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나] 자각몽

황혼달빛 2016-08-22 6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두 개의 세상을 살고 있었다.

 

“오늘 서울의 평균 기온은 28도로 제법 쾌적한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지역별 강수 확률은 이와 같은데요. 남쪽의 일부 지역은 나가실 때 우산을 챙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꽤 어린 시절부터 꾸던 꿈이 있었다. 꿈에서 나는 꿈이라는 것을 알고,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되어 현실과 비슷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자각몽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이 꿈은 당시의 내게 있어선 그저 조금 신기한 꿈일 뿐이었다.

 

“옆집 사는 학생이지? 나는 이쪽 사는 사람인데. 자, 여기. 이번 부녀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이야. 읽어 보고서 옆집에도 건네줘. 부탁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꿈속의 현실이 변하기 시작했다. 차원종이라 불리는 외계 생명체가 침공해 왔고 그에 대항해서 위상 능력자라 불리는 초능력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그 위상 능력자 중 한 명이었다. 위상력을 자각했던 그 날, 전 세계에서 차원의 문이 열렸다.

차원전쟁의 시작이었다.

 

애초에 어느 쪽도 내게는 현실과 마찬가지였다. 저쪽의 경우 꿈이라는 자각이 명확하게 있었기에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쩌다가 꾸게 된 일반적인 꿈에서 느꼈던 꿈 특유의 비 인과적인 상황이 저쪽에는 전혀 없었다.

모든 일은 인과에 따라 벌어졌고 갑작스레 얻게 된 위상력이라는 초능력도 그 나름의 원리를 가지고 받게 된 것이었다. 그랬기에 저쪽을 꿈이라고 인정하면서 현실과 같다고 생각하는 굉장히 모순적인 상황이었지만 내 안에서는 확실하게 성립되었다.

그렇게 나는 두 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쪽의 나는 평범한 학생. 그쪽의 나는 위상 능력자.

어느 쪽에도 불만은 없었다. 저쪽은 초능력자였지만 전쟁상태였고 이쪽은 평범하지만 평화로운 곳이었으니까. 두 개의 삶은 오히려 내게 활력을 넣어주었다. 저쪽의 삶은 내가 노력하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이쪽의 삶은 전쟁의 목표로 하는 평화를 각각 보여주면서 의욕을 고취시켰다.

 

“1204호지? 경비실에 소포 있으니까. 빨리 가져가도록 해.”

 

클로저란 유엔 산하의 기관 유니온에서 발표한 위상 능력자에 대한 총칭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전장에서 활약하는 위상 능력자에 대한 총칭이었다. 그들은 전장에 나서, 차원종을 쓰러뜨리고 차원문을 닫았다. 그들의 존재는 희망이었고 내게도 충격이었다. 두 세계를 살게 되면서 30년도 넘는 삶을 살아온 나도 이렇게 무서워 떨고 있는데 그들은 맞서 싸우고 있었다. 나보다도 더 어린 나이의 아이조차도 그랬었다.

그랬기에 나도 클로저에 자원했다. 거기서 교관을 만나 클로저로서의 역량을 높여갔다. 교관은 존경할만한 인격자로 육체 나이로는 어린 편인 내가 전장에 참여하는 걸 항상 꺼림칙하게 여겼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나를 돌봐 주었다.

그쪽에서도 이쪽에서도 그렇게 헌신 받은 적은 처음이라 그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는 데에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팀 울프팩의 일원으로서 소중한 사람들이 늘어갔다. 그렇다 할지라도 가장 소중한 사람은 그였다. 이곳은 전장이었고 그와 나는 병사였기에 사랑 같은 달콤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가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은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행복했다. 나를 소중히 여겨주고 필요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했다.

울프팩의 클로저, 티나로서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저쪽의 내가 죽었다. 그날 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밤중에 일어나 ** 듯 날뛰었다. 아니, 실제로도 어느 정도 미쳐 있었을 것이다.

그쪽의 나는 차원종 간부에게 고문당했고 마지막에는 그 괴물의 손이 내 심장을 잡고 쥐어 터트리는 감촉까지 생생하게 느꼈기에 공포와 아픔에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무엇보다 나의 반생이었던 그쪽의 내가 죽었다는 사실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뒤로 내 특별한 자각몽을 꾸는 일은 없었다.

 

 

“꽤... 덥네...”

 

일기예보와 달리 밖의 날씨는 상당히 더웠다. 잠시 걷던 것을 멈추고 근처에 있는 그늘져 있는 벤치에 앉았다. 어차피 특별히 빨리 갈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나는 휴학생이고, 특별히 일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클로저 티나로서의 습관으로 집안에 오래 박혀있으면 답답해질 뿐이었다. 티나는 일류 클로저가 되기 위해서 항상 체력단련을 하거나 위상력을 다루는 훈련을 하곤 했으니까. 덕분에 지금의 나도 건강해지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씁쓸한 잔재일 뿐이었다.

그 꿈을 꾸지 않게 된 지 벌써 1년이 넘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오늘은 티나가 죽은 지 내 기준으로 1년이 된 날이었다.

비록 꿈이었고 티나 또한 나였지만, 그래도 분명 티나는 나의 반생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기일을 기리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비록 이쪽과 저쪽은 다른 세계였지만 기본적인 지리는 거의 비슷했다. 덕분에 티나의 기억을 더듬어 그녀가 죽은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1년 전 이맘때.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도착한 그 장소는 정말로 허무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 골목, 거리가 티나의 기억과 거의 비슷했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일이라 그런지 쓸데없는 회상이 많네....”

 

챙겨둔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이상할 정도로 과거에 대한 회상이 많은 날이었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라는 걸까?

 

 

 

 

“무슨 일이지, 트레이너.”

 

티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뻐꾸기의 화상에는 티나의 약간 공허한 눈동자가 비쳤다.

트레이너라는 호칭에 속이 쓰렸지만 별수 없었다. 현재 그녀의 명령권자는 현재 홍시영 감시관이었고, 나는 그저 처리부대의 리더일 뿐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에게만큼은 계속해서 교관이라 불리고 싶었다. 하물며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지금이라면 더욱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무슨 일이지 티나?”

 

“이제 곧 칼바크 턱스의 연구소의 세 번째 잠금이 해제된다. 교관은 내게 당신과 동행해서 연구소 주변을 탐색하라 지시를 내렸다.”

 

“그렇다면 변종 스컬 퀸은 누가 처리하는 거지?”

 

“그쪽은 나타와 레비아가 맡는다. 하피는 교관과 연구소 내부 탐색. 다른 한 명은 여기서 대기하다 이상 사태가 벌어지면 처리하기로 했다.”

 

어쩐지 갑작스럽게 복귀하라 명령하더니 이것 때문이었나. 일단 크리자리드 타입에 대한 조치는 취해 놓았으니 티나와 동행해도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어쩐지 꺼림칙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홍시영 감시관의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연구소 주변에 무슨 이상 현상이 일어날지 모르니 살펴보는 건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변종 스컬퀸 타입에 관한 일도 자신이 억지로 밀어붙였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 할 것이다.

 

“알겠다. 그럼 먼저 연구소 쪽으로 향하고 있어라. 합류 포인트는 뻐꾸기를 통해서 알려주도록 하지.”

 

“이해. 그럼 출발하겠다.”

 

 

 

“... 여기서 잠시 기다려라. 곧 합류하겠다.”

 

“이해. 대기하도록 하겠다.”

 

티나에게 지시를 내리고 티나에게 붙여놓은 뻐꾸기를 자동 운행 모드로 변경시킨 뒤 구로역으로 보냈다. 벌처스의 제품인 만큼 상당히 튼튼했지만, 상대는 칼바크 턱스였다. 혹시 모를 함정에 걸리게 되면 쉽게 부서질 가능성이 높았고, 그게 아니어도 구로역 보내 놓으면 거기서 대기 중인 대원에게 만약의 사태 때 상황을 전할 수 있었다.

티나에게 다가가면서 솔직히 마음이 꽤 불편했다. 그녀를 늑대개의 일원으로 받았을 때 그녀에게 심어놓았던 살인을 하지 말라는 명령어 때문에 그녀가 자신이 살인을 거부하는 게 혹시 모를 감정의 파편이 아니라, 명령어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또한 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것이 태도에서 느껴졌다. 그녀는 감정 기복이 적은 만큼 태도가 변하면 정말 쉽게 알 수 있었다. 2에서 1이 되는 건 알기 힘들지만 1에서 0이 되는 건 알 수 있으니까.

결국, 내가 초래한 사태지만 그렇기에 더욱 답답했다.

아니, 신경 쓰지 말자. 일단은 임무를 우선시하자.

티나에게 다가가는 사이 다시 한 번 연구소의 주변 지형을 암기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에 이용할 진입로와 퇴로를 설정해 놓을 때쯤 합류 포인트에 도착하게 되었다.

 

“특별히 정비가 필요한가 티나.”

 

“필요하지 않다. 현재 만전의 상태다.”

 

“좋아. 그럼 돌입하도록 하지. 내가 선두, 네가 5보 후방이다.”

 

“이해했다.”

 

어쨌든 그녀와 오랜 시간 일 해왔기에 둘의 호흡은 좋은 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둘이라면 어느 정도 선이라면 처리할 수 있다.

 

 

 

“홍시영 감시관. 어떻게 되고 있소?”

 

“이쪽은 이제 막 진입했어요. 아직까진 특별한 건 없군요.”

 

“알겠소. 이쪽도 특별한 징후는 보이지 않고 있소.”

 

우선 하피가 있으니 저쪽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였다. 연구소 침입은 그녀에게도 생소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뭐가 위험한지에 대한 감 정도는 있으리라. 그보다 중요한 건 다른 한쪽이었다.

 

“특경대의 채민우입니다.”

 

“음? 채민우 경감. 그쪽에 대기 중이던 우리 대원은 어디 가고 당신이 받았소?”

 

“잠시 주변에 차원종이 나타나서 소탕하러 갔습니다. 혹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고 이것을 제게 맡기고 갔습니다.”

 

“그렇군. 알겠소. 그렇다면 나타 쪽 일행이 어떻게 되었는지 연락받은 것 있소?”

 

“아직 연락받은 것은 없지만, 그 주변 위상 변동률이 낮아지는 것을 보아 처리에 성공한 모양입니다.”

 

이쪽도 별 문제 없이 처리한 모양이었다. 곧 홍시영 감시관이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별 이상 없이 돌아오면 이번 구로에서의 일은 끝나게 된다.

“....”

 

슬쩍 티나를 보자 평소처럼 부지런히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홍시영 감시관이 오기 전과 똑같아 나도 모르게 다가가 말을 걸려다 발을 멈추었다.

차원전쟁의 말기, ** 말았어야 할 것을 봤던 그 날 이후 벌처스의 개로서 시체처럼 사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적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뼈아팠다. 처음에는 그 아이의 편린으로서 봤지만 이제 와서는 티나 그 자체가 내게 위안이 되고 있었다. 만약 홍시영 감시관이 떠나게 된다면 늑대개의 일원으로서 다시 명령권자가 내게 돌아오겠지만 단지 그걸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나, 조금 고민됐다.

 

“.... 트레이너.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

 

“어디지?”

 

 

처음에는 얼른 인지되지 않았다. 티나가 가리킨 방향에서 묘한 위화감이 있었지만 명확한 무언가를 느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감각과는 반대로 직감은 내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현재 매우 위험한 상황이고 조치가 필요하다. 그 직감을 믿고 곧바로 홍시영 감시관에게 연락했다.

 

“이쪽은 트레이너요. 홍시영 감시관. 내 말 들리시오?”

 

“이쪽은 홍시영이에요. 무슨 일이죠. 트레이너?”

 

“지금 연구소 외벽 쪽에서 정체불명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소. 다행히 그쪽에 하피가 있으니 빠져나오는 데 어려움을 없을 것이오. 지금 상황이 굉장히 안 좋은 쪽으로 변할 것 같으니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길 권하고 싶군.”

 

“알겠어요. 안 그래도 찾던 것은 찾았으니까요.”

 

“그럼 이쪽도 상황을 지켜보다가 그쪽이 나오는 데로 바로 이탈하겠소.”

 

“그렇게 하도록 해요.”

 

홍시영 감시관과의 연락을 끊고 티나가 가리켰던 쪽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자 그제야 처음으로 일렁임을 인지했다. 차원의 문이 열리는 징조였다. 위상력의 변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칼바크 턱스는 차원문과 차원에 관련된 지식과 기술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저기서 어떤 괴물 같은 것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몰랐다.

 

“티나, 일단 뒤로 물러서라. 섣불리 자극하지 말고 저격태세를 취하고 있어라. 뭔가 튀어나왔을 때 바로 공격하도록.”

 

“이해. 그럼 이탈하겠다.”

 

티나는 평소처럼 허수공간을 이용한 끈을 만들어 사이킥 무브로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저곳 정도면 안전하겠지. 티나가 착지하는 지점을 보고서 안도했을 때, 갑작스럽게 착지 지점에서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거대한 공허였다. 공간이 유리조각처럼 부스러져 그 너머의 검은 공허를 보였다. 빛무리나 거대한 문 같은 차원문 타입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더욱 위험했다. 저것이 배출하는 타입의 것이 아니라는 최소한의 확증이 없으니까.

 

“티나! 이쪽으로 끈을 보내!”

 

티나도 검은 공허를 눈치챘는지 재빨리 방향을 틀어 내게 허수공간의 끈을 쏘아냈지만, 그것이 채 내 몸에 닿기도 전에 검은 공허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내버려 둘까 보다!”

 

재빨리 달려나가 허수공간의 끈을 잡았다. 덕분에 티나가 곧바로 검은 공허로 빨려 들어가는 사태는 막았지만 흡입력이 생각보다 강했다. 전력을 다하고 있음에도 끌어오기는커녕 끌려가는 것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것이 언제 사라질지 몰랐지만 이대로는 둘 다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쨍그랑.

 

갑작스런 유리 깨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방금 전 보았던 일렁임에서 공간이 깨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저쪽의 검은 공허와 비슷한 타입의 차원문이겠지.

그리고 같은 종류의 차원 문이라면 이쪽에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쨍그랑, 쨍그랑.

 

예상대로 등 뒤의 공간이 깨질수록 등 뒤에서 흡입력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나와 저쪽 공허와의 힘이 대등이었다면 이제는 이쪽이 더 우세하다. 이대로 이쪽 차원문의 흡인력을 이용한다면.

 

“....레이너! 트레이너!”

 

티나가 외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나는 너의 교관으로서 내 훈련병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러니 이런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쨍그랑, 쨍그랑. 와장창!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등 뒤의 흡인력이 어마어마하게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에 저항하기는커녕 최대한 순응하면서 허수공간의 끈을 잡아당겼다. 예상대로 티나는 검은 공허의 흡인력이 미치는 공간에서 점차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티나가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등 뒤에 끈적한 무언가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이것이 그 검은 공허....

 

“트레이너!”

 

티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내 전신에 끈적이는 것이 덮였다.

 

 

 

검은 공허는 트레이너를 삼키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완전히 없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티나가 등 뒤를 돌아보자 그녀를 삼키려고 했던 검은 공허도 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한 명을 삼키고 나면 사라지는 타입의 함정이었던 모양이었다.

 

“.....트레이너.”

 

주저앉은 티나의 내부에서는 에러 다발이 산발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구동부에 문제가 없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으며 안구 세정제를 사용하려 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흘러내렸으며 인공지능의 사고연산도 거의 멈췄다. 티나의 상태를 점검하던 시스템도 ‘에러 해결 불가.’ 라는 판단을 내리고는 스스로 작동을 정지했다.

즉, 전혀 기계답지 않은 상황이었다.

티나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트레이너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 응? 뭐지? 트레이너? 교관님?”

 

백일몽인가...? 갑작스럽게 꿈의 감각이 느껴졌는데?

 

 

 

 

분명, 그렇게 끝났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각몽인 것은 같았지만, 이전과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어두운 방 같은 곳에 갇혀 창밖을 내다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나와 닮은 아이가 있었다. 나는 먼 곳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듯한 시야와 그녀의 눈으로 직접 보는 시야 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꿈을 인정하면서 현실임을 깨달았었기에 이 모순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아이 악령에게 적응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녀는 클로저를 죽이는 암살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여과 없이 봐야 했었다.

이전과 달리 꿈을 꾸는 것은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잠을 안 잘 수 없었고 부디 이번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그러다, 그를 보았다. 내 기억보다 나이가 들고 상처도 생겼지만, 여전히 그였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 나의 교관.

 

 

 

“크윽, 여긴? 어떻게 된 거지?”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눈앞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 남자가 허공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왔었다. 그리고 당혹과 낭패가 가득한 그 남자의 목소리는 매우 익숙한 목소리였다.

 

“교관.... 님?”

 

방금 전 백일몽에서 사라졌었던, 그리고 오늘 온종일 생각하고 있었던 그 사람. 교관님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 남자는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다가가는 것이 주저되었다. 그는 티나의 교관이었다. 그는 꿈속에만 있던 사람이었다.

내 꿈과 내 현실.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본인인걸까, 아니면 닮은 사람인걸까.

 

“티...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짓고선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런 그의 반응에 같이 다가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말을 걸거나 응답하지도 않고 그저 이를 악 물고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현실에 침식한 꿈에 대한 두려움, 가장 소중한 사람을 다시 만난 반가움, 기쁨. 그를 꿈으로 생각했던 나에 대한 자책감, 이대로 만나도 되는가에 대한 회의, 그럼에도 그가 가까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모든 것이 뒤섞여 다가오는 그를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서 세 걸음을 앞두고 그대로 쓰러졌다.

 

“....어떻게 해야할까.”

 

당장이라도 집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주고 싶은 욕구와 그가 정말 나의 교관님인지 티나의 무덤가에서 확인해 보고 싶은 욕구가 충돌했다. 잠시 동안 망설이다가 절충안으로서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벤치에 옮겨놓았다. 여기서 이 사람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그 뒤에 움직임에 무리가 없어 보이면 예정대로 성묘를 하러 가기로 했다.

 

 

벤치로 남자를 운반하자 예상외의 문제가 있었다. 남자는 키가 상당히 큰 편이기에 벤치에 몸을 전부 눕힐 수가 없었다. 교관님에게 배웠던 구급 법에 따르면 그는 단순 탈진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편한 자세로 눕혀놔야 했다.

 

“.... 별 수 없지.”

 

잠시 고민하다 그를 나무그늘 아래 그나마 푹신한 곳에 눕히고는 허벅지로 머리를 받혔다. 흔히 말하는 무릎베개였지만 설령 교관님이 아니더라도 굉장히 닮은 사람이다 보니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그가 불편한지 아닌지만 신경 쓰였다.

 

“나이.... 드셨네....”

 

남자를 내려다보자 이전보다 더 선명해진 주름과 머리카락 사이로 가려져 있는 화상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필사적으로 살아왔다는 증거였다. 티나가 살아있을 때는 없었던 것들이었다.

뺨에 손을 대자 온기가 느껴졌다. 당신이 진짜이건 가짜이건 지금 내 곁에 숨을 쉬고 살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온기였다. 평화로운 기분과 동시에 가슴에서 둔탁한 고통이 느껴졌다.

꽤 괜찮은 바람이 불고 있다.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이렇게 오후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티나로서 교관님과 같이 있었던 때는 한창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였으니 이렇게 느긋하게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었다. 이거야 말로 내가 가장 바라던 전쟁이 끝난 뒤의 일상이었다.

 

 

 

“으....윽......”

 

한 시간쯤 지나자 남자는 신음성을 냈다. 전장에서 얻은 습관으로 쓸데없는 소리는 내지 않던 사람인데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걸 보아 정말 몸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새삼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남자는 곧 눈을 떴다.

 

“일어나셨나요?”

 

“티...나? 아니, 하지만, 머리카락이....”

 

그답지 않게 버벅 거리며 말을 이었다. 잠에서 깨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머리가 잘 돌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황해 하며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그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눕게 했다.

 

“당신이 제게 궁금한 것도 제가 당신에게 궁금한 것도 많이 있지만 일단은 성묘를 끝내게 해주세요. 그 뒤에 다시 이야기해요. 일단은 안전하니까 걱정하지는 말고요.”

 

“... 그래, 그러도록 하지.”

 

내가 그를 잠정적으로 교관님이라 생각하는 것처럼 그도 티나와 닮은 나를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20대가 되어버렸고 위상력이 없기에 평범한 검은 머리카락이지만 티나와 나는 기본적으로 동일인이니 그가 나를 특별하게 여겨도 이상할 것 없었다.

이제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기도 했고 움직이는데 지장도 없어 보여 다리 위의 머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관님은 이런 방면에 굉장히 무감각했기에 그동안 내 다리를 베고 잤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일절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금 아쉬운 기분을 느끼며 그를 데리고 원래 목표로 했던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티나가 죽었던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차원전쟁 때 상당히 많은 건물과 거리가 파괴되어 재건된 신서울과 현재 이곳의 서울은 당연하게도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이 부근만큼은 신서울이나 서울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여긴....”

 

얼핏 들린 그의 중얼거림에 그가 교관님이라는 확신이 섰다. 내게도 교관님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소이니 이곳에 오면 분명 반응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 예상대로 교관님은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곧 도착하게 된 곳은 인적이 드문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가방에서 소주와 꽃을 꺼내다 놓았다.

나는 이곳에서 죽었다.

 

“그 때, 이곳이었어요. 교관님과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그곳에서 차원종 간부에게 고문 받고 여기서 심장을 뜯겼어요.”

 

그 감촉은 아직도 생생했다. 온몸이 박살나서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손이 내 심장을 직접 움켜진 감촉은 고통 이전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체험이었다. 그나마 곧바로 뜯어서 다행이었다고 할 정도로 트라우마가 된 감촉이다.

떨리는 손으로 소주를 따고 적당히 술을 뿌렸다. 내가 나를 추모한다는 웃기지도 않은 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꽤 편해졌다. 반쯤 남은 소주를 교관님에게 넘기자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남은 절반을 주변에 뿌리셨다.

“너는.... 누구지?”

 

빈 소주병을 든 교관님은 혼란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물어보았다. 간단하지만 핵심을 찌른 질문이었다. 나는 티나도, 위상능력자도 아니지만 티나는 나였으니까. 설명을 해줘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얼버무려야 할까. 조금 고민되었다.

 

“그 때 나이가 15살? 16살? 아,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직전이었으니까 16살이었겠네요. 여기 기준으로 아직 1년 전의 일이네요.”

 

결국 얼버무리기로 결정했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가 믿어줄지도 의심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내게 있어서 그가 꿈속의 존재였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지 몰라 무서웠다. 그는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기에는 무섭다.

 

“현재 여기는 서기 2010년, 평화로운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해요. 교관님.”

 

 

 

 

“일단 앉아서 쉬고 계세요.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걸 준비할게요.”

 

결국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억지로 끌고 오듯 내 집으로 교관님을 데려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와 같이 있는 것이 거북한 듯 했지만 휴식을 제대로 취해야 만약의 사태에 움직이기 편하고 이곳의 연고가 없는 상태에서 공권력과 마찰이 생기면 귀찮아 질 수 있다는 설득에 결국 납득하고 같이 집으로 오게 되었다.

정말 무드라고는 조금도 없는 **신청이었다. 교관님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일반 가정집이 오랜만인지 굉장히 어색해 하는 교관님을 소파에 적당히 앉히고는 부엌으로 가 최대한 빠르게 할 수 있는 메뉴로 만들기로 했다. 달걀 프라이에 스팸? 가장 무난하지만 여자로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대접하는 자리에서 그래도 될까 싶었다. 그렇다고 국을 끓이거나 거하게 차리기에는 재료도 부족하고 시간도 없다. 잠시 고민하다가 주먹밥을 만들기로 했다. 재료는 비슷하지만 적어도 프라이에 스팸보다는 좀 더 손이 가는 편이니 자취생같이 느껴지진 않겠지.

김치를 볶고 스팸을 구우면서 참치 캔을 하나 따고 마요네즈를 뿌렸다. 밑 재료 준비가 끝나자 곧바로 밥을 푸고서 소금을 적당히 뿌린 뒤 밑 재료를 넣고 주먹밥 모양으로 뭉쳤다. 그 뒤에 맛김을 감싸면 적당히 볼만한 주먹밥이 완성되었다.

특별한 기교도, 재료도 없었지만, 항상 모독스러운 맛의 전투식량만을 선호했던 교관님이라면 이 정도라도 혀를 녹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식사하세요.”

 

“.....”

 

열 개쯤 뭉쳐놨을 때쯤 교관님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수상하다고 내 요리를 먹지 않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곳에 오지 않았을 사람이다 보니 대답이 없는 건 이상했다. 슬쩍 거실 쪽을 보자 교관님은 소파에 앉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교관님!”

 

보통 사람이었다면 좀 다가가서 깨웠겠지만, 교관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부엌에서 불렀다. 예상대로 교관님은 잔뜩 긴장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항상 전장에서 살다보니 정말로 안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면 쉽사리 긴장을 풀지 않았었다. 다만, 그 습관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그의 시간으로 차원전쟁이 끝난지 18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아직도 전장에서 살고 있다.

 

“밥 다됐어요. 식사하세요.”

 

“.... 아, 그래. 고맙군.”

 

교관님은 내 말에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경계 태세를 풀고 식탁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냥 재워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지만 내가 보았을 땐 이쪽으로 넘어온 탓인지 기력이 꽤 쇠한 듯 했다. 적당히 먹이고 재워야 좀 더 빨리 회복하리라.

 

“.... 이건, 별로 효율적인 식사는 아니군.”

 

“교관님은 언제나 맛 대신 영양을 우선시 했으니까요. 이곳에 있는 만큼은 좀 맛있게 드세요.”

 

“... 그래, 알았다.”

 

그 뒤로는 말없는 식사시간이었다. 준비해 놓은 주먹밥과 물을 먹고 마시며 조용히 시간이 지나갔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교관님은 효율이 떨어진다고 타박했었지만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잘 드셨다. 가끔 교관님의 광대가 가끔 움찔 거리는 걸 보면 확실히 맛있긴 한가보다. 티를 안내려고 노력했었지만 가끔 지수씨가 입에 사탕을 넣어줄 때도 저런 반응을 보이곤 했었다. 그게 또 귀엽다고 엄청 웃으셨었지.

 

“...뭐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교관님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자 알겠다고 하고 넘어가셨지만, 은근히 신경 쓰였는지 입 주변을 열심히 문지르셨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식사가 끝나자 교관님은 곧 다시 잠드셨다. 밥 먹고서 바로 잠들면 소가 되어버린데요, 하고 농담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곳으로 넘어온 것도 있고 평소에도 피곤에 절어있는 사람이었으니 그대로 자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다행히 추운날도 아니니 굳이 이불이 없어도 감기에 걸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교관님이 깨지 않게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다시.... 만났어.... 정말로 교관님이야....”

 

가슴을 옥죄는 감정에 주먹으로 가슴을 꾹 누르며 목소리를 죽였다.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정말로 기쁜 일이니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그저 가슴을 누르고 입술을 깨물며 소리와 감정이 흘러나가지 않게 조심할 뿐이었다.

평생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가장 소중한 사람을 만났다. 그것이 더 없이 행복해서 웅크려 감정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니 주위가 어슴푸레 밝은 새벽녘이었다. 무시하고서 다시 잠들려고 했지만 으레 그렇듯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서 웅크렸던 몸을 펴고 한숨과 함께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는 졸려서 휘청거렸지만 막상 볼일을 다 보고나니 잠이 다 깨버렸다. 막상 침대에 누우면 금방 잠이 들.....

 

“큭...”

 

“소리내지마라. 여긴 어디지? 무슨 목적으로 날 이곳으로 데려왔나.”

 

화장실의 불을 끄자 사각에서 교관님이 나를 기습했다. 오른손으로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목을 조르고 왼손으로는 내 오른팔을 붙잡고 발등을 밟아 다리도 쓸 수 없게 해놓았다.

사자 같은 악력으로 나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른 위협이 없는지 찾고 있었다. 한 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목이 졸린 시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겠지만 교관님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대충 예상이 되었기에 몸에 힘을 빼고 대답 하겠다는 의미로 봉쇄되지 않은 왼손으로 목을 잡고 있는 손을 툭툭 쳤다.

내가 저항하지 않고 대답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것을 알았는지 목소리만 겨우 나올 정도로만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아직 잠이 덜 깨신 것 같네요. 여긴 안전해요. 확인해보셔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진정하세요. 여기에 당신의 적은 없어요.”

어떻게든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말을 하자 점차 목을 조르는 힘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아까 화장실을 사용한 것 때문에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어났고 평소와는 너무 다른 풍경에 평소보다 배는 경계했던 모양이었다.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상황인식을 하도록 유도하자 다행히도 여기가 어디인지 떠오른 모양이었다.

목을 조르고 있던 오른손을 조심히 치우고 교관님을 품에 안았다. 내가 적이 아니라는 것 까진 인식했지만 평소보다 높아진 경계의식은 겨우 피아식별 정도만 가능할 뿐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지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조금 진정되셨나요? 계속 긴장하고 계시고 잠에 덜 깨셔서 잠시 헷갈린 것뿐이에요. 여기는 안전하니까 조금 더 마음을 가라앉혀 주세요.”

 

“.....미안하다.”

 

“아뇨, 괜찮아요. 저도 그 때 같이 있었으니까. 언제 어디서 누군가 덮칠지 모르는 상황의 연속이었잖아요? 빠른 대처는 당연한 거죠. 일단 행동하고 생각해야했던 상황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등을 토닥이며 계속 말을 걸자 드디어 교관님의 몸에서 긴장이 풀린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딱히 뭐라 할 수 없었다. 생존을 위해 몸에 배인 습관이었으니까. 그게 당연한 곳에서 지내왔고 갑작스레 이곳으로 왔으니까.

 

“..... 미안하다. 다친 곳은 없는 건가?”

 

“이런, 괜찮다니까요. 그보다 가서 한숨 더 주무세요. 아직 이곳으로 건너온 후유증과 피로, 다 안 풀리셨죠? 저쪽에 있는 약병에 수면 유도제가 들어있으니까 드시고 더 주무세요. 교관님께 필요한 건 휴식이에요.”

 

“.... 그래, 알았다.”

 

껴안던 것을 풀면서 억지로 떠밀자 교관님은 살짝 비틀거리며 식탁위의 약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물도 없이 여러 알을 삼키고는 방금 전까지 자고 있던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이번에는 잠들기 전에 이불과 베개를 건네주고서 화장실로 돌아왔다.

 

“콜록, 콜록!”

 

어쩌면 아직 잠들지 않았을지도 몰랐지만 이젠 한계에 가까웠기에 세면기를 붙잡고 계속 기침을 했다.

공기가 부족해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흐릿해지고 침과 눈물이 줄줄 흐를 때쯤에야 기침이 멎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체감상 5분은 넘었던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세면대에 기대서 몸을 일으키자 거울속의 내가 보였다. 예상대로 목 주변은 새빨갛게 변했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 그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거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으며 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심호흡을 하면서 어떻게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자 주변이 조금 보였다. 오른손을 너무 강하게 잡아 손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잘 펴지지 않는 왼손으로 천천히 펼치자 갑작스레 피가 통해 따끔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교관님도 교관님이지만 나도 참 미련하다 싶었다. 그래도 그 사람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크게 다친 곳은 없었고 이런 모습을 보여 줘봤자 쓸데없는 걱정과 불안만 키울 뿐이었으니까.

악령 탓에 사게 된 수면 유도제가 도움이 될 날이 있을 줄은 몰랐다. 최근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니 괜찮아졌지만 한동안은 꿈을 꾸는 게 무서워 잠을 ** 못했었으니까. 애초에 사람을 죽이는 게 나쁜 거니까 고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지만.

 

“....다시 잠들긴 글렀네.”

 

호흡이 진정되고 나서 피로감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왔지만 이미 잠은 완전히 깨버렸다. 아무래도 많이 이르긴 하지만 아침 찬거리나 사러가야겠다. 슬슬 해가 뜨기 시작하니 하나, 둘 정도는 열고 있겠지.

..... 적어도 전장이 떠오르는 영양으로 충만한 음식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내가 죽은 이후로 최초로 찾아온 평화일 테니까. 어떻게든 지금만큼은 전장을 멀리 하게 하고 싶었다.

 

 

 

수면 유도제로 꽤 늦게 일어날 거라 예상되었고 아침부터 조금 기름진 걸 먹는다고 탈이 날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아침은 평소보다 좀 더 손이 가는 것들로 준비했다. 예상대로 교관님은 별다른 불평 없이 아침을 드셨다. 이번엔 어제보다 더 광대가 움찔하는 게 잦아서 좀 더 맛있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오늘 새벽의 일은 다시 한 번 사과하지. 미안했다.”

 

“아뇨, 괜찮아요. 제가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어야 했는데 교관님을 잠을 깨워서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한걸요.”

 

“아니, 이번 일은 내 실책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요구하도록. 사죄의 뜻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돕겠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 문득 교관님의 옷차림에 눈이 갔다. 꽤 맵시 있는 양복이었지만 이쪽으로 건너오면서 꽤 많이 망가져 있었다. 거기다 애초에 저 옷은 위상 섬유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그런 옷을 입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언제든 위상력을 사용할 상황을 대비하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클로저 때 입어보았지만 위상섬유로 만들어진 옷은 일반 옷과 감촉이 좀 달랐다. 옷을 갈아입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을 덜 수 있을 것이다. 교관님에게서 전장을 연상시키는 건 전부 치워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애를 써도 결국 전장으로 돌아갈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더 잊게 해주고 싶었다.

 

“그럼, 옷을 사러 갈까요?”

 

 

 

딱히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쇼핑할 때 꼼꼼하게 보는 쪽이 좋았다. 가격과 디자인을 전부 따지면서 여러 조합을 맞춰 보는 것 자체가 상당히 즐거운 작업이었다. 이번에도 별로 다르지 않아 일단 교관님께 괜찮아 보이는 옷을 사서 입힌 후에 온 매장을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남성복 매장 위주로 돌아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남성복, 여성복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

 

“음... 좀 많은가.”

 

지금 교관님이 들고 있는 짐들은 새로 산 옷 두벌(상, 하의 전부), 집에서 입을 가벼운 옷 두벌, 입고 계셨던 위상섬유 옷에 남성용 속옷 다섯 세트, 양말 등에 내 옷 다섯 벌이었다. 원래는 이렇게 많이 살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옷이 많아서 질러버렸다.

 

“후우, 이거 지치는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교관님이 같이 다니는 것만으로 들떠서 충동적으로 지른 것 뿐 이었다. 별로 좋은 방면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좀 더 여자아이처럼 보이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여자의 쇼핑에 익숙치않은 교관님은 굉장히 지치신 모양이었다. 삼일 밤낮을 차원종과 싸워도 멀쩡했던 사람이 저렇게 힘들어 하는 게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미안해졌다. 그래도 교관님은 새벽녘의 사죄라 생각했는지 별다른 불평 없이 나를 따라다니셨다.

 

“슬슬 돌아가도록 할까요? 필요한 건 다 산 것 같네요.”

 

“그런가. 그럼 돌아가도록....”

 

내 말에 상당히 반가워하던 교관님은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겨 말을 다 잇지 못하셨다. 이곳을 돌아다니면서 처음으로 뭔가에 반응 했다.

 

“뭐가 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 물음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셨지만, 이미 교관님이 보고 있던 걸 확인했다. 은회색 베이스에 붉은색 모조 보석이 박혀있는 단순한 형태의 펜던트였다. 펜던트가 큰데다 가운데의 붉은색 돌 또한 가짜라는 티가 심하게 났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싸구려에 수수했고, 평범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크고 부담스러웠다. 마치 아이들이나 할법한 디자인이었지만 교관님이 눈을 뺏긴 이유는 나도 알 수 있었다.

펜던트는 놀랍도록 티나의 색을 닮았다. 위상력이 없는 이곳의 나에겐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티나의 색. 절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아주 작은 것에서도 티나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이거 주세요.”

 

“아, 저기.”

 

“교관님이 처음으로 고르신 거니까요. 자요.”

 

“아니, 저기.”

 

펜던트를 받아든 교관님은 드물게도 매우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설마 본인이 해야 될 거라 생각해서 당황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자요, 제 목에 걸어주세요.”

 

“.....티나.”

 

“어서요. 이런 건 원래 남자가 달아줘야 하는거에요.”

 

계속 머뭇거리기에 머리카락을 걷어 목을 보여주자 교관님은 결국 체념했는지 내게 가까이 다가오셨다.

 

“웃....”

 

목덜미에 그의 손이 닿자마자 움찔 했지만, 어떻게든 버티는데 성공했다. 교관님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교관님만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나도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의 손길과 온기는 물론 머리 근처에서 그의 숨결도 느껴져 일순간 다리가 풀릴 것 만 같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는 티나를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잊혀 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하품을 하는 척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직 한 발 남았다... 

2024-10-24 23:10:55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