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1]
클창인생들 2016-08-21 2
비가 우수수 내리는 낮이었다. 위상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그녀는, 결국 검은양 팀에서 나오기로 했다.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결과이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래서....이제 다시 돌아가게?"
대답이 정해진 말이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그녀에게 꺼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래야지~ 정미랑도 놀고 자유다~!"
그건 너에게 자유가 아닐텐데.
하고 싶은 말을 입안에 꾹 눌러담았다. 분명히 그녀도 알테지. 그러니 아픈 곳을 후비는 건 내 역할이 아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버스 시간표를 보고 있었다. 아직 20분정도가 남아있었다.
"아직 한참 남았네..."
"그러게~ 이왕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한 정거장정도는 걸어가자~!"
"...그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당당히 앞으로 걸어나갔고, 나는 조용히 그녀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녀가 우산을 쥔 왼손을 조금씩 오른손으로 부여잡았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고, 그녀와 나는 방금전의 활발함은 이미 없었던 것인 양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다음 정류장이 보였다.
...그게 내가 꺼낼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나의 사랑이든, 너의 사랑이든 그렇게 쉽게 녹을 수 없는 차가움인데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차가운 그말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차가워진 입과 손을 녹이지 않았다.
"...날이 추워서 그래."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 처연한 얼굴색은 보는 사람의 입을 얼어붙게 했다. 나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여전히 내가 잡은 손은 차가웠다.
".........그렇네."
내 손은 분명 그녀의 손보다 뜨거울텐데, 어째서 그녀의 손은 여전히 따뜻한 걸까. 이해를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잡았던 손에 남긴 뜨거움이 사라지도록 꽈악 잡는 것뿐이었다. 창문 밖에서는 아직도 비가 내렸다. 우수수 떨어지는 빗방울을 등뒤로한 그녀는 의외로 잘 어울렸다.
"..........춥네."
"..........그러게."
시답잖은 대화, 어색한 대화의 나열, 중심을 빗나가는 대화, 말할 때마다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 그리고 그것을 지푸라기마냥 붙잡고 있는 나. 모두 추워지고 있었다. 너무 추웠다. 소름이 들어갈 정도로 추웠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와 그녀는 서로의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
"............옛날 생각 나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위상력을 잃든 잃지 않든 여전히 그녀는 빛나는 보석이었다. 그러나 난 더이상 세공사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관람객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건 그저 작품앞을 바라보고, 우는 일 정도였다.
"........"
"..............시간이 된 거 같아. 그동안 즐거웠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해도."
끝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사라진 위상력을 돌려줄 수 없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가 보는 나는 싸늘하게 굳어버린 시체였다. 없어지는 게 두려웠다. 그것보다 그녀에게 나를 말함으로써 그녀가 사라지는 것은 더더욱 두려웠다. 그녀와 잡은 손이 느끼는 온도는 서서히 차가워졌다.
ㅡ아마도 나는 돌아오지 않을 사랑을 주었던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눈을 돌렸다. 나는 이미 그녀가 눈을 돌린 먼 산을 주시하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숨결을 내뱉었지만 서로가 맞는 비의 의미는 달랐다. 간단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사랑이란 이런 것이었다.
"...........마지막으로....할 말 없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나지막한 슬픔이 깔려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더이상 그녀의 울음에 아파하지 않았다. 시체는 시체답게,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는 자다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겠지. 잡았던 손을 풀었다. 풀었던 손은 바로 뜨거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피가 흐르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돌리고 있었다.
".......잘가."
"...............그래."
단순한 작별인사인데도, 심장은 미친듯이 얼어붙고 있었다. 뜨거운 것이 필요했다. 따뜻함이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은 필요했던 따뜻함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곧이어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졌고, 나는 두손을 마주잡았다.
.........손이 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