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용서해주세요 - 19. 나의 사랑, 우리의 정의 -

Articulus 2017-01-20 3


국제공항부터의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국제공항 에피소드까지 클리어하지 않으신 분들 중 스포일러를 보기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이 내용은 기본적으로 클로저스의 기존 설정에 기반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매우 많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국제공항 이후의 스토리는 완전히 작가의 상상력에 근거하므로, 본작의 에피소드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엣지에서는 미디어 플레이어의 재생이 되지 않습니다. 번거로우시더라도 BGM을 들으면서 감상을 원하신다면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이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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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 

  "결전의 시간이다!"

  젊은 여성의 포효가 울리며, 거센 위상력이 주위로 흩뿌려진다.
  진분홍색의 빛을 띠고 있는 오오라가 하늘빛의 긴 머릿칼을 휘날리는 여성을 감싸자, 곧 여성이 사라졌다. 그녀의 행방을 쫓는 적들은 곳곳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녀를 찾지 못했다.
  무언가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세찬 바람이 불어오자 그들은 잠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이 눈을 뜨자 자신들의 한 가운데에 그들이 찾는 이가 있었다.

  "느려!"
 
  뭉툭한 대검의 넙적한 검신이 마치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듯 그녀의 바로 오른쪽에 있었던 두 명을 강타했고, 그것을 맞받아치기 위해 자신들의 위상병기로 수비자세를 취하던 이들은 그들에게 가해진 엄청난 힘을 어떻게 해**도 못한채 그대로 뒤로 날아가버린다.

  "크아악!"
  "아아아악!"

  두 명의 비명소리가 저멀리 멀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를 노리고 또 다른 이들이 공격을 해온다.
  창과 같은 기다란 무기로 무장한 두 명이 일제히 그녀에게 달려들었지만, 여성의 시선은 이미 자신을 향해 공격해들어오는 이들을 알아차리고 적들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 가까이까지 다가오자 하늘을 향해 검을 잡지 않은 한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하이드."
  "대령했습니다."

  쿵!
  매우 커다란 소리와 함께 지상을 흔드는 충격파가 하늘로 높게 솟구쳐올랐고, 흔들림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여성을 노리고 달려들던 두 명의 남자가 그대로 쓰러지며 충격파에 밀려 하늘로 붕 떠올랐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지만 여성은 우아하게 뛰어올랐고, 두 남자보다 더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 그들을 겨눈채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대검에 의해 만들어진 충격파는 또 다시 두 사람을 강타했고, 미처 손도 쓰지 못하고 그들은 딱딱한 아**트 도로 위에 처박혔다. 물리적인 힘이 가해진 지상충돌의 충격으로 그들은 정신을 잃어버린 것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은채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순식간에 네 명의 적을 리타이어시킨 여성의 실력을 보고, 다른 이들은 미처 공격을 이어갈 기미를 보이지 못했다. 무작정 쪽수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그녀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그들은 자기들의 눈 앞에 있는 이 여성이 어쩌면 자신들만큼이나 뛰어난 위상능력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레 겁을 먹고, 누구 하나 서로 공격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위상력 싸움으로 맞부딪히는 것은 매우 자신이 있는 그들이었지만, 눈 앞의 여성은 위상력도 위상력이지만 신체적인 능력이 크게 강화되어 있어서 그 힘을 감히 당해낼 수 없다.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과 같은 피라미가 아닌, 자신들보다 더 강하고 경험이 많은 이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쉽사리 나서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잠시 서로 거리만 벌린채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이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 어림잡아 처음 몰려왔을 때만큼이나 몰려든 것처럼 보인다.
  1대, 아니 2대 절대다수의 상황은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져만 간다. 이 여성과 남성 - 바이올렛과 하이드 - 을 원거리에서 지원해주던 티나도 어느 순간부터 엄호사격을 해주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녀 역시 자신에게 접근한 적들과 따로 교전 중인 모양이다.

  "아가씨, 이대로 적들과 계속 싸우시겠습니까?"
  "별 수 있나요, 지원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요."

  바이올렛의 말대로 아직 그들에게 지원은 오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늑대개 팀 전용 무전기에서는 트레이너의 집결지시가 들려왔지만, 아직 다른 대원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트레이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있는 플레인게이트는 꽤나 지하에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잠시 눈을 굴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의 수를 세고 있었다. 10명이 훨씬 넘는 수라서, 그 이상 세는 것은 무의미했다. 저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간 분명히 크게 당하고 말 것이다. 살짝 입술을 깨물며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짝짝짝.
  매우 성의없는 세 번의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들려온 곳은 정체불명의 위상능력자 집단의 뒤에서였다. 거기에는 유니온의 마크가 새겨진 트레일러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트레일러의 문이 어느새인가 열려있었고 그 사이에서 나타난 왠 사람이 아마 박수를 친 것으로 보인다. 어두워서 사람의 모습은 미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아마도 남자로 보이는 체형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트레일러의 철제계단을 타고 내려와 위상능력자들 사이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앞으로 나오자, 마침내 주위의 가로등의 불빛에 모습이 드러난다.

  옅은 갈색빛 머릿카락을 가지고 있는 안경 쓴 남성. 짙은 정장에 푸른색 넥타이를 메고 있는 이 남성은 무척이나 웃음이 잘 어울리는 얼굴로 보인다. 바이올렛은 이 남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이 사람은 이들과 관계가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재민, 관리요원. 당신이 왜?"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 아름다워졌군요. 거기에다가 실력까지 향상되다니, 정말 재벌 아가씨답게 엘리트시로군요."
  "난 그걸 묻지 않았어요. 당신이 왜,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인지를 물었지."
  "그 전에, 제가 예전에 드렸던 제의, 다시 한 번 확인해도 될까요?"
  "당신에게 관리받는 클로저가 되볼 생각이 없냐는 그 제안 말씀이신군요?"
  "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남성은 조용히 여성의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여성의 답은 무척이나 빠르게 주어졌다.

  "사양하죠. 언젠가는 클로저가 되겠지만, 지금은 늑대개 팀과 함께 하고 있으니까요."
  "좋습니다. 제 질문에 답해주셨으니, 이제 제가 답을 드릴 차례로군요."

  남성은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좋아서 짓는 웃음이 아닌, 매우 음흉한 기색을 띠고 있는 웃음이다.
  웃음의 대상은 분명히 바이올렛이었고,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을 향해 흘려지는 비웃음을 견디지 못한 하이드가 나서려고 몸을 움직였지만, 팔을 들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바이올렛은 그를 제지했다. 분을 삭히며 마지 못해 하이드가 뒤로 물러나자, 한재민은 말을 시작했다.

  "어차피 당신들은 죽습니다, 그러니 말을 해도 상관없겠죠. 저는 대한민국 행정자치부 산하이지만 대통령 직속기관인…"
  "정부의 개, '이능력자관리개발원'의 녀석들이겠지."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바이올렛과 하이드의 뒤에서 들려왔고, 그에 대한 한재민과 바이올렛의 반응은 분명히 엇갈렸다.

  "……"
  "대장님!"

  바이올렛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회색 코트를 입은 험상궂은 인상의 남성은 자신의 위상력을 따라 푸르게 물든 자신의 눈을 번뜩이며, 적들을 노려보았다.
  그를 향해서 한재민은 다소 기분나쁘다는 듯 말했다.

  "개라니, 말이 좀 지나치시군요. 같은 개 주제에."
  "우리는 개가 아니다. 우리는 늑대를 택했다."
  "푸훗,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차피 개나 늑대나 모두 짐승, 짐승은 잡아 죽이면 끝이죠."
 
  말을 마치자 그의 앞으로 뒤에서 또 다른 이들이 나와 선다. 그의 앞으로 선 이들은 모두 여섯 명. 위상력의 질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은 한재민의 앞에 선 여섯 명의 위상능력자들이 방금 전까지 바이올렛과 하이드가 상대했던 잔챙이들과는 달리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트레이너와 바이올렛, 하이드 모두 살짝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현우 씨, 재영 씨, 상협 씨, 상미 씨, 수현 씨, 주찬 씨, 명령을 내리죠. 당신들의 반원들과 함께 늑대개 팀을 처리하세요. 반드시 숨통을 끊어놓으십시오.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관리관 님."

  여섯 명의 남녀가 일제히 말을 끝마쳤고, 저마다 자신들이 가진 위상병기를 손에 쥐었다.
  아직 공격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날선 위상력은 분명히 느껴진다. 살짝 바이올렛은 긴장한 눈치이다. 그녀의 심중을 알아차리고 트레이너는 넌지시 물었다.

  "두렵나, 바이올렛."
  "아뇨, 그저 살짝 긴장될 뿐이에요."
  "후후, 놈들은 피라미이다. 우리 늑대개의 상대가 못 돼. 긴장하지 마라, 놈들은 우리의 것이다."
  "알겠어요, 대장님. 그나저나 설마 이렇게 실전에서 대장님의 실력을 보게될 줄은 몰랐어요. 조금 기대되는걸요!"
  "기대할 건 없다. 그것보다도 눈 앞의 적을 놓치지 마라."
  "알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제 검은, 절대로 적을 놓치지 않으니…!"

  트레이너의 리드와 함께 바이올렛은 대검을 들어올렸고, 자신들의 적을 마주보며 결전을 준비한다.

.
.
.

  『제이 씨! 현재 위치를 말해주세요!』
  "테인이와 함께 지금 막 역삼동에 들어섰어. 플레인게이트까지는 앞으로 몇 분 안으로 도착할 것 같군!"
  『최대한 빨리 움직여주세요. 늑대개 팀이 공격을 겨우 막아내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까요!』
  "걱정 말라고, 유정 씨. 놈들이 절대 플레인 게이트를 닿지 못하게 할테니까."
  『전운을 빌어요.』

  김유정의 무전은 끊어진다.
  새벽졸음을 살갗에 부딪히는 차가운 밤공기로 깨워가며 제이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사이킥 무브로 크게 도약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미스틸테인이 커다란 자신의 창을 들고서 그를 따르며 밤하늘을 가르고 있다.

  그들이 김유정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은건 지금으로부터 10분 전이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그들과 같은 팀원인 이슬비와 서유리가 밤 사이에 외부차원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대를 늑대개 팀 일부가 지키고 있었는데, 전에 이슬비의 승급심사 과정 중에 문제를 일으켰던 이들이 또 다시 쳐들어온 모양이었다. 꽤나 골치아픈 일임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외부차원으로 이슬비와 서유리가 떠났다는 것을 알고 플레인게이트를 급습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목표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추론하건대 그들의 목표는 플레인게이트를 파괴하여 두 사람을 외부차원에 가둬버리는 것이겠지. 이미 한 번 검은양 팀에 크게 물 먹은 적이 있는 그들에게는 세 명이라는 전력의 공백이 발생한 지금이야말로 복수를 할 수 있는 호적기일 것이다. 검은양 팀에게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던 최악의 경우의 수가 걸린 것일테고.

  제이는 이슬비라면 또 다시 돌발행동을 보일 수 있으리라고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세하를 찾기 위해 먼저 외부차원으로 떠난 것을 사실상 확정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따라 서유리까지 그곳으로 들어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주 만약의 경우에 전에 그들이 상대했던 이들이 또 다시 급습하는 것 역시 최악의 수로 이미 생각을 해두긴 했지만, 말 그대로 최악의 수이기에 실상 거기까진 고민해** 않았던 그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은 베테랑이 그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골치아픈 상황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다만 다행이라면, 전과는 달리 늑대개 팀이 그들과 함께 싸워준다는 것이다.
  트레이너가 이끄는 늑대개 팀의 대원 개개인의 실력은 그가 본 바로는 꽤 강하다. 그 정도라면 유니온의 정식요원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그들의 도움은 전혀 가정하지 않은터라 김유정에게 상황설명을 들었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빨리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바로 팀원이자 자신이 돌보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이 바로 여기에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미스틸 역시 그를 따라 최고 속도를 내며 따르고 있다. 

  아까 김유정에게 보고한 대로, 그들은 몇 분 내로 플레인게이트 입구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전투에 돌입하게 되겠지. 그러므로 그들은 이동하는 동안 전투 준비를 완벽히 갖추어야 한다.
  제이는 상관없었지만 클로저로서의 경험이 그보다는 떨어지는 미스틸에겐 다소 버겁게 다가올 수도 있다. 실제로 미스틸이 꽤나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에,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소년을 다독이며 조언을 주었다.

  "테인아, 떨리냐?"
  "후읍! 아뇨, 안 떨려요!"
  "저번처럼 실제 사람과 싸우게 될거야. 사람과 싸운다고 하더라도,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알겠지?"
  "우웅! 걱정마세요. 전 잘 할 수 있어요!"
  "그래그래, 나도 테인이를 믿는다."

  오기를 부려보며 자신이 그렇게 어리지않음을 보이려는 미스틸의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며, 그는 어릴 적의 자신을 생각했다. 미스틸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위상능력자로서 전장에 나서야 했던 그 때의 자신을 말이다.
  그는 훌륭한 팀원들과 싸워나갔다. 그가 속한 팀은 백전불패의 영웅들이 모인 곳이었다.

  울프팩, 바로 그것이 그가 속했던 팀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팀을 이끌어나가던 한 여성을 기억해냈다. 차원종의 재앙, 알파퀸으로 불렸던 그 여자를. 그녀의 모습을 상기하며, 그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해보았다.

  "그 때 누님이 날 보면서 느꼈을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인가?"

  혼잣말의 끝에서 그는 웃었다.
  그리고 미스틸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크게 다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누님처럼, 멋지게 싸워보겠어!"  
  "우웅? 저도 아저씨랑 같이 열심히 싸울게요!"

  두 명의 클로저 앞에 커다란 G타워가 크게 보이기 시작했고, 한창 복구 중인 강남역이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넓게 강남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강남대로가 펼쳐졌고, 플레인게이트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은 멀리 있기에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들이 목적지로 두고 있는 곳의 공터에는 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듯 하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느껴지는 위상력의 파장이 이곳까지 뻗어오고 있다.

  두 클로저들은 직감했다, 자신들이 전장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음을.
  그리고 자신들의 전투가 곧 시작될 것임을.


  ◆ 19-2

  이슬비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단언컨대 그녀가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이토록 커다란 비명을 들은 기억은 없다. 너무나도 처절했고, 너무나도 구슬펐고, 너무나도 소름끼쳤다. 그의 비명은 마치 세상이 처음 탄생하던 날 신이 하늘과 땅을 나누어 경계를 가르던 그 때의 소리와 같아서, 감히 들을래야 들을 수 없는 끔찍한 소리였다.

  비명이 일순간 뚝 그치고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만 다시 숙이고 있는 이세하를 바라보며, 이슬비는 너무나도 불안한 느낌에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세하야."
 
  그녀의 물음에 돌아오는 답은 없다.
  분명히 그는 호흡하고 있다. 그가 살아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왜 그는 답을 주지 않는 것일까? 저절로 떠오르는 질문이건만 슬비는 그런 의구심에 답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세하."
 
  여전히 묵묵부답.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장난을 치리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답이 없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의 마음에는 더욱 불안이 커져만 간다.

  "이세하, 들리면 대답해줘, 부탁이니까…"
  "아아…"
 
  답이 돌아왔다.
  분명히 그의 목소리였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그 뜻은 명확하지 않다, 그가 한 말이 긍정의 뜻인지, 아니면 그저 입에서 아무런 의미없이 낸 말인지.
  그래서 그녀는 다시 물었다.

  "똑바로 말해줘, 이세하."
 
  정공법이다.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는다면, 곧바로 대답이 올 수 있도록 유도한다.
  만약 제대로 알아들었거든, 제대로 대답해줄 것이다.

  "아! 알아들었다고!"
  "세하야?"

  확실하게 와닿는 의미. 그런데 분위기가 다르다.
  이세하의 목소리이지만, 이건 그의 분위기가 아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그의 몸 주위로 퍼져나오는 짙은 자색과 흑색이 섞인 오오라에서 재와 먼지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리고 그와 슬비의 눈이 마주쳤다. 이미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그의 홍채는 이제 보랏빛을 넘어 붉은빛을 띠고 있다. 살벌한 기운이 그대로 그녀를 침범해왔다. 그러자 그녀는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고, 점점 표정이 어두워져만 간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세하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히힛, 이슬비. 왜 그런 표정을 짓는거야?"
 
  둘 사이의 거리는 열 발자국 정도. 그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던 이세하는 이슬비를 향해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렇지만 거리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올 때마다, 그녀가 뒤로 한 발자국 씩 물러났기 때문이다.
  슬비는 눈 앞에 있는 남자가 분명히 이세하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것은 이세하의 본래 인격이 아니다. 그렇기에 눈 앞의 남자는 그녀가 아는 이세하가 아니다.

  "왜 도망가는거야? 나야 나, 이세하. 너의, 남자친구."
  "다가오지마."
  "나라니까? 왜 그래?"
  "넌, 세하가 아니야!"
  "아, 참…"
 
  세하의 모습이 흐려진다. 마치 잔상이 남듯 그의 형상은 점차 무너져갔고, 그의 본체가 나타난 곳은 바로 슬비의 앞이었다. 이미 이전부터 그가 자주 이동하는 기술로 사용했던 이 힘은 여러번 보아서 익숙했지만, 언제나 그의 공격속도는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어느새 뽑아든건지 그녀의 앞에 나타난 세하는 오른손에 검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높이 치켜들고서, 그녀를 향해 내려치려고 하고 있다.

  "도망치지 말라고!"
  "읏!"


  까앙!
  시끄러운 격철음의 한 가운데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친 세하의 검과 그것을 아래에서 맞받아친 슬비의 나이프들이 있었다. 나이프들을 서로 어긋나게 교차시켜 세하의 검격을 받아낸 슬비는 이 공격으로 눈 앞의 이세하는 본래의 이세하가 아니라는 결론을 확실히 지을 수 있었다.
 
  키기깅.
  날붙이들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소리 사이로 맞댄 검날들이 힘싸움을 하며 흔들린다. 그리고 날선 검날 사이로 검의 주인인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두 사람이 입은 옷은 모두 흑색, 백색, 적색의 삼색이 어우러져 있었지만, 단 하나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두 사람의 눈동자이다. 서로 극렬히 대비되는 청색과 적색의 눈은 서로를 향해 적대의 시선을 날카롭게 보내고 있었다.

  계속되는 힘겨루기에서 점점 슬비가 밀리는 기색이다.
  여전히 힘의 차이는 있었다. 그녀가 아직 정식요원이던 시절, 이세하와 격돌했을 때 느꼈던 물리적인 힘의 차이는 여전했다. 확실히 특수요원이 된다고 하여서 체격의 차이가 줄어드는것은 아니다. 힘싸움에서 남자에 비해 여자가 불리한 것은 생리적인 차이기에 어떻게 할 수 없다. 그것은 그녀도 충분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오랫동안 힘겨루기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앗!"
  "읍?!"
 
  서로 무방비상태인 하반신을 노리고, 슬비는 있는 힘껏 이세하의 배를 걷어찼다. 발길질은 팔의 힘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하기에, 아무리 건장한 남자인 이세하라고 할지라도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위상력을 주입하여 공격했기에 걷어차는 힘이 더욱 강력할 것이다. 그리고 이세하는 보기 좋게 저멀리 나뒹굴었고, 그 사이에 두 팔이 자유로워진 이슬비는 더욱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쉽게 다가오지 못할 정도의 거리를 벌리고서 그녀는 15개의 페이즈 나이프들을 소환하여 등 뒤로 부유시켰다. 여차하면 바로 탄환으로 만들어 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좋든 싫든 그녀는 지금 이세하와의 전투에 돌입했다. 눈 앞의 이세하는 제정신이 아니기에 그녀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머뭇거림이 없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나올지 그녀는 살펴야만 했다.

  "아, 씨. 너무한거 아니야? 이래뵈도 너의 남자친구인데."
 
  머리를 긁적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이세하가 일어섰다. 무척이나 짜증이 가득 섞인 말을 투덜거리면서,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슬비는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기분나쁜 시선을 한가득 받으면서 물었다.

  "너, 누구야."
  "이세하라니까."
  "아니, 넌 이세하가 아니야."
  "휴, 아직도 그런 덜 떨어진 놈을 마음에 두고 있는거야?"
  "뭐…?"
 
  그의 입에서 방금 전에 나온 말은 마치 자신을 또 다른 무언가와 차별을 두며 말하는 것 같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해가 안돼?"
 
  그는 허공에 검을 놓았다. 검붉은 색의 검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부유한다. 아마도 위상력에 의한 것이겠지.
  검을 놓아 완전히 손이 자유로워지자, 이세하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찾는 이세하는 이전의 이세하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이미 나에게 패배해서 여기에 갇혔어."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그가 말하는 예전의 이세하, 그게 아마도 슬비가 알고 있는 본래의 이세하일 것이다.
  지금 표면으로 드러난 이 녀석은, 그 이세하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누구일까라는 의문이 제일 먼저 그녀에게 들었다. 그 의문은 그녀에게 바로 질문을 던지게 했다.

  "그렇다면 너는 누구야?"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아. 난 나야, 이세하."
  "내가 아는 이세하는, 네가 아니야."
  "그래, 나는 네가 아는 이세하가 아니겠지. 그렇지만 나 역시 이세하야, 그런 얼빠지고 나약한 녀석과는 다른 나, 그게 나야."

  그녀는 눈 앞의 이세하가 또 다른 인격의 이세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전에 잠깐 세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그녀에게 떠올랐다.
  검은양 팀 모두가 경험한 바가 있겠지만, 큐브 안에서 그들은 또 다른 자신을 만났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차원종이 된 미래의 자신을 만났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 이세하는 그런 가능성의 발현일까?
  그것이 아니면, 차원종의 군단에 잠식되어 발생한 또 하나의 이세하로서의 인격이든지.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이세하는 그녀가 알고 있는 이세하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말은 곧 그녀가 더이상 눈 앞의 남자에게서 자신이 아는 이세하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눈 앞의 - 이세하의 모습을 하고 있는 - 남자는 그녀가 쓰러뜨려야 할 적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쓰러뜨려야만, 그녀는 자신의 힘을 주입하여 그를 구해낼 수 있다.

  "세하는 어떻게 된거야."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물었다. 매정하게 자신에게 쏘아붙이는 것에 꽤나 실망한 듯, 이세하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말했잖아, 여기에 갇혔다고."

  다시 한 번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이세하. 
  분명히 질문에 대한 답을 받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답은 그것이 아니다.

  "자세히 말해!"
  "내가 왜 그래야 하는거지?"
  
  오히려 그는 반문했다.
  그의 물음에 무엇이라 답해야할지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다그칠 뿐이다.
 
  "묻는 거에나 대답해, 차원종!"
  "차원종이라…"

  자신을 칭하는 그 말에,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는 네가 말한대로 차원종이라는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름없는 군단'이라는 근사한 이름이 이미 있어. 그리고 나는 곧 군단이고."

  지금 그가 한 말은 구로역에서 칼바크 턱스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 중에 처음으로 만났던 애쉬와 더스트가 했던 말과 같다. 정말로 그는 군단 - 차원종 - 의 의식인 모양이다.

  "나약해 빠진 그 녀석은 군단의 의식 속에 깊이 잠겼지. 그리고 마침내 내가 나온거야, 나 '이세하'가.
  더 이상 인간 이세하는 없어, 오직 군단의 이세하만 있을 뿐."

  형상복제자가 처음 이세하를 복제하여 남산에서 나타났을 때, 그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했던 그 말을 이슬비는 떠올렸다. 멀리서 어렴풋이 들었던 그 말,
 
 '는 ''이자 ''야, 이세하.'

  그 당시에 그녀 역시 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의 놈은 이세하가 차원종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그 말은 이세하가 군단 - 차원종 - 의 일원이 된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차원종이 된 이세하는 군단과 의식을 공유하게 되어 곧 차원종이자 이세하이게 된 것이다.

  "뭐야, 그랬던 거였어?"
  "이제서야 조금씩 감이 오나보네, 이슬비?"
  "그래, 이제서야 알아챘어. 그리고 이젠 확실히 알았어, 너는 이세하가 아니고 그저 내 적 - 차원종 - 일 뿐이라는걸."
  "훗."
 

  그는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검을 다시 오른손으로 움켜쥔다.
  그리고 허공으로 한 번 휘두르더니, 다른 반대편 손으로 그녀를 향해 도발하듯 손짓한다.
 
  "어서 덤벼라, 시간이 아깝다."

  거기에 호응하듯이, 그녀 역시 양 손에 쥔 페이즈 나이프를 꽉 쥐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언제나 전투에 돌입하기 전에, 자신이 본격적으로 싸움에 임한다는 것을 자기암시하듯 하는 말을 그녀는 입에 담았다.
 
  "작전 개시. 적을 섬멸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세하는 그녀에게 빠른 속도로 접근해왔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아주 빠른 속도로 베며 들어오는 검격은 맞받아치는 것보다 흘리는 것이 그녀에게 더 좋은 회피방법이다.

  그녀가 몸을 숙이자 그녀의 상체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격은 그대로 허공을 베었고, 그녀가 치고 들어갈 아주 약간의 틈을 만들어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앗!"

  커다란 공격은 가하지 않는다. 그녀가 가진 페이즈 나이프는 이세하가 할 수 있는 베는 공격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오히려 틈을 파고들어 찌르는 공격이 더 유효하다. 자신의 무기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빠른 몸놀림으로 그의 팔과 어깨를 노리고 힘껏 찔렀다. 그리고 그녀의 공격은 성공했다. 그가 입고 있는 갑주에까지 그녀의 단검 끝이 닿은 것이다.

  하지만,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짜릿한 반동이 그녀의 손목을 타고 느껴진다. 그녀의 나이프들은 갑주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원거리 공격이 아닌 근접공격이라면 충분히 뚫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생각이 빗나갔다. 공격이 막혔으니 이제 상대의 공격이 그녀를 노릴 것이다. 그 전에 피해야 한다.

  허공을 베고 잠시 멀어진 이세하의 칼날은 다시 이슬비의 등 뒤를 노리고 위에서 찔러온다. 과거의 그녀였다면 그저 몸을 움직여 피했을테지만, 지금의 그녀는 다르다. 특수요원으로의 승급 중에 위상력 리미트가 한 단계 해제되면서 그녀는 더욱 위상력을 정밀하게 다루거나 넓게 퍼뜨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위상력을 활용하면 굳이 그의 공격을 몸을 움직여 피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정면에서 맞부딪히면 된다.


  깡! 깡! 깡! 까아앙!
  그녀의 등 뒤로 부유하고 있는 15개의 비트 중 4개가 연분홍빛 위상력에 휩싸인채 따로 빠져나와 네 자루의 장검의 형태를 이뤘고, 그것들이 그대로 위에서 찔러들어오는 검격을 밀어내듯 막아내었다. 자신의 공격이 가로막히자 완전히 무방비상태가 된 그는 검을 다시 빼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을 놓치지 않고 그녀는 공격을 이어나갔다. 

  이세하의 검을 봉하고 있는 4개의 비트를 제외한 나머지 11개의 비트가 그 끝을 일제히 그를 조준했다. 날카로운 칼날들이 자신을 향해 그 끝을 겨누는 것을 보면서 그는 다소 당황한듯 놀란 표정을 지었고, 더 빨리 검을 빼내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4개의 비트가 그의 검을 마치 둘러싸듯 완벽히 봉하고 있어서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설마 자신의 공격이 그녀에게 읽힌 것일까 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를 노리는 11개의 비트들이 주인의 단 한 마디의 호령과 함께 일제히 쏘아졌다.

  "탄환 발사!" 
 
  11개의 비트들이 공기를 가른다. 매우 빠른 속도로 쏘아진 비트들은 공기와의 마찰열로 녹아내리면서도 완전히 녹지 않은채 뜨거운 열을 그대로 가진채로 막대한 운동에너지와 함께 가로막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탄환이 된다. 그리고 그 11발의 탄환은 이세하의 갑주에 그대로 직격한다.

  이미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공격으로 이세하를 상대했던 적이 있었다. 관통상을 노렸지만 사실 관통된 공격은 없었고, 모두 갑주 앞에 가로막혔다. 그 정도로 그가 입고 있는 저것은 뚫기가 힘들다. 그 때는 이 정도로 근거리에서 쏘지 않았기에 효과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번은 영거리이다. 이 정도 거리에서 쏜 탄환이 관통되지 않는다면, 더 강력하거나 다른 방법의 공격을 그에게 쏟아부어야만 한다.

  까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아아앙.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모든 탄환이 하나 같이 그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공격 중에서 관통력을 최대한 키운 공격임에도, 도저히 저 갑주는 뚫을 수 없나보다. 11개의 비트가 모두 가로막힌 지금의 상황은 그녀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예상 외로 이세하는 비명을 질렀다. 비록 뚫지는 못했어도 비트들이 가진 관통력은 그대로 전해져서 그의 몸을 세차게 때렸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선은 생각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잠시 거리를 벌리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을 그녀는 내렸다. 그리고 자켓의 오른쪽 주머니에서 웜홀을 생성하는 캡슐을 꺼내 뒤로 던졌다.

  웜홀이 연달아 세 개가 만들어졌고, 마지막 세 번째 웜홀에서 그녀가 빠져나왔을 때는 꽤 그녀의 적과 거리가 벌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가 거리를 충분히 벌렸을 때에는 이미 그의 검을 봉하고 있던 4자루의 비트가 모두 박살난 채 땅에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서 떨어져 있었다. 고작해야 1분도 못되는 시간만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윽! **, 이 정도로 강해졌을 줄이야…"
  "숨 돌릴 시간은 있나봐?"

  이세하는 자신의 머리가 쭈뼛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자신의 찌릿하며 눈 앞에 푸른색의 전류가 흘렀다.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고 피할 생각조차 못했다. 그가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그의 주위, 그리고 위와 아래까지, 그의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푸른 전류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씩 조금씩 그를 압박하듯 다가왔고, 그를 완전히 사각의 틀 안에 가두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를 가두고 있는 전류는 반대 성질을 가지고 있는 전하를 끌어당겼고, 곧 엄청난 양의 전류가 끌려와서 일제히 그에게 쏟아졌다. 마치 전기통구이가 되는 것처럼 그의 온 몸에 전류가 흘러 전기쇼크를 주기 시작했고, 전격이 그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뜨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전류의 벽은 이슬비의 염동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사람의 온 몸은 사실 전도체와 다를바가 없다. 그러므로 운동량으로 관통하는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면, 전류를 흘려보내서 강제로 감전시키면 된다. 그리고 이번 공격은 완벽히 성공했다.

  감전 상태가 된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고통에 힘겨워하고 있다. 이대로 계속 놔둔다면 분명히 그는 생명에 위협을 받을 것이다. 현재 이세하는 정신을 차원종에게 빼앗겼을지 모르지만, 그의 몸 만큼은 본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의 생명을 끊어버릴 정도의 공격은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그것을 잘 아는 그녀는 충분히 적이 기절할 정도의 충격만 준 뒤, 다시 전류를 거두어 들였다.

  벡터값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자 전류는 그대로 허공에서 방전되어 곳곳으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동시에 이세하의 주위를 감옥처럼 막고 있던 전류의 벽도 그와 함께 사라져갔다. 감전상태에서 해방된 그는 그대로 힘없이 땅에 쓰러져버렸고,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본 슬비는 자신의 공격이 충분히 먹혀들었다는 사실에 기뻐하였다.

  아마도 상대는 기절하였을 것이다.
  차원종의 정신이 잠시 가라앉은 지금, 그녀는 자신의 위상력을 그에게 주입하여야 한다. 이 과정이 꽤 그녀에게나 그에게나 힘들겠지만,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 서유리가 옆에 있어주었다면 더욱 쉬웠을텐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상황이다. 그녀 혼자서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상황이다.

  분명 힘이 들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반드시 해낼 수 있다는 말 못할 자신감이 마음에 넘쳤기에, 그녀는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지고서 천천히 쓰러진 이세하를 향해 다가간다.


  ◆ 19-3

  춥다.
  어둡다.

  지금은 밤일까?
  나는 웅크려있는 것 같은데도, 온 몸에서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
  추위는 느껴지지 않음에도 스산하다는 기분이 든다.
  주위를 둘러봐도 정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쩌다 이런 곳에 있게 되었을까?

  갑자기 생각이 몰려들어왔다.
  이건 나의 기억들이다. 너무나도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이 하나씩 찬찬히 내 앞을 지나쳐간다. 
  나는 그것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고, 그러다 문득 한 기억에 도달했다.

"알파퀸? 그 알파퀸의 아들이라고?"
"네 어머니는 정말 인류의 영웅이었어. 네 어머니가 없었다면 차원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지…"
"혹시 가능하다면 너희 어머니와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겠니?"
  "네가 서지수의 아들이라니, 너는 참 훌륭한 어머니를 두었구나?"
"이야! 그 알파퀸의 자식이라면 정말로 놀라운 힘을 물려받았겠지?"

  그래.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나를 '나'로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세하'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그 어떤 사람도 나를 그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았다. 서지수의 아들, 알파퀸의 자식, 그게 나의 이름대신 나를 따라다니던 호칭이었다.
  나를 바라보던 이 사람들은 처음 나를 만났을 때 모두 경이로운 눈빛으로 한 가득이었다. 그것은 나를 보고서 짓는게 아닌, 나의 뒤에 있는 엄마를 향하고 있었다.

"실망스럽군. 알파퀸의 자식이 이 정도밖에 안되다니."
"조금 미안한 말인데, 너 정말 서지수 씨의 아들인거 맞지? 하하, 장난이야, 그런 얼굴로 쳐다**마."
"너 노력은 하는거 맞지? 대충하는거 아니지? 이건 장난이 아니라고, 알파퀸의 아드님!"
"풋! 이건 뭐 기대하던 것보다 못하네. 아아, 너한테 한 말 아니니까 신경쓰지마!"

  유소년 위상능력자과정에 등록하던 날에 한 테스트가 있었다. 그 결과를 보고 나를 대하던 사람들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른들은 나를 무척이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그 중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듯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 그들은 나에게서 엄마를 기대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엄마이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자신들은 나를 엄마 정도의 수준으로 키워낸 연구원이라는 세간의 평가를 듣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그 테스트 이후로 아무도 내 앞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너가, 알파퀸의 아들?"
 "너네 엄마가 전설의 알파퀸이라면서?"
"그러면 고생 안해도 편하게 유니온에 들어가서 클로저가 되겠네?"
"부러워. 너는 우리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와 함께 훈련과정을 겪던 아이들은 다들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그들은 동정 반 질투 반, 여러 감정이 섞인 말을 나에게 서슴없이 했다. 결국 나는 며칠만에 엄마에게 이 훈련과정을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우와, 쟤 머리색 좀 봐."
"눈 색도 우리랑 달라!"
"엄마한테 들었는데, 쟤는 위상능력자라 우리랑 다르대. 으으, 무서워."
"무섭긴 뭐가 무섭냐! 잘봐, 이 녀석 예전부터 내 앞에서는 쫄아서 아무 말도 못했다? 보여줄게. 
야, 괴물, 일어나! 내 말 안들려? 일어나라니까! 어? 으아아악!"
"야, 괜찮아?!"
 "선생님! 선생님!"

  학교로 돌아가서도 나는 특수한 아이였다.
  또래아이들은 나와 어울려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는 그들과 달랐기 때문에.
  평소 오래전부터 나를 자주 괴롭히던 아이가 있었다. 그날 따라 유독히 나를 놀리며 괴롭혔기 때문에, 나도 화가 나서 그 아이를 밀치고 말았다. 그 결과 그 아이는 몇 개월동안 병원에 입원해야하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었고, 나는 그 일로 엄마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엄마에게 혼나면서도 들었던 생각은 하나였다. 남이 아픈게 싫다.

"쟤가, 그 서지수 님의 아들"
"알파퀸의 아들이라면 엘리트 과정만 밟아왔겠지? 정식 클로저 요원이 되는 것도 금방이겠다."
"차원전쟁의 영웅의 아드님이니, 얼마나 편하게 살아왔을까. 참 부럽다."
"에휴, 쟤랑 우리는 어차피 다르니, 우리는 더 열심히 해야겠어."

  나는 계속해서 성장했고, 유니온 특수능력자 청소년 과정까지 마치게 되었다.
  그 때가 되어서는 더는 누군가에게 도발을 당해서 욱하는 일이 없었다. 내가 스스로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피곤해지기가 싫었다.

  저들은 저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틀린 말을 아무런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유니온 특수능력자 청소년 과정을 수료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며칠 후 나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반가워."
"아, 내 소개부터 했어야했는데. 내 이름은 한재민, 소속은 내 요원증에서 보다싶이 유니온이고."
"데이비드 국장님께서 너를 발탁하셨어."
 
  그 사람이 다녀간 이후, 유정 누나가 나를 찾아왔다.
  그 때 유정 누나를 처음 만났고, 누나는 나에게 자신이 관리하게 될 검은양 팀에 들어올 것을 청했다. 나는 검은양 팀에 들어오라는 그 제의를 아주 오랫동안 거절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일부러 누나의 전화도 받지 않고 무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 눈 앞에 '그녀'가 나나타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나를 처음으로 '나'로서, 나를 이세하로 대해준 내 또래의 여자아이.
  그 아이의 이름은,

"안녕? 네가 이세하지? 반가워, 나는 이슬비라고 해."

  이슬비.
  나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여자.
  내 무엇보다도 더 귀하고, 그 어떤 것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나의 사랑인 그녀.
 
  그렇지. 나는 그녀에게 모욕감을 주었던 데이비드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애쉬와 더스트에게 힘을 양도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를 거의 쓰러뜨리기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그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막대한 힘을 얻고서도 나는 그를 쉽게 상대할 수 없었고, 그를 상대하느라 더욱 많이 그들의 힘을 가져다 쓴 결과 잠식당하던 의식이 더욱 빨리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그러다가 이슬비를 눈 앞에서 보고, 그 녀석에게 도망치라고 했었지.
  하지만 그 녀석은 내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고.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고, 정신차려보니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 녀석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거였는데.
  게임기 끄라고 할 때 게임기 꺼주고, 작전에 집중하라고 할 때 작전에 집중해주고, 그렇게 처음부터 네 말을 잘 들었더라면, 너는 내가 도망치라고 했을 때 내 말을 잘 들어주었을까.
  그래, 어쩌면 내가 너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이제서야 벌 받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일까.
  여기에는 나밖에 없고 너는 없는데,
  이렇게 너의 목소리, 너의 따뜻한 위상력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
.
.

  "한 발은 맞겠지!"

  서유리는 오른손에 들고있는 검을 다시 등 뒤에 건 뒤, 주머니 속에 넣어둔 또 다른 한 자루의 권총을 꺼내들었다. 양손의 권총을 엄지손가락으로 조작하여 사격모드를 단발에서 자동으로 맞추고, 그녀는 적들을 향해 총탄들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가까이에 있는 적부터 멀리 있는 적까지 주위의 모든 적은 총구로부터 발사된 탄환에 꿰뚫려 쓰러진다. 그녀의 위상력이 한가득 주입된 총탄들은 차원종들의 몸을 그대로 관통하고서도 여전히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어 꽤나 먼거리까지 도달했다. 차원종들에게 박힌 총탄보다 모든 것을 관통하고 오히려 땅에 박힌 총탄의 수가 더 많다는 것은 그걸 증명한다.

  그녀의 제압사격에 꽤나 차원종의 수가 많이 줄었다. 하나하나 검으로 베어가며 상대하는 것보다 이렇게 원거리에서 쓰러뜨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다. 적의 대부분은 근접공격을 가하기 위해 그녀에게 달려들었기에 계속해서 검으로 적의 공격을 막고 베어넘기는 것은 상당한 체력의 부담을 준다. 전투를 시작한지 이제야 20분 정도가 지났는데도 그녀는 상당히 체력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자신의 상태는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기에, 이렇게 원거리 공격을 통해 적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동시에 자신의 체력을 보존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도 곧바로 그녀는 권총을 다시 장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고있는 정식요원복의 자켓에는 여러 주머니가 별도로 달려있는데, 그 주머니 안에는 아직도 탄약들이 있었고 여전히 그녀는 장전만 한다면 곧바로 탄환을 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능숙한 솜씨로 빠르고 정확하게 재장전을 끝내는 것은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이 길지 않기에, 근거리에 있는 적들이 모두 소탕된 지금의 상황에서 남아있는 적들이 그녀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이 잠시 멈춘 것을 그녀가 공격할 수단이 없어졌음으로 이해한 차원종들은 다시 무모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재장전이 끝난 권총들이 다시 불을 뿜기 시작하자, 그녀를 향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던 차원종들은 모두 위상력이 실린 총탄에 꿰뚫려 싸늘한 사체로 변해갈 뿐이다.
 
  서유리는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자신에게 불리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클로저로서 많은 적을 상대해 본 그녀라고 할지라도, 1대 절대 다수의 상황은 쉽게 타개할 수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노련한 클로저가 오더라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고작해야 정식요원으로 임명된지 채 1달도 채우지 못한 신참급 요원에게 이런 상황이 쉬울리가 없다.

  그녀는 머리를 굴리는데 약하다. 그녀가 만난 모든 적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그런 것으로 흠잡아 조롱했다. 그녀 역시 인정하는 바이고, 그렇기에 그녀는 전투에 있어서 전략이나 전술을 이용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그저 지금까지의 운동으로 다져지고 만들어진 뛰어난 육감을 이용해 전투를 어떤 상황에서든지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뿐이다.
  즉 이 싸움은 그녀의 전술에 의해서가 아닌 몸에 의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져온 것인데, 그녀의 이러한 상세한 사항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본다면 지금의 전투를 상당히 그녀가 전략을 잘 짜서 그대로 이끌어 나갔다고 밖에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지형을 잘 이용하여 적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포위를 당해서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게 되면 쉽게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것을 몸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새인가 그녀는 완전히 트인 공터가 아닌, 한 갈래길까지 전략적 후퇴를 하여 싸우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적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한정된 수만이 그녀와 근접전을 벌일 수 있고, 그녀에게 오는 통로는 단 하나인데다가 그렇게 넓지 않기 때문에 특히 지금과 같은 원거리 공격에서 화망을 좁혀 더욱 훌륭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지형을 이용하는 방법은 그녀가 처음부터 전술을 짠 것이 아니라, 싸우다보니 몸이 스스로 판단하여 움직인 것이다. 덕분에 비행형 차원종이 아니고서야 그녀를 뒤에서 공격할 수 있는건,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모든 적을 눈 앞에서만 두고 싸우는 유리함을 그녀는 잘 살리고 있다.
 

  또 다시 두 권총에 장전된 탄환들이 모두 약실을 떠나 사라졌다. 다시 장전을 해**다.
  서유리는 장전을 하면서도 눈으로는 적의 수를 살폈다. 꽤나 많은 적을 쓰러뜨렸음에도 적의 수는 아직도 많았다.

  "이렇게 많이 쓰러뜨렸는데도,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니…"

  장전을 위해 주머니 속에 담긴 탄알집을 꺼내려고 할 때,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제 남은 탄알집들은 이번 장전이 끝나면, 단 한 번만 더 장전할 수 있는 수만 남았다.
  애초에 그녀는 두 자루의 권총으로 싸우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가 휴대하고 있는 탄환들은 언제나 한 자루의 권총을 사용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양이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더 챙겨올걸 그랬네."

  하지만 지금 후회해서 무얼하나. 뒤늦은 후회를 해도 총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꽤나 고위급 클로저들 중에는 자신의 위상력을 총탄처럼 만들어 쏘는 이들도 있다고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지금의 그녀로서 할 수 있는 위상력의 운용법은 위상병기에 자신의 힘을 실어서 공격하는 방법 뿐이다. 그렇다는 말은 총탄을 아껴야 한다. 이렇게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것도 이제 몇 번 뿐이니까.

  그녀는 아주 잠깐 망설이더니 다시 주머니 속으로 권총 한 자루를 집어넣었고, 대신 오른손에는 다시 등에 걸쳐놓은 검을 빼내어 들었다. 그리고 권총의 사격모드를 다시 단발로 바꾸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한 발 한 발 쏘기 시작했다. 역시 단발사격은 자동사격만큼 화력을 내지 못했고, 두 권총을 난사해대듯 쏘았을 때에는 가까이에 다가오지도 못했던 적들이 꽤나 가까이 그녀에게 접근해왔다.

  가까이 다가온 적들은 검으로 베어 제거한다. 이런 과정을 얼마나 반복해야 남은 차원종들의 수가 줄어들까 그녀는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아직도 그녀의 눈에 보이는 적의 수는 무척이나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목을 틀어막고 버티기만 하면 과연 답이 나올까? 그것 역시도 장담할 수 없다.

  사실 그녀의 클래스는 레인저. 빠른 기동력으로 적들 깊숙히 침투하여 난전(亂戰)을 유도하는게 그녀의 역할이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적합한 싸움법은 이렇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돌진하여 적들 한 가운데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들을 이렇게 상대하고 있다가, 틈을 봐서 뚫고 나가 적들의 한 가운데로 들어간다. 그 타이밍이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그녀라면 몸이 먼저 때가 되서 움직일 것이다. 자신의 실력을 신뢰하며 그녀는 고독한 분투를 이어나갔다.

.
.
.

  "사냥의 칼날이야!"

  공간을 찢고 갑자기 나타난 마검의 환영이 붉게 비췄다. 갑자기 자신들의 앞에 나타난 거대한 검날이 빛을 뿜자, 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소년과 사내들의 거리는 꽤 벌어졌지만, 소년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한꺼번에 찌르기!"

  붉은 마검이 사라지고, 대신 사내들의 머리 위로 빛나는 거대한 원이 생성되었다. 사내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 무엇이 생긴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듯 하다.
  거대한 원의 둘레는 빛나고 있었지만, 그 안은 그와는 정반대로 너무나도 어두워서 무엇이 안에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아주 잠깐 빛나더니, 그 빛나는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의 정체가 삐죽 원 밖으로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자그마한 창이었다. 그리고 그 자그마한 창들은 계속해서 그 끝을 내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아주 세차게 땅으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창들이 공기를 가르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사내들은 자신들의 머리에 위에서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피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었다. 사내들은 자신들의 몸이 저 수많은 창에 꿰뚫려 꼬챙이가 될 것을 두려워하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이 소환한 무수한 창들은 모두 위상력으로 만들어진 마창이기 때문에, 결코 사람의 육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만 이 마창들이 땅과 충돌하여 발생시키는 위상폭발은 위상능력자의 위상력을 심각하게 불안정하게 만들고, 위상력의 반발성을 이용한 원리로 그들의 목숨까지 위협한다.
 
  처음에 사내들은 자신들의 몸이 꼬챙이가 될줄 알았지만 아무런 물리적 피해를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비웃었지만, 이내 마창들의 효과가 드러나면서 그대로 땅에 나자빠져 버리고 기절하기 시작한다. 위상력을 사용하는 자들 - 클로저와 차원종 - 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창답게, 미스틸테인은 자신이 상대하는 모든 위상능력자들에게서 승리한다.


  소년의 옆에서는 또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트레이너와 제이는 분명히 같은 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꽤나 자연스러운 팀워크로 적들을 하나하나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서 전투를 속행하고 있는 다른 늑대개 대원들 - 나타와 하피 - 은 잔챙이가 아닌 간부를 상대하고 있었으므로 전투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트레이너와 제이가 상대하고 있는 적들은 간부가 아닌 졸개들이었다.
  두 사람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기에 분명히 간부급 위상능력자들이 덤벼들 줄 알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어서 무척이나 싱겁게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위상력이 거의 없는 지경에 이른 제이와는 달리 넘쳐나는 위상력으로 적들을 한꺼번에 여럿을 박살내나가는 트레이너는 대포와 다를바가 없었다. 그의 위상력은 폭발하는 힘이 있어서, 이리저리 적들을 날려버린다. 그와는 반대로 제이는 한 명 한 명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트레이너와는 달리 가벼운 공격이 여러 차례 이어지는 한 자루의 소총과 같았다. 소총과 대포는 최고의 콤비를 보여주며, 그 어떤 다른 전투요원들보다 더욱 뛰어난 전투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형, 오른쪽에 두 놈!"
  "눈 앞에 적부터 처리해라. 내 쪽이 아니라 네 쪽에 신경쓰도록."
  "예나 지금이나 그 잔소리는 여전하시군!"

  제이의 주먹이 공기를 가르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한 여성의 복부에 박혔다. 여성은 기침과 함께 침을 토해내더니,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녀를 향해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말했다.

  "미안. 원래 여자는 때리지 않는게 내 신조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어."

  그리고 그 한 번의 정권은 상대를 기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위상호흡법, 단 한 순간 위상력을 집중시켜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그의 공격법은 여전히 통용되는듯 하다.
  자신에게 달려든 적들을 그보다 먼저 쓰러뜨린 트레이너가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신기한 공격이군. 신체에 접촉하는 순간에 위상력을 집중시키다니."
  "형이 없는 18년 동안 여러 일이 있었거든. 나도 원해서 이렇게 싸우는게 아냐."
  "클로저는 위상력이 없더라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몸 관리는 소홀히하지 않았나보군."
  "어쩔 수 없지. 나이가 들다보니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이야."
  "훗, 너도 그런 말을 할 나이가 된건가."

  다시 한 번 짧게 웃음짓고서 트레이너는 한 손에 위상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주먹을 쥐는 것과 동시에 근거리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흡착력이 그의 손을 중심으로 발생하여, 그들 주위에서 서성이는 적들을 가까이 끌어온다.

  강제로 끌려온 세 명의 사내들이 그 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썼지만, 그것은 발버둥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그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더욱 강하게 작용했고, 트레이너의 바로 앞까지 끌려가자 저마다 양손으로 목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의 목이 무언가에 의해 졸리는 것처럼 그들의 얼굴빛은 파랗게 지려간다. 아마도 트레이너의 힘일까?

  트레이너는 자신의 앞까지 끌려온 세 명의 사내들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박아서 저멀리 날려버린다. 그의 팔과 어깨에 부딪힌 그들은 저항조차 못하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아가 땅바닥에 널부러진다.
  그걸 보면서 제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과연 형도 단련은 게을리하지 않았나보군."
  "당연하다. 나는 트레이너이니까."

  18년 전 차원전쟁에서 대활약한 울프팩 팀의 멤버들.
  그들은 인류의 영웅이었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게 정의를 위해 싸운다. 그들은 그것이 클로저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이 믿는대로 그들은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 늙은 늑대의 신조였다.


  갑자기 차갑고, 약간은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그것은 무척이나 인위적이었고, 분명한 방향성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저 멀리에서부터 불어오는 것 같더니, 매우 빠르게 그들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바람이 스쳐지나갈 때 아주 잠깐이지만, 제이와 트레이너는 낯선 잔상을 보았다.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껌뻑거리기만 할 무렵, 바람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이 사실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듯 했다.

  "형, 방금 그거."
  "헛것을 본게 아니었나."

  여전히 두 남성은 자리에 서서 멀뚱거릴 뿐이었다.


  ◆ 19-4


  타박. 타박.
  이슬비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려서, 쓰러진 이세하가 깨어날까 두려웠다. 그의 곁에 가까이 갈수록 그녀의 심장고동도 커져만 갔고, 그에 따라 두려움도 커져만 간다.
  형식상으로나마 적대하였으나 실제로 맞부딪치기도 여러 번 하기를 벌써 2주 가까이 끌어온 그와 그녀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그 거리감이 그들의 연심(戀心)을 가로막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잖이 방해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게다가 지금의 이세하는 평상시의 그가 아닌 차원종의 의식이 깨어나 있어서, 그녀를 향한 살의(殺意)는 분명하다.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겠지. 그런 이유로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선 지금에서도 몸을 살짝 떨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 이세하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다. 혹시 자신의 공격 때문에 죽지는 않았을까, 살짝 걱정을 하면서 그녀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도 그는 작게나마 호흡을 하고 있었다.
  기회라면 지금이야말로 기회이다. 지금이 아니면, 그에게 자신의 위상력을 주입할 수 없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 그중에서도 이마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곳이 위상력의 발현지와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위상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의하면, 위상력은 사람의 신체 중에서도 뇌의 한 부분이 변이되어 발생되는 것이라고 한다. 위상력의 질과 양은 그밖의 많은 사항에 따라 결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상력이 발현되는 뇌는 단연 독보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므로 위상능력자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한 부위는 뇌이고, 그곳을 통하여 일부 능력자들은 타인의 정신에 간섭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녀가 손을 올린 곳은 가장 위상력의 발현지와 가까운 이마. 이곳이 바로 타인과의 위상력이 연결되는 통로와 같은 부위이다. 특수기기가 없는 지금에 있어서 유일하게 위상력을 주입시킬 수 있는 방법은 피부와 피부가 맞닿게 하는 것으로, 이 과정을 통해 위상력은 확실하게 전도된다. 본래 위상력이라는 것은 외부로 방출되는 것이 아닌 내부에 깃들어있으려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위상력을 받아들이는 측이 억지로 위상력을 강하게 밀어내지 않는한 주입시키는 쪽의 위상력이 고요히 들어간다.
 
  바로 옆에서 자신의 남자친구를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손을 그의 이마에서 떼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숙여 조심히 자신의 이마를 그곳에 맞대어보았다. 그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맞닿은 그의 품은 옛날과 다름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따스함에 그녀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그와 얼굴을 마주대하고 있는 건, 그와 마지막으로 나눈 키스 이후 처음이리라. 다른 이들의 방해만 없었으면 영원했기를 원했던 그 순간은 단 몇 십초만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나누었던 입맞춤이었기에 짧은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그 달달하고도 애달픈 순간은 너무나도 짧게만 느껴졌던 그 때의 기억은, 여전히 그녀의 기억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천천히 이마를 떼고, 위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이렇게 이세하인데, 왜 그들은 서로 칼을 주고 받아야하나. 그녀는 자신들의 관계가 여기까지 치닫게 만들어버린 원인을 제공한 애쉬와 더스트, 그리고 데이비드를 원망했다. 그리고 눈 앞의 남성의 짧은 생각 역시 아주 잠깐이나마 원망했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끝이야."

  그녀는 당당히 선언했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이제 끝을 맺을 것이라고 그녀는 자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오른손을 이마에 대고서, 천천히 몸에서 돌아다니는 위상력의 흐름을 느꼈다. 그 흐름을 그저 이세하를 향해 돌리는 것만으로, 위상력들은 일제히 방향을 돌려 그를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따스한 흐름은 그대로 팔로 흘러갔고 손을 통과한 후에 그녀의 피부를 통하여 그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가 구축한 위상력이 흐르는 통로가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아마 일정량 이상의 위상력이 주입되면, 이세하는 강제적으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차원종의 의식이 무척이나 괴로워하기 시작할테지. 그녀는 지금과 같이 혼자 있는 상황에서 그 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스러웠다. 그 때를 잘 넘겨야만, 세하를 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 의문이 꼬리표를 물고 늘어질 때, 이세하의 입이 움직였다.

  "슬비, 야…"
  "세하?"
  "몸을, 못 움직이겠어. 나좀, 일으켜 줘."
  "아, 알았어! 잠깐만!"

  그녀는 아무런 의심없이, 이마에 올리고 있던 오른손을 떼서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녀가 잡지 않았던 그의 반대편 손이 그녀의 복부를 향해 뻗어갔다. 자신에게 뻗어오는 마수의 손길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흩날려라…"

  낮은 목소리의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몸에 검붉은 위상력이 직격했다.
  날선 위상력에 그대로 노출된 그녀는 그대로 힘없이 날아가버렸고, 목가에 두른 그녀의 위상력 안정기가 이세하로부터 나온 강력한 위상력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흡수하느라 한 쪽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그녀는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력한 힘에 밀려난 그녀는 땅을 구를 수밖에 없었고, 입고있는 자켓의 한 부분이 살짝 찢어졌고 지면과 닿아 미끄러진 살갗에는 생채기가 생겼다. 그리고 지면과 충돌할 때 머리부터 땅에 닿았기 때문에, 그대로 그 물리적인 충격이 전해져서 그녀는 신음과 함께 얼굴을 찡그렸다.

  "으큭, 어째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당한지도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금세 현재 사태를 파악해냈다. 아마도 이세하를 흉내낸 차원종의 의식이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리라.
  그렇다는 말은 지금 그녀는 무척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아파도, 그녀는 일어나야만 했다. 억지로 일어서느라 고통이 극심했지만,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일어나야 한다. 일어서면서 그녀는 자켓의 찢어진 어깨 쪽의 생채기가 생긴 팔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척이나 그곳이 아픈 모양이다.

  고통에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남자는 조소(嘲笑)했다.
 
  "후후, 감히 내 몸에 그딴 짓을 하려고 해?"
  "…"
  "잠깐동안 느꼈지만, 너무나 깨끗해서 정말 역겨운 위상력이었다. 덕분에 생각했어, 너 역시 나처럼 만들어주고 싶다고."
  "웃기지, 마."
  "난 매우 진지해. 너도 나처럼, 더럽혀주겠어."
 
  확실히 저 녀석은 본래 세하의 인격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 그의 말투, 모든 것을 그대로 배낀 위조자. 그 사기꾼에게 속아넘어간 그녀는 자신을 바보라고 다그쳤지만, 이미 일은 벌어지고난 후였다.

  문득 시선이 닿은 그녀의 팔.
  다친 팔을 감싸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피가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를 향해 그 역시 시선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보며 혀를 낼름거리며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 시선과 그의 행동에 그녀는 불쾌함을 느꼈다.
 
  어느새인가 검을 쥐고 있는 그는 그녀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을 쥐지 않은 반대편 손에는 그녀를 향해 내뿜었던 그 검붉은 위상력이 맴돌고 있었다.
  흉흉한 살기를 가득띤 미소를 지으며 이세하는 말했다.

  "파괴자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날선 시선만 서로 교환하며,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누구하나 먼저 움직이지 않고, 서로의 움직임을 기다린다. 서로가 판단한 상대의 기량은 상당하다. 막무가내로 덤빈다고 해서 쉽게 이길 정도는 아니다.

  서로의 수를 기다리며, 두 위상능력자는 다시 시작된 싸움을 이어간다.




  안녕하세요, 몇 주만에 뵙습니다.
  오늘내일 중으로 올린다는 약속대로 오늘 올렸네요 ㅋㅋㅋ
 
  분량이 살짝 애매합니다.
  원래는 이번편에 다 끝내려고 했는데, 그러면 분량이 폭주하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다음화로 다음 내용들을 넘깁니다.
 
  이제 완결까지 몇 화 안 남았어요.
  끝까지 함께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엔드크레딧에 들어갈 팬아트를 그려주실 분들을 찾습니다! 본작의 내용 중 생각나시는 아무런 내용을 소재로 삼으셔서 그려주시면 되어요! 많을수록 좋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 읽어주시는 분들, 댓글과 추천도 잊지 않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화도 기대해주세요!

  p.s. 사랑은 깨져야 제맛.


2024-10-24 23:13:2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