졌다. 아마도 그의 휴대폰 벨소리인듯 싶은데, 그 노래를 듣자마자 유리는 배가 터질듯이 웃어대기 시작했고, 그녀가 왜 웃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미스틸은 '우웅?'하며 호기심어린 표정을 짓는다. 약간 기분이 나쁜 건지 얼굴을 찌푸렸던 제이는 곧 전화를 주머니 속에서 꺼내어 받아들었다.


  "어, 왠일이야, 유정 씨."

  "크, 큰일 났어요, 제이 씨!"

  "무슨 일인데, 그래?"

  "데이비드가… 데이비드가…"

  "그 녀석이 왜?"

  "차원종의 위상력을 흡수한 뒤, 이곳에서 도망쳐버렸어요…"

  "……"


  제이는 말을 잃었다.

  이해할 수 없다. 차원종의 위상력을 흡수했다는 건,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차원문이 제일 처음 열렸을 당시, 사람에게 발현된 것은 제2위상력으로 분류되는 위상력이었다. 차원종들이 사용하는 위상력은 제1위상력, 분명히 사람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렇기에 이 두 위상력이 공존할 경우, 상쇄되는 에너지가 생명을 깎아먹게 되고 결국 사용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아스타로트의 강남 침공 사태의 때만 보더라도 두 위상력이 공존할 경우의 제3위상력은 엄청난 힘이라는 것이 드러났고, 그 어떤 차원종도 그것을 이길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만약 김유정이 말한대로 데이비드가 차원종의 위상력을 흡수했다면, 분명히 그는 제3위상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숨겨졌던 위상능력자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클로저도 제3위상력을 가진 자를 쓰러뜨릴 수는 없다. 오로지 제3위상력을 사용하는 자는 같은 힘을 사용하여야만 쓰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제이는 말을 잃은 것일테지.


  제이의 굳은 표정을 보고 한참을 웃고있던 유리가 웃음을 그치고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 채었다. 그것은 미스틸도 마찬가지.

  제이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유정 씨, 방금 한 말, 사실이지?"

  "믿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이에요."

  "특수 요원들과 늑대개 팀은 도대체 뭘 한거야?"

  "베로니카 라는 위상능력자의 억제에 힘을 쏟다가 그만..."

  "뭐?! 베로니카?"

  "아… 그러고보니, 그 위상능력자, 18년 전의 차원전쟁에 참여했던 클로저라고 하더라고요."

  "자세하게 말해줘, 유정 씨.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제이의 목소리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전화 안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유리와 미스틸은 그저 서로 마주보며 알 수 없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다. 그들이 제이를 바라보는 표정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18년 전 차원전쟁 당시 베로니카라는 이 클로저는 차원종의 장기를 이식받게 되어, 모든 위상력을 다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부작용 때문에 그녀는 폭주하게 되었고, 유니온은 이곳 버려진 휴게소의 지하에 비밀수용소를 만들어 그녀를 이곳에 봉인하고, 수용소에 수감된 위상능력자들의 위상력을 사용해 그녀의 폭주를 억눌렀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더이상 그녀의 폭주를 억누를 수 없게 되었고, 폭주하는 그녀를 잠재우기 위해 늑대개 팀과 특수 요원들이 모두 투입되어서 겨우 그녀의 폭주를 막아냈지만, 그 뒤에 나타난 데이비드가 쓰러진 베로니카에게서 차원종의 위상력을 흡수해버린 뒤 이곳을 이탈해버렸어요. 우리는 손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그를 놓치고 말았고요."

  "이것 참, 심각하게 흘러가는군.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되었지?"

  "차원종의 위상력이 떨어져나가면서 폭주는 멈춘 상태에요. 지금은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취하고 있고요."

  "그러면 그 녀석은 어떻게 되는거지?"

  "특경대와 램스 키퍼를 통해서 계속 추적할 예정이에요. 다만… 언제 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알겠어. 아이들에게 이 상황을 전파하려고 전화한거지? 난 아이들에게 가감없이 그대로 전하면 되나?"

  "어렵겠지만, 부탁할게요, 제이 씨. 그리고 특히 세하에게는, 무리가 안가게 잘 전해주기 바랄게요."

  "후우… 알았어."


  전화가 끊어진다.

  제이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손꼽아 기다리던 유리와 미스틸은 그가 휴대폰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물었다.

  "아저씨,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에요?"

  "안 좋은 일이에요?"



  제이는 한숨만을 내쉴 뿐, 말을 잇지는 못했다.

  유리와 미스틸의 애만 태워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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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에서 내린 후 우리는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를 더 올라가 목적지 인근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거의 내려앉아 어둠 뿐이었지만, 한밤의 벚꽃길은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자연 하천의 양 옆으로 놓인 인도의 옆으로 계속하여 늘어서있는 벚꽃 나무에서는 하천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그 잎을 흩어놓고 있었다.


  낭만적으로 생긴 가로등의 빛이 길을 비추고 있었고, 흐르는 강물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한 낮에 보았으면 더욱 예뻤을법한 이 길을 우리는 비록 밤에 걷고 있지만, 낮과 다르게 밤에는 인파가 매우 적어 한껏 이 길을 우리의 마음대로 즐길 수 있다.


  간혹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나 우리와 같은 연인들로 보이는 남녀, 혹은 운동 삼아 나온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종종 지나치곤 하는데, 그 외에는 정말로 사람이 없다.

  전등의 불빛이 비추는 강변길은 이색적인 느낌을 느끼게 해주는데, 특히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흩날리는 벚꽃잎이 나와 슬비의 얼굴에 닿아 간지럽히곤 하는게 매우 산뜻했다. 바람은 그렇게 많이 불지 않는데도, 잎은 하늘 높이 떠올라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다 결국 땅으로 강으로 흩어져 떨어지곤 한다.


 

  "세하야, 저기!"

 

  슬비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전등 옆에 서 있는 정말 풍성하게 벚꽃잎이 열린 나무였다. 아마 그곳으로 가자는 것이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으로 방향을 향했다.


  몽글몽글 하다고 표현하면 어울릴 것이다.

  분홍빛의 이 나무는 아직 꽃잎이 다 떨어지지 않아서 마치 분홍색 솜사탕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만든다. 멍하게 이곳을 보고 있을 때, 슬비는 나와 잡고 있던 손을 놓고서 나무의 바로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매우 사랑스러운 포즈를 취한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하야! 너무 예뻐! 혹시 사진 한 번만 찍어줄 수 있어?"

  "어두워서 잘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


  나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집에 좋은 카메라가 있긴 하지만, 그것을 다시 집까지 가서 들고 나올 수는 없기에, 안타깝지만 휴대폰의 카메라 기능을 사용해서 사진을 남길 수밖에 없다.

 

  카메라 앱을 눌러 휴대폰 카메라의 렌즈를 그녀를 향해 맞추었다.

  전등빛 덕분일까, 휴대폰 카메라 치고는 꽤 예쁘게 나온다. 백**이 퍼지는 일대의 벚꽃 나무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맞으며 서있는 슬비의 모습을 보니까, 가슴이 무척이나 뛴다.

  이 녀석은 왜이리 예쁠까?


  "찍는다?"

  "응!"

  "하나. 둘. 셋!"


  착- 하는 소리와 함께 핸드폰의 사진첩에 그녀의 사진이 담긴다.

  몇 번 더 사진을 찍어서 남기고 휴대폰을 내리자, 슬비는 금세 다가와 사진을 보여달라는듯 내 핸드폰에 빤히 얼굴을 내밀었다.


  "와, 예뻐."

  "역시 사진하면 에이폰이지."


  슬비는 내가 찍은 사진에 만족한 모양이다.

  새로 찍은 또 다른 사진과 이전 사진을 번갈아가면서 몇 번이나 보더니, 그녀는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끼우고 나를 잡아당겼다. 내 몸이 완전히 그녀의 몸에 붙는다.


  "왜 그래 슬비야?"

  "나만 찍으면 나쁘지. 같이 찍자."

  "어… 응."


  내 사진은 잘 찍는 편은 아니지만, 이 아이와 함께한 사진이라면 얼마든지 좋다.

  내가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것을 마치 증명이라도 할 수 있는 사진같기 때문이랄까?


  벚꽃 나무 아래에서 우리 둘은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 붙이고 애인다운 포즈를 취했다.

  나와 슬비의 모습이 다 들어오게끔 화면을 맞추고 나는 말했다.


  "여러장 찍을거야. 눈 감지 마?"

  "알았어."


  착- 착- 착- 착-

  네 장의 사진을 연속으로 찍었다.

  이번에도 꽤 예쁘게 나왔다.


  나무 곁의 벤치에 우리는 앉아 찍은 사진을 구경했다.

  "야, 이슬비. 눈 감지 말랬지?"

  "마지막 사진만 그렇게 찍힌거야. 다른 사진은 다 괜찮게 나왔는데? 그건 지워줘."

  "아니, 그냥 놔둬도 될 것 같아."

  "왜? 지워."

  "싫어, 이 모습도 귀엽다고."


  이 한 마디에 슬비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더 이상 지우라는 말은 없었다. 내가 귀엽게 봐줘서였을까?


  우리는 벤치에 앉아 강 건너를 바라보았다.

  맑은 수면에 달의 모습이 그대로 비추고 있다. 강 건너의 반대편은 전부 아파트 단지임에도 소란 없이 조용했다. 간혹 지나다니는 자동차들과 버스의 소리만 어렴풋 들려온다.


  뭐라고 말해야할까?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녀가 받아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의 마음을 받아주었고, 지금의 우리는 이렇게 사랑을 나누고 있다.

  이런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어서일까, 무척이나 이슬비와는 가까운 사이지만, 이 상황에서만큼은 왠지 낯설어 무엇이라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내뱉은 말은,


  "좋다."



  연애 초보의 말이다.

  아,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난 정말 꽝이다.

  과연 슬비가 뭐라고 말할까?


  "그러니까."

  나의 말에 그대로 슬비가 대답해주었다.

  아, 정말 고마워, 슬비야.



  "그런데 있지?"

  말을 덧붙인다.

  응? 뭐라고 하려는 거지?


  "세하, 너랑 있으니까 더 좋은 것 같아…"

  "이슬비…"


  이성이 무너져내린다.

  아아, 이 사랑스러운 녀석을 어떻게 해야하지?

  정말 슬비가 사랑스럽다.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안아주는 것 뿐.

  밤이라 약간 썰렁한 느낌이 있어서 일까,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도 기쁜듯이 나를 안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


  콩닥이는 심장소리가 그대로 서로에게 전해진다.

  정말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나보다.

  안고 있는 이 녀석을 놓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말로 놓아주고 싶지 않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슬비야."

  "응."


  안고 있어 서로의 얼굴은 보고 있지 않지만, 어떤 표정으로 우리가 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나 너나, 우리는 둘다 얼굴을 붉힌 채로 두근거리고 있겠지.

  

  말을 하고 싶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하기가 부끄러울까?

  분명히 슬비는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사랑해."

 

  말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온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아. 마치 아침에 고백할 때처럼 말이다.


  훗, 하고 웃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정말로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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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꼴사납군."


  이 목소리.

  우리는 그대로 정말로 굳어버렸다.



  "후~ 혼자 보기에는 안타까울 정도인걸? 너무 달달해서 질투가 날 정도야."

   

  우리는 곧바로 떨어졌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온갖 증오를 담은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기에, 우리는 차원종을 대하는 것 같은 적개심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에 저주를 담아 외친다.


  "데이비드!"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남자는 서 있었다.

  검정빛의 코트 아래로 정장을 입은 갈색머리의 남자. 신경질이 날 정도로 남을 비웃는 것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이 남자의 이름은 데이비드 리.

  우리 검은양과 유니온의 배신자이다.


  무기를 그에게 겨누자,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제는 지부장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는군. 그 칭호, 참 듣기 좋았는데 말야."

  "닥 쳐! 당신은 그런 말 들을 자격도 없어!"

  "재밌군. 만약 내가 조금 더 늦게 자네들을 배신했다면, 자네들은 지금도 나를 그 칭호로 부르고 있었을 것을. 정말로 멍청해."

 

  경멸하는 어투로 그는 말했다.

  나와 다르게 슬비는 다소 침착한 어투로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비드 리, 추적받고 있는 당신이 왜 우리 앞에 나타난거죠?

  비록 우리는 이제야 갓 정식요원이 된 클로저들이지만, 1대 2의 상황에서는 우리가 더 유리한 걸 뻔히 알텐데요. 우리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도 있나요?"

  "어디 한 번 시험해볼텐가?"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놈에게 달려들었다.

  나의 선두에 맞추어 슬비도 곧바로 공중으로 도약했다. 나는 전방에서 슬비는 상공에서 동시에 공격을 퍼붓는다. 비록 말은 맞추지 않았지만 오랜 팀워크를 통해 다져진 우리의 협공은 매우 부드럽다.


   위상력을 폭발시켜 몸에 빠른 스피드를 부여한 후, 그가 피할 틈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놈의 가까이에 다가선다. 놈의 멱살을 낚아채는데 성공한 나는, 그대로 건블레이드의 방아쇠를 두 번 당겨 전탄을 놈의 몸에 쏟아놓는다.

  영거리 포격의 반동으로 자연스레 멀리 밀려난 나는, 공격으로 인해 먼지로 뒤덮힌 일대로부터 벗어났고, 곧바로 슬비의 공격이 녀석을 향해 이어진다. 놈은 위상능력자이기에 결코 방심하면 안되고, 더욱이 공격을 피할 틈을 주어선 안 된다.


  슬비의 주위에 부유하는 15개의 비트가 전부 탄환이 되어 매우 빠른 스피드로 놈을 향해 쏘아진다.

  비트는 공기와의 마찰열로 녹아내리겠지만, 완전히 녹아내리지 않은 잔해는 매우 높은 열을 지낸채로 운동에너지의 관성과 함께 그대로 놈의 몸을 관통할 것이다.

 

  이 정도의 공격이라면 일반 차원종은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의 실력을 쉽게 보아서는 안되기에 최후의 공격을 놈에게 쏟아놓아야 한다.


  "별빛에…"


  슬비의 공격이 끝남과 함께 나는 위상력을 온 몸에 집중시켰다. 내 주위로 모여드는 무색과 푸른색의 빛은 그대로 폭발하여 매우 빠른 속도를 나에게 부여하였고, 곧 나는 검 끝을 놈의 몸을 향해 정조준하며 건블레이드를 꽂아넣는다. 아마 그걸로 놈의 생명은 끝이날 것이다.

  검 끝이 놈의 몸에 박힐 무렵, 말한다.


  "잠겨라!"


  파악-

  어? 왜?


  "이 정도가 끝인가?"

  "말도 안돼…"


  검을 빼낼 수 없다.

  아주 근거리에 있기에 나는 볼 수 있었다, 놈이 내 검을 한 손으로 붙잡은채 놓아주고 있지 않는 것을.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걸 한 번 받아보게."

  놈은 자유로운 손을 마치 장풍을 쏘듯 손바닥을 나를 향해 밀쳤다.

  "끄악!"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아픔과 함께 나는 이미 날아가고 있었다. 잠시 후 아무런 힘도 없이 그대로 땅에 추락한 나는 흙바닥에 처박혔다.


  "세하야!"

  슬비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의 공격따윈 놈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만은 사실이다.

  이슬비, 안돼. 이곳으로 오지마.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슬비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슬비, 야… 도망, 쳐… 빨리…"

  "무슨 말이야! 널 놔두고 어딜!"

 

  슬비의 울먹이는 목소리와 함께 기분나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정말 눈물 겹군."

  "데이비드,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물론 알고 말고. 이슬비 양의 남자친구 이세하 군을 만신창이로 만들었을 뿐인데. 왜, 문제라도 있나?"

  "죽어!"


  데이비드의 머리 위의 상공에 커다란 원과 함께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 사이로 강변 주위에 주차되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동차 세 대가 슬비의 위상력과 함께 중력의 힘을 가진 채로 낙하한다. 세 대의 차량은 지상과 충돌하자마자 폭발하여 전소했고, 그 사이에 갇힌 데이비드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에 휘말렸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그는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것을 보는 슬비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잡고 있는 손을 떠는 것만 보아도 느낄 수 있다.

 

  "도망쳐, 빨리…"

  "안돼, 난, 못 도망쳐, 널 버리고는."


  바보 녀석.

  지금 너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있는 힘껏 말하고 싶지만,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놈의 공격을 받은 나는 마치 얼마 전의 최서희 씨처럼 움직일 수 없다. 온 몸에 힘도 들어가지 않고, 말을 하고 호흡을 하는 것조차 힘들다.


  폭발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놈은 말했다.

  "자네의 말처럼 죽을 수는 없겠군."

 

  불길 가운데서 걸어나오는 놈은 어디 하나 다친 곳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옷마저도 불에 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껏 다시 한 번 슬비를 향해 말했다.


  "제발, 도망, 쳐. 난, 괜찮으, 니까. 빨리!"

  "아… 아아아…"

  "빨리!!"


  화를 내듯 외쳤다.

  나의 다그침에 반응한 것일까.

  슬비는 눈물을 흘리며 나의 몸에서 손을 뗴고, 도주를 위해 등을 돌렸다.


  "어딜 도망가나?"

  "아악!"

 

  말도 안될 정도의 중력이 온 몸을 짓누른다.

  나 뿐만이 아닌지 슬비도 무릎을 꿇은채 움직이지를 못했다.


  "이, 이게 뭐…"

  "어떤가, 내 힘이? 근사하지 않나?"

  "데이비드, 너 무슨 짓을…"

  "아, 유정 씨에겐 아직 소식을 못전해들은 모양이군. 뭐 좋아, 내가 직접 알려주고 나중에 그녀가 말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자네들에게 내 소식을 전해들은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날 것을 생각하니, 더 마음이 뛰는걸?"

  "입 닥 쳐, X자식아."

  "말이 심하지 않나, 이세하 군? 어른에게 욕을 하다니. 정말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모양이야. 아, 아버지 없이 자라서 그런가?"

  "그 입, 닥치라고 했지!"

  "자네나 닥치게."


  놈의 목소리에서는 나를 향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놈은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도리어 공격하는 것은 슬비다.


  "꺄아악!"

  "슬비야!"

  "어때, 자네의 여자친구가 자네 때문에 짓밟히는 느낌은?"

  "데이비드! 이 X새 끼야! 죽여버릴거야!"

  "어디 더 지껄여보시지."

 

  놈의 계속되는 거친 발길질에 짓밟히는 슬비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더이상 놈에게 무어라고 했다가는, 정말로 슬비가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분을 여전히 가라앉히지 못했지만, 그것을 겨우 억누른채로 나는 말했다.


  "제발, 그만해. 이 입, 닥칠테니까."

  "흥. 이제 좀 잠잠해진건가? 사람은 비굴해질 때는 비굴해질 줄도 알아야하는 법이지."

 

  만족스럽다는 듯 놈은 슬비를 향한 발길질을 멈추고 우리와 약간 거리를 벌렸다.

  놈의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슬비의 약한 울음소리, 그리고 나의 거친 숨소리가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섞여 일대의 적막을 깬다.

  그리고 곧 놈의 말이 들려왔다.


  "이 정도면 힘은 만족스럽군. 완벽하게 사용하지 못하는데도 이 정도의 힘이라니, 정말 놀라워.

  유정 씨에게 듣게 되겠지만, 차원종의 위상력을 흡수한 지금의 나는 제3위상력의 사용이 가능하지.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힘을 시험해볼 대상이 필요했는데, 마침 자네들을 발견해서 말이지. 정말 나는 운이 좋았어, 시간을 아낄 수 있었거든."

  "제3위상력…?"

  "그래. 그러니 자네들은 결코 나를 이기지 못해. 이미 강남사태로 증명된 바이잖나?

  쓸데없이 나를 추적하려는 생각은 버리는게 좋다고 유니온에 전하게. 자네들을 살려주는 이유는 오직 그것 뿐일세.

  그럼 이만 실례하지. 언젠가 또 볼지도 모르겠군. 그 때까지, 안녕이네."


  자신의 할 말만 남긴 채 그 남자는 천천히 걸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지 약 10분 정도가 더 지나서야, 우리를 구속하고 있던 알 수 없는 중력이 사라졌고 우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못하는 슬비에게 나는 곧바로 달려갔다.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슬비 앞에서 곧바로 나는 넘어져버렸다. 그 상태로 나는 슬비를 부축했다.


  "슬비야! 괜찮아?!"

  "으, 응. 금방 괜찮아질거야. 세하, 넌."

  "이렇게 움직이는 걸 보면서도 날 걱정하는거야?"

  "다행이야, 정말."


  슬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넌 왜 도망치지 않은거야?

  원망을 담아 나는 슬비에게 쏘아붙였다.


  "이 바보야! 도망치라고 했을 때 말을 들었으면 이런 꼴은 안 보잖아!"

  "널 버리고 어떻게 도망쳐."

  "그러니까 너가 바보라는 거야! 너가 죽었을 수도 있잖아!"

  "내가 도망쳤으면, 너가 죽었을 수도, 있었어. 그걸 나더러 보라고?"


  슬비의 되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죽은 그녀를 바라보는 만큼, 죽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도 깨질 듯이 아플 것이 느껴졌다.

 

  "으아아아아앙!"

  나는 그대로 슬비의 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이 울음은 애인을 지켜주지 못한 나의 무능력함과 나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자기를 지켜주지 못한 무능한 나를, 이 녀석은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루는 양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토닥여주었다.

  한참이나 울던 나를 다독여주며 그녀는 말했다. 


  "세하야, 이제 그만 울자."

  "큭. 크윽. 흑흑… 응. 미안."

  "미안하다니, 너가 왜?"

  "내가 무능해서, 흑, 너가 이렇게 된거잖아."

  "그런 소리 하지마! 왜 너가 무능한데?"


  슬비는 말도 안된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사랑하는 여자를 놈에게서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무능력함은 너무나도 컸다.


  나에게는 힘이 필요하다, 놈을 이길 수 있는 강대한 힘이.

  놈이 내 앞에서 살려달라고 무릎꿇고 빌게 만들 정도의 위대한 힘이.

  내 눈 앞에서 슬비를 짓밟은 놈에게 굴욕과 모욕을 똑같이 맛보게 해줄 수 있는 힘이.


  그것을 원하는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무능하다.

  그것을 확인이나 해주듯,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넌 무능해. 이세하."

  "너무 약해빠졌어."


  "애쉬, 더스트!"

  "윽, 하필, 이럴 때에."


  슬비는 얼굴을 찌푸리며 온 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다.

  놈들이 슬비를 공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놈들을 상대해야 한다. 데이비드에게 당한 공격으로 아직 온 몸이 아프지만, 정신력으로 이겨내야 한다.

  건블레이드를 땅에 박고 그것에 의지하여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세웠다. 이런 나의 모습이 우스운 것인지 저 녀석들은 나를 향해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진정해, 이세하.

  우리는 너희와 싸우려 온 것이 아니니까."

  "맞아. 너희에게 손을 내밀러 왔어."

  "거짓말 하지마!"


  거칠게 반응한 나의 목소리에 살짝 놀란 것인지 애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곧 말한다.


  "강남 사태도 우리가 아니었으면 너희는 맥도 추리지 못했을테지.

  아스타로트를 무찌를 힘을 주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야."

  "맞아. 그 은혜를 벌써 잊어버린거야?"

 

  놈들의 말은 어느 정도 맞다.

  확실히 놈들이 없었다면, 아마 최악의 수로 데미플레인 자체를 격추시켜 아스타로트의 영지를 박살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 경우 강남은 더이상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겠지만.


  "확실히 그 때는 너희의 힘이 필요했었지.

  그리고 변덕으로 죽어가던 나에게서 다시 힘을 뽑아간 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너희는 분명히 차원종이고, 우리 인류의 적이야. 그 점은 변하지 않아."

 

  나의 말에 애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하핫, 너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듣다니. 정말 우습군."

  "애쉬.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 나, 이런 이야기 재미 없어."

  "알았어, 누나.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세하. 너희의 배신자는 제3위상력을 가지게 되었지. 덕분에 너희에게나 우리에게나 공동의 적이 생겨버린 셈이고. 녀석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론적으로 보자면 녀석은 우리 군단의 잠재적 위험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이 녀석은?

  "말하려는게 뭐야."

  "너희에게 힘을 주겠어. 아스타로트를 쓰러뜨렸을 때의 그 힘을.

  너희가 제3위상력이라 부르는 그 힘을 얻게되면, 너희는 놈을 쓰러뜨릴 수 있겠지."

  "단, 이 경우 하나 조건이 있어."

 

  더스트의 말.

  불안하다.


  "조건?"

  "강남사태 때 말했던 것과 같아. 너희가 우리의 군단에 들어온다면, 힘을 주겠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왠지 저 이야기에 솔깃해진다.


  "듣지마, 이세하. 바보같은 소리야.

  놈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데이비드를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거야."

 

  슬비는 놈들의 제안은 거들떠 볼 것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이해된다. 만약 내가 놈들의 힘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나는 붕괴한다. 내가 살아남는 법은 놈들이 자신들의 힘을 거둬가거나, 아니면 내가 차원종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다. 하지만 놈들이 강남의 사태처럼 변덕을 부려 나에게서 힘을 거둬갈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내가 살아남는 방법은 차원종이 되는 것 뿐이다.

  슬비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데, 정말로 그것이 있을까?


  "안됬지만 이슬비 양, 다른 방법은 없어.

  너희가 위상력이라 부르는 그 힘, 차원종의 힘은 본질적으로 너희가 다룰 수 있는게 아냐. 그건 너희 인류의 기술력이 얼마나 발달하더라도, 영원히 마찬가지이겠지. 그것이 신이 정해놓은 법칙이야.

  너희를 위해 힘을 기꺼이 제공할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 우리 군단의 최고위 간부인 내가 장담하지, 단언컨대 단 하나도 없어."

  "찾아보면 무슨 방법이…"

 

  헛된 희망.

  슬비가 가진 그것은 헛된 희망이다.

 

  "다시 말하지만, 너는 무능해, 이세하."


  애쉬의 말이 내 마음을 찌른다.

  너무나도 아프게 찔러서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이다.


  "너는 너가 사랑하는 사람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나약해.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너는 네가 미워하는 어른들에게 아직도 복종하고 있다는 걸.

  게임을 좋아해? 웃기지마, 게임은 너의 무능함에 대한 현실도피일 뿐이야.

  녀석에게 배신을 당하고도, 아직도 어른에게 복종할 마음이 남아있는거야?

  유니온은 언제나 그랬어, 너의 어미 때도 그리고 지금도. 

  데이비드나 유니온이나 다 똑같은 녀석들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며칠 전 들었던 말이다.

  형상복제자를 처음으로 쓰러뜨리던 그 날, 나의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그 말이다.

 

  참담한 심정이다.

  두렵다. 나는 내가 바라는 나가 아니다. 나는 정말로 무능하다.

  어쩌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 때 진심으로 '놈'을 믿었고, 그가 내리는 명령에 복종했다. 하지만 '놈'이 배신한 지금에서야 나는 내가 너무나도 쉽게 '놈'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른은 믿을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언제나 마음에 새겼던 나였지만, 나는 '놈'이 착한 어른이라 기대하고 있었기에 배신을 당한 것이다.

 

  유니온의 모습도 이와 같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엄마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노력을 무시당했다. 내 노력은 마치 선천적인 것처럼, 그들은 나의 노력을 보아주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내 삶 - 클로저로서의 삶 - 은 철저하게 당위적이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나를 이용하는 유니온.

  어쩌면 유정 누나도 나를 처음부터 이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검은양 팀 전체가 그녀와 유니온에게 이용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위험한 일은 우리가 직접 담당했고, 그런데도 유니온은 우리에게 고맙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정말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유정 누나는 유니온을 대신해서 우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지금까지 나는 이용만 당하고 있던 것이다.


  클로저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희생을 강제당했다.

  나도 일반 아이들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클로저인 엄마와 다르게 되고 싶어서, 나는 머리를 염색하고 눈에는 렌즈를 꼈다.

  처음 클로저로 부름받았을 때, 그 공무원이 했던 말을 기억한다.


  『데이비드 국장님이 너를 발탁하셨어』

  '놈'은 검은양 팀에 나를 불렀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분명히 '놈'은 내가 가진 잠재력을 크게 본 것이 틀림 없다. 내 노력의 결과는 전혀 ** 않고서, 그저 내가 가진 위상력만을 보았기에.

  그리고 '놈'은 나를 이렇게 처참한 몰골 - 클로저 - 로 만들어버리고 우리를 배신했다. 그리고 불과 10분 전, 놈은 나를 깔보며 나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슬비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진 나의 자존심은, 오로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더 소중하다,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기에 나를 희생할 수 있었다.  슬비를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뭐든지 할 수 없다.

  내가 무능하기에. 너무나도 나의 힘이 부족하기에. 그것을 나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에…….


  "어때, 이세하."

  "나는…"

  "무능한 너 자신이 싫지 않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조차 구하지 못하는 너가 밉지 않아?"

  "나는…"

  "세하야! 저런 말에 고민할 필요 없어!

  당장 사라져! 그렇지 않으면, 너희를 공격할테니까."


  슬비의 다그침에 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다.

  애쉬는 다소 아쉽다는듯 머쓱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면, 시간을 주겠어.

  너희 둘 모두에게 하루의 말미를 주지. 그 안에 결정을 내리도록 해."

  "너희의 힘을 빌릴 일은 절대 없을테니, 다시는 나타나지마!"

  "후후, 기다리고 있겠어."


 

  애쉬와 더스트의 모습이 어두워져간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곳 강변길은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밖에 없는 곳이 되었다.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적막에 휩싸인 어두운 강변길.


  나와 슬비는 아무런 말도 못한채,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한참동안 멍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오늘은 참 별이 밝구나. 나는 이렇게 초라한데.


2024-10-24 23:00:5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