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夏] 언제나 내 곁에
루이벨라 2016-04-24 9
※ 오랜만입니다. 좋아하는 시 보다가 필받아서 써보았습니다.
※ 세유가 결혼도 하고, 세하는 죽은 상태입니다. 보기 싫으신 분은 뒤로가기.
아침을 장식하는 화사한 햇살 때문에 난 눈을 떴다.
"..."
이 별장에 오고 나서 좋은 사실 하나는 집이 숲으로 빙 둘러싸여있어서 창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에어컨이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기분좋은 자연적인 바람을 맞으며 느리게 가는 오후를 보내는 걸 처음에는 지루하게 생각했지만 이제는 즐기고 있었다. 항상 신서울에서 떠들썩한 하루를 보냈던 나에게 이렇게 시간을 천천히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오후 바람을 맞고 있으면 항상 누군가가 떠올랐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공중그네에 앉아서 히히덕덕거리면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뜨거운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에는 숲속으로 같이 도피를 하고는 했었던 그 사람.
그네는 앉은지 꽤 되어버린 듯 묶여있는 줄은 낡아가고 있었고, 내가 이 집안에만 있는지는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내가 일주일 전에 이 집으로 왔으니 한번도 이 집에서 나가본 적이 없다는 뜻이 되었다.
우울한 생각은 그만하자. 그렇게 우울한 감상에 잠기려고 일부러 휴가를 얻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어느새 소파 위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하긴 우울한 기분을 떨칠려고 냉장고에서 보이는 음식이라는 음식은 거의 다 먹었으니까 포만감으로 인해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로 인해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내일은 아마도 밖에 나가서 장을 봐야하나보다.
지나가는 바람을 타면서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를 들으면 더운 것도 잊을 수 있다고 누군가가 그랬다. 그게 언제였지...아마도 처음으로 이 집에 오면서 덥다면서 투덜거리는 나 때문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이는 파란색 일본풍 풍경을 사가지고 왔다. 풍경에는 귀여운 물고기 그림도 있어서 마치 푸른 바다를 영상시켰다. 내가 달겠다는 걸 굳이 내 키가 저 창문 끝에 닿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면서 자기가 직접 달았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었다.
그 풍경...아직 안 떼고 있었네...
그이가 사가지고 왔던 새 풍경은 몇년동안 자리지킴을 하고 있는지라 낡을 때로 낡아있었다. 낡았기 때문에 새로 교체를 할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키가 닿지 않는다는 석찮은 이유로 그만두었다. 그리고 바꾸기에는 변함없이 소리가 처음처럼 맑았고 시원했다.
-세하야! 왠지 모르게 시원해지는 기분이야!
"..."
이제는 그 말을 들어도 대꾸해줄 사람이 없겠지...
풍경을 달던 그 뒷모습이 영원할 거 같았다. 풍경 소리가 조금 이상하게 흔들리면 귀찮더라도 의자를 들고 와 풍경자리를 다시 매잡던 그 뒷모습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풍경을 만지고 난 후엔 항상 나보고 '다 됐다' 라며 지어준 환한 미소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지금이라도 네가 저 창문 앞에 있을것만 같은데...
넌 여기 없어.
이곳은 신서울보다 공기가 좋으니 당연히 밤하늘도 잘 보였다. 처음 여기로 왔을때는 그 점이 마냥 신기했는데 며칠이 지나자 그것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하는 별자리책이라는 걸 가지고 와서 읽는거 같았다. 세하가 별자리에 관심이 있었나해서 의외였는데 그것도 결국엔 날 위해서였다.
티브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밤만 되면 심심해하는 나를 위해 방금 책에서 얻은 지식을 더듬거리며 말해주는 걸 보면 그랬다. 그리고 모든 계절에 그렇듯 해가 없는 밤은 낮보다 더 춥다. 별자리를 보면서 밤바람이 춥다며 어째서인지 내 옆에 붙어있는 세하를 보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밤바람은 차가웠지만 따뜻했다.
그 후로 밤에도 별을 보고 있는 나를 보면 언제든지 세하가 와서 따스하게 옆에 있어주었다. 이상하게 세하의 목소리는 밤이면 더 달콤하게 들렸다. 낮에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 감성이 밤에는 보인다고 하는게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사소한 것에서도 더 신경을 잘 써주고 짜증같은 것도 별로 안 냈다.
정말 이 사람이랑 결혼을 한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했는데...
예전과 다름없이 밤하늘을 보고 있었지만 뒤로 와서 따뜻하게 날 안겨주는 사람의 체온이나 가디건 같은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접 가디건을 가지고 와서 다시 창가에 걸터앉아 마저 별을 보았다.
이제는 옆에서 누가 무슨 별자리니, 라고 말하지 않아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계절의 별자리는 모르겠지만 여름 별자리라면 자신이 있었다. 매일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듣던 이야기이니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
시작한지 5분도 안되어서 나만이 시작했던 별자리 찾기 게임을 그만두었다. 예전에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같은 별자리만 계속 찾아도 행복했었는데...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 신서울에 있는 슬비에게서 전화가 왔다.
슬비는 잠시 아무 말 없었다. 일주일 전에도 헤어졌지만 적어도 나한테는 벌써 1년이라는 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슬비를 본거 같았다. 내 체감상 시간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 곳은 1년 내내 추억이 가득한 여름이라는 계절이었겠지.
슬비는 나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냐고...? 그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난 그냥 그렇지, 라는 허탈한 대답을 날렸다. 그러자 슬비는 한숨을 쉬며 다시 말했다.
-아프지 말고 푹 쉬다 와. 이틀 후 휴가가 끝나긴 하지만 유리 네가 싫다면 2주...아니, 한달 넘게 거기 있어도 좋아. 그러니까...
"알았어. 고마워, 슬비야."
내가 방금 전 슬비에게 하고 싶었던 '진짜' 말은 무엇이었을까. 목울대까지 차오르다 간신히 삼킨 그 말. 물론 슬비가 고마운것도 사실이었다. 한달 사이에 2명이라는 인원의 공백이 생겨버렸고, 요즘 들어 임무도 많아진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그걸 내색하지 않고 쉬다 오라는 슬비에게는 정말 고마웠다. 고맙기도 했고...
주르륵-
나 사실 엄청 힘들다, 라고 말하고도 싶었다.
불면의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여름이니까 열대야라서 잠을 못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았다. 아까도 말했다. 이곳 밤바람은 추운 편이라고. 창문을 살짝 열면 쾌적한 기분으로 잠을 들을 수 있었다.
요새는 악몽을 자주 꾸면서 일어나는 일이 많았다. 아니, 요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세하가 죽은 직후, 그러니까 한달 전부터 계속 되는 현상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수면 시간이 줄어든거 뿐이었다. 잠을 자도 악몽을 꾸지도 않았고 그저 피곤에 지친채 잠이 든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2주 전부터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연한 편이었다. 예를 들면 장례식 같은데서 내가 상복을 입은채 울고 있다거나 그런거 말이다.
구체적인 악몽이 된건 불과 4일 전이었다. 분명 그때 그 현장에 내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세하가 죽는 장면을 내가 직접 본다던지 그런거 말이다. 이건 분명 꿈이라는 건 아는데, 항상 일어나 보면 내 베갯잇은 축축해져있었다.
그러고보니 혼자 잠드는 밤이 요 근래 한달이 참 오랜만이었다. 그때까지는 옆에 세하가 같이 있어주었으니까. 열대야가 푹푹 찌는 한여름의 신서울 집에서도 내가 좋다며 딱 달라붙어있었다. 그때는 뭐가 좋았다고 그렇게 잘때만이라도 붙어있을려고 안간힘을 썼는지 모른다. 슬비 말에 의하면 우리가 너무 붙어다녀서 눈이 시렸다, 라는 말을 했는데, 잘때에도 그렇게 붙어있어야했을까.
세하는 거짓말쟁이다.
분명 이번 임무 멋지게 성공하고 돌아온다해놓고서, 그러지는 않았다. 임무는 어쨌든 성공적인 편이었다. 테러리스트의 기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니까. 다만 희생자 1명도 낳으면서 말이다.
분명 세하가 죽은건 안다. 머릿속으로는 분명 아는데...영정 사진, 추모 메달, 추모 상장, 장례식장, 화장터, 납골당 등등...
여기로 오니까 세하가 아직도 살아있는거 같잖아. 계속 내 곁에서 있는거 같잖아. 지금이라도 우는 내 모습을 보면서 말없이 날 안아주어서 위로해줄거 같잖아. 내 옆에 있는거 같은데, 네 모습이 보이지 않아.
불면의 밤은 오늘도 계속되었다.
* * *
언제나 당신 곁에 내가 있습니다.
발코니의 푸른 풍경이 흔들릴 때
바람이 한숨 지으며 지나가고 있음을
당신이 믿는다면
내가 푸른 나뭇잎 사이에 숨어
한숨 짓고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등뒤에서 알 수 없는 희미한 소리 울릴 때
아득한 목소리가 당신 이름을
부르고 있음을 믿는다면
당신 주위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내가 부르고 있음을 알아주십시오
한밤 중에 입술이 바짝 마르고
두려움으로 심장이 두근거릴 때
보이지는 않지만 당신 곁에서
내가 숨쉬고 있음을 알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