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어느 봄날 (1)
수지퓨전콘서트 2016-04-20 4
"대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
"……뭐?"
아직 조금 쌀쌀한 기운이 남아있는 봄의 회의실에서, 핑크색 리더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했다고는 해도 어떻게 말한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
내가 한국인이 아닌 걸까, 아니면 네가 말하는 게 한국말이 아닌 걸까.
"이해하기 쉽게 말해주지 않을래? 아니, 그냥 말하지 마, 지금 바쁘거든. 정 말하고 싶으면 조금만 기다리던지."
"그래, 그거 말이야, 그거."
조금만 기다리라니까.
거 참, 참을성 없네.
속으로 투덜대면서 이슬비를 힐끔 쳐다본 후에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
GAME OVER!
"……야."
"헹, 쌤통이다. 그러게 누가 말하고 있는데 게임하래?"
야, 그건 아니지.
내가 게임하는 데 네가 말을 건 거잖아.
이 빌어먹을 핑크가…….
됐다, 말해 뭐해.
그냥 처음부터 다시 깨야지, 뭐…….
"잠깐, 이세하, 잠깐만."
"뭐, 왜, 바빠. 정 말하고 싶으면 조금만."
"아니, 그게 아니지! 왜 다시 시작하는 건데?!"
핑크가 뭐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지만, 나는 게임에 집중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어."
난 없어.
게임은 생각하면서 하는 게 아니라고.
본능이다!
이성과 본능이 충돌할 때에는 본능을 따르는 게 답이지!
아니, 지금 이건 별로 상관없나.
"……별빛에 잠겨라……."
"오케이, 말해 봐.
그건 반칙이잖아!
그 때 분위기를 타버리는 게 아니었어…….
어째 요즘은 흑역사만 늘어나는 것 같다.
"게임이 그렇게 좋아?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야?"
"어디가 좋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는데……."
"그럼 뭐가 그렇게 좋은 건데?"
"그것도 마찬가지로 뭐라고 할 말이……."
그보다 그거, 똑같은 말 아니야?
"그럼 반대로, 넌 사랑과 차원뭐시기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
"사랑과 차원전쟁이야. 어디가 좋냐고 물으면, 나도 마찬가지로 해줄 말이 없어. 하지만 그건 결코 좋은 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좋은 점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야. 굳이 말하자면, 그렇네. 무엇보다도 스토리일까. 사람들이 예상도 하지 못하는 전개로 이끌어가는 점이라거나, 예상은 가지만 설마 그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는 그런 스토리가 좋다고 생각해. 게다가 막장, 막장거리기는 해도 보는 사람들이 많잖아? 역시 사랑과 차원전쟁의 매력이라고 하면 그렇게 시청자들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아닐까 싶네. 한 번 빠져버리면 헤어나올 수 없는 것도 매력이지. 그게 다가 아니야. 사랑과 차원전쟁의 진정한 매력은……."
나는 이슬비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지만, 여백이 부족해서 여기에 적지 않는다.
그보다 듣고만 있자니 지루하네.
안타깝게도 게이머의 숙명인지, 나는 흑역사를 생각하면서도 다시 게임기의 전원을 켰다.
그렇게 한참을 하고 있자니, 연설이 끝났는지 이슬비가 내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잠깐, 언제부터 게임을 하고 있었던 거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야 할 거 아니야!"
누가 그걸 듣고 있을 수 있겠어.
1+1이 2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을 듣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참고로, 1+1이 2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꽤 많은 양의 페이지가 필요하다.
"별빛……."
알았어! 알았다고!
알았으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 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고 싶은 말……? 별빛에 잠겨라?"
"네놈의 피는 무슨 색이냐아아아아아아아!!"
잔인한 핑크 같으니!
"그러게 누가 사람이 말하는 데 게임하래?"
"그건 아니지, 내가 게임하는 데 네가……."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화 같은데.
주로 몇 줄 위에서 들어본 것 같다.
"그래서, 무슨 얘기 중이었지?"
"게임이 어디가 그렇게 좋냐며……."
"뭐야, 그건 또 기억하고 있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까도 말했지만, 딱히 어디가 좋다, 라고 말할 만한 부분은 없어."
"그럼 왜 맨날 게임만……."
"그치만 좋아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겠냐. 안 그래? 실제로 너도 사랑과 차원뭐시기를……."
"사랑과 차원전쟁."
"아아, 그래, 그거. 사랑과 차원전쟁을 좋아하지만 이유는 딱히 없잖아."
"다시 말해줄 수도 있는데?"
으음.
확고하구나.
"아, 아무튼 그런 거니까. 이제 됐지? 지금은 자유시간이니까 게임해도 상관 없잖아."
"……뭐, 그렇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어딘가 기분이 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뭐야 저거.
……삐친 건가?
삐친 핑크, 줄여서 삐크다.
아니, 삥크가 나으려나.
내가 막 게임을 시작하려고 할 때, 삥크가 또다시 질문해왔다.
"저기, 이세하."
"뭐냐, 삥크."
"……삥크?"
아차, 나도 모르게 그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왜?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아니, 그냥 말하지 않는 걸로."
"……게임이 그렇게 좋아?"
"……방금 말한 기억이 있는데."
혹시 이 기억은 심어진 기억인건가!
빌어먹을 유니온 자식들!
응, 농담이다.
"저기, 그, 그럼……."
"뭐야, 스테이지 시작하기 전에 빨리 말해."
"그, 우으……."
기회를 줘도 말을 안 하네.
하지 말라고 할 때는 그렇게 하더만.
네가 무슨 초등학생이냐?
초등학생 같은 신체부위가 있긴 하다만…….
다행히 이슬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방금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야.
하마터면 버스를 맞았을지도 몰라.
"할 말 없으면 그냥 게임하고."
"아니, 우으, 그……."
"……시작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이슬비는 결심한 듯 붉어진 얼굴을 치켜들고 외쳤다.
……어? 붉어진?
"내, 내, 내가 좋아, 아, 아니면 게임이 좋아?!"
"게임!"
남자는 박력! 단호!
나도 내가 단호박인줄 알았다.
"아니, 잠깐만, 아니야. 말을 잘못했어. 너야, 너니까 일단 버스부터 어디로 치워줘, 아니, 치워주세요."
"그, 그런 거짓말은 필요 없어! 진심으로 말하란 말이야!"
아니, 진심이라고는 해도 말이지…….
실제로 난 게임 쪽인데?
"야, 그러는 너는."
"나는 뭐?!"
"내, 내가 좋아, 아니면 사랑과 차원전쟁이 좋아?"
이거, 생각보다 부끄럽구나…….
이슬비는 용케도 이런 대사를 말했구나 싶다.
"아, 아우, 그……."
천하의 이슬비도 역공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얼굴을 점점 머리에 깔맞춤하고 있다.
……진짜 삥크네.
한참을 우물쭈물 하더니, 삥크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그, 그야 너인 게 당연하잖아!"
"……네?"
사람은 이해능력을 뛰어넘는 문제에 직면했을 경우 사고가 정지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이슬비는 사랑과 차원전쟁을 엄청나게, 정말로, 온 마음을 다해서 좋아한다.
그런 사랑과 차원전쟁보다 내가 더 좋다는 건…….
큰일났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갑자기 이슬비가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나, 이렇게 쉬운 남자였나…….
"너, 너는 동료니까! 드라마보다는 동료가 소중한 게 당연하잖아!"
"……아아, 그런 말일 것 같았어……."
"그런데, 넌 동료보다 게임이 더 소중하다는 거야?!"
"말을 잘못했다고 했잖아!"
"그, 그럼 제대로 말해!"
"크윽…… 그냥 넘어갈 만도 하잖아……."
"말해!"
잠깐의 부끄러움이냐, 죽음의 고통이냐.
……답은 의외로 쉽게 나오는 군.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아."
"…………………………헤에………."
그런 반응 보이지 마!
죽고 싶어지니까!
잠깐이 아니었다.
별빛에 비교조차 되지 않을 흑역사가 추가되었다…….
"뭐, 뭐, 기분은 나쁘지 않네. 하, 하던 거 마저 해."
"안 해, 이런 기분으로 하긴 뭘 해, 집에 갈 거야…… 근데 뒤에 있는 건 뭐냐?"
"어, 어?! 뭐, 뭐가?! 아무 것도 없는데?!"
"……그래, 뭐. 나중에 봐."
"아, 응…… 잘 가."
"그래."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나는 회의실을 뒤로 했다.
복도를 걸어가고 있자니, 저 멀리 서유리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야호~ 세하야~."
"여어, 어디 가냐."
"회의실 가지. 그러는 세하 넌 어디 가? 회의실 안 가?"
"난 지금 집에 가는데. 방금까지 거기 있다 왔거든."
"에에? 더 있다 가지~."
"아니, 거기에 더 있다가는 못 버틸 거 같아서 말이지……."
주로 정신적인 부분이.
"으음, 그래, 뭐~ 나중에 봐~."
"그래."
서유리와도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아직은 조금 쌀쌀한 봄날.
창 밖으로 벚꽃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며 문득 중얼거렸다.
"……핑크색이네."
이슬비 말마따나, 신기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