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암흑의 광휘 이야기

Articulus 2016-08-03 7

 

  모든 것이 불타버린 거리.
  파여있는 곳곳의 땅은 치열했던 사투의 흔적을 보여준다.
  하늘에서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이 땅의 열기를 식혀주고 있지만, 한껏 붙은 불은 사그러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 때 차원종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던 강남거리는 또 다시 파괴되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차원종이되 차원종이라고 할 수 없는 자에 의해서라는 점에서는 저번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적을 수없이 쓰러뜨리고 피를 흘려 마침내 도달한 이 자리,
  거기에서 그들은 마주쳤다.

  "왔구나?"

  그녀는 씨익 웃었다.
  과거의 그녀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 모습.

  그녀의 상징과도 같았던 분홍 머릿칼이나 푸른 빛의 눈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완전히 희게 물들어버려 윤기따윈 없어보이는 백색 머릿칼과 차원종의 위상력에 의해 짙은 자색으로 물들은 눈동자만이 그녀의 현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그녀는 2년 전, 차원종이 되었다. 자신의 부모를 죽였던 원수들과 손을 잡은 그녀는 자신을 배신한 유니온을 천천히 유린해왔다. 그녀가 처리한 유니온의 클로저만도 수 십 명에 달한다, 그것도 모두 그녀를 사냥하기 위해 유니온이 보낸 B급 이상의 상위 랭크의 클로저들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게 어쩌냐고 말하며 빈정거리듯 그들을 죽이고, 무능한 유니온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의 시신을 되돌려보냈다.

  결국 유니온은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지금은 사라진 과거 검은양 팀의 동료로 활동했던 이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녀에게 가장 호적수라고 여겨지는 자를 보내 그녀와 상대하게 했다.

  유니온의 예상대로 그들이 파견한 요원은 다른 요원들과는 달리 뛰어난 실력으로 그녀의 세력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그녀가 이끄는 차원종의 군단은 이 요원의 칼날 아래 으스러졌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이길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를 죽이지는 않았다. 물론 이런 상황을 관측하지 못하는 유니온은 번번하게 그에게서 놓쳤다는 보고만을 믿었지만, 지난 번 만큼은 달랐다.

  「유정 언니가 할 말씀이 있대.」
  「감찰국에서 보고를 받았어. 설마, 지금까지 그녀를 일부러 놓아준 거니?」
  「요원관리국 2022-783호 문서의 효력에 따라, 이번 임무에서는 반드시 그녀의 생명을 거두어야 한다.
  그것이 자네에게 주어진 임무일세.」

  이세하.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렸다. 그러다 그녀를 보고선 한참 생각에 빠져들었던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음울한 눈빛 한 가득으로, 그는 피 묻은 건블레이드를 겨누었다.

  "오늘로서 끝이야."
  "후후, 정말이지 아쉬워. 짐승들을 더 죽이지 못한게."
  "짐승? 지금의 너에겐 사람들이 짐승으로 보이는거야?"
  "응. 구제할 도리가 없는 쓰레기들."
  "… 넌 정말이지…, 많이 변했어."
  "변한 건 너야, 이세하."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는 증오를 가득담은 눈으로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 차원종 주제에."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한거야?
  그러면 다르게 말해볼까? 어른이 된 심정이 어때?"
  "닥치라고 했지!"

  쾅!
  그의 무기가 그녀를 향해 거친 푸른 불꽃의 포화를 토해냈다.
  흡사 대포가 발사되는 소리와 비슷한 굉음이 일대에 울려퍼지고, 그녀를 삼키고도 남을 불꽃이 그녀를 덮친다.

  가볍게 그것을 피해낸 동시에, 그녀는 주변에 널린 파괴된 쇠붙이들을 일제히 끌어모아 자신과 적대하고 있던 그에게 쏘았다. 음속을 돌파하는 속도로 쏘아낸 그것은 전자력에 의해 녹아내려가면서도 엄청난 관통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하나만이라도 공격을 성공시킨다면 치명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주위에 위상력을 폭발시킴으로써 쏘아진 쇠붙이의 운동에너지를 상쇄시켰다. 그리고 위상력의 폭발이 부여한 에너지를 그대로 몸에 실어, 자신을 공격했던 자와의 거리를 0으로 좁힌다.

  챙! 
  보기좋게 그의 무기가 여자의 무기와 교차했다.
  그녀는 날을 세운 그의 둔탁하고도 커다란 무기를 자신의 단검 두 개를 교차시킴으로써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무식할 정도로 치고 들어온 남자의 공격을 여자는 즐겁게 받아냈다. 물론 이대로 밀고 당기는 힘의 대결을 할 경우, 여자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겠지만.

  날선 무기의 날 사이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남자에게서는 증오가, 여자에게서는 비웃음이 느껴진다. 
 
  "넌 국제공항 때도 그랬지. 어른을 욕했어.
  하지만 지금의 너를 봐. 넌 그 때의 네가 욕했던 그들과 다르지 않아."
  "**! **! 죽여서 그 입을 막아주마, 이슬비!"

 
  그의 주위로 집중되는 푸른 위상력.
  그것은 그의 무기로 모여들어 검날에 스며들었고, 그대로 그녀의 페이즈 나이프를 분쇄시켜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러뜨린 것이다. 그의 무기는 그대로 땅에 처박혔고, 근거리에서 대처할 무기를 잃은 그녀는 뒤로 물러나 또 다른 공격을 준비했다.

  "여왕에게 와."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끌어당긴다.
  그가 기억하는 차원종이 되기 전의 그녀의 특기는 염동력이었다. 그것을 사용한 것일까, 그대로 힘 없이 남자는 그녀의 앞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무언가에 의해 목이 **진채로 공중에 천천히 떠올랐다. 마른 기침을 토해내는 그를 보며 그녀의 얼굴을 희락에 차올라간다.

  "어쩌면 말이야, 어른이 되기 싫었던건 나였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너가 정말 불쌍한거 있지?" 
  "무슨… 소리야…"
 
  마치 건틀렛과 같은 여자의 검은색의 철제 장갑이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불결하고도 차가운 그 느낌에 이세하는 목을 이리저리 흔들어 피해보려 했지만, 역시나 헛수고. 그 소용없는 발버둥을 보고서도 그녀의 마음에는 죄책감따윈 쌓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만 그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슬픈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가 계속하여 시선을 맞추어주었으면 좋을텐데 라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녀는 아직도 과거의 관계를 완벽히 청산하지는 못한 것이리라.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약간 음울한 기색을 띈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때보다 인간 같은 그 목소리에 남자의 마음이 흔들렸고,
  남자는 눈을 내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작전에 동참했는데도,
  왜 지금 우리는 갈라진걸까?"
  "몰라서 물어? 너는 인류를 버렸어. 유니온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너는 우선적으로 보아야할 것을 잊어버린거야!"
  "그래, 나도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했었지."

  순간 남자의 목을 조르고 있던 기운이 사라졌고, 그대로 남자는 땅에 처박혔다.
  계속해서 고통스러운 기침을 연거푸 토해내던 남자는 미처 눈 앞의 적을 공격하지도 못하고, 계속하여 그녀의 이야기상대가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니 생각이 바뀌었어. 내가 정말로 인류의 적이 된걸까? 아니, 나는 인류를 공격하는게 아니라, 인류를 해방하고자 하는거야."
  "… 미쳤어, 너는."

  여자는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은 채로 남자와 다시 한 번 시선을 맞추었다.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너도 자유롭지만은 않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넌 지금까지 날 번번이 놓아줬지. 그 이유가 뭐야?"
  "…"
  "역시 너도 나와 같구나."

  어느새인가 여자는 남자에게 몸을 밀착해왔다.
  그리곤 팔을 내밀어 남자의 목을 감쌌다. 서로의 어깨를 아래에 두고 두 사람의 얼굴이 교차한다.
  흡사 포옹의 모습과 같았다.

  그런 그녀를 그는 공격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할 바를 알지 못했다. 머리가 하얗게 되어만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너와 싸우기 싫어."
  "뭐…?"
  "이렇게 되면서 모든 것이 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게 딱 하나 있었어. 바로 너를 바라보던 내 마음."
  "…"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래서 나를 계속해서 놓아줬던 거잖아."
  "…"

  남자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여자가 하는 말은,
  인정하기 싫지만 지극히 정답이다.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너가 돌아오길 바라면서 계속해서 기회를 주었건만.
  왜 너는 돌아오지 않았나.


  남자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를 잃었던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

  수없이 그녀에게 배신을 당해도 그녀를 믿었다.
  그녀가 돌아올 것이라는 아주 작은 희망 하나를 믿고서, 남자는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온 것이다.
  흡사 바보 같다. 완전히 매료되어버린 그의 모습이란, 정말 어리석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가치를 이 남자는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에게 무엇보다 가치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다고 수없이 생각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에.

  하지만 인류를 저버리는 일은 그에게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서 이 바보같은 생각을 그만두기 위해, 그는 수없이 그의 적을 베었고, 그녀를 쓰러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를 때면 그의 결심은 모래성이 파도에 무너지듯 무너져내렸고, 그렇게 수없이 그녀를 놓아주곤 하였다.
 
  너를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안은 여자의 품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귀엽고 아늑한 이 품에 안길 때마다 남자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예전에는 그가 주로 먼저 안았다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차이가 있지만, 그 느낌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 때가 무척이나 그리웠었다. 그녀에게 마음껏 애정표현을 하더라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던 그 때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인류의 적의 품에 안겨 있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사살될 만한 거리를 남겨주는 것이다.
  다만 그가 이 상태로 무방비상태의 그녀를 죽인다면, 그러한 시선으로부터 영원히 자유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자에게는 전혀 그녀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지금 역시 그러하다.
 
  "난, 네가 필요해."

  여자의 말에 남자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무척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뱀 - 차원종 - 이 여자에게 신이 되어보라고 유혹했고,
  그 유혹에 넘어간 여자 - 이슬비 - 가 다시 남자 - 이세하 - 를 유혹하는 것과 같다.

  인류의 고전에 담긴 이 이야기와 무척이나 닮은 이 상황.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신에게 벌을 받게 되어 낙원에서 쫓겨났다는 결말을 앎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미쳤다.
  이 모든 상황이 미쳤음에도.
 
  "세하야."
  여자가 마지막으로 불러준 그 한 마디에,
  남자는 미쳐버린 이 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인연의 끈은 잔인할 정도로 질기게 연결되어 있어,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이미 미쳐있었다.

  "응."




  그녀의 제안을 동의하는 한 마디의 말과 함께, 남자도 팔을 뻗어 여자를 안았다.
  그것으로 끝.

  남자는 자신에게 덮여오는 잿빛의 위상력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포근하게, 아주 친근하게 다가와 그를 감쌌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환청처럼 흐릿하게 들려왔다.



  『어서와
  『군단의 세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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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을 다시 한 번 싸지르고 ㅌㅌㅌ... 
  단편 쓰는 것도 은근히 재밌네요.

  부족한 제 소설을 열심히 읽어주시는 삼류 차원장인님께서 제안하신 바에 따라, 
  이번에는 포지션을 한 번 바꿔보았습니다.

  이미 본 소설에서 세하가 차원종이 된 마당에, 계속 세하만 차원종으로 놔두면 식상하지요.
  그래서 한 번 써본 건데, 퀄리티는 괜찮으려나 모르겠네요.

  랄까... 내용을 다 쓰고 보니, 언젠가 팬만화 게시판에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그리셨던 만화 내용과 비슷하기도 한 것 같고... 에휴.
  어서 돌아가서 다음 화나 계속 써야겠어요.

  이제는 단편을 접고, 다음화에서 뵙겠습니다!!




2024-10-24 23:10:2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