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용서해주세요 - 7-2. 복종 -
Articulus 2016-05-09 4
※ 국제공항 이후의 스토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므로, 국제공항 이후의 에피소드를 클리어하지 않으신 분들 중 스포일러를 보기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 이 내용은 기본적으로 클로저스의 기존 설정에 기반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매우 많이 가미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국제공항 이후의 스토리는 완전히 작가의 상상력에 근거하므로, 본작의 에피소드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감정묘사를 위해 비속어의 사용이 중간에 들어갈 수 있으나, X라는 문자로 교체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7-4
종례시간이 시작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담임선생님의 종례가 시작된다.
우리 학교는 종례 전에 청소를 모두 끝내기 때문에 종례 후에는 바로 하교이다. 물론 야간 자기주도학습을 신청한 학생들이나 방과후 학교를 신청한 학생들은 그것까지 모두 이수하고 가야하지만, 나는 둘다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바로 하교이다.
우리 학교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 거의 남지 않기 때문에 종례 후에는 50명도 채 학교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남는 학생들은 학년 구분없이 한 곳에 모인다고 한다.
나와 슬비, 유리도 마찬가지로 학교에 남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곧 끝난다.
"밤 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그래서 오늘부터 선생님들이 조를 짜서 너희가 자주 나타나는 몇 곳을 중심으로 순찰을 돌거야. 적발된 학생은 다음 날 바로 벌점 5점이니까 각오하고 있도록 해.
제발 너희나 우리나 서로 힘들지 말자, 알겠지? 아직 출몰한 형상복제자가 소탕되지 않았다고 하니, 더더욱 조심하고. 그리고 세하나 유리같은 클로저들이 너희 때문에 피곤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럼 여기까지. 조심히 들어가고."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우다닥 의자를 밀어넣고 곧바로 학생들이 교실 밖으로 쏟아져나간다.
교실에 남은 것은 나와 유리 뿐.
"저렇게 빨리 집에 가고 싶을까? 학교에 더 있고 싶은데."
투덜거리는 유리도 천천히 가방을 싼다. 나 역시 가방을 싸고 있었고.
그때 유리가 말했다.
"아, 세하야."
"왜."
"슬비가 전해달라고 했어. 오늘은 먼저 갈테니까 찾지 말라고."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슬비의 화는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아침의 일로 나도 유리도 모두 사과했지만, 여전히 슬비는 답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슬비에게 있어서는 토라지기 꽤 좋은 핑계였나보다.
"미안, 정말. 두 사람 모두 분위기가 안좋아보여서 한 장난이었는데, 이렇게 두 사람 사이를 나쁘게 할줄은 몰랐어. 정말 미안해."
"아냐, 서유리. 나쁜 의도로 한 것도 아니고.
다만 너도 여자잖아. 몸은 스스로 아끼라고."
"응…"
유리는 정말 미안한듯 작게 대답했다.
어쩌겠나, 우리 모두 속은 아직 아이인걸. 쉽게 토라지고 쉽게 삐치고, 이것이 우리다.
시간이 흐르면 아마 좀 괜찮아지겠지, 오늘은 그냥 놔두는게 더 좋을 것 같다.
삐- 삐- 삐-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동시 발신인지 나와 유리의 폰이 동시에 울렸다.
검은양 팀이 원거리에서 단체대화를 할 때 사용하는 채널이다.
일반적인 휴대폰에는 달려있지 않은 기능이고, 오직 유니온을 통해서 개조된 우리의 휴대폰이기에 가능하다. 나와 유리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전화를 받아든 사람, 이름들 말해줘.
"이슬비, 통화 받았습니다."
"미스틸테인도 받았어요."
"이세하, 받았습니다."
"서유리님 등장!"
다섯 명 모두가 채널에 들어온 모양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아마도 아저씨. 아저씨는 유정 누나의 대리로 명령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어서, 대부분의 업무 지시는 아저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아마 아저씨가 우리 모두에게 통신을 시작한 이유도 업무 지시를 하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유정 씨로부터 업무 연락이야.
우선 어젯밤에 데이비드가 대장과 동생을 상대로 한바탕 난리를 쳤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을거야. 데이비드는 제3위상력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도 상대하는 것은 무리야.
유니온은 지금 데이비드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고, 그 녀석을 상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임무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어. 그래서 이 임무를 우리 검은양 팀 단독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판단, 결국 우리는 내일 오전 9시까지 국제공항으로 복귀해서 늑대개 팀과 합동작전을 수행하게 될거야.
그러니 우리 모두 집에 돌아가는대로 가족에게 다시 작별인사하고 짐을 싸놓도록 해. 이미 알겠지만 내일 볼 때는 모두 요원복 차림이어야 하고, 내일 아침 7시 반에 공항철도 시작점인 신서울역에서 보자고. 혹시 질문 있는 사람?"
철수라니.
놈이 여기에 있는데 철수라니.
있을 수 없다.
나와 슬비에게 그렇게 모욕을 주었던 놈을 버리고, 이 신서울을 떠난다고?
놈이 신서울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누가 알고서 이곳을 버리고 합류하라는거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이다.
"나는 반대에요. 전 합류하지 않겠어요.
놈이 이곳에 있는데, 어떻게 이곳을 버려두라는 건가요?"
"동생, 유니온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남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그래서 우리 대신 우리보다 강력한 이들이 이곳에 오게 될거고. 교체 시의 공백은 1시간도 되지 않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아뇨.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전 가지 않을거예요. 놈은 저에게 모욕감을 줬어요. 이대로 국제공항으로 돌아가는 건, 놈에게 굴복하고 꼬리를 내리며 도망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절대 그럴 수 없어요."
"동생, 이건 상부의 명령이야. 좋은 싫든, 동생은 클로저로서 명령에 복종해야만 해."
"복종? 위상능력자로 태어나면 강제적으로 유니온에 종속되고, 우리의 자유는 하나도 없이 유니온의 명령에 따르는 건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는거죠?"
"동생. 그건 우리의 사명이야."
"사명? 웃기지 마요. 데이비드나 유니온이나 다르지 않아, 다 똑같은 녀석들 뿐이야!"
통화종료 버튼을 눌러버리고 나는 곧바로 가방을 싼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통화하고 있던 유리는 깜짝놀라며 내 앞을 막아섰다.
"세하야! 왜 그래? 조금만 더 진정하자, 응?"
"필요없어!"
유리를 밀치고 나는 교실 밖으로 나갔다.
내가 밀치는 덕분에 넘어진 유리가 아야, 하고 약하게 신음소리를 내뱉었지만, 지금의 나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유리는 나의 이름을 부르며 가지말라고 하는 것 외에는 나를 제지하지 않았고, 그 목소리조차 내가 점점 멀어져가는 것과 함께 옅어져만 갔다.
교문을 나설 무렵, 유리에게서 전화가 한 번 걸려왔다.
무시해버렸다.
이제 학교 앞 버스정류장까지 가니, 이번에는 아저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역시 무시해버렸다.
빨리 이 근방을 벗어나버리고 싶어서, 우리 집 방향으로 향하는 버스가 아니더라도 좋으니 아무 버스라도 타고 싶었다. 아니, 애초에 오늘 밤은 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적어도 내일 아침 9시까지는 집에 가면 안 된다, 검은양 팀원들이 모두 공항으로 갈 때 까지는 말이다.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는 기분나쁘게도 남산 근방으로 향하는 버스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쓸 겨를도 없이 나의 발은 이미 버스 안으로 향했다.
아니, 남산에 가면 혹시 '나'의 모습을 한 그 녀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밤을 새서라도 놈을 찾아서,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버스가 출발할 즈음, 서유리가 교문에서 달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를 찾는 것인지 두리번 거리던 그녀와 나의 눈이 아주 잠깐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곧바로 버스로 달려왔지만, 버스가 더 빨리 출발해버려서 나를 쫓아올 수는 없었다.
버스는 한참이나 달려서 동작대교 부근까지 왔다. 강남을 거의 벗어나 이제 강북으로 내딛는 순간이다.
한강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무렵, 또 한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핸드폰 자체를 꺼버릴 심정으로 주머니 속에서 꺼내든 핸드폰, 화면에 나타난 발신인의 이름은 다름아닌 슬비다.
다른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슬비다.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하던 찰나, 왠지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수화버튼을 밀어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미쳤어, 이세하? 너 무슨 짓이야!"
"할 말이 그것 뿐이라면 이만 끊을게."
"전화 끊지마, 이세하.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이슬비, 넌 어젯밤의 일을 벌써 잊어버렸어? 너를 그렇게 짓밟던 그 녀석을 설마 용서하겠다는건 아니지?"
"절대 아냐. 하지만 이건 아냐,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을 상대가 아닌건 너도 잘 알잖아?"
"비록 내 힘이 부족하더라도 내 눈 앞에서 너를 짓밟은 것은 놈에게 후회하게 만들어줄거야. 죽을 힘을 다해 덤비면 적어도 놈에게 치명상 한 번은 입힐 수 있겠지."
"하지만 힘의 차이는 분명하잖아!"
"그렇다면 이대로 당하고 있으란 말이야!"
언성이 높아진 우리 두 사람.
버스 안에서 소리를 지른 덕에, 모든 사람이 나를 잠깐동안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자신들이 할 것을 이어가자, 나는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도망치는 건 있을 수 없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거야.
가려거든 가도 돼. 하지만 나는 절대 여기를 떠나지 않을거야."
"이세하… 바보같은 말, 하지마.
널 버리고 가라고? 너가 뻔히 죽으러 갈걸 아는데도?"
"내가 도대체 뭐길래…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걸."
"아니, 넌 내 남자친구야. 하나 밖에 없는 이세하라고."
마음이 두근거렸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그녀의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하지만 그녀의 말도, 나의 집념을 꺾기에는 불가능했다.
이렇게 계속 말해서는 그녀를 굴복시킬 수 없다.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내 할 말은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경우, 뒷 일은 어떻게 될지.
상상되는 결말을 알기에 내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고작, 그 이유야?"
"뭐…?"
"날 포기해, 이슬비. 그래, 이제부터 난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너를 지켜주지 못하는 난, … 난, 너에게, …… 사랑받을 자격도 없으니까."
전화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결국 슬비를 울리고 말았다.
가책이 느껴진다.
내가 심했다. 그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렸다.
"어젯밤 일 때문이야?"
그녀가 애써 울지 않는 척 하려는 것이 눈에 선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오늘 내가 화를 내서야?"
울컥하는 마음이 나에게도 든다.
더이상 전화를 받아서는, 내 생각이 무너지고 만다.
그대로 나는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고, 그대로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이제 더이상 아무도 나에게 전화를 걸 수도, 그리고 내가 전화를 거는 일도 없겠지.
내가 탄 버스는 한강을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눈에 훤히 들어온다, 슬비와 내가 처음으로 데이트를 했던 그곳에.
.
.
.
멍하니 산을 올랐다.
등산로도 아닌 이 길, 하지만 경사는 평범하지만은 않아서 조금 빨리 걸으면 쉽게 땀이 난다.
그래서일까, 나는 느긋하게 천천히 이 길을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꽤 많이 올라가기 때문에 길의 곳곳에는 중간중간마다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있다.
날이 꽤 어두워진터라 낮 만큼이나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어느 벤치에 걸터앉아 아래를 바라보았다.
정말 높지는 않아도 서울에서는 고지대에 속하는 곳이라, 신서울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온다.
쌀쌀한 밤공기가 느껴지는 한 밤. 나는 도대체 이곳에 왜 와있는 것일까? 그래, '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놈을 죽이러 왔었지.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주변을 잠깐 둘러보았다.
이상하다,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다. 아니 어느새인가 사람들의 통행량이 확 줄어든 느낌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서 놈을 찾으러 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은 해봤어?"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다.
게다가 어제 듣기도 했었고.
분명히 남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이 기분나쁜 목소리는 애쉬의 목소리다.
내가 생각을 해내기도 전에 이미 애쉬와 더스트는 내 눈 앞에 나타나있었다.
"어때? 우리와 손 잡을 생각은 들었어?"
나는 곧바로 건블레이드를 두르고 있는 천을 풀고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자신들에게 겨눈 무기를 보고서도 그들은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은채 말했다.
"이세하, 너와 단 둘이 있고 싶었어. 이슬비 양이 함께 있었다면 절대 우리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을게 뻔했거든. 그래서 너를 이곳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이 녀석'을 사용한거고."
애쉬의 옆으로 '나'의 모습이 보인다.
놈은 아침에 담임 선생님이 보여준 사진 속의 '나'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사복차림의 나, 영락없이 나였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린다.
애쉬가 한 듯 하다. 그것에 맞추어 놈은 나의 모습을 버리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놈의 원래의 모습은 형태없이 흩어질 것 같은 연기와 닮았다. 그리고 곧바로 놈은 차원종이 소멸할 때와 같이 빛의 가루가 되어서 사라졌다.
"자, 이제 너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형상복제자는 이곳에 없어."
"형상복제자를 이곳에 보낸 건 너희였어? 도대체 왜!"
"사람들이 얼마나 너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지, 그리고 그들 마음대로 생각할 줄밖에 모른다는 것을 너에게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뭐?"
애쉬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나의 마음의 요동을 눈치챈 것인지 더스트가 이번에는 말을 걸어왔다.
"오늘 학교에서의 일도 그래. 너의 억울함을 들어준 사람이 있어?"
"…"
"인간이란 다 그런거야. 너희는 너희의 생각밖에 할 줄 모르지.
하지만 우리는 달라, 우리는 너의 고민을 들어줄 의향이 있어."
나의 고민.
놈들은 어제 나에게 힘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제안의 대가는 내가 그들의 편에 합류하는 것. 그것은 인류를 저버리고 차원종과 한 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더이상 슬비를 만날 수 없다.
"우리와 손을 잡게 되면, 이슬비 양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고민하고 있겠지."
"읏!"
"정곡을 찔린건가? 하지만 두려워할 거 없어, 너는 너의 정의에 맞게 싸우면 되는거다. 약속하지, 우리는 너에게 결코 강요하지 않겠어. 우리는 유니온과 달라, 너에게서 자유를 박탈하지 않지.
이세하, 너는 너의 정의를 위해 우리의 힘을 사용하는거다. 그리고 너의 적인 데이비드를 쓰러뜨리는거다. 그리고 지금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언젠가 데이비드와 유니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 너의 적대감은 저절로 유니온에게도 향하게 되겠지."
데이비드와 유니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지금도 조금씩 느끼고 있다.
지금은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놈은 나에게 그것이 진실인양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도를 파악해보면 나는 언젠가 유니온과 적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슬비와도, 싸우게될 수밖에 없다.
"너는 너의 자유로 이슬비 양에게 유니온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거다.
클로저라는 이유만으로 억압 받고 자유를 상실한 자신의 모습을 그녀가 깨닫게 될 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너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과연 너를 대적할까?"
그래.
나는 자유를 얻는 거다.
더이상 누구의 눈치나, 누구의 억압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누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도 되고, 정의를 위해서 내 맘대로 싸울 수 있다. 놈들은 그것을 나에게 약속했다.
칼바크가 말했던 복음은 아마 이것일까? 유니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 말이다.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제 곧 유니온의 감찰국 요원들이 나를 잡기 위해 추적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곧 뒤를 잡히게 되겠지. 그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도 나는 힘이 필요하다.
슬비도 언젠가 나의 이런 모습을 이해해주겠지.
"힘과 자유, 확실히 약속해줄 수 있지."
애쉬의 입가에 미소가 띠워진다.
"우리는 인간과 달라. 한 번 한 약속에 대해서는 목숨으로서도 책임을 지지."
"처음은 두려울거야. 하지만 걱정하지마, 곧 익숙해질테니까."
유니온은 데이비드를 상대할 수 없다.
강남사태 때처럼 제3위상력을 사용할 수 있는 상대를 상대하는 것은 유니온의 힘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방법은 오직 이것 뿐.
"힘을 빌려줘."
애쉬와 더스트의 얼굴에는 한껏 웃음이 흐른다.
소리 없는 웃음,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기뻐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고 내민 손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힘의 전달을 위한 하나의 의식과 같은 것일뿐.
"아, 기대돼. 인간의 영웅의 아들이 차원종이 되다니."
"이것을 알았을 때의 네 어미의 낯짝을 정말로 보고싶군."
몸이 뜨거워진다.
이 고통, 강남사태 때 놈들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의 그 고통과 같다.
잘 생각해보면 이 고통은 내가 나에게 들어오는 힘을 억지로 막으려고 하면 발생한다.
이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환영해. 그리고 어서와, 차원종의 세계에."
놈들의 말과 함께,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7-5
아침 7시 30분이 다 되어가는 시간.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신서울역은 언제나 그렇듯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하다.
공항철도를 탈 수 있는 입구의 앞에서 유니온 정식요원복을 입은 네 명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저마다 역 광장에 있는 커다란 전자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동료를 기다리고 있다.
"정말 안오려는걸까?"
서유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특히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슬비만큼이나 걱정이 가득찬 사람은 없어보였다.
"아직 약속시간까지는 조금 더 남았어요. 그리고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미스틸테인은 모두의 걱정을 풀어주려는듯 애써 웃음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은 그 역시 하고 있지만, 그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동료를 믿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때, 반가운 목소리로 제이가 외쳤다.
"동생!"
그 말에 금방이라도 울상이던 슬비의 표정이 해맑게 바뀌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동료, 이세하의 등장은 그토록이나 간절했던 것이다.
그들과 불과 10미터 정도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정식요원복 차림의 이세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오고 있었다. 그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슬비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서는 하고싶었던 말을 터뜨렸다.
"이세하, 내내 휴대폰을 꺼놓으면 어떻게 해! 걱정했잖아!"
"……"
"그보다도 요원증은 어딨어? 항상 패용인거 잊은거야?"
"……"
"이세하, 왜 말이 없어? 너 계속 그러면 유……"
슬비의 말이 멎었다.
그리고 그녀의 표정은 당혹감으로 가득차갔다.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는 입가를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녀의 주위로 온 다른 팀원들은 그녀가 왜 그런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내 이어진 슬비의 말은 그녀가 놀란 이유를 알아차리기에 충분했다.
"이세하… 누, 눈이…"
"알아챘구나."
그제서야 입을 여는 이세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세하의 눈을 향했다. 세하의 홍채는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클로저는 자신의 위상력의 컬러에 맞게끔 눈동자의 색과 머리색이 변해간다.
이세하는 그동안 이상하리만큼이나 자신의 눈과 머리의 색이 일반인과 비슷했는데,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것은 머리 염색과 렌즈를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머리 염색은 그가 탈색을 하지 않는한 더이상 변하지 않지만, 눈동자의 색은 렌즈를 벗으면 곧바로 드러난다.
제2위상력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클로저 요원들의 눈색은 대체적으로 푸른색 계통으로 녹색으로부터 황갈색에까지 넓게 퍼져 있다. 다만 절대 클로저 요원들은 붉은색 계통의 색을 가지지 않는데, 그것은 위상력의 차이 때문이다.
제1위상력을 사용하는 차원종의 경우, 인간형에 한하여 눈동자의 색은 보라색에 가깝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더 붉을 수도 있고, 더 옅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자색으로 나타나기에, 보라색을 눈동자 색으로 가졌다는 것은 자연적인 것, 혹은 렌즈를 꼈거나, 아니면 차원종의 위상력을 사용하는 경우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세하야, 그거 렌즈지? 다른 렌즈를 낀거지?"
슬비의 말에 세하는 말없이 웃었다.
자신의 추측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슬비는 다시 물었다.
"아, 아니면 원래 그런 색을 가진거지? 응? 그렇지?"
"애써 추측을 부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돼, 슬비야."
"아냐… 아냐… 세하가 놈들에게 복종할리가 없어, 아냐… 아니라고!"
세하는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 온 건 따라가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검은양 팀과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온거에요."
슬비는 그 말에 주저앉아버렸다. 유리가 그녀를 부축했고, 두 사람의 앞을 미스틸테인과 제이가 막아선다. 어느새인가 두 사람은 전투를 할 준비가 완료된 것인지, 몸에 위상력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하는 무기도 꺼내놓지 않았다.
"싸울 생각은 없어요.
전 자유를 얻었고, 더 이상 유니온은 저를 강제로 복종시킬 수 없죠. 이제 남은 건 제가 데이비드를 쓰러뜨리는 것 뿐, 그러니 더이상 저를 찾지 마세요.
저는 이 시간부터 더이상 검은양의 팀원 클로저 이세하가 아니라, 검은양의 적 차원종 이세하니까."
그렇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그는 돌아섰다.
돌아서기 전, 아주 잠깐 슬비를 보면서 그는 작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