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
참나리 2017-01-22 1
“이세하, 너 정말 똑바로 안 할래?”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들썩거렸다. 매서운 외침과 함께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려친 소녀는, 곧바로 자신의 양 손을 척하니 올리고는 한층 눈을 날카롭게 치켜세웠다.
여전히 눈은 자신보다 키가 큰, 지금은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는 채였다.
“정말로 위험할 뻔 했잖아! 그러니까 임무 중에는 게임기를 맡겨놓고 오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겠어!!”
“알았어, 알았다고….”
몇 데시벨이나 갈지 도전하듯, 소녀의 외침이 여전한 고음으로 소년의 귀에 파고들었다.
신생 클로저 팀인 검은양의 리더인 이슬비와, 그 팀에 속한 요원인 이세하.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저을 정도로 상극인 두 명이기에, 이러한 말다툼은 사실상 팀의 일과와도 같았으나 오늘은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몇 시간 전, 언제나처럼 임무에 투입된 검은양 팀은 어김없이 수많은 차원종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수는 압도적이었으나, 이미 여러 전투로 잔뼈가 굵은 검은양 팀은 물러서지 않고 그들과 맞섰고 수월한 싸움을 펼쳐갔다.
그러나 싸움이 거의 끝나갈 무렵, 차원종들이 초조함에 대놓고 날린 공격이 펼쳐졌고 범위는 넓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에 팀원들은 그에 대해 각자의 대처를 해 나갔다.
딱 한 명만 빼고.
어째선지 몸을 기울인 세하가 그대로 몸을 날려 표적이 되었고, 차원종들의 공격은 사정 따윈 봐 주지 않고 그런 세하를 덮쳤다.
그에 재빨리 다른 팀원들이 세하를 도왔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잘못 되었어도 이렇게 슬비가 그를 꾸짖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분명 별다른 피해 없이 넘어간 일에 안도해도 될 상황. 그럼에도 공은 공, 사는 사라는 딱딱한 마인드가 박힌 리더이기에, 그에 대해 아낌없는 질책을 퍼붓고 있는 그녀였다.
힘없이, 그러나 거슬린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흑발의 소년은, 한 손을 휘휘 저으면서도 시선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성의껏 잔소리를 해주고 있음에도 들은 체 만 체 하는 세하가 거슬린 소녀가, 잠깐 화제를 바꾸었다. 그에 대답도 않은 채 소년의 눈은 아래를 향해 있었고, 힘없이 있는 그의 손엔 작은 배지가 들려 있었다.
“이거, 전에 말한 그 마르시아인가 뭔가 하는 그 캐릭터 배지야?”
“야?!”
외마디 소리와 함께 세하의 눈이 소리를 질러대던 슬비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잔소리를 시작한 이후로 처음 보인 반응이었다.
세하의 손에서 염동력으로 캐릭터 배지를 뺏어낸 슬비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잡은 채 세하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흔들어댔다.
“고작 이런 거 때문에 죽을지도 몰랐다고, 알고 있는 거야?!”
다시금 슬비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이번엔, 세하 또한 지지 않고 그녀를 마주 보고는 무겁게 늘어져 있던 입을 열었다.
방금 전의 힘없는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외침이었다.
“고작 이런 거라니, 말 다 했어?! 마르시아는…아니, 그게 아니라…”
갑작스럽게 돌변한 세하에게 흠칫한 슬비였으나, 채 10초도 되지 않아 말을 늘어뜨리는 세하의 모습은 여전히 가관이었다.
말없이 슬비의 손을 바라보고는 시선을 피하는 세하. 그런 소년을 얘가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보고 있던 슬비는, 세하가 자신의 손에서 배지를 뺏어갈 때 그제야 그와 눈이 마주쳤다.
“…됐어, 다음부턴 조심할게. 먼저 간다.”
“이세하,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이는 세하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치는 슬비였지만, 들은 척도 않고 배지를 손에 꼭 쥔 세하는 언제나 한결같은 잔소리꾼을 그대로 둔 채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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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밤인 시간을 반영하듯, 램스키퍼의 안은 최소한의 조명만 남겨진 채 소등되어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한 쪽 구석에서 세하는 등을 벽에 기댄 채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었다. 마치 그 안에 녹아든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평소에도 그리 의욕 넘치는 모습은 없었지만,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유독 기운이 없어 보이는 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요란한 한숨이군요. 이걸 두고 인간들은 ‘땅이 꺼지겠다’라고 한다고 했던가요?”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한 세하였기에, 일순 동공이 확장된 세하가 재빨리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사람은커녕, 작은 물체가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쇼그…?”
“본의는 아니지만, 꽤나 소란스러워보여서 와 봤습니다.”
램스키퍼의 두뇌라 할 수 있는, 현재 벌처스의 첨단 로봇 ‘뻐꾸기’를 장악한 13세대 인공지능 쇼그였다.
세하의 반응을 무시하듯, 그렇게 말하며 거리낌 없이 다가서는 쇼그였지만 세하는 굳이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세하의 옆에서 그를 올려다보듯 뻐꾸기를 위로 향하는 쇼그의 모습은, 마치 애완동물이 주인을 올려다보는 것 같았다.
“어쩐지 근심이 있어 보이는군요. 물론 저는 인간들의 표정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긴 해.”
쇼그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세하. 그러자 쇼그가 더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슬쩍 몸을 뒤로 빼는 세하였지만, 이미 쇼그의 동체는 세하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와 있었다.
“그렇군요. 혹시 괜찮다면, 저에게라도 얘기를 해주실 수 있나요? 근심이나 걱정이란 것들은, 누군가에게 털어 놓으면 상당히 가라앉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쇼그는, 말로는 세하를 위하는 것 같았지만 말투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흥미가 있다는 오라를 팍팍 풍겨대고 있었다. 이 녀석에게 눈이 있었다면 분명 조명이 필요 없을 만큼 빛나고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하는 세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온 쇼그가 껄끄러웠지만, 그에 대해 커다란 부정을 내보이진 않았다. 내심 그의 말마따나, 누군가에게라도 말하고 싶긴 했으니까. 오히려 상대가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점이, 세하의 입을 열기 더 쉽게 만들었다.
“…그렇군요. 그럼, 화해는 안 하실 생각이신가요?”
세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약간의 침묵 뒤에 침착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록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성일 뿐이었지만, 어째선지 평소의 순수하리만치 가벼운 그 말투가 한층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에 대해 세하는 아무 대답을 못 하였다.
“본래 이런 일은, 빨리 매듭지을수록 좋다고 들었습니다. 시간을 끌수록, 일이 커지며 서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매듭인가…?”
세하에게 충고하는 듯한 쇼그였지만, 쇼그의 의도와는 다른 부분을 되뇌는 세하였다. 그의 말뜻을 이해 못한 쇼그는 공중에 떠 있는 채로 뻐꾸기의 몸을 한 바퀴 돌렸고, 그런 의문의 표현을 무시한 채 세하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언제나처럼 끼고 있던 장갑은 찢어져서 그의 손을 벗어나 있었다. 그런 쇼그의 관심은, 세하의 장갑이나 손이 아닌 그의 손가락에 매어진 끈을 향해 있었다.
마치 반지처럼 묶인, 낡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작은 매듭이었다.
이내 고개를 들어서는, 주변을 이곳저곳 둘러보는 세하였고 쇼그는 그의 움직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뭔가 찾으시는 것이 있나요?”
“…아니, 그 반대. 누가 있나 싶어서.”
“지금은 밤중이라 그런지, 다들 자기 방으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저의 시야에 이세하 요원님 외에 포착되는 생명체는 없습니다.”
“…그래?”
확신하는 듯한 쇼그의 말에, 다시금 힘을 빼고 벽에 기대는 세하. 이내 자신의 손과 쇼그를 번갈아 보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고개를 들어 쇼그를 마주보는 세하의 눈은, 방금과는 달리 무언가 결정한 듯 생기를 띠고 있었다.
“…잠시 할 얘기가 있는데, 아무한테도 말 안 할 수 있지?”
“무엇인가요?”
“예전에 있었던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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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언제인진 기억나지 않지만, 꽤나 오래 전의 어느 날.
바깥에선 차원종이니 테러니 하며 한껏 소란스러운 데 반해, 신서울의 한복판은 여러 장비와 병력으로 보호되고 있는 만큼 남의 일이나 되는 듯 한가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역시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어떤 문제라도 일어나게 되어 있는 듯, 한 소년에게 만큼은 그리 좋지 않은 매일이 되었다.
“우으…”
우는 소리를 내며 소년은 그저 길을 걷고 있었다. 유치원생 이하로 보이는 소년의 머리는 흔한 검은색이었지만, 어째선지 군데군데에 금빛이 도는 의아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을 본 사람들은 그와 관계되기 싫었는지 슬쩍 자리를 피해 주었고, 덕분인지 소년은 막힘없이 걸어갔다. 자신이 제대로 길을 가는지조차 모르는 채 연신 눈물을 닦아내는 소년이었지만, 그보다도 더 눈에 띄는 것은 소년의 행색이었다.
여기저기 흙과 쓰레기 등의 물체로 더러워진 모습은, 주변의 사람들이 보기엔 거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했었다. 그렇지만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을 보아, 험한 일엔 휘말리지 않아 보였다.
얼마를 걸어 다녔을까, 그제야 울음을 그친 소년이 고개를 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그 눈이 이채를 띠고, 소년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을 깨달았다.
길을 잃었다는 것을 파악하는 데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분히 생각해보는 것도 잊은 채 다시금 그 얼굴이 찌푸려지더니, 그 똥그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우….”
“얘, 너 뭐하니?”
막 울음을 터뜨리려는 소년이었지만, 갑작스런 목소리에 퍼뜩 몸을 움츠리며 목소리의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소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소년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그러나 소년과 크게 달라 보이는 점은, 소녀의 머리색이 흔치 않은 분홍색이었다는 점이었다.
눈 또한 검정인 소년과 달리, 파란색이었다. 마치 바다를 담은 듯한 푸른 눈이 소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여러 의미로 놀란 소년이 아무 말 않자, 소녀가 다시금 재촉하듯 물었다.
“왜 울고 있어? 무슨 일이야?”
“그게…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어서…”
“길을 잃었단 거야?”
소녀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 대답하듯 똑같이 고개를 끄덕인 소녀가, 이내 소년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 의미를 알지 못해 소녀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는 소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소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내 문답무용으로, 소녀가 소년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끌었다.
“아….”
“꼭 잡아, 또 미아가 되기 싫으면.”
“…응….”
소녀의 말에, 얼굴을 붉힌 소년이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앞선 소녀가 뭐라 말하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소년이 생각한 것은 소녀의 작은 손이 보기와 달리 한없이 포근하고, 따뜻하다는 것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아이가 도착한 곳은 작은 경찰서였고, 그곳에 당당히 들어선 소녀가 소년을 대변하듯 입을 열었다.
이내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데리러 올 거라는 말을 들은 소녀가, 할 일은 다했다는 듯 경찰관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뒤도 안 보고 걸어 나갔다.
그러자 소년이 재빨리 뛰어가서, 경찰서 밖에서 소녀를 불러 세웠다.
“왜?”
“아, 저기…고마워.”
소녀와 눈을 마주치진 못한 채, 입만을 작게 움직여 말하는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을 빤히 보던 소녀가, 그제야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 옷이 왜 그래? 설마 무서운 사람이라도 만난 거니?”
“아, 아니….”
소녀의 말에 흠칫한 소년이,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고는 몸을 움츠린다. 그러나 소년이 무슨 반응을 보이든 소녀는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눈으로 소년을 뚫어지게 보았고, 그 강직하기 그지없는 눈에 압박당한 소년이 어째선지 자신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었다.
이내 침을 삼킨 소년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너도…위상능력자야?”
“응? 그 말은…설마 너도?”
소년의 말이 의외였는지, 그를 훑어보던 소녀가 그제야 납득한다. 확실히 소년 또한, 자신과 같이 평범한 모습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한 가지 사실을 예상할 수 있었다.
“설마…따돌림 받은 거야?”
‘너도’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응, 난 가만히 있는데 자꾸 애들이 나보고 괴물이라면서…막 흙뭉치를 던지고…때려도 별로 아프지는 않지만…난 가만히 있었는데, 엄마가 말한 대로…놀려도 꾹 참았었는데…”
말을 이어가는 소년의 목소리가 다시금 가라앉더니,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소년의 이야기를 듣던 소녀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얼굴은 차츰 굳어져갔고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는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을 꾹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소년의 감정이 최고조가 되려는 순간, 살짝 숨을 내쉰 소녀가 크게 몸을 움직이더니 소년에게로 얼굴을 바싹 갖다 대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울지 마, 남자잖아?”
그 짧은 말에, 그리고 그 눈빛에 소년의 울음이 멈추었다. 자신이 어째서 그랬는지 의아했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있었다.
그 때의 소년은 문학에 대해 잘 몰랐지만, 나중이라면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바다같이 맑고, 커다라면서도 곧은 눈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이내 무언가 떨치듯 소년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흠칫하며 물러선 소녀였고, 약간 상기된 얼굴의 소년은 여전히 물기가 남아 있는 눈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 울음을 터뜨리려고 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어조였다.
“나도…너처럼 될 수 있을까?”
소년의 말에 턱에 손을 짚은 소녀가,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글쎄…적어도 지금처럼 울기만 해서는 힘들지 않을까?”
“에…!”
분위기만큼이나 매몰찬 소녀의 대답에 한껏 충격을 받은 소년이 다시금 울상을 짓는다. 그런 소년을 못 미덥다는 듯 보던 소녀가, 이내 조그만 손을 들어서는 자신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그렇게 말한 소녀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그 조그만 손에 어울리는 가는 머리끈이었다. 장식조차 제대로 없는 소박한 끈을 보던 소년이, 소녀의 말에 따라 그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소녀는 말없이 끈을 내밀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손가락엔 반지처럼 머리끈이 매어졌다. 서투르지만 잘 고정된 모습이었다.
“…이건 내가 하던 머리끈이야. 소중한 거지만…지금은 쓸 일이 없게 됐거든.”
그렇게 말하는 소녀의 손이 향한 곳엔 소녀의 머리에 묶인 머리끈과, 옆으로 삐죽 나온 작고 귀여운 꽁지머리가 보였다.
“존경하는 사람이 주신 게 있으니까.”
소녀의 눈은 전에 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한껏 무게 잡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랑스러운 듯 자신의 머리를 보여주며, 이러쿵저러쿵 한껏 호들갑을 떠는 소녀였고 그 말엔 ‘아카데미’니 ‘클로저’니 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소년의 머릿속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그 모습이 편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마친 소녀가 그제야 화제를 바꾸었다.
“…물론 아주 주겠단 건 아냐, 나에겐 소중한 거니까. 그러니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그 머리끈을 돌려줘. 대신 그 때는, 좀 더 남자다운 모습이 되어 있는 거야. 알겠지?”
“…으, 응.”
다시금 긴장한 소년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소년을 보던 소녀의 눈이 감기며, 그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새겨졌다.
처음으로 보여 준 밝은 미소에 다시금 소년이 경직되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듯 소년의 가슴 깊이 답답한 느낌이 들었지만, 끝내 그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럼 약속.”
소녀의 작은 손이 내밀어졌고, 소년 또한 붉어진 얼굴을 한껏 숙인 채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작은 매듭이 묶인 소년의 손은, 어째서인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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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군요.”
세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익숙치 않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어느새 밤은 깊어져 있었고, 어쩐지 살짝 들뜬 듯한 쇼그의 음성만이 램스키퍼의 어둠 속에 퍼져가고 있었다.
세하는 어느 순간부터 쑥스러워져 고개를 한껏 숙이고 있었지만, 그런 그를 놔주지 않겠다는 듯 쇼그가 차근차근 정리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이세하 요원님이 위험에 처한 것은 그 장갑 안에 있던 매듭 때문이고, 그에 대해 솔직히 말하지 못해 이런 오해가 생겼다는 것이군요.”
“…그렇지.”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런 일이 있다면 전부 설명하면 쉽게 해결될 일을, 굳이 이렇게 질질 끌면서 오해를 살 필요가 있었나요?”
쇼그의 말에, 방금 전 일을 떠올린 세하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으로는 무언가를 우물우물 거리며, 눈은 어둠 속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듯이.
“그건 그래. 하지만…내가 이렇게 말해도 되나 싶지만,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 같은 인간에겐 합리적과는 거리가 먼 이유가 많다고 생각되거든. 그래서…”
“그건,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감정’이라는 거겠죠?”
세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쇼그의 말이 파고들었다. 그 말이 틀렸다곤 생각지 않았기에, 그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하. 그러자 그에 반응하듯, 쇼그의 말이 이어졌다.
질문이라는 취지에 걸맞지 않게 확신이라는 것을 한껏 품은, 세하의 머릿속에 파고드는 물음이었다.
“그 말은, 이세하 요원님은, 이슬비 요원님이 신경 쓰인다…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좋아한다’는 건가요?”
세하의 몸이 경직되었다. 동공이 확장된 채,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 커다란 침묵만이 그의 몸을 감돌고 있었다. 쇼그는 그런 세하를 가만히 향하고 있을 뿐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정이 된 듯 한숨을 내쉰 세하가 체념한 듯 작게 말하였다.
“…하아, 그래. 그땐 몰랐지만, 생각해보면 나는…그 녀석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
“그럼 이세하 요원님은, 이슬비 요원님과 교제를 하고 싶다는 건가요?”
“…그…”
세하의 얼굴이 전에 없이 붉게 상기되었다. 로봇이라 그런지, 질문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그에 대답한다.
이 배려 따윈 존재치 않는 단도직입적인 물음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오기를 부리는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그렇, 겠지….”
더 이상 얼굴을 들기 힘들어져,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리 깔았다.
상대가 쇼그라 망정이지, 다른 누군가에게 이 모습을 보였다간 한동안 그의 침대에 이불이란 이불은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분홍빛 분위기 속에서, 쇼그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군요. 그 말은…이세하 요원님은 이슬비 요원님과 짝짓기를 하고 싶다는 건가요?”
“아니, 왜 얘기가 그쪽으로 가는 거야?!”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세하가 세차게 고개를 들며 소리친다.
쇼그의 말에 세하의 얼굴이 마치 불난 데 기름을 부은 듯 다른 의미로 한껏 달아올랐고 그런 세하의 반응이 달갑지 않았는지, 이어지는 쇼그의 말엔 기계답지 않게 ‘아쉬움’이란 감정이 한껏 묻어나왔다.
“…아쉽게 되었군요. 얼마 전에 헤지호그들이 짝짓기라는 행위를 했던 것처럼 인간들 또한 그런 행위를 한다고 들어서, 인간의 짝짓기에도 흥미가 생겼는데 말이죠. 그것을 관찰할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는데.”
“부탁이니까 그런 건 딴 데 가서 관찰해줘….”
홍당무마냥 달아오른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는, 다른 손은 일 없다는 듯이 내젓는 세하.
만약 세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누군가가…구체적으로는 오세린 같은 사람이 지금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면, 그는 당분간 자신의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게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당분간’이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이 램스키퍼에 없는 것에 감사하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관찰할 수 있는 다른 곳이 있다는 건가요?”
“나한테 묻지 마! 그것보다 그 얘기에서 멀어질 수는 없는 거야?!”
집요한 쇼그의 물음에 그렇게 소리치는 세하였고, 그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다시금 쇼그의 음성이 차분해졌다. 세하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 지는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얄미울 만큼 고저 없고 계산적인 말투였다.
“여하튼 지금까지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세하 요원님은 이슬비 요원님과 함께 하고 싶다는 얘기이겠군요.”
“그렇긴 하지만…”
열이 가라앉은 세하가 그에 납득하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후는…본인과 직접 얘기하고 더 생각해 볼 문제겠죠. 마침 좋은 기회이니까 말이죠.”
“뭐? 그게…”
이어지는 쇼그의 말에 의아해진 세하였으나, 그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확실히 그 근처에 있었을 존재감은, 이제 세하의 눈앞에 확연히 나타나 있었다.
작고 아담한 모습을 한, 분홍머리의 소녀. 그 정체를 곧바로 알아챈 세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누가 로봇인지 알기 힘들 만큼 부자연스럽게 쇼그를 돌아보았다.
“아…아니 쇼그, 분명히 주변에 나 외에 생명체는 없다고…”
“분명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비 요원님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분명, ‘그 시점’의 상황을 말한 것뿐이니까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쇼그였고, 혼자만 차분한 그 말투에 왠지 모를 외로움과 배신감을 느낀 세하가 여전히 경직된 입을 움직여 말을 이었다.
“아니, 비밀로 해주는 건…”
“그에 대해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슬비 요원님의 얘기이니 본인이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고요.” “아니, 야…그런…”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당연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일순 세하의 머릿속에 이 인공지능을 파괴해야하냐 마냐에 대한 갈등이 이어졌고, 그런 그의 감각을 차단하듯 그제야 소녀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더니,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거구나.”
“…언제부터 있었어?”
슬비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세하가,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넌지시 물었다.
“내가 예전에 미아가 된 너를 경찰서로 끌고 갔다는 부분 정도.”
“…….”
다 들었구나, 하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톱니바퀴가 꼬인 듯한 머릿속을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세하가 무진장의 갈등을 겪고 있을 때, 그러거나 말거나 발걸음을 옮긴 슬비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고 그것을 알아챘을 때 어느새 슬비의 손은 세하의 손에 맞닿아 있었다.
그에 소스라치게 놀란 세하였으나, 슬비의 눈은 그와 대비되게 여전히 차분했다.
“이건 다시 받아 갈게.”
“아, 응….”
자연스럽게 세하의 손가락에 묶인 매듭이 풀렸고, 슬비의 머리끈은 다시금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이내 몸을 일으킨 슬비가 정갈한 움직임으로 뒤돌아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히 걸어가는 소녀를 세하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참, 이 말을 잊었네.”
갑작스레 세하를 뒤돌아보는 슬비. 언제나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무표정이었지만, 어째선지 세하는 어렴풋이 그녀의 눈이 평소와 달리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너, 꽤나 남자다워지긴 했더라. 다시 봤어, 이세하.”
그리고 멍하니 있던 상태 그대로 굳어지는 세하였다.
“그리고…”
다시금 입을 여는 슬비에 의해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슬비는 이번에는 그를 돌아** 않았다. 하지만 명백하게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는 목소리로, 소년을 다그치듯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고백을 할 거면 똑바로 마주 보고 해, 둔탱아.”
그 말과 함께, 대답 따위 필요 없다는 듯 슬비의 발이 움직였다.
세하가 말을 걸 여유조차 주지 않으려는지 소녀는 어울리지 않는 재빠른 발걸음으로 세하와 쇼그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녀의 반응이 주변에서 멀어질 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쇼그가 그제야 스피커에서 음성을 내보냈다.
“이세하 요원님, 괜찮으신가요?”
어느새 세하는, 다시금 처음처럼 무릎을 끌어안은 채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런 세하의 상황은 신경 쓰지 않는 듯, 형식적인 쇼그의 음성만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이세하 요원님을 속인 것 같은 이 상황에 대해서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저의 이런 판단이 도움이 된 것 같군요. 이것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건가요? 상당한 성취감이란 것이 느껴집니다. 더욱 이 이후의 상황에 흥미가 가는군요.”
여전히 세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가만히 보던 쇼그는, 그의 생체반응이 전과 달리 심각하리만치 치솟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체온, 심박수, 그리고…
“이세하 요원님?”
“…….”
걱정이 되었는지 소년을 부르는 쇼그였지만, 그에 대해 세하는 무언가 말을 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 입을 열면 꾹 눌러 담고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아, 그저 진정될 때까지 고개를 들 생각조차 않게 된 세하의 모습만이 쇼그의 카메라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어둠 속의 램스키퍼는 음산할 정도로 조용했으나, 기계인 쇼그는 물론 세하에게 또한 조금도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그 머릿속에서는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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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써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