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If - 레비아 이야기
NoirSoleil 2015-11-11 2
"저, 트레이너 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말씀 드려도 될까요?"
"그게 뭐지? 레비아."
트레이너는 샌드백에서 눈을 돌려 레비아를 바라봤다. 램스키퍼 안에 마련한 체력 단련실에서 한참 운동에 열중하던 참이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늘 순종적이고 명령만 기다리던 레비아가 먼저 무언가를 요구하던 일이 대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게...... 인간 사회에 대해서 조금 더 공부를 하고 싶어요."
"......흠."
점점 더 인간스럽게 변하는군.
트레이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들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말 한 뒤로는, 점점 더 그들을 닮아가려는 것이 보였다.
되도록 좋은 부분만 닮았으면 좋겠는데.
"네? 방금 뭐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트레이너 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든 너의 부탁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군. 생각해둔 것이 있나?"
"네, 꼭 배우고픈 사람이 한 명 있어요."
"그게 누구지? 레비아."
"그건......."
***
"뭐, 뭐라고? 나보고...... 선생님을 하라고?"
석봉은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손에서 게임기를 놓쳐버릴 뻔 했다. 그 정도로 세하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자고 일어났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게임 속 최고의 아이템이 하루 아침에 쓰레기로 전락한 패치 내역을 보는 느낌이었다.
[응. 레비아가 너한테 꼭 배우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던데?]
"그... 그치만... 난 누굴 가르치는 건... 잘 못 하는데. 그보다... 그 얘는 왜 그런걸 배우려는거야? 난... 잘 이해가 안 가는데."
한참동안 통화를 이어가며 석봉은 천천히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알고보니 레비아는 사람의 모습을 한 차원종이며-하지만 인간에게 적의가 전혀 없는-오히려 인간과 닮고 싶어서 인간 사회의 관습등을 자신에게 배우고 싶어한다, 라는 것이 세하가 알려준 것들의 중점이었다.
하지만 대체 뭘? 어떻게? 석봉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은 그저 게임 밖에 없었다.
친구라고는 세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하는 것이나 이야기들 대부분이 게임에 관련된 것 들이기에 자신이 지금껏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온 것들을 말로 설명하자니 그저 막막했다.
"하아....아무튼 알았어. 내일부터? 으........"
석봉은 레비아가 딱히 싫은 건 아니었다. 사실 그 전부터 이마에 달려있는 부적같은 무언가가 신경 쓰여서 매번 물어보고는 싶었지만, 혹시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건 아닐까 싶어 물어**도 못했다.
그래도 자신을 그렇게 각별하게 대해준 여자 아이는 처음이었기에 썩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렸달까.
"아,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석봉은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다시 게임기로 눈을 돌렸다. 이미 Game over 라는 글자가 액정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는 내일부터 레비아에게 무얼 알려주는게 좋을지가 가장 큰 걱정이었기 때문에.
***
"안녕하세요, 한석봉 님. 오랫만이네요."
"으, 응... 잘 지냈어? 레비아..."
석봉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레비아를 바라보았다. 레비아는 평소 입던 대원복이 아닌 하늘색 원피스에 분홍색 모자, 하늘색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검은색 면바지에 남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자신은 칙칙하기 그지 없다는 생각에 묘하게 주눅이 들었다.
사실 석봉이를 만나러 간다는 이야기에 유리가 자신의 옷을 레비아에게 빌려준거란걸 석봉이 알 리가 없었다.
유리가 둘이서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오해한 것은 더더욱 말 할 것도 없었다.
"저기, 그런데 오늘은 어떤걸 배우나요?"
"응? 아, 저기... 그러니까... 일단은 보통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을 가볼거야. 그래서... 그런 곳에서는 다들...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런걸 배운다고 생각하면 될거야."
"아, 그렇군요. 잘 부탁드려요, 한석봉 님."
"으응, 나야 말로... 잘 부탁해."
새삼 이렇게 보니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 같았다. 아니, 확실히 레비아가 예쁘다는게 느껴졌다.
그건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이 한 번씩 그녀에게 꽂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석봉은 더더욱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애랑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강남 거리를 돌아다닌다니, 예전의 자신이라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늘 게임만 하고, 말 재주도 없는 자신을 다들 싫어거라 생각했다.
이런 자신이 누군가에게 인기 있을리 없다고 생각했고, 만약 정말로 누군가에게 정말로 싫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지금껏 사람들을 일부러 피해왔다.
그래서 더욱 더 게임만 했다. 게임 속에서는 언제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왕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음유시인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거나,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스스럼 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게임 폐인' 이라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차가운 세상보다는, 차라리 데이터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가 훨씬 더 따뜻했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같아... 기분이 묘한걸.'
"석봉 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응? 아, 미,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침착하자, 침착해. 석봉은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신에게는 슬비가 있는데, 이제와서 레비아에게 흔들리는건 정말 어불성설 이었다. 게다가 이 얜 차원종이잖아?
지금 슬비랑 세하, 유리, 미스틸, 그리고 제이 아저씨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존재란 말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죄송해요."
"으...응?그게... 무슨 말이야?"
"괜히 저 때문에 석봉 님께 불편을 드린 것 같아서요."
"아.... 아니야! 그런게.... 절대 아니야."
석봉은 그때 깨달았다. 이 얜 차원종이다. 아마 자신보다 더 차가운 시선과 험한 말과 행동을 겪어왔을 것 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정작 타인의 경멸을 잘 아는 자신이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어릴 땐 자신들을 놀려대는 반 아이들이 괴물처럼 보였다. 언젠가 무시무시하게 커져서 자신을 집어삼킬듯한 모습으로 보였는데, 이제는 자신이 그 괴물처럼 행동하다니!
"아냐, 레비아. 난... 절대 그런게 아냐. 사실... 난 말재주도 없고... 무엇보다 여자애랑 이렇게 같이... 거리를 다녀본 적도 없어서...
그래서 긴장해서 그랬어. 정말이야."
레비아는 푹 숙인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모자 아래 드리워진 그늘 틈으로 살짝 붉어진 볼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저기, 그럼 석봉 님은.... 제가 평범한 여자아이로 보인다는 말씀이신가요?"
"응? 으....응. 세하에게 이야긴 들었어... 그치만 나한테는... 지금 넌 그냥 여자애야."
순간 석봉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뭘까? 굉장히 낯익은 이 느낌.
눈 앞에 있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분명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도저히 기억해낼 수 없었다. 대체 왜 일까?
'그냥...... 착각일까?'
***
그 이후로 석봉과 레비아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레비아는 '평범한 인간 사회'가 그저 신기했다.
평화롭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거리를 울리는 음악, 처음 먹어본 음식들은 여태껏 레비아가 겪어온 것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들이었다.
석봉이는 그런 레비아가 그저 어린 아이처럼 귀엽게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안타깝게 보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작은 일에도 기뻐하는걸까. 분명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
'그럼에도.... 지금까지 계속 버티면서 살아왔겠지?'
석봉은 그런 레비아가 새삼 대단하게 보였다. 아마 자신이라면 일찌감치 포기했을텐데.
생각해보면 앞으로도 무엇을 해야될지 아무런 계획도, 목표도 없었다.
게임기를 끄면 자신을 감싼 현실로 돌아올 때마다, 무엇도 할 수 없고 어디도 갈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참기 힘들었다. 게임을 좋아하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프로 게이머가 될 수는 있는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자신이 없어졌다.
"석봉 님, 다음엔 어딜 갈건가요?"
그렇게 말하며 한 손에는 콜라, 한 손에는 핫도그를 들고 눈을 빛내는 레비아를 보고 있자니 석봉은 그녀가 너무 귀엽기도 하고, 순수해 보여서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와버렸다.
천천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레비아가 다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오렌지빛 카펫을 깔고 산 너머로 우아하게 입장하는 태양을 바라보며, 석봉은 차라리 이대로 이 빛 속에 녹아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너무나도 따스한 날이었다.
***
"석봉 님, 저 왔어요."
"아, 어서 와, 레비아."
그 날은 석봉이가 알바를 하는 날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쉬는 날이었으나 점장의 갑작스런 부탁으로 출근을 해야했고, 필연적으로 레비아도 그가 일하는 편의점으로 와야 했다.
"저, 오늘은 어떻게 하실건가요?"
"응, 이럴 것 같아서... 미리 영화를 가져왔어."
사실 계속해서 거리만 걷는건 안 될 것 같아서 석봉은 자신이 쓰는 게임기 안에 따로 영화를 인코딩 하여 넣어놓은 상태였다. 그 마저도 어떤 것이 좋을지 몰라서 꽤나 고심했지만.
"영화요? 아, 들은 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재미를 위해서 보는 만들어진 영상물이죠?"
"응, 맞아. 일단은... 이걸 보여줄게."
그 동안 석봉은 천천히 매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어색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기는 했지만, 그 날 이후로 왠지 레비아를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워서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게 훨씬 마음 편했다.
그리고, 그때 느낀 그 낯익은 느낌을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할수가 없었다.
"저, 석봉 님. 이건 뭔가요?"
석봉은 레비아의 오른쪽으로 돌아가 게임기 액정을 쳐다보았다. 영화 속에선 두 남녀가 모래사장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 저건... 바다야. 굉장히 크고... 또 저렇게 물이 많아."
"정말 신기한 곳이네요. 나중에 가능하다면 한 번 꼭 가보고 싶어요."
"응, 나도... 바다를 본게 너무 오래 전이라......."
"그땐 저도.... 이 영화처럼 석봉 님이랑 함께......."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비아의 은발이 형광등 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석봉은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머리칼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은 머리 속 깊은 곳으로 묻어두었다.
괜히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고, 그런 짓을 했다가는 어떤 얼굴로 그녀를 봐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더욱 난감한건, 도대체 자신도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레비아가 예뻐서 그런건 아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슬비라는걸 분명히 아는데도, 분위기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자꾸만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물론 슬비에게 자신은 전혀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늘 스스로 자신의 눈 앞에 닥친 상황에 맞서는 슬비가 빛나 보였고, 초라한 자신이 그 옆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길 바라기만 했다.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처럼. 그저, 계속해서 바라기만 했었다.
"레비아는... 정말 사람이... 되고싶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냥.... 뭐랄까. 지금도 사람이랑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까지 노력하니까... 무슨 이유라도 있는거야?"
'......너는 날 기억해 줄 테니까.'
또다. 왠지모를 이 익숙한 느낌. 이번에는 좀 더 뚜렷한 형체를 띈 무언가가 닫힌 상자를 열려고 했다. 대체 왜지? 처음 만날때부터, 왠지 모를 이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언가 말해주고 싶다. 격려해주고 싶지만, 대체 뭘? 무엇을 위해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만들어 너에게 전해줘야 할까?
"그건......."
석봉은 순간 아차, 싶었다. 물론 레비아가 전혀 다른 것 때문에 그런다는걸 그로서는 알 리가 없었지만.
무거운 침묵이 턱 하고 밀려와 숨 쉬기가 곤란해졌다. 말재주가 없는 석봉으로서는 이럴 때 어떤 이야기를 해야할지 몰라 좌불안석이었다.
"석봉 님은, 미래의 꿈 같은게 있나요?"
"나, 나? 그, 글쎄...... 잘 모르겠어. 사실 세하랑, 유리랑, 슬비는 나보고 유니온의 관리요원이 되어보라고 하지만... 내가 그런걸 할 수 있을지... 난 잘 모르겠어."
"아니에요, 석봉 님이라면 분명 잘 하실 수 있을거에요."
"으, 응... 고마워, 레비아."
어색한 공기는 어느새 살며시 두 사람의 대화 속에 녹아들고, 따뜻한 추억이 살며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레비아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아침해가 뜨지 않아도 좋으니, 차라리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른다면, 부디 이대로 계속.
***
"**, 꼰대는 왜 이런 일을 시키는 거야?"
나타는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공항의 폐쇄구역 주변의 야간 순찰을 하라는 임무가 그로서는 마뜩치 않았다. 테러리스트의 잔당들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찌보면 중요한 임무였지만, 차라리 적과의 피튀기는 전투를 즐기는 그로서는 짜증이 나는게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나타 님. 그래도 굉장히 중요한 임무라고 트레이너 님이 말씀 하셨으니까요."
"뭐야? 너 지금 그 꼰대 편을 드는거야?"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 너만 한석봉한테 가서 공부나 시켜주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레비아는 습관적으로 죄송하다고 말 할 뻔 했지만, 그랬다간 그가 더 화를 낼것이 분명해서 그저 조용히 뒤에서 같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풀벌레들 조차 숨을 죽인 밤은 어둠 그 자체였다. 만약 이런 시시한 대화라도 없었다면 그대로 거대한 입 속으로 삼켜질 것 같았다.
물론 그런 레비아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타는 그저 계속 궁시렁 대면서 앞만 걸어갈 뿐이었다.
"너 말야, 이왕 만나고 올거면 내 이야기도 좀 해주고 올 때 과자도 좀 얻어오......."
바스락-
누군가 있다. 나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숨을 고르며, 우리를 향해 그 무시무시한 재앙을 쏟아내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마귀가.
나타와 레비아는 천천히 무기를 들어 전면전을 벌일 준비를 했다. 만약 잡힌다면 아주 철저하게 썰어버리겠어. 게다가 이런 어둠 속에서 감으로만 죽여야 한다니, 이건 이것 나름대로 짜릿한걸?
흥분과 긴장감으로 자세를 잡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텅 빈 공기만이 시커먼 어둠을 가득 채웠을 뿐이었다.
"쳇, 착각인가. **, 짜증나."
나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나타 님, 위험해요!"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타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갑자기 버려진 폐기물 상자 뒤편 허공에 붕 뜬 인영이 보였고,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레비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야, 대체 이게 무슨......?
정신을 차렸을 때 레비아의 등에 이상한 주사가 꽂혀있는게 보였다. 그 안에 들어있는 불길한 초록색 액체가 빠르게 레비아의 몸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빌어먹을, 빌어처먹을! 야! 정신 차려!"
나타는 황급히 레비아의 몸에 박힌 주사를 빼냈지만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레비아의 눈은 이미 반 쯤 풀린 상태였다.
"나, 나타님......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어서......."
"시끄러워! 왜 니가 사과하는거야!"
나타는 레비아를 안고 램스키퍼를 향해 **듯이 뛰었다. 예상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적의 기습에 이렇게 허무하게 넘어간 자신에게 분노가 솟아올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지금 당장 한 명만 걸린다면 사지를 **가 될 때까지 썰어버릴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나타는 계속해서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아파왔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래도 멈출수는 없었다. 아직 이 녀석에게, 마지막을 안겨줄 순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나타는 계속해서 달렸다.
***
"이건...... 솔직히 적이지만 놀랍군요. 이차원 분진을 액체화 했어요."
정도연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쯤 되면 칼바크 턱스, 그가 천재적 능력을 가진 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재능을 가지고 파괴를 일삼다니, 같은 과학자로서 한편으로는 정말 용서할 수 없었다.
"그건 중요한게 아니오. 이걸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 해주시오."
트레이너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의 주먹이 명백한 증거였다.
이미 유하나의 능력을 써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인간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치유 능력을 보이는 그녀의 능력도 차원종인 레비아 에게는 어째서인지 아무런 효능을 보이지 못 했다.
고열과 두통, 무기력증, 그리고.... 서서히 체온이 내려가고 있는 레비아에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명령을 한게 잘못이었을까? 왜 하필 폐쇄구역으로 보냈을까?
트레이너는 자신을 끊임없이 책망했지만 그것이 무의미 하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해 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뭐? 그럼 지금 이 녀석이 죽는걸 그냥 보고만 있으란 소리야?"
나타는 정도연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 멍청할 정도로 착해 빠진 녀석이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된다면, 그땐 정말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붕대 녀석을 묶어놓고 천천히 썰어버려도 시원찮았다.
정도연은 그저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 누구 하나 섣불리 말 하는 이가 없었다.
"저...... 트레이너 님."
"레비아, 말을 아껴라."
"아니에요. 저....쿨럭, 쿨럭.... 하아, 마지막으로..... 흐윽, 부탁이.... 있어요."
"그게 뭐지?"
"그건......."
***
"레비아, 괜찮아?"
"네...... 하아, 괜찮아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레비아는 겨우 힘겹게 대답을 이어갔다.
바로 다음 날, 석봉은 급한 사정이 있다고 핑계를 대 편의점 근무를 뺐다.
반복적으로 덜컹거리는 기차의 옆자리엔 레비아가 담요를 덮고 눈을 감은 채 숨을 내쉬고 있었다.
석봉이가 해줄 수 있는건, 그저 레비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물론 평소의 그라면 먼저 손을 잡는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먼저 말을 꺼낸 레비아의 부탁을 차마 거절 할 수 없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불과 얼마 전까지, 모든게 평화롭고 조용했다. 같이 거리를 걷고, 영화를 보며 이야기를 하고, 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책상에 앉아 책에 열중한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밖에 나가 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심호흡을 하기도 했다.
모든것이 꿈 같았다. 만약 그녀가 슬비였다면,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일어나곤 했지만 레비아에게 실례라며 스스로를 나무라고 다그친게 불과 엊그제 같았는데.
'왜? 대체 왜 넌 이렇게 고통스러워 해야하니?'
안타까웠다. 그녀가 처음부터 사람이었다면, 이런 저주받은 운명의 속박에서 벗어났었다면, 그랬다면 아마 우리는 정말 친한 친구 사이가 됐을텐데.
자꾸만 일어나는 기시감을 떨쳐내기 위해 석봉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기차에서 내린 석봉은 레비아를 업고 모래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그락, 사그락 밟히는 모래의 감촉이 여느 때라면 분명 즐거워야 할진데, 지금은 슬픔의 늪으로 서서히 빠지는 느낌이었다. 왠지 이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불길한 느낌이 발걸음을 다시 돌리려고 했지만, 그래도 레비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레비아, 다 왔어."
"네...... 쿨럭, 쿨럭, 하아....... 감사합니다, 석봉 님......."
석봉은 레비아를 조심스럽게 모래사장에 앉혔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궈진 레비아의 머리가 그의 어깨에 닿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비아, 보여? 지금 저게 바로 바다야. 그리고...... 바닥에 깔린 이것들이... 바로 모래사장이야. 그리고..... 저기 날고있는 새들이 갈매기야."
"아.... 네, 보여요........"
석봉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껏 참았던 그것들이 자꾸만 터져나올 것 같았다.
나무에 걸린 바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서는, 겨울밤의 별처럼 늘 외롭게 지내던 아이가, 이제는 마지막 인사를 건낼 것 같아서.
어디선가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제발, 바람아, 부탁이야. 오늘만큼은 멈춰주렴. 파도야, 잠시만 노래를 그만해주렴.
너의 몸짓이 이 아이를 데려갈지도 몰라. 너의 노래가 이 아이를 잠에 빠지게 할지도 몰라.
석봉은 신에게 기도라도 하고 싶었다. 정말 당신이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
착한 사람을 곁에 두려는 그 욕심은 조금만 접어두고, 제발 한 번만 우리를 못 본 척 해줘요.
"석봉 님...... 고마워요. 쿨럭! 전...... 지금 너무 행복해요."
"레비아.... 부탁이야. 제발.... 그런 말 하지 말아줘."
석봉은 레비아의 손을 힘 주어 잡았다. 땀이 밴, 아직은 미열로 가득찬 그 손에 다시 생기가 돌아온다면, 그렇다면 정말 좋을텐데. 우리가 아직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남아있을진데.
어째서 벌써 떠나려고 하는거야. 너의 빈 자리를,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는데.
"레비아, 부탁이야. 좋아질거야... 다시 예전처럼... 거리를 구경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 하지 말......"
석봉이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자신의 입술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과, 가까이 맞닿은 레비아의 감은 눈, 그리고 가늘게 흔들리는 여린 숨 소리.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석봉 님..... 쿨럭, 쿨럭! 그치만.... 쿨럭! 하아.... 석봉 님과 알게 되어서.... 행복했어요."
"레...... 비아?"
털썩,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레비아의 얼굴이 석봉의 가슴을 향해 무너지듯 쓰러졌다.
석봉은 레비아의 작은 어깨를 감싸안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싸늘하게 볼을 스치던 바람도, 무한히 부서지던 파도 소리도.
석봉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어깨가 천천히 흔들리고 가슴이 떨려왔다.
눈 앞이 너무나 흐려져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어 그대로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빗물이 세차게 레비아의 머리칼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 비는 조용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
10년 뒤.
석봉은 유니온 본부 옥상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고, 여전히 이곳 저곳에서 클로저들은 차원종들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너무하잖아, 싶을 정도로 그렇게 세상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 여기 있었구나."
"오세린 선배......."
소리가 난 곳에는 세린 선배가 있었다. 얼마 전 임무에서 큰 공을 세워 그 능력을 인정받고 본격적으로 텔레패스 클로저들을 육성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제가 여기 있는건.... 어떻게 알았어요?"
"응? 아, 세하가 알려줬어. 분명 여기 오면 네가 있을 거라고 했거든."
"아아,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고 석봉은 다시 무심하게 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서진 오후의 햇살 조각들이 거리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의 무리속에, 나와 그 애가 있었던 때가 있었지.'
"저, 저기... 오늘 다들 퇴근하고 간단하게 모일 예정인데, 올래?"
"죄송해요, 선배. 전 오늘 일이 있어서요."
"응? 아아, 그래? 괜찮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헛걸음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냐, 아냐. 정말 괜찮아."
석봉은 품 안에서 무전용 PDA를 꺼냈다. 그가 관리하고 있는 요원들에게 모두들 수고했다는 메세지를 건낸 뒤 옥상 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늘은 꼭 가야만 한다. 1년에 단 한 번 뿐인 날이니까. 요원들에겐 미안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너무 늦어버리니까.
세린을 지나쳐 유니온 본부를 나선 석봉은 근처 꽃 집에서 노랑붓꽃 한 송이를 샀다.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탄 뒤 그가 향한 곳은 장렬하게 쓰러져간 클로저들이 묻힌 국립 공동묘지였다.
10년 전, 김유정 부국장과 트레이너의 노력으로 칼바크 턱스를 저지함과 동시에 늑대개 팀의 누명이 벗겨진 후 필사적인 요청으로 인해 레비아는 이 곳에 잠들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차원종인 그녀가 클로저들의 묘지에 묻히는 것은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라며 반대하는 강경파들도 많았지만 김유정 부국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덕에 조금 불협화음은 있었지만 편안하게 안치될 수 있었다.
"나 왔어, 레비아."
석봉은 그녀의 묘비 앞에 섰다. 묘비명도, 그 흔한 묘비 문구도 없는 쓸쓸함만이 가득한 무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널 찾아 돌아올 곳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노랑붓꽃을 조용히 내려놓고 묘비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초여름의 햇빛을 한껏 머금은 묘비에서는 아직 미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너는 그 곳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까?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돼. 넌 나에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저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여자애였어. 너에게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는데. 그땐 왜 그 말을 하지 못 했을까.
석봉은 양 팔을 벌려 묘비를 끌어안고 볼을 갖다댔다. 나의 말이, 마음이, 심장 소리가 너에게도 닿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텐데.
"생일 축하해, 레비아."
석봉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바람에 실려오는 레비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fin.
***
게임을 하면서 문득 명색이 본케인 레비아에 관련된 이야기도 뭔가 써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시즌 1에서도, 그리고 공항에 와서도 계속 인간과 닮아가려는 레비아를 보면서 레비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라면 역시 인간으로서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특히나 큰 호감을 보인 석봉이라면 최후가 다가와도 행복하게 눈을 감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몹쓸 욕망인가... ;;)
아무튼 그래서인지 예전에 쓴 것과는 달리 마냥 달달한 내용으로는 쓸 수가 없었네요 ㅠ.ㅠ
마지막 엔딩은 사실 고등학교 때 제가 쓴 글에서 따왔습니다.그때는 대사가 좀 다르긴 했지만...무튼 지금 생각해보면
이불에 공중 오메가급 발차기를 날릴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었는데 -_-;;;;
엔딩만큼은 마음에 들어서 다른 곳에도 우려먹은 적이 몇 번 있네요 =_=;;;;;
마지막에 국화가 아닌 노랑붓꽃이 나오는 이유는 레비아의 생일 (이라지만 정확히는 알에서 부화한) 6월 6일의 탄생화가 노랑붓꽃 이더군요. 국화는 뭔가 식상한 감이 있어서 일부러 탄생화로 수정을 했습니다
끝으로 이런 부족한 글을 귀한 시간에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D
다음번에는 더 재미있는 내용을 구상해서 돌아오도록 할게요!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