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독백] 암광

루이벨라 2017-01-22 10

※ '귀여운' 업화님의 썰을 제공으로 보내드립니다.
※ 암광에 오염된 세하가 제정신을 유지 못할 때 큐브세하의 환각을 보는 썰입니다.
※ 이번 건 세하 독백 버전, 세하유리(세유) 버전도 있습니다.(세유 버전은 유리가 조금 더 많이 출연할 뿐이지만요...)





 힘을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남은 쑥대밭이 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장소가 위험에 처해진다는 사실에 난 망설임 없이 힘을 받아들였다. 뒤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난 일부러 안 들리는 척 무시했다. 뒤를 돌아봐서 동료들의 얼굴을 보면, 내 이 결심이 흔들릴 거 같았기 때문에.

 -자, 이세하 군. 새로운 '군단장' 이 된 소감은?
 -꺄하, 역시 내가 점찍은 남자!
 -...

 애쉬와 더스트의 질문에 잠시 곱씹었다. 기분? 그런 건 아무런 느낌 없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현실감이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내가...차원종이 되었다? 애쉬와 더스트가 말하는 군단장이 되었다? 그 말이, 이제는 내가 <검은양> 의 일원이었던 이세하, 그 이세하로 되돌아갈 수 없다, 라고 못을 박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저 위에 군림하고 있는 '용' 을 쓰러뜨리기만 한다면, 그런 건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지금까지 '혼자' 였으니까.

 -저것 봐! 데미플레인이 무너지고 있어!
 -이세하!
 -세하 형!

 데미플레인이 무너질 때 들었던 그 소리는...환청이었을까. 그래, 데미플레인이 무너지고 있는 건 거기서도 보일게 분명했다. 자그맣게,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겠지...? 잘 지내, 모두들...



* * *



 "..."

 밝은 햇살에 눈을 떴다. 밝은 햇살...? 분명 내부차원에서는 햇빛이 들 일이 없을 텐데, 어째서 햇빛이 눈에 들어오는 걸까.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누워있는 이곳은...내부차원이 아니었다.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곳, 푸른 하늘이 있는 이 곳, 신서울이었다. 신서울의 어느 버려진 폐건물 안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갑자기 들어버린 제정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찬찬히 곱씹었다. 기억은 깨져버린 유리 조각처럼 잘잘하고, 잘 모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날카로웠다. 자칫 모으다가는 내 손에 상처가 날 수 있을 정도로.

 -쿡...

 ...어디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이 건물에는 나밖에 없던 거 같았는데 말이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여기라고, 이세하.

 또 다시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 계속 들었던 목소리였다. 그야 이 목소리는...

 '내' 목소리였다.

 남을 깔보는 듯한 내 목소리를 가진 자는...내 기억에는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아니...그 이전에 '실체' 를 하기는 하는 존재일까.

 -안녕, 이세하.
 "...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의 모습이 보이자, 난 저절로 눈살이 찌푸러질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나와 똑같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똑같은 건 겉모습뿐이야.
 -...나는, 너와는 달라. 너처럼...어른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거든.
 -나는...이세하야.



 안 좋았던 그 기억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세하, 또 하나의 가능성을 가진 이세하, 라고 했던가. 나와는 달리 소름끼치는 붉은색의 눈을 가진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오랜만이지?
 "..."
 -꽤나 무정하군. 오랜만인데 반갑게 인사 정도는 해줘야...
 "왜 또 여기 온거야?"

 나의 외침에, 녀석은 한순간 멈칫거렸다. 그것도 잠시, 녀석은 기분 나쁜 목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마치, 내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이제 와서 강한 척, 하는 거...너무 가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지금 네 꼴을 봐. 나와 같잖아...?

 같다. 그 말에 몸서리가 처졌다. 같다...? 도대체 내 어디가 너와 같다는 거지? 라는 반박을 할 수도 없는 지금의...내 상황...

 난 지금 현재 차원종의 힘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로 인한 영향인지 머리는 백발로 탈색되었고, 눈은 저 녀석만큼 소름끼치는 보라색으로 변한 상태였다. 아무 말 없는 내가, 자신의 말을 수긍했다고 여겼는지 녀석은 계속 말을 이었다.

 -말했잖아? 진작에 날 받아들였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
 -괴롭잖아? 괴로울 거야. 하긴...팀원들을 그 지경으로 만들려고 했으니...괴롭겠지.
 "무슨..."

 소리지? 난 데미플레인이 붕괴된 날 이후로, <검은양> 팀원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난 분명 내부차원으로 갔던 걸로 기억...

 ...그 기억이 맞는 걸까? 정말로?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녀석은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뭐, 실제로 거기까지 간 건 아니야. 차원종의 힘은 네 몸과 융합되려고 하고 있고, 넌 그걸 계속 거부하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지금 네 눈에 보이는 나도 일종의 환각이랄까?
 "..."
 -정말, 웃기지...? 미쳐가는 도중에도 보이는 게 결국 '나' 라니...역시 넌 차원종이 되고 싶...
 "**!"

 옆에 있던 건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모습은 사라졌지만, 날 비웃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귀에 맴돌았다.

 -기억해 둬, 이세하. 이제 너와 난, 별개가 아니야. 너는 나, 나는 너. 같은 힘을 받아들인 동지에게 너무 한 거 아니야?
 "내 머릿속에서 나가!"

 나가, 나가, 나가! 나가라고! 제발!!!

 웃음소리는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도대체...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도대체...



* * *



 그 뒤로도 녀석은 가끔씩 내 앞에 모습을 보이곤 했다. 실컷 내 처지를 비웃고,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난 내가 지금 엄청 위험한 상황에 처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난 지금 내 몸에 있는 제2위상력에 의해 정신이 오염되고 있는 상태였다. 가끔씩 끊어졌다 이어지는 내 기억을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 으로 계속 남고 싶어 하는 나의 '욕심' 은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몸의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육체적인 고통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날 더 괴롭히는 건 몸 속에서 두 힘이 부딪혀서 아플 때마다 나타나 이런 날 철저하게 비웃는 '녀석' 의 존재였다.

 심한 두통이 있을 때마다 난 보이지도 않는 그 '녀석' 과의 싸움을 계속 진행 중이었다.

 "...윽..."
 -받아들여...
 "입 다물어...!"
 -멍청하긴.
 "시끄러--!!"
 -이제 그만 편해지라고?

 나처럼 받아들여, 처음부터 받아들였으면 좋았잖아? 영웅의 아들 이세하, 이것도 지겹지 않아? 그까짓 것, 깨부숴버려. 그딴 게 뭐가 소중하다고? 차원종의 군단장 이세하, 이것도 꽤 좋지 않겠어?

 다물어, 다물어, 다물라고--!!

 -...멍청한 녀석.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아마도 그 말을 꺼낼 때, 깔보는 눈빛으로 날 내려다봤겠지. 너무 아파서, 몸을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상태였으니 녀석의 모습은 **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목소리만은 너무도 선명하게 잘 들렸다.

 받아들여, 받아들여, 받아들여--!!

 그리고 난 그 제안을 '끝까지' 거절을 한다.

 -처음부터 받아들였다면,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텐데.

 녀석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내 나름대로의 반항이었다. 오늘도 한차례 휩쓸고 갔다. 예전에는 하루에 한번 꼴로 발작이 일어났는데, 요즘에는 그 차례가 천천히 늘어나고 있었다. 기본으로는 하루에 두 번, 어떨 때는 세 번...많을 때는 네 번도 일어난다. 괴롭지 않다면, 그건 또 거짓말이다. 너무 괴로워서 머리를 벽에다가 내리찍은 적도 많았다. 그렇게라도 안하면, 녀석의 달콤한 제안에 나약해지는 내가, 넘어갈 거 같아서.

 정말로, 돌아올 수 없을 거 같아서.

 지쳐서, 바닥에 냅다 누웠다. 반(半)차원종이 된 몸은, 굉장해서 몇날며칠을 이런 체력 소모를 했는데도 끄덕도 없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언제까지...이래야 할까. 그 다음 생각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녀석이, 또 나타나 비웃을 거 같아서.

 그렇게 누워있는데 어디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무도 없는 이 폐건물에 사람이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또 그놈의 환청인가...적어도 말은 걸지 않았으니 무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점점 크게 들리는 누군가의 발소리. 한 명이 아니었다. 두 명? 적어도 네다섯은 되는 발자국 소리였다.

 ...누구일까, 이런 폐건물에 찾아오고.

 그리고 그 뒤로 들린 목소리에 몸이 전율했다. 그 목소리들은 다시는 못 들을 줄 알았던, 그리운 목소리였기 때문에.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분명히 세하 목소리였는데..."
 "..."

 도망갈까.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신이 있어, 기적이 일어나서 다시 만나게 된다 해도, 이런 모습이 아닌, '인간 이세하' 의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다. 서둘러 몸을 일으키는데 바로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세하!"
 "..."

 뒤 돌아보면 마음이 약해질 거 같아서, 일부러 돌아볼 수 없었던 그때와는 달리 천천히 돌아보았다. 반가운 얼굴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이슬비, 서유리, 제이 아저씨, 미스틸, 유정이 누나 등등...

 "아아..."

 시야가 갑자기 뿌옇게 변했다. 이상하다. 왜 갑자기 눈물은 나오는 걸까, 바보 같이.





[작가의 말]
세유 버전은 1일 이내로 올라갑니다.(아마도...?)
2024-10-24 23:13:29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