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용서해주세요 - 6-1. 벚꽃길 끝에서 -
Articulus 2016-04-1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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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뭐, 두 놈이나 더 쓰러뜨렸다고?"
이 바보의 커다란 목소리가 교실 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덕분에 우리 반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이곳을 일제히 집중했다.
"서유리, 조용히 말해!"
"아, 하하하… 미안."
결국 슬비가 나서서 핀잔을 주어야만 이 녀석도 진정하는 것일까.
하지만 유리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어젯밤 놈들 중 하나가 세하에 의해 소멸당했고, 오늘 아침 또 다른 두 놈이 슬비와 세하에 의해 각각 하나씩 소멸당했다.
강북을 떠들석하게 만들던 차원종이 거의 박멸되었다는 소식은 어느새인가 재빨리 퍼져서 지금 한창 생방송 뉴스로 나오고 있는 중이다. 비록 주인공인 나와 슬비는 인터뷰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아저씨를 통해 올라간 보고가 한창 뉴스를 시끄럽게 달구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다.
"아직 좋아하긴 일러. 한 놈이 남았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슬비와 유리.
그렇다. 최초 목격자의 진술에 의하면 형상복제자의 수는 넷. 그 중 세 놈이 우리의 손에 사라졌고, 행방이 묘연한 마지막 한 녀석만이 남아있다. 강북을 계속해서 조사해서 남은 녀석을 빨리 소탕해야 한다.
강북 지역을 담당하는 클로저 요원들은 놈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우리 검은양 팀에게 양도했고, 이제 좋든 싫든 놈을 끝장내는 건 우리의 몫이 되었다.
내 모습을 복제한 녀석이 멀쩡히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욱이 녀석들 중 하나가 죽기 전에 남겼던 말.
"나는 '나'가 살아있는 한 죽지 않아."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신경쓰인다. 그 뒤에 녀석이 남겼던 말대로 바로 다음 날 녀석들을 나는 조우했다. 이것을 염두하고 한 말이었을까?
"이세하."
슬비가 나를 부른다.
"어?"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
"내 표정이, 그렇게 심각해보였어?"
"응. 정말로."
"별로 심각한 생각한 건 아니야."
"무슨 일이 있다면 말해."
"아냐, 정말로 아무 일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띠리리-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2교시 수업이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슬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교실 뒷문을 나가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고, 유리도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 수업을 준비했다. 이번 시간은 따분한 수학 시간이다. 졸립지만 공부는 해야지.
바깥을 쳐다보았다.
학교 화단을 두른 벚꽃들이 무척이나 예쁘게 보인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이제 막 절정기에 이르러서 한창 폈다, 이제 곧 저 벚꽃들은 모두 떨어지겠지.
연분홍빛의 벚꽃을 보니, 비슷한 머리색을 한 녀석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 슬비랑 단 둘이 걷고 싶다."
◆ 6-2
"테인아, 뭔가 느껴지는게 있니?"
"아뇨, 전혀요. 차원종의 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이상하군 그래."
"그 녀석, 도망친거 아닐까요? 아니면 본래 차원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좋겠다만."
제이와 미스틸테인은 시민아파트 근방으로 나와 수색 중이다.
신강초의 특별한 허가를 얻어 미스틸테인은 제이와 이곳에서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이곳은 아침에 형상복제자의 출현으로 현재 출입이 통제된 지역이다. 특경대가 이곳을 지키고 있는데, 기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이곳을 취재하려는 듯 폴리스 라인을 넘보고 있다. 취재하려는 그들과 이것을 통제해야하는 특경대의 숨막히는 신경전의 틈에서 제이와 미스틸테인은 수색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들은 벌써 시민아파트의 모든 층을 수색했다. 방과 방은 물론이고 모든 복도와 구석진 곳까지 모두 수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차원종의 흔적은 물론 기척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마치 아침에 이슬비가 한참을 헤매도 녀석들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도 이곳에서 계속하여 헛된 수고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저씨, 그냥 포기하는게 어때요? 그 녀석은 이곳에 없는 것 같아요. 미스틸의 감각은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아침에 대장도 말하기를 이곳에서 놈들의 기척을 전혀 찾을 수 없는데도 갑자기 놈들이 나타났다고 했어. 이곳 어딘가에 놈들이 숨어있을 수도 있겠지. 아직 못 본 곳이 있나 확인할 필요가 있어."
"아저씨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어두운 복도를 울리는 휴대폰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발생지는 제이의 주머니. 그의 휴대폰이 진동과 함께 과거에 한창 유행이었던 노래가 울리는데, 미스틸테인이 아니라 유행에 민감한 젊은 학생들이 들었다면 바로 웃음을 터뜨렸을뻔한 노래다.
그러나 검은양 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제이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터치하여 전화를 받았다.
"나야, 유정 씨. 공항은 별 일 없지?"
"네, 제이 씨. 그것보다도 뉴스를 봤어요, 세하와 슬비가 형상복제자들을 셋이나 벌써 제거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이야."
"왜 제게는 보고하지 않은거죠? 처음에 분명히 부탁드렸을텐데요, 제이 씨는 제 역할 대리라고."
"아아, 숨기려는 마음은 없었어. 사태가 일단락되면 그 때 보고하려고 했거든. 공항 정리일로도 바쁜 유정 씨를 이런 소란으로 혼란스럽게 만들 수는 없었어."
"그건 별개의 일이라고요, 제이 씨. 저는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이에요. 만약 팀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그 때의 저는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일을 처리한 건가요?"
"화내지 말라고, 유정 씨."
"후… 이번 만은 넘어가드리겠지만, 앞으로는 똑바로 보고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하나 전달해드릴 것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사뭇 달라진 김유정의 목소리.
그것을 알아챈 제이의 눈빛도 달라진다.
"뭐지, 유정 씨, 그 전달해줄 것이라는 건?"
"전 지부장, 데이비드 리의 행방을, 포착했어요."
"형, 아니… 그 남자, 결국 찾아냈군. 어디에서 마지막으로 포착된거지?"
"구 경부 고속도로의 안성 휴게소 근방이에요. 램스키퍼가 순항 중 그곳에서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보이는 이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곳에 데이비드 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그 고속도로라면 차원전쟁 이후 폐쇄된 곳일텐데. 게다가 폐쇄된 휴게소는 도대체 왜?"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지금 늑대개 팀이 그곳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하니, 그들의 대장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대로 새로운 소식을 전해드리겠어요."
"알겠어. 하나 더 묻고 싶은게 있는데, 우리 팀은 그곳으로 출동하는건가?"
"아뇨… 총본부에서는 이 일을 특수요원들과 늑대개 팀에 맡기려는 모양이에요."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없애버리겠다는 뜻이군."
"……"
"알겠어. 그럼 수고해달라고, 유정 씨."
"제이 씨도요. 부디 아이들을 잘 이끌어주세요."
3분 가량의 통화가 끊어지고 다시 정적이 감돈다.
휴대폰을 자켓 주머니 속으로 밀어넣은 뒤, 제이는 크게 한숨 지었다. 대략적인 통화의 내용을 들은 미스틸테인이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저씨, 지부장... 아니 그 남자의 행방을 찾은 건가요?"
"그런 것 같아. 그가 왜 그런 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소식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알려야겠는걸."
"그럼 철수인가요?"
"우선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으니, 조금만 더 이 부근을 수색해보자.
만약 그래도 찾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떠나야겠지."
미스틸테인의 제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의 의견에 수긍했다.
데이비드 리, 그 남자의 이름.
그들의 배신자의 이름이 이렇게 무거웠음을 두 사람은 새삼 느끼고 있었다.
◆ 6-3
"데이비드의 행방을 찾았다고요?"
슬비의 말에 더 놀란 반응을 보인 것은 나다.
유리도 적잖이 놀란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놀란 것을 넘어 그 남자를 향한 적개심과 증오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고 있다.
우리는 매점에서 사온 빵과 우유를 앞에 놔두고,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우리가 막 점심을 먹으려던 참에 슬비의 휴대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아마 아저씨에게 걸려온 모양이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았던 슬비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들 모두가 좌시할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겠지.
"구 안성 휴게소. 폐쇄된 경부 고속도로를 말하는 거군요.
그런 곳에 도대체 왜 데이비드가…
네, 알았어요, 좋은 정보 감사해요, 제이 씨. 그럼."
전화가 끝난 모양인지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 주머니 속으로 집어 넣었다.
그녀가 휴대폰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나는 질문을 쏟아붓는다.
"아저씨가 뭐라고 하셨어?"
"데이비드의 행방이 포착된 모양이야. 지금 그를 체포하기 위해서 늑대개 팀이 이미 작전을 시작한 모양이고."
"우리는? 우리는 계속 여기서 대기만 하고 있어야해?"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빵을 한 입 베어물었다. 슬비가 먹기 시작한 것을 본 유리도 금세 빵을 집어들었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배신을 당한 우리가, 그 누구보다도 믿었던 어른이었던 그 남자를 체포할 수 없는 것인가?
도대체 왜?
그 인간에게 갚아줄 것이 아직도 남았는데, 도대체 왜?
"인정 못해."
"이세하."
"왜,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건데!"
"상부의 명령이야. 유니온 총본부도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거야."
"더러운 어른들이 뭘 알아! 데이비드와 똑같은 녀석들인걸!"
"이세하!"
소리를 지르는 슬비.
그녀가 윽박지르는 소리에 나는 더이상 말을 하지 못헀다.
그저 그녀가 원망스럽다.
이슬비, 넌 왜 도대체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거야.
왜? 어째서?
너도 당했잖아, 그 녀석에게, 그 남자에게 당했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너는 이렇게 잠잠할 수 있는거야? 왜? 왜? 왜?
나의 마음 속의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 그녀는 말했다.
"나도 분해. 데이비드, 그 녀석을 잡아서 우리 앞에 당장 무릎 꿇리고 싶은 마음은 나도 너만 할거야. 유리도 마찬가지일테고.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감정대로만 나선다면, 그건 오히려 놈들의 함정에 걸려드는 것에 불과할거야. 추적을 받고 있는 데이비드가 멀리 도망치지 않고 신서울 근처로 도망쳤다는 것은, 아마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려는 속셈이겠지.
만약 우리가 그의 함정에 걸려들어서 이도저도 못하게 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속 편안히 앉아서 늑대개 팀이나 유니온이 우릴 구해주길 바랄거야?"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분하지만 슬비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그 녀석이 안성까지만 도망쳤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하면 그곳에 있어도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우리가 그곳을 치기를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분명히 우리가 놈을 체포할 수 있어.
데이비드를 체포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검은양 팀이야.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 우리는 지금 당장 마지막 남은 또 다른 차원종을 물리치는게 더 급해."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조용히 빵을 베어 물었다.
소보루 빵의 단 맛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벚꽃의 달콤한 향이 한가득 풍겨왔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우리의 점심시간은 이렇게 지나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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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고.
세하나 유리같은 클로저들이 아무리 힘을 내고 있어도, 여전히 강남에는 차원종 패거리가 조금씩 남아있다고 하니, 항상 인적이 드문 곳을 피해 다니고. 일찍일찍 집에 들어가도록 해라.
특히 강남역 주위에 우리 신강고 학생들이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으니까, 알아서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그럼 이상."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신강고의 학생들이 그렇게 기다리는 방과 후 시간이 되었다.
자율학습으로 학교에 남는 소수를 제외하고, 모두는 이 학교를 떠난다. 이제 10분만 지나면, 이 학교는 정말로 텅텅 비겠지.
아이들이 다 나갈 때까지 나는 기다렸고, 교실 안에는 나와 유리만이 남았다.
유리는 의자에 앉아 머리 뒤로 손을 올린 채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 녀석도 꽤나 수업시간이 따분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천장으로 시선을 두더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세하야."
"왜?"
"만약에 한 여자를 한 남자가 좋아하게 되었어. 그리고 두 사람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었지.
그런데 그 남자를 그 여자보다 오래전부터 짝사랑하던 또 다른 여자가 있었어. 그런데 그 남자는 또 다른 여자가 자기를 좋아해주는지 몰라줘. 그러면 또 다른 여자의 마음은 어떨까?"
"몰라서 물어? 당연히 실연감에 빠지겠지."
유리는 살짝 웃었다.
하지만 금세 미소를 지운 채로 말했다.
"아침에 봤어, 우연히.
너, 슬비랑 사귀게 되었지?"
"어? 어, 어어, 응."
"슬비, 걔, 겉으로는 멋진 리더이지만, 속은 굉장히 여려.
그러니까 세하야, 절대 슬비에게 상처를 줘선 안돼. 그러면 내가 오히려 너한테 화낼거야."
"무, 물론! 상처같은 걸 줄 일 따위 없겠지만서도…"
"응! 그러기를 바랄게.
만약 나중에 용서해주세요, 라고 나중에 빌어도, 그 땐 용서 따윈 없을거야. 알았지?"
"으, 으응."
녀석 답지 않다.
서유리는 정말로 붕 뜬 분위기의 가벼운 이야기밖에 못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진지한 구석이 녀석에게도 있었나?
서유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를 책상으로 밀어넣고서, 그녀는 말했다.
"슬비 반의 종례가 늦어지는 것 같으니, 나는 이만 실례~ 슬비한테는 먼저 간다고 말해줘."
"알았어. 내일 봐, 유리야."
"응."
인사를 마친 그녀는 교실 뒷문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딱 문 앞에서 설 무렵, 그녀는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는건가?
"벚꽃이 오늘 밤이면 많이 질거래. 그러니까 벚꽃 구경을 하려면 오늘이 최고라고 하더라.
여기서 좀 멀지만 강북의 노원구 쪽에 사람도 많이 없는데 벚꽃 구경하기 참 좋은 곳이 있대. 친구가 그 옆의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그 학교부터 그쪽에 흐르는 강까지의 코스가 정말 좋다고 해. 그 강의 이름이 우이천이라고 했던가? 한 번 오늘 가보는 게 어때?"
그렇게만 말을 남기고 녀석은 복도 밖으로 사라졌다.
자기 할 말만 해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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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비가 우리 반에 온 것은 유리가 떠난지 약 10분 후였다.
그동안 나는 교실에 앉아 조용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역시 생각을 없애는 데는 게임이 최고다.
교실에 들어서도 반응이 없는 나를 본 그녀는 자신의 위상력을 사용해 나의 게임기를 내 손에서 강탈해갔고, 게임기를 따라가는 나의 시선이 멈춘 곳은 그녀의 손 위였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우리 반에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슬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넌 고백해도 변하는게 없구나?"
"윽… 잠깐 한거라고."
"그래서, 좋아한다고 말했던 사람이 반에 왔는데도 몰랐다?"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후후, 장난이야."
그녀는 내 손 위에 게임기를 다시 올려두고, 내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우리 둘 밖에 없는 이 교실, 참 조용하다.
슬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이 지나면 벚꽃이 거의 진대."
"응, 들었어."
"그래서 말인데, 세하야."
말이 없는 이슬비.
무슨 말을 할지 뻔한데.
내가 먼저 선수를 친다.
"사람은 많이 없지만, 벚꽃이 참 예쁘게 핀 곳을 알고 있어."
"어?"
"시간이 된다면, 오늘 밤에 같이 갈래?"
"으, 응."
승낙하는 슬비.
먼저 말하고 싶었던 것을 내가 해주어서 그런걸까? 약간 뾰로통한 표정을 잠깐 짓기는 했지만, 결국 웃음을 지으면서 승낙해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말한 묵언의 제스처. 그녀도 내게 손을 내밀어 손을 맞잡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맞잡은 손을 통해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우리는 발을 맞추어 천천히 서로의 얼굴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본채 교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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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 알려준 곳은 우리학교에서 적어도 1시간 정도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한 번에 그곳으로 갈 수 있지는 않고, 지하철을 탄 후 한 번 버스로 환승해야 갈 수 있다. 게다가 도보로 걷는 시간만 10분 정도는 소요된다. 지금이 5시쯤 되었으니, 그곳에 도착하면 6시가 넘어서일까?
나와 슬비는 꽤 걸어서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하교시간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우리 학교의 학생들이 꽤 많이 있었지만, 얼굴은 잘 모른다. 그저 교복만 보고 우리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지하철을 탈 수 있는 탑승 플랫폼 앞까지 와서 다음 열차가 언제 도착하는지 확인했다. 두 정거장 전에 있는 것을 보아, 아마 3분 후면 지하철을 탈 수 있겠지.
우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계속 맞잡은 채로 나란히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놀랍지 않아, 슬비야?"
"뭐가?"
"우리가 정식 클로저 요원으로 활동한건 불과 한 달 정도인데, 그 사이에 엄청 많이 변했잖아."
"그렇지. 정말로 많은 것이 변했어."
우리의 일상도, 우리의 모습도, 그리고 이 강남도, 매우 많이 변했다.
차원종의 습격은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우리나라에 남겼건만, 차원종의 대대적인 강남침공은 강남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다.
다행히도 우리 검은양 팀은 아스타로트의 강남침공을 무마시키는데 성공했고, 그 뒤 매우 오랜시간을 재해복구작업과 플레인게이트의 탐사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지난 한 주간, 우리는 국제공항에서 배신자와 인간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지나갔다.
『지금 이수, 이수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 걸음 밖으로 물러나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이 역사 안을 울린다.
그리고 시끄러운 지하철 소리가 한가득 바람을 몰고 달려온다. 우리 앞을 한참이나 지나가던 지하철은 속도를 점차 줄이더니, 잠시 후 완전히 멈춰섰다. 그리고 열리는 문과 함께 쏟아져나오는 인파로부터 우리는 비켜섰고, 내릴 사람이 모두 내리자 우리는 지하철 안으로 들어섰다.
퇴근시간대라 사람이 많은 지하철임에도 불구하고, 꽤 사람이 많이 내려서인지 빈 자리가 곳곳에서 보인다. 우리는 가장 바깥의 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앉기가 무섭게 우리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우리 두 명이 모두 휴대폰을 꺼내는 것을 보아, 아마도 검은양 팀의 단체 메신저방에 누군가 이야기를 꺼낸게 틀림없다. 채팅방에 들어가자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저씨였다.
「테인이와 시민아파트 수색을 했는데, 결국 마지막 층의 구석에서 놈을 발견했지.
그 녀석, 우리를 보더니 바로 차원문을 타고 도망쳐 버리더군. 」
「분명히 제 창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친게 틀림 없어요!」
아저씨에 이어 테인이가 이야기를 올린다.
두 사람은 우리가 학교에 있는 동안 따로 조사를 했구나. 게다가 차원종까지 도망치게 했다니. 이제 강북에서 놈들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열심히 일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죄 지은 것처럼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정말 열심히 일하는데, 놀러가려는 나를 생각하니 약간 뜨끔하달까.
"아저씨랑 테인이는 열심히 일하나본데, 우리 이렇게 놀러가도 괜찮을까?"
"하루 쯤은… 괜찮을거야."
슬비도 나처럼 꺼림직한 부분은 있는 모양이다.
괜히 두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때 지이잉- 하는 진동과 함께 새로운 이야기가 채팅방에 올라온다. 이번엔 유리다.
「우와, 완전 고생했어요, 아저씨, 그리고 테인아. 아참, 혹시 아저씨, 지금도 테인이와 같이 있어요?」
「응. 왜?」
「잘 됬다! 그럼 지금 어디계세요?」
「강남역 근방이지.」
「그럼 저희 꽃구경가요! 오늘이면 벚꽃 다 진대요!」
「음, 그것도 나쁘지 않지. 좋아, 어디서 만날래?」
「강남역 5번 출구 쪽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기다리고 있을테니, 어서와라고. 근데 대장이랑 동생도 같이 오나?」
「아뇨, 두 사람 피곤하다고 먼저 집에 간다고 했어요. 저희끼리 가요.」
「그렇게 하지 뭐. 대장이랑 동생은 사진이라도 올릴테니, 그거라도 봐두라고.」
채팅방의 대화가 끝난 듯 조용해졌다.
서유리의 등장으로 우리의 고민은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는 그녀가 말한대로 말한 적이 없다. 우리가 피곤해서 먼저 집에 가겠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덕에 그들도 따로 꽃놀이를 가게 되었고, 이것으로 우리는 더이상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서유리 이 녀석, 다 알고서 한 말일까? 그 바보가?
"유리한테는 고맙게 되었네."
슬비가 살짝 웃음을 지었다.
정말이다. 유리에게는 빚을 하나 지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지금 가는 그곳도 유리가 알려준 곳이다.
어쩌면 정말로 그 녀석은 우리의 생각을 다 알고있는지도 모른다.
내일 그 녀석의 입에 빵이라도 물려줘야겠다.
『이번 역은 이수, 이수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지하철의 소음에 안내방송 소리가 묻혀서 흩어진다.
그렇게 우리가 탄 지하철도 우리의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