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어느 봄날 (5)
수지퓨전콘서트 2016-04-24 5
자,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나는 감기에 걸렸고, 평소에 신경 쓰이던 여자애가 병문안을 왔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는데. 어쩌다보니 내 방에서 자게 되었다.
나는 바닥에서 자고, 그 애는 내 침대에서 자고 있는 중이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막 잠이 들 무렵 그 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호, 혹시 괜찮으면 올라와서 같이 잘래……?”
“…………뭐?”
자, 이제 눈을 뜨자.
어떤 상황인가?
내 눈앞에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이슬비가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죽을 것 같다.
조금만 움직이면 이마가 닿을 것 같은 미묘한 거리.
무엇보다도 코끝을 스치는 새콤한 향기가 나를 자극한다.
“…….”
“…….”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예쁜 눈이다.
핑크빛 머리에 살짝 가려진 예쁜 하늘색 눈에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성분이 존재하는 게 분명하다.
작은 손으로 이불을 움켜쥐고 턱 밑까지 끌어올린 모습은 마치 작은 애완동물 같아서,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뭐하는 거야.”
“아, 아니…… 그냥.”
센스 없는 대답을 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황급히 머리에서 손을 떼고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등을 돌리기 전에 흘끗 이슬비가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본 것도 같았지만, 아마 어두워서 잘못 본 거겠지.
이슬비에게서 등을 돌리고 눕자, 바로 코앞에 침대의 끝이 보인다.
원래 1인용 침대였으니까 둘이 누우면 좁을 만도 하지.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아 다시 돌아누우려니, 이번에는 바닥에 떨어지는 대신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아서 계속 등을 돌리고 있었다.
1분, 어쩌면 1시간일지도 모르는 시간이 지나고, 문득 이슬비가 내 옷을 잡아당겼다.
“……왜?”
“…….”
대답이 없다.
죽은 것 같다.
아마 잠꼬대라도 한 거겠지.
“……이쪽 봐.”
“……뭐?”
“……이쪽, 보라고.”
아마 잠꼬대라도 한 거겠지.
“이쪽 보라니까.”
아마 잠꼬대라도…….
“이쪽 보라고!”
“우와아아아악?!”
갑자기 몸이 끌어당겨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이슬비의 얼굴이 정면에 있었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가깝지 않나 싶은데.
이마는 이미 맞닿은 지 오래고, 이제는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상황이다.
“왜, 왜?”
애써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목에서 나온 소리는 내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높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뭐가?”
뭐가?
설마 시치미를 뗄 생각인가.
“왜, 왜 나를 끌어당긴 거냐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질문하자, 이슬비는 묘하게 부루퉁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몰라.”
모른다니.
상상치도 못한 답변에 내가 넋을 잃고 있으려니, 이슬비가 한 번 더 말했다.
“몰라, 모른다구! 그런 것쯤은 알아서 생각하란 말야이……!”
“그, 그래. 미안.”
혼자 생각해보기로 했다.
혼자 생각해 본 결과, 혹시 내가 떨어질까 봐 배려해 준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뭔가 아닌 것 같지만 이것 외에는 딱히 답이 없네.
그보다, 이거 진짜 괴로워…….
바로 앞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이슬비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게다가 부끄러워서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건 이슬비도 마찬가지인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나 그냥 내려갈까?”
“그, 그냥 여기 있어.”
“……그래.”
부끄럽기는 하지만 이 상황이 싫은 건 아니었고, 이슬비가 내가 내려가는 걸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군말 없이 누워있기로 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슬비가 내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이세하…….”
“……왜?”
“……응, 아무 것도 아니야. 잘 자.”
“……잘 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본인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굳이 물어보는 것도 웃기는 일이겠지.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들기 직전에,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 것 같았다.
아마도 꿈이겠지.
시끄러울 만큼 두근거렸지만 실제로는 조용했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가슴께에 느껴지는 묘하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나는 눈을 떴다.
천천히 눈을 뜬 내가 본 것은 분홍빛 머리와 분홍빛 얼굴의 소녀였다.
분홍빛으로 붉어진 얼굴의 소녀는 이미 눈을 떴고, 잠에서도 완벽하게 깨어있는 상태였다.
내 품안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왠지 모르게 웃고 있는 소녀는 내가 깼다는 사실을 알아챘는지, 그제야 고개를 들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밀쳐서 침대 밖으로 떨어트렸다.
……아파.
“……야, 아침부터 뭐하는 거야.”
“내, 내, 내가 할 소리야! 너야말로 아침부터 앞길이 창창한 소녀를 끌어안고 뭐하는 거야!”
으음, 그러고 보니 어제 내 침대에서 같이 잤지.
아무래도 잠결에 추워서 이슬비를 끌어안은 것 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따뜻하긴 했으니까.
캐릭터 상품화 하면 잘 팔리지 않을까.
이슬비 베개라거나, 이슬비 손난로라거나.
일단 분명히 서유리는 하나 사겠지.
그리고 틀림없이 매일 밤마다 꼭 끌어안고 잘 거다.
“이슬비 손난로라…… 겨울에는 괜찮을지도…….”
“뭐, 뭐?! 나를 난로 취급 한 거야?!”
“아니, 뭐…… 나오면 하나 살까 해서.”
“나올 일 없어! 그보다 그런 걸 본인 앞에서 말하지 마!”
“어째서?”
“그, 그러면 네가 나를 항상 가지고 다니고 싶다는 것처럼 들리잖아!”
“응, 너는 클로저가 아니라 소설가를 하는 쪽이 수입이 좋았을 거라 생각해.”
“죽어버려!”
다행히 실내라 버스는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게임기 파편이 날아왔지만.
그러고 보니 엄마, 녹음기는 고쳐줬으면서 내 게임기는 안 고쳐줬지.
“아, 맞다. 이슬비, 녹음기 가져가.”
“어, 어?! 녹음기?!”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슬비는 당황한 모습으로 팔을 휘두르며 말한다.
야, 휘두르지 마, 맞잖아.
아파, 아프다니까.
“아무래도 어제 게임기 파편하고 같이 네 녹음기도 주워온 것 같은데, 엄마한테 말해서 고쳐놨으니까 이따가 가져가라고.”
“아, 어, 어! ……그, 근데 혹시, 들었어……?”
“……? 들어? 뭘? 엄마가 안에 아무 것도 없다던데?”
“! 아, 아아! 그, 그랬었지! 까, 깜빡했네!”
시간을 보니 어느새 9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이슬비가 있다는 걸 생각해내고 상의를 벗기 직전에 손을 멈춘다.
……엥, 9시?
“야, 이슬비. 너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
“어? 아니, 보통은 6시쯤 일어나는데?”
“그럼 오늘은?”
“오늘도 6시에 일어났는데? 그건 물어서 뭐하게?”
“……그럼 말이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 뭔데?”
“너, 나한테 3시간 동안 안겨 있었냐……?”
“……!”
얼굴이 붉어지고,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저 반응을 보니, 나한테 3시간 동안 안겨 있었던 게 맞구나.
으음, 미안해서 어떡한담…….
“으음, 미안해.”
내가 사과를 할 줄은 몰랐는지, 이슬비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뭐, 뭐가 미안해?”
……?
뭐가 미안하냐니.
“나 때문에 3시간 동안 묶여있었던 거 아니야?”
“마, 맞긴 한데…….”
“3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으면 짜증났을 거 아니야.”
“아, 아니, 그건 뭐랄까…… 나쁘지 않았다고나 할까…….”
"아, 그러냐…… 너도 참 취향 이상하구나."
“내, 내 취향이 어때서? 게다가 내 취향을 욕해봤자 너한테 이득 될 게 없을걸!”
“……그건 또 왜?”
“그거야 당연히 내 이상형이……!”
그러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야, 뭐야? 왜 말을 하다가 말아? 네 이상형이 뭐?”
“몰라!”
“모른다니…… 말 나온 김에 들어나 보자. 네 이상형은 어떤 남자냐?”
“……궁금해?”
“뭐, 굳이 말하자면 흥미는 있어.”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게임기를 켰겠지만, 게임기가 없는 지금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 뭐, 알고 싶다면…… 일단은 검은 머리.”
“호오, 검은 머리인가. 확실히 너 다운 선택이네.”
머리색은 이래도, 이슬비는 꽤나 모범생이다.
애초에 염색이나 화장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검은 머리는 모범적이라는 인식이 있으니까.
애초에 나만 봐도 검은 머리지만.
게다가 서유리도 검은 머리라고?
검은양팀 문제아 중에 반 정도가 검은 머리다.
모범생인 이슬비를 빼면 정확히 절반.
안타깝게도 검은 머리가 모범적인 건 아닌 모양이다.
“또?”
“또, 평소에는 못 미덥지만 자기 할 일은 제대로 하는 사람.”
“흐음, 그건 좀 의외네.”
“의외? 어째서?”
너처럼 깐깐한 성격이면 평소에 못 미더운 남자를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거든.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냥. 또?”
“뭔가 말을 돌린 것 같은데…… 뭐, 됐어. 마지막으로, 나를 신경써주는 사람이면 좋겠네.”
“너, 그, 그건 설마……!”
“……이제 알았어? 이 둔탱이.”
그, 그래.
나도 이슬비의 말을 듣던 도중에 알아챘다.
설마, 설마…….
“이슬비 네가 석봉이를 좋아할 줄이야!”
“죽어버려!”
어? 아냐?
검은 머리에 할 때는 하는 남자.
게다가 이슬비를 신경써주는 사람.
……석봉이 맞는데?
핫, 설마!
“서유리냐!”
“유리는 여자잖아!”
“하지만 네 이상형이 남자라고는 한 마디도 안 했잖아!”
“이 멍청아아아아아아아아아! 죽어버려, 초절정 바보 둔감남!”
배게도 염동력으로 던지면 아프구나.
처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