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저스 x 어마금] Surrender?
b청규d 2016-03-30 0
그 날 있었던 일은, 이전까지 벌어졌던 모든 사고가 그랬던 것처럼, 평범하게 지나가고 있던 일상 속에 예고 없이 난입했다. 강남 GGV에서도 그랬다. 이전 구로역에서도 그랬다. 신강 고등학교에서도 그랬다. G 타워에서도 그랬다.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사고인건가.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 일어나서는 안 되고,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하지만, 어딘가에서는 반드시 터지는 것. 사고.
사실, 사전적 정의로 따지면 그 때의 일은 내게는 사고라고 표현하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불행하기만 했던 일은 아니었으니까. 새옹지마라고 해야 하나. 타인의 아픔을 알게 되고, 본인의 약한 곳을 자각하는 건 분명 힘든 일이지만, 얻는 게 있다. 사고라는 단어 대신에 사건. 그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과는 다른 특별한 일. 그렇게 표현하는 게 좋겠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 일이 내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사용자 정보 : 유니온 정식 요원 이슬비. 인증되었습니다. 이슬비 요원 전용 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합니다. 백그라운드 시뮬레이트 진행 중.]
감정이 없는 무감각한 기계음이 귓가에 장착되어 있는 이어폰 형태의 통신기를 통해 전해져오는 것을 신호로, 이 곳의 공간이 무언가에 침식되어가는 것처럼 변해간다. 체육관, 그리고 돔경기장을 섞어놓은 것 같은 밀폐된 분위기. 발생하는 즉시 수리하긴 하지만 완벽히 지우지 못해 차원 압력과 위상력을 버티지 못하고 곳곳에 균열이 가 있는 흔적. 엄중히 내부를 격리시키고 있는, 한 눈에 봐도 두꺼워보이는 잠겨진 출입문들. 유니온의 특수훈련장, 통칭 '큐브'라고 불리우는 시설이다. 훈련을 위한 시설이기에 안전성을 최우선해서 그런지, 미적 센스는 전혀 반영이 되어 있지 않은 듯 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흐르던 시간도 죽어버린 것 같은 이 곳이 변화하여, 폐허가 된 도시로 바뀐다. 본래는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위풍당당하게 기능하고 있어야 할 도시인 신서울. 그러나 차원종들의 습격으로 인해 황폐화되었다ㅡ라는 설정으로 세팅해두었다. 실제로 신서울의 일부는 이런 모습이다. 부서진 도로들. 무너져버린 건물.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여있는 가로등과 불타고 있는 주택들.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찾을 수도 없다.
[차원종 시뮬레이트 진행 중.]
곧 훈련이 시작된다. 복장은 조금 더 편한 복장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항상 난 유니온의 정식 요원 차림 그대로 훈련에 임했다. 하얀색 셔츠에다가 파란색 넥타이, 그리고 검정 재킷. 활동성을 중시하기 위해 바지 대신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만 빼면 말 그대로 정장이다. 물론 명찰도 가슴에 반듯하게 달았다. 훈련도 실전처럼이라는 모토 때문이기도 했지만, 검은 양팀의 리더로서 책임감을 항시 놓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사실을 명심했다. 복장이 흐트러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키에에에에에에엑ㅡ!
오래지 않아, 이 살풍경한 장소를 만들어낸 주범들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출현하고, 뒤이어 그것들의 포효가 사납게 공기를 진동시킨다. 그것들의 이름은 차원종. 울음소리도 가지각색이다.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는 게 있는가 하면, 가수나 악기 뺨칠 정도로 굵거나 풍부한 소리를 내는 개체도 있었다. 단 하나의 공통점은, 듣는 모든 인간들에게 본능적으로 공포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나둘씩 나타나는 차원종들을 보면서, 가볍게 숨을 들이마쉬며 단검들을 양 손에 쥐었다.
"목표 확인. 적을 섬멸합니다."
매번 작전을 수행할 때마다 되뇌이는 이 말도, 이제는 밥을 먹기 위해 수저를 드는 것처럼 당연한 절차가 되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부모님을 살해한 차원종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적을 죽이기 전에 내가 죽지 않게. 차원종이란 존재가 다시는 이런 비극을 일으키지 않도록. 본격적인 전투 전에 몸 안팎에 흐르는 위상력을 조정하는 동안, 아까 전에 있었던 일을 잠시 떠올린다.
*
"슬비야? 오늘도니?"
"네, 유정 언니."
"조금 더 쉬지 그래.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다들 휴식을 취하고 있잖아? 아스타로트도 물리치고 아직 재해 복구 프로젝트가 시작하려면 더 시간이 있어야 하니까. 그동안만이라도..."
확실히 우리 검은 양 팀은 대단한 일을 해냈다. 단기간에 이런 공적을 세운 클로저들이 차원전쟁 개시 후 몇이나 될까. 자부심을 가져도 되고, 또 충분히 느끼고 있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의 문제다. 아직 차원종들은 많이 남아있다. 내 힘으로 쓰러뜨릴 수 없는 차원종들, 가령 애쉬와 더스트도 아직 무리지 않은가. 그 둘보다 강한 차원종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버지....어머니....'
내버려두면, 또다시 나와 같은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그래서 여태까지 뼈를 깎는 노력과 연습을 반복했다. 나는 다른 검은 양 팀원들에 비해 위상 잠재력이 낮다. 다시 말해, 재능이 부족하다. 수행을 게을리 하면 순식간에 도태되고, 유리, 제이 씨나 미스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그리고.....
ㅡ와우, 형이랑 누나가 손 잡으셨다! 드디어 사이가 좋아지셨군요! 그럼 전 훈련하러 가볼게요. 계속 그렇게 손 잡고 있으세요, 아셨죠?ㅡ
ㅡ........ㅡ
ㅡ........ㅡ
지금 와서 그 때의 일이 왜 떠오르는 걸까. 나는 왜 그 녀석이 계속 신경 쓰이는 걸까. 처음 만났을 때의 첫 인상은 최악이었는데. 종일 게임기나 붙잡고 있고, 집중하라고 하면 자기까지는 진지해질 필요가 없다라는 말이나 하고. '알파 퀸'이라는, 전설적인 클로저의 아들로 태어나 엄청난 재능이랑 잠재력을 가졌는데도 그걸 썩히기만 하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동경하던 영웅의 아들이라고 해서 내심 기대하고, 또 질투했는데도, 그런 의외의 모습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싫어했었다. 하지만.
'이해하게 되었어.'
오랜 시간동안 '검은 양' 팀으로 활동하면서,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마치 링컨 대통령에 이어 미국 대통령에 즉위한 앤드루 존슨이 처했던 운명과도 같았다. 그에게 어머니의 이름은 축복이 아닌 족쇄였다.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져 주변의 기대를 어렸을 때부터 한 몸에 받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을 받을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비뚤어진 거고. 난 클로저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여기까지 올라오기 위해서 정말 피눈물을 흘리며 단련해서 역량을 끌어올렸는데. 생각해보면 나와 완전 극과극이다.
그래서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비뚤어짐을, 언제부터인가부터, 잡아주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빛에 가린 그림자 속에 과도하다 못해 상처까지 입히는 기대를 받으며 방황하던 도중에, 우리 검은 양을 만나게 되었다. 신서울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온갖 난관을 겪던 그에게, 처음의 그 철없고 나약한 어린 아이 같은 일면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머니와는 다른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남들의 시선과는 상관없니 스스로 노력하면서 꺾이지 않는 의지를 관철하는 그를 난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주고, 함께했다.
"나....정식 요원이 됐어."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정식 요원의 복장을 입고 나타난 그를 보고 난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유니온의 정식 요원 승급 심사를 통과했다. 더이상 훈련생 시절 같은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직접 마주하니 뭔가 여러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걸 감추기가 힘들었다.
처음에는 놀라움과 감탄, 그 다음에는 부러움, 그 다음에는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질투심. 마지막에는.....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이었다. 검은 양 팀을 지휘하는 리더로서 그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고 단련을 해왔지만, 언젠가는 남을, 세하의 짐이 되어 또 어떤 비극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도. 그러한 상실감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크기로 날 덮쳐왔다. 그건 동기 부여를 넘어서서 내 삶을 괴롭게 만드는 아픈 자극이었다.
때문에, 정식 요원이 되기 위해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더욱 더 노력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세하와는 다르게, 남들보다 한참 더 노력하지 않으면 금받 뒤처지는 게 나니까. 밖에서 보이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말릴 정도로, 그리고 안 보이는 곳에서도 쉬지 않고 단련을 했다. ** 듯이 차원종을 쓰러뜨리고, 작전을 수행하고, 끝내 유니온에서 2차 승급 제의가 왔을 때는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 결국 합격했다.
심사 직후, 그동안의 고생을 지켜본 유정 언니가 강제로라도 클로저를 위한 의료 시설에 나를 끌고 가려는 걸 피해서, 나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검은 양 팀의 대기실로 향했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간 그 곳에는, 임무를 마치고 쉬고 있는 세하가 있었다. 다른 이들은 각자의 사정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단 둘뿐이라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왠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다는 거에 안심하면서, 난 겨우 겨우 갈아입은 정식 요원 복장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누구....어라?"
나를 보자, 오늘도 게임기를 붙잡고 있던 세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0.1초의 망설임은 있었던 것 같지만, 게임기를 책상 위에 두고 일어서서 내게 다가오는 걸 보고, 그 정도면 만족해ㅡ라고, 나는 생각했다.
"너도 정식 요원이 된 거야? 오오,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결국 됐구나! 축하해! 정말 수고했어!"
밝은 웃음을 짓는 얼굴에 담겨있는 순수한 감탄이, 나를 향한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하게 여겼으니까. 나와 같은 나이의 또래가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남을 위해 기뻐해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유리가 말해주었던 것과 같아. 자신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즐기는 것 그 자체를 사랑하는 천진 난만한 모습.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머리 속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겨우 너와 같은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네."
"슬비야?"
비틀ㅡ
후에 반드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가슴 속에 꾹 참고 참아두었던 말을 토해내자, 둥근 실타래가 굴러가듯이 순식간에 몸을 지탱하던 정신의 끈이 스르르 풀렸다. 유니온이 합격 여부를 판단하는 거지만, 그의 웃음과 칭찬을 듣고 나서야 정식 요원으로 정말로 인정받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짐이 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과, 그 이상으로 따스하게 내 마음을 적셔주는 무언가의 감정으로 인해.
"야, 이슬비. 너,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정신 차려!"
'다행이야...'
세하의 말은 끝까지 듣지 못했다. 바로 정신을 잃었지만, 난 바닥에 넘어져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쓰러지려는 내 몸을, 그토록 옆에 서 있고 싶은 누군가가, 따뜻하게 받아주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
짧은 회상을 끝낸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서, 고개를 살짝 흔들어 먼지를 털어내듯 내 약한 모습을 지워버린다. 그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앞으로 있을 훈련에는 방해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안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이 잠깐 동안의 평화 동안 더 힘을 길러야 해요."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조심하고, 다칠 정도로 하면 안 된다?"
"걱정 마세요. 심려를 끼치게 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런 나를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고 있지만, 끝까지 말리지는 못하는 유니온의 관리 요원, 김유정 언니. 임무를 받을 때마다, 그리고 같이 있으면서 항상 느꼈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다. 맡은 직무 그 이상으로 우리 검은 양 팀을 위해 발벗고 나서주고, 챙겨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유니온의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내가 훈련을 위해 큐브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 반대를 흘리면서 금쪽같은 자신의 휴식 시간을 쪼개서 내 훈련을 모니터링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는 위치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행여나 무슨 문제라도 일어날까봐. 특히나 지난번 정식 요원 심사 때 내가 무리한 이후로 한시도 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까. 더더욱 하지 않을 수 없어."
캬오오오!
두두두두두두두
마침내 이 자리에 현현한 진짜 차원종처럼 만들어진 입체영상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다시 괴성을 지른다. 이번에는 바닥을 울리는 둔중한 발걸음 소리까지 뒤따라온다. 여기 서 있는 나한테까지 그 진동이 전해질 정도다.
스윽ㅡ
고개를 돌려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그것들을 정면으로 쳐다본다. 거리가 시시각각 좁혀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 여유는 있다. 그런데도 저것들의 악의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정말 현실처럼 똑같이 구현화한 큐브의 힘에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격렬한 증오가 끓어오른다. 이것이 훈련이고, 적이 입체영상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방금 전 밖에서 품었던 것과는 180도 다른 싸늘한 감정은 사그라들지 않고 휘몰아치는 격류처럼 내 마음을 휘젓는다.
으득.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차원종들이, 각자 들고 있는 무기, 혹은 몸을 이용해서 공격을 하려는 순간, 그것들이 내지르는 괴성과 포효 속에서 나는 똑똑히 들었다. 내가 내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가는 소리를. 그와 함께, 난 마음을 이미 가득 채운 증오심을 툭 던지듯이 내뱉었다.
"무릎 꿇어."
*
끼엑?!
콰앙ㅡ!!!!!!!!!!
막 슬비에게 도끼를 내리치려던 덩치 큰 트룹 대장이 그 자세 그대로 위로 뜨더니, 상하가 반전되어 꼴사납게 바닥에 처박힌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녀 주위에 생성된 푸른 원 모양의 장판 위에 있던 다른 차원종들도 달려오면서 낸 우렁찬 소리에 비해 힘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뒤집혔다.
그오오오오!
예상치 못한 일격에 화가 더 났는지, 몸을 일으키면서 트룹 대장은 성난 소리를 냈다. 역전된 중력의 힘을 이겨내기 위해 용쓰는 그것의 몸 여기저기에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진다. 비록 큐브가 만들어낸 입체영상일지라도, 그것 안에 세팅된 공격 프로그램은 실제 차원종의 인간을 향한 증오 못지 않았다. 포효를 지르고 이빨과 함께 적의를 드러내는 것도 모두 똑같았다. 가상이지만 현실의 법칙은 똑같이 적용되었다.
고오ㅡ
그러나, 현실의 법칙이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차원종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다운된 상태에서 기상하여 공격할 때까지의 틈은, 그들이 둘러싸고 있는 유니온의 '정식 요원'에게는 차고 넘치는 시간을 준 거나 다름없었다. 중력장이 사라지고, 트룹 대장이 다시 공격하기 위해 일어나서 도끼를 잡았을 때, 그것은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진 것을 느꼈다. 자신을 감싸듯 짙게 드리운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그것은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다...."
이슬비는 어느샌가 허공 위로 떠올라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그림자로 우람한 체구의 트룹 대장을 가리기에는 너무나도 차이가 크다. 그리고, 트룹 대장의 눈은 슬비가 아닌, 그녀 위에 그림 같이 그려진 소환진에 가 있었다. 원 모양으로 점멸하던 소환진은, 곧 그것을 비집고 나오려는 그림자의 본모습을 보여주었다.
"짓눌러버리겠어."
쿠콰콰콰콰콰콰!!!!
나지막히 중얼거린 슬비의 말과 함께 그녀가 들어올린 손을 밑으로 긋자, 트룹 대장도 삼켜버릴 거대한 크기의 시내 버스가 밑에 있는 차원종들을 덮쳤다.
그 후에는 일방적인 학살이 진행되었다.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어오며 차원종의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낸 검은 양 팀의 리더, 이슬비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가로막는 차원종들을 박살내버렸다. 이제 B급 차원종 정도로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덧붙여 그 이하의 잔챙이들은 그저 다음 차원종이 나타날 동안 시간벌기를 하면 그만일 뿐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실제 상황하고는 느껴지는 긴장감이 다르군...'
크거어어...
탱그렁ㅡ
말 머리 뼈 모양 얼굴을 지닌 스컬들을 통솔하는 보스 급 스컬, '혹한의 스컬 나이트'가 단말마와 함께 불타오르는 화염에 감싸져 몸부림치다가 쓰러진다. 그 옆에는 스컬 나이트가 들고 있던 손잡이가 원반형인 거대한 검이 박살난 채 흩어져 있고, 산양의 그것을 연상케하는 푸른색 뿔만이 바닥에 덩그러니 남겨져있어 그곳에 스컬 나이트가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그것 마저도 곧 입자화해 뒤늦게 사라진다. 슬비가 차원종들을 쓰러뜨리는 속도를 큐브가 따라가지 못해서 근처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입체영상으로 구현화된 차원종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말렉, 칼바크 턱스, 하케톤케일, 아스타로트, 그리고 애쉬와 더스트. 슬비는 첫 대면을 했을 때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느꼈던 이들을 상대했을 때, 그 때 온 몸에 흐르던 떨림과 긴장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녀 자신을 성장시킨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맹수의 이빨 앞에 목을 드러낸 심정과도 같았다. 죽음이 그렇게 가까웠던 적이 없었으니까. 큐브의 훈련 프로그램은 만족스러웠고 처음에는 정말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적응을 끝낸 지금의 그녀에게는 이제 그 때만큼 무서움은 전혀 없었다. 물론 또 그런 강대한 적이 나타나는 건 사양이었지만. 무소식이 언제나 희소식이었다.
"......음? 뭐지? 벌써 끝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에 잠겨있다가, 슬비는 문득 꽤 긴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더이상 차원종이 생성되지 않는 다는 걸 눈치챘다. 사방이 고요했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생성되기만 하면 벌집을 건드리자 뛰쳐나온 성난 벌 떼처럼 몰려오던 차원종들이 보이지 않았다. 훈련이 끝났으면 주변 환경이 이전의 그 삭막한 큐브로 바뀌어야하는데 그럴 기미도 없었다. 이상하다고 여긴 슬비가 통신으로 유정을 부르려는 순간ㅡ
"슬비야! 긴급 상황이야!"
ㅡ먼저 유정이 그녀에게 연락을 해왔다. 통신기로부터 전해지는 유정의 목소리에는 이유 모를 다급함이 역력히 느껴져서, 근처의 건물 잔해에 걸터앉아 쉬고 있던 슬비가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유정 언니? 무슨 일이시죠?"
"크, 큰일 났어! 이럴 리가....이럴 리가 없는데...내 눈이 잘못된 건가? 큐브 내의 위상 변곡률이 상승하고 있어! 그것도 급격, 아니, ** 듯이 오르고 있다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렇게 가파른 상승 곡선은 처음이야. 큐브가 또다시 폭주한 것 같아! 훈련은 중단해! 얼른 모든 장치를 끄고 문을 개방할 테니까, 당장 거기서 빠져나와 슬비야. 지금 당장ㅡ"
"언니? 유정 언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흔히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치직 거리는 노이즈조차 나오지 않았다. 슬비는 직감적으로 외부와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었다고 판단했다. 비슷한 경험을, 정식 요원 심사를 받을 때도 해본 적이 있었으니까. 통신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봐도 묵묵부답인 걸로 봐서는, 역시 그런 듯 했다.
'뭐야, 다시 큐브로 돌아왔어? 훈련이 종료된 건가?'
스테이지는 그 잠깐 사이에 신서울에서 큐브로 되돌아와있었다. 슬비가 그동안 진행했던 훈련에서 본 자연스러운 변화는 아니었다. 꼭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강제 종료한 것처럼 큐브의 환경이 억지로 바뀐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큐브를 제어하는 컴퓨터의 기계음이 나오지 않은 게 그 증거였다.
".....!!"
순간, 뒤에서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느낀 슬비는 재빨리 앞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허공에 잔상을 남기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어질 정도로, 매끄럽게 '긴급회피' 스킬로 미끄러지듯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엄청난 단련으로 인해 위상력을 컨트롤하는데 익숙한 그녀는 검은 양 팀원들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으로 사이킥 무브를 구사할 수 있었다. 공중에 살짝 떠 있다가, 땅에 가볍게 착지한 슬비는 조금 전 그녀가 느낀 위압감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 곳에는,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슬비보다도 더 어리게 보이는 중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소녀였다. 하얀색 와이셔츠에 연베이지색 조끼, 그리고 회색 플리츠스커트와 하얀 루즈 삭스 차림의 의상은 완벽한 학교의 '교복'이었다. 조끼의 왼쪽 상단에 붙여져 있는 마크가 그것을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어깨까지만 내려오는 길이의 갈색 단발머리에 단정한 외모, 그리고 교복은 한창 뛰노는 10대 소녀가 가질 수 있는 특징을 다 나타내고 있었지만, 그녀에게서 학생다움이란 느낌은 전해져오지 않았다. 공부만 하는 모범생도, 놀기 좋아하는 스포츠 소녀도, 심지어는 불량한 ***도 아니었다.
'나보다 어린데, 그렇다고 전혀 생각되지 않아...그것보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소녀다움을 망치는 단 하나의 요소는, 슬비를 쳐다보는 소녀의 눈빛에는 그 나이 대 청소년이 한창 가지고 있을 생기발랄함은 티끝만큼도 없었고, 그 대신에 담겨있는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냉기였다. 어른에게서도 보기 힘든 그런 것을, 슬비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당신은 누구.....?"
두 개의 단검을 잡고 있는 양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로, 이슬비는 눈 앞에 나타난 '침입자'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는, 휴식 중에는 거두어두었을 여러 기의 전자 기기들이 위상력에 의해 변화한 그녀의 머리색과 똑같은 분홍빛 구체에 감싸져 부유하고 있다. 슬비의 움직임에 맞추어 상대를 공격하는 역할을 맡는 그 비트들은 얼핏 보면 묵묵히 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적이라고 판단될 경우, 즉시 대응하기 위해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
정적이 흐르고 있는 이 정육면체 공간 안에 낯선 침입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울려퍼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죽어있는 듯한 눈빛과는 달리, 아직 소녀다운 온기가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녀를 보고 슬비가 꺼낸 첫 마디와 똑같았다.
"제가 물어봤을 텐데요. 당신이 누구냐고. 혹시 차원종인가요?"
"차원종?"
계속해서 대답 대신에 자신의 말을 되풀이 하는 침입자에게 슬비가 살짝 눈썹을 찌푸린다. 자신은 진지하게 묻고 있는데, 이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이 처신하는 침입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장난치실 만큼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 여기는 일반인이 들어올 수 있는 구역, 아니, 공간이 아니에요. 어떻게 이 곳으로 들어온 거죠?"
자신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는 자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을 기대하는 게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지만, 슬비는 경계하는 기색을 굳이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그녀 말대로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이 곳은 '큐브'. 유니온 기술부가 개발한 특수훈련실로, 클로저들이 정식 요원으로 승급하기 위한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거쳐가는 곳이었다. 그 방법은 심사 대상인 클로저의 기억을 바탕으로, 가장 알맞은 적, 차원종을 질량을 가진 입체영상의 형태로 출력하여 맞서게 하는 것이다.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개개인의 역량에 맞춘 전용 시험 문제를 뽑아 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그 심사 도중에 외부인의 출입은 통제된다. 단순히 '시험'에 개입하여 공정한 평가를 망치는 행위를 차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입체영상이라고 해도 질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큐브 내부에 출현한 차원종들은 큐브 안에서는 실제 차원종들과 다를 바가 없다. 위험성 또한 마찬가지라는 거다. 게다가 현재 큐브의 난이도는 정식 요원인 이슬비에 맞게 설정되어 있다. 바깥에서도 보기 힘든 고위 차원종들이 방금 전까지 이 안에 우글거리고 있었다. 물론 슬비가 다 처리하긴 했지만, 그 전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면 생명이 위험했을 거라는 건 자명했다.
"대답하세요. 당신은 차원종입니까?"
"........"
게다가, 침입자가 나타나기 전 김유정이 다급하게 외쳤던 경고도 슬비는 신경이 쓰였다. 일반적으로 위상변곡률이 높아진다면 차원간섭이 일어날 확률이 상승, 곧 차원문(위상게이트)가 열려 차원종이 출현한다는 것을 뜻한다. 위상변곡률이 상승하던 건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남역부터 G타워까지 슬비와 함께 수라장을 헤쳐온 유정이 그렇게 당황할 정도라면 그 상승세의 위험성은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에 나타난 이 침입자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기에 슬비는 눈 앞에 서 있는 침입자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현재 침입자의 정체에 대한 가능성은 총 세 가지다. 첫째는 차원종, 둘째는 유니온의 관계자,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정말 아무 상관없이 우연히 여기에 휘말려버린 제 3자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 거야?"
"?!"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침입자가 중얼거리자, 슬비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침입자는 슬비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에, 큐브의 내부를 한 번 슥 올려다보더니, 흥미가 동했는지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슬비와는 대조적으로 침입자 소녀의 얼굴에는 이 상황이 재미있기라도 한 것처럼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건 꼭 아름답게 세공된 인형이 웃는 것 같아서 섬뜩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네가 말하는 '차원종'. 그게 뭔지 나는 몰라. 당연히 난 그게 아니고. 그리고 이 곳....아마도 꽤 공들여서 만든 것 같네. 아까 여기에 있었던 것들, 생물의 반응이 아니었어. 생체적 신호가 하나도 없었거든. 기계? 그렇다면 원자 단위로 분해되는 공격을 받지 않는 이상 잔해가 남기 마련인데 그것도 보이지 않고. 그러면 홀로그램이군. 근데 보아하니 실체를 지니고 있는 것 같은데......호오."
"이봐..."
조용히 있다가, 막힌 둑이 터져 안에 있던 물이 쏟아져나오는 것처럼 말하는 침입자 소녀를 보며 슬비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긴장하고 있던 게 다 헛수고인가 싶을 정도였다.
"다차원이 서로 간섭하는 압력을 한 점에 집중한 건가? 신선하네. 흐음. 구현화 하는 그 데이터는 어디서 뽑아오는 거지? 그런 엄청난 용량을 하나하나 저장해서 따로 관리하는 건 그다지 깔끔한 방식이 아닌데. 유지하는 데도 비효율적이고. 이 정도 설비를 제조한 자들이 그렇게 우아하지 않은 방법을 썼을까?"
"이봐, 당신!"
뭐라고 반박하려는 슬비의 말을 무시한 채 침입자는 말을 이어갔다. 소녀는 그저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큐브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맞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절대로 얕은 지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유니온의 과학자들이 그녀를 봤다면 당장 스카우트를 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시간이 흐르고 있는 데도 큐브 외부와의 통신이 재개되지 않자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 슬비에게 그런 걸 한가하게 봐줄 여유가 있을리가 없었다. 슬비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서야 뒤를 돌아본 침입자는 그녀가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걸 보고,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저장이 아니라 동기화하는 방법을 쓴 건가. 실험 대상자의 기억에서 직접 뽑아내는 거였어. 알겠군, 알겠어~ 여기는 대상자를 분석해서 가장 최적화된 가상 시물레이션을 바탕으로 훈련을 시켜주는 훈련장이었구나."
"그게 아니잖아요. 제 질문에 답하란 말입니다!"
하지만 한눈에 처음 보는 큐브의 용도와 사용된 기술의 분석까지 다 파악한 침입자는, 정작 슬비의 기분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녀는 태연하게 자신의 지식욕을 채우려 하고 있었다. 둘러보는 것으로는 만족을 못했는지, 침입자의 시선이 큐브에게서 벗어나서 슬비의 위아래를 훝어보았다. 마치 온몸을 핥는 듯한 끈적끈적한 시선에 슬비는 본인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
"너도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말한 대로, 난 네 기억 속의 존재가 실체화한 존재야. 아, 정확히 말하면, 이.끌.려.져. 나온 거지. 이 곳의 차원으로."
침입자는 두 팔을 벌리더니, 오른손으로는 슬비를 가리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슬비도 이해가 갔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또 있었다.
"전 당신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만."
"흐응? 나야, 나. 못 알아보겠어? 분명히 알아볼 텐데."
파직
침입자 소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주변에서 청백색 스파크가 번쩍 하고 일어났다. 그 순간, 여태까지 긴가민가하며, 무의식적으로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언동이나 눈빛이 달라서 부정하고 있었던 슬비의 가정이 힘을 얻었다.
"......설마, 미사카 미코토?"
"딩. 동. 댕~!"
짝짝짝ㅡ
퀴즈 프로그램에서 정답을 맞춘 출연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처럼, 미사카는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양 손으로 박수를 쳤다. 슬비는 여전히 믿겨지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말했잖아. 네 기억 속의 존재라니까? 여기, 네가 말한대로라면 이 '큐브'라는 이름의 시설이, 네 심리와 기억을 분석해서 '나'라는 존재를 실체화시킨 거야."
"내가 본, TV에서 방영해주던 애니메이션이.....?"
"정답, 일거야. 여기의 차원 속에서는 내가 애니메이션 속의 존재라니, 좀 서글픈데. 내가 살고 있는 차원에서는 내가 현실이고 너가 게임과 만화, 애니메이션 속의 존재인데 말이야. 난 널 한 번에 알아봤는데? 내가 아는 그대로거든. 너는."
아주 간단하게 제 4의 벽을 넘어버리는 미사카와 대화하며 슬비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미사카를 알아보는 건, TV 애청자인 그녀가 봤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복장이나 외모는 애니메이션과 똑같았지만, 성격이나 느껴지는 분위기가 너무나 다른 것 같았고, 또 작품으로 접하는 것과 실제로 만나는 건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원작에는 저런 끈적한 시선이나 죽은 듯한 눈빛, 그리고 과학과학스러운 면모는 없었다.
"말도 안 돼...."
거기다가 자기는 그녀의 세계에서 게임 속 캐릭터라고 한다. 맥빠진 목소리로 슬비가 중얼거리자, 미사카는 바로 캐치했는지 척, 하고 손가락을 위로 세우며 말했다.
"왜 말이 안 돼? 내가 아까 말한 거 들었지?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라고 해도 그렇게 척 보고 한 번에 여기에 쓰인 기술들의 원리를 분석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어디서 ** 않았더라면 그럴 수는 없지. 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꼭 책에서 본 걸 그대로 말하는 것처럼 똑같이 말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런데.....나는 진짜로 다 봤거든.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사실 나도 반신반의해서 처음에는 모르는 척 하고 일부러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사를 했지만, 내가 여기 원리에 대해서 혼잣말을할 때 네 표정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어. 정말 너와 여기는 내가 아는 게임 속 세계라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자신의 상상과 현실로 강림한 캐릭터의 지나치게 대조적인 모습에 느낀 괴리감은 일단 접어두고, 슬비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재인식했다. 이 쪽으로 이끌려져 나왔다는 미사카 미코토의 존재는 그렇다 치자. 외부와의 통신은 여전히 먹통이고, 큐브의 개폐장치가 작동하지도 않는다. 밖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이대로 계속 여기 갇혀있을 수는 없다. 안에서 억지로 큐브를 부수기라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며 끙끙 앓는 슬비의 그 물음에 뭘 쓸 데없는 걸 고민하냐는 듯 미사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싸워야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그리 말하면서 오른팔을 슬비가 있는 앞으로 쭉 내미는 미사카. 그 오른손에는 동전으로 보이는 물체가 올려져 있었다. 미사카 미코토가 출연하는 애니메이션을 본지는 꽤나 시간이 흘렀지만, 슬비는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애니메이션의 인기와 함께 그 주인공인 미사카 미코토란 캐릭터의 상징이기도 한 능력. 일렉트로 마스터(전격술사)라는 초능력을 지니며, 학원도시의 레벨 5이기도 한 그녀를 다른 이들이 경외감을 담아서 부르는 이명이기도 한 그 능력의 이름은,
'초전자포(레일건).'
".......무슨 짓이죠?"
차원종들의 생성이 중단된 이후, 그저 부유하기만 할 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슬비의 비트들이 정렬했다. 이에 맞춰 잠깐 낮추었던 이슬비의 경계심이 상승한다. 미사카는 명백히 공격의 방향을 슬비가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엇다. 이제 그녀가 능력을 사용함과 동시에 손가락을 튕기면, 집고 있는 게임 센터의 코인이 전자기 가속을 통해 레일건의 탄환이 되어 발사될 것이다. 슬비와 미사카 사이의 거리는 50m가 채 안 된다. 당연히 아무 방비 없이 맞으면 즉사하고도 남을 위력이다.
"이해 못하겠어? 너가 나를 불렀고, 난 네 부름에 따라 이끌려져 나왔어! 큐브는 원래 네 기억을 토대로 가장 적합한 차원종을 입체영상으로 생성하지. 그런데, 너가 정식 요원이 되기 위해 승급 심사를 여기서 받을 때, 뭐가 나왔었지? 기억 나?"
슬비는 대답하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숨기려는 의도는 없었다. 어차피 미사카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다. 슬비가 미사카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한 편의 필름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정식 요원을 위한 승급 심사 때, 네 심층심리에 숨어있는 두려움이 차원종이 된 너를 통해서 표출되었다면, 나는 과연 왜 여기에 나왔을까? 그 답은 너가 제일 잘 알잖아?"
"하지만! 내가 아는 미사카 미코토는 그렇지 않았어! 레벨이 낮은 능력자들에게도 상냥하면서 응원해주고, 스킬 아웃 같은 학원도시의 범죄자들과 키하라들 같은 악인들과 맞서 싸우면서 차일드 에러들을 보호하면서 레벨 어퍼 사건을 해결하고, 레벨 6 시프트 실험을 스스로 희생해서 끝내려고 했던 그런 사람이였다고!
당신처럼 그런 죽은 눈빛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지나치게 과학에만 몰두하는 과학자스러운 면도 없었어. 이 상황에서도, 내가 아는 '미사카 미코토'라면, 다른 방법을 모색했을 거야."
차갑게 대꾸하는 슬비에게서, 미사카는 미묘하게 그녀가 중간에 어떤 부분에서 말을 할 때 움찔했다는 걸 감지했다. 슬비 자신도 느꼈는지, 말을 마치고 미사카를 똑바로 쳐다** 못하고 있었다. 속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겠지, 그런 슬비를 보고 미사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 '캐릭터'라고 말해도 돼. 나한테 너도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네가 봤다는 애니메이션에서는 거기까지 나왔나보구나. 그 뒤의 일을 모르고 있으니,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겠네.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으니 짧게 말해줄게.
큐브는, 그 뒤에 있었던 '어떤 일'을 계기로 변한 나를 여기 이끌어냈어. 네가 아는 범위라면, 그래. 키하라 겐세이. 그가 누군지 알지?"
"레벨 6 시프트 실험의 입안자이자....흑막."
모를 리가 없었다. 슬비는 그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작품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줄 몰랐다. 볼 때마다 자신을 개조하고 싶다는 정도연은 그 할아버지에 비하면 양반도 아닌 천사에 속했다.
"그는 그 녀석에게 의해 중단된 레벨 6 시프트 실험을 재개했어. 언제나처럼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그리고 강제로. 수 많은 평행세계가 존재하니 다른 차원에는 다른 결말들이 있겠지. 그리고, 이 '나'는 큐브가 너의 기억에서 뽑아낸 '미사카 미코토'라는 존재를, 너에게 적합한 적으로서 기능하게 하기 위해 그 결말들 중의 하나를 구현화시킨거야. 그런 나를 큐브가 이곳에 이끌어낸거야."
"결국, 너는...."
"알겠어? 난 네가 아는 그 올곧은 미사카 미코토가 아니란 소리야. 그 녀석도 구원해주지 못한 채....키하라 겐세이가 재개한 그 실험의 말로로 뒤틀리고, 타락해버린 미사카 미코토라고. 이슬비."
여기서 처음으로 미사카는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슬비의 이름을 알고 불렀다. 물론 슬비는 가슴에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는 정식 요원 명찰을 달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슬비가 미사카를 알아본 것처럼, 미사카의 세계에서도 미사카가 주장한 것처럼 이슬비가 게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다만, 여기에 있는 미사카는 슬비가 아는 그녀와는 전혀 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걸까. 학원도시 최강자도 그 소년과 함께 이겨냈던 그녀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었어? 이렇게 오랫동안 테스트, 아니, 훈련인가? 그게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데 이 정도 급의 시설을 관리하는 이들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게?"
아직도 갈등하고 고뇌하는 슬비에게 미사카가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슬비의 머릿 속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외부 통신이 끊어졌던 시점과, 미사카 미코토가 여기에 나타났떤 시점이 같다는 사실, 그리고, 큐브 내의 훈련용 가상 스테이지가 신서울에서 갑자기 다시 훈련장으로 바뀐 이유. 그건 외부에서 김유정을 비롯한 유니온 관계자들이 폭주한 큐브를 강제 종료시킨 것의 여파였던 것이다.
".....그렇다는 건."
"그래. 바깥과 이어지는 통신을 끊은 건 나야. 여기를 통제하고 있는 것도 나고. 큐브라고 했지? 지금도 밖에서는 큐브의 통제권으로 훈련 중단과 개폐 장치를 작동시키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있는 한 그건 불가능해. 증거를 보여줄까?"
[백그라운드 시뮬레이트 진행 중.]
미사카의 말과 함께, 기계음이 나오면서 큐브 내의 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높게 위로 뻗은 건물들. 자동차들과 버스들이 있지만 움직이지 않은 채로 도로 위에 있고, 인적이 하나도 없는 거리. 언뜻 보기에는 파괴되지 않은 신서울과 비슷해보였지만, 세부적인 느낌은 달랐다. 결정적으로, 간판과 표지판의 언어가 모두 일본어였다.
"학원도시....."
"여기 안은 너무 삭막하잖아? 이왕 싸울 거면,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싸우자고."
큐브의 통제권이 미사카에게 넘어간 것 또한 확실해보였다. 슬비는 애니메이션 속에서만 봤던 배경 속에 서자, 당혹감을 금치 못했지만, 의외로 일본어를 빼면 신서울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 사실, 그 애니메이션이 나온 시기는 상당히 옛날이지만 배경설정이 근미래적인 도시라는 걸 생각하면 신서울하고 비슷한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도시도 그다지 좋은 풍경은 아닌 것 같은데."
"공감이야. 하지만, 내 안식처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옥이기도 한 이 곳이, 내게는 가장 좋은 풍경이거든. 이해해줘."
슬비는 더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미사카가 그녀보다 나이가 어리기도 하고, 인간 대 인간 사이의 거리감도 없었다. 마침내 고민도 마쳤다. 미사카에게 설득의 여지는 없고,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도 없다. 유니온의 클로저이자 정식 요원인 이슬비는, 자신에게 뚜렷한 적의를 나타내는 미사카 미코토를 적으로 인식했다. 미사카가 코인을 세팅한 것처럼, 슬비의 비트들은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언제라도 적을 섬멸할 수 있도록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여기를 나가려면 너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거야?"
"바로 그거야."
소녀들 간의 대화는 곧 앞둘 무시무시한 전투에 비해서, 이상하리만큼이나 평화로워 보인다. 폭풍전야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리라. 하지만그것으로, 둘 사이에 대화는 끝났다. 몇 초도 안 되는 잠깐의 시간 동안에, 학원도시로 바뀐 이 스테이지는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 침묵이 끝나자, 두 소녀 간의 싸움이 태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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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은 미사카의 것이었다. 일치감치 공격 준비를 끝낸 그녀는 잠깐의 침묵을 레일건을 쏘는 것으로 부서뜨렸다. 능력 사용으로 인한 청백색 섬광으로 인해 뜨겁게 달궈진 공기 속에서, 미사카의 손에 의해 튕겨진 코인은, 곧 탄환이 되어 주홍색 섬광과 함께 가로막는 모든 것을 녹여버리려 날아간다.
콰콰콰콰콰아아ㅡ!!
침착하게 자신에게 발사된 레일건으로 노려보던 슬비는, 살짝 공중에 뜨더니, 몸을 뒤로 기울이며 위로 비스듬히 푸른 구체를 생성시켜 던졌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구체는 45도 정도 지면 위를 비스듬히 날아가다가, 미사카 위에서 딱 움직임을 정지했다. 동시에 전자기 가속으로 발사된 코인은 슬비의 바로 코 앞까지 도달했다.
치링
그러나, 이슬비, 어엿한 클로저이자 유니온의 정식요원인 그녀가 이 공격에 맞아 한 방에 스러지는 일은 없었다. 슬비의 몸이 한순간 빛에 휩싸이나 싶더니, 점멸하던 그녀는 푸른 구체가 정지한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표적을 잃은 레일건은 오랫 동안 대기를 찢으며 오렌지빛을 뿌리다가 사라져갔다.
"....초소형 중력 탄환이야? 그걹 던져서 웜홀 비스무리한 걸 생성하는 건가? 텔레포트라....과학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재미있는 기술을 쓰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 게임 직접 한 번 해볼 걸 그랬어. 대략적인 스토리 밖에 모르고 있는 걸."
자신을 내려다보는, 분홍빛 머리와 차가울 정도로 맑은 파란 벽안을 지닌 소녀에게 미사카는 정말로 아쉽다는 듯이 말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슬비는 대답 대신에, 미사카의 등 뒤로 사뿐히 착지했다. 미사카가 대응하려 뒤를 돌아볼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녀는 양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중력 역전!"
곧바로 슬비의 주위에, 하늘을 향해 몸을 세우고 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장판이 형성되었다. 바로 뒤에 있던 미사카 또한 그 범위 안에 들어갔고, 슬비가 만들어낸 중력장은 전에 거꾸러뜨렸던 차원종들처럼 즉시 위에 서 있는 모든 물체에 작용하는 중력을 사라지게 했다.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무중력 상태로 된 그 장판 위에서, 오로지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시전자인 이슬비 뿐. 미사카는 그녀처럼 위상력을 기반으로 한 염동력, 즉 사이킥 무브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중력이 상실되자 차원종들처럼 공중으로 떠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위로 떠오른 미사카와 슬비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상실되었던 중력이 슬비가 치켜든 팔을 내리는 것으로 몇 배는 더 커진다.
".....?!"
"잊었어? 우리가 서 있는 도로에는....철 성분이 아주 많다는 걸."
파직....파지지지직
그러나, 강화된 중력에 의해 가차없이 바닥에 처박힌 차원종들과는 달리, 미사카는 중력장이 사라질 때까지 허공에 그대로 떠있었다. 간단히 공격을 허용할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중력의 간섭을 피하면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시선들, 그 속에서 슬비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아주 잠깐 스쳐지나갔고ㅡ미사카는 그 빈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언니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아마도 단검을 수납하는 걸로 보이는 그 케이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
쉬이익ㅡ!
이번에도 슬비는 미사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미사카가 손가락으로 슬비의 단검 케이스를 가리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저 멀리 축구공을 차는 것처럼 내팽겨쳐졌기 때문이었다. 끊어지지 않게 단단히 장착한 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슬비의 가녀린 체구가 보이지 않는 끈에 매달린 것처럼 속절없이 뒤로 날려진다.
콰직
허나, 마음 편히 날아가는 것조차 미사카는 슬비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사이킥 무빙으로 몸의 중심을 잡아 균형을 회복하기 전에, 그녀는 가로등 하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내더니, 밑으로 내리쳐서 도로를 박살냈다. 부서진 도로의 파편들은 곧 허공에 떠올라서 아주 쉬운 과녁이 된 슬비를 향해 돌진했다.
퍽
"결계 전ㅡ커윽?!"
슬비는 자신에게 아**트와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마자 염동력으로 단검과 비트들을 조종, 자신을 보호하는 염동 결계를 만들어냈지만 급조한 것으로 밸런스도 잃은 상태에서 모두 다 막아내기는 무리가 있었다. 조약돌만한 파편이 몸에 꽂힌 것만으로도, 그녀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약한 소리 내지마. 잔뜩 날려줄 거니까."
쿠쿠쿠쿠쿵!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사카는 가로등이 어떻게 되건 간에 상관 않고 마구 움직여대면서 거리를 파괴했다. 모래성을 만드는 것에 싫증난 어린 아이가 발로 차서 헤집어버리는 것처럼, 근미래적인 기술이 투입되어 있는 도시의 거리가 간단하게 엉망이 되어 간다. 구부러진 가로등과, 떨어진 간판들, 부서진 도로의 파편들을 포함한 온갖 것들이 자기력에 영향받는 금속만 포함되어 있으면 허공에 떠올라 슬비를 요격하려는 미사일, 즉 탄막이 되었다.
슈슈슈슈슈슈슝!
"크....집...속탄 생성! 집중 포화!"
꼬챙이로 꿰는 걸로 모자라, 떨어지는 운석 파편에 시달려서 크레이터가 흉칙하게 패인 달의 표면으로 만들어버리려는 파편들이 슬비 앞에 생성된 자기장에 모여든다. 그것으로 일단 위기를 넘긴다. 그 후, 슬비의 염동력에 이끌리는 다수의 단검들이 힘을 잃은 파편들을 부수면서 미사카에게 날아온다.
"이런 건 통하지 않는 걸 알텐데?"
하지만, 전격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에게 슬비의 단검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굳이 자기력으로 튕겨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어느샌가 도로에서 사철을 뽑아내서 검, 아니 더 늘려서 채찍 형태로 만든 미사카는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날아온 단검들을 산산조각내버렸다.
"그게 끝이 아니야."
마지막으로 날아든 단검을 미사카가 사철검으로 쳐내는 순간, 바닥에 착지한 슬비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콰아앙ㅡ!
스컬 나이트를 태워서 재로 만들었던 기술, '화염 폭풍'이 방금 전까지 미사카가 서 있던 자리에서 거세게 타오른다. 미사카 또한 커진 불길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슬비는 그녀가 이리 간단히 쓰러질리 없다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길이 꺼지자 보란 듯이 미사카가 옷자락만이 살짝 그을린 모습으로 멀쩡히 나타난다.
"이야, 방금 건 정말 위험했어.'레이더'가 아니면 위험할 뻔 했잖아. 뜨거웠어~ 한 방 먹었는 걸?"
'.....전자파로 전방향을 레이더처럼 파악하고 있는 거야?'
그랬다. 슬비가 던진 단검 중 하나가 특별하다는 걸 미사카는 '레이더'를 통해 바로 눈치채고, 사철과 파편들을 이용해 방패를 만들어 불길을 막아낸던 것이다.
파즈즈즈즛!
쉴 새도 없이 두 소녀는 전투를 재개한다. 이번에도 먼저 공격하는 측은 미사카 미코토다.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 주위로 순수한 전격들이 그 에너지를 마음껏 뽐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막대하게 모이는 그 에너지는, 오직 미사카를 제외한 그녀 주변에 말려든 모든 것을 검게 태우면서 가만히 서 있는 이슬비를 잡아먹을 기세로 달려든다. 일렉트로 마스터가 쓸 수 있는 지극히 기본적인 공격이지만 '기본적'으로 강력하다는 뜻도 된다.
'이번에 한 번 시험해볼까? 학원도시의 초능력과, 우리 클로저들의 위상력으로 구현한 전기의 힘이 서로 맞부딪치면 어떻게 되는지.'
슬비는 피하지 않고, 자신을 덮쳐오는 청백색 스파크들 향해 그녀가 알고 있는 오로지 전기 에너지로만 순수하게 이루어져 있는 스킬을 발동했다.
"전자의 폭풍이다!"
콰르르르릉!
슬비의 외침과 함께 정면을 세 갈래로 나누는 벼락이 몰아친다. 맹렬히 슬비를 향해 달려오던 전격은 그녀가 만들어낸 전자 폭풍와 충돌하더니, 이내 상쇄되어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치직...
전격은 잦아들었지만, 미사카와 슬비가 싸우고 있는 거리는 난장판이 된지 오래였다. 성한 가게나 건물이 없었고, 도로도 숯검댕처럼 새까맣게 타버렸다.
"......."
그 가운데, 쉬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던 미사카는 번개가 사라진 뒤에도 더 뭔가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또 뭔가 하겠지, 하고 긴장하며 대비하려던 슬비는 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미사카의 얼굴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좋아.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슬비 언니.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싸움이 시작된 이후,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던 미사카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본 슬비는, 파편을 맞아 욱신거리는 배의 통증에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슬비가 막아낸 전격은 나름 미사카가 '신경을 쓴' 일격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는 전기를 바탕으로 인정받은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기도 했다. 학원도시 내에서는 전격을 다루는 능력만으로는 미사카를 따라잡는 가능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이제 진지하게 가겠어...."
분노를 잔뜩 억누른 미사카의 목소리가 슬비에게도 들려왔다. 그리고, 슬비가 그 말을 듣고 다음에는 무슨 공격이 올까, 하며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는.
"에?"
미사카가 바로 그녀 눈 앞에 와 있었다.
치이잉ㅡ!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허나 자세히 보면, 둘 다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한 쪽은 척 봐도 진동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사철로 이루어져 있는 초진동 나이프. 미사카 미코토의 것이다. 다른 한 쪽은 그 사철검을 분홍빛 오오라로 감싸여져 있는 두 개의 단검을 교차시키는 것으로 막고 있는 이슬비였다.
'정말로...죽을 뻔 했어...'
그녀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0.1초라도 대응을 그녀가 늦게 했더라면, 지금쯤 슬비의 몸은 훈련 때 그녀가 쓰러뜨렸던 차원종들과 별다를 게 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자기력을 이용한 고속 기동. 막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위상력을 단검에 온 정신을 다해 집중시키지 않았다면, 단검이 삽시간에 두 동강이 나버리니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기회였다. 이렇게 큰 공격은 실행 직후 반드시 간격이, 게임에서 흔히 말하는 후딜레이가 생긴다. 공격의 턴이 끝나고 수비에게 반격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 구도에 있는 슬비에게는 미사카에게 결정적인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수단이 하나 있었다.
"........"
그러나, 슬비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미사카와 검을 맞대고 있는 채로, 1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제 수비의 턴도 지났다.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둘은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흐름은 공격에게로 넘어왔다.
부들 부들ㅡ
실제로, 미사카는 사철검을 슬쩍 슬비의 단검들에게서 떼내었다. 그런데, 정작 슬비는 단검을 교차한 그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만이 그녀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얼어붙은 듯이 움직이지 못하는 슬비의 귓가에, 미사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게 당연해. 사철검 자체는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오랫동안 맞대고 있지는 말았어야 했어."
꼼짝도 못하는 슬비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못 참겠다는 듯 미사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슬비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전격과는 다른 찌릿한 감촉이 피부에 퍼지면서, 수치심과 함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그녀의 몸이 멋대로 신음 소리를 내게 만든다.
"윽....흐읏..."
"꽤나 좋은 소리를 내잖아, 슬비 양. 촉감이랑 안면은 마비시키지 않았으니까. 운동신경도 전기신호로 움직이니까, 언니도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남한테 하는 것도 실.험.으로 여러번 해봐서 제법 익숙해졌어. 그렇지 않아?"
피부의 감촉을 음미하듯이 흐응, 하고 미소짓는 그녀의 손가락이 점점 슬비의 목덜미로 내려갈 때마다, 슬비의 몸이 감전된 것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불행하게도, 실제로도 그녀의 몸은 미사카의 전격에 의해 마비되어 있었다. 미사카가 가지고 있는 규격 외의 힘이, 사철검을 통해 위상력을 뚫고 단검으로 흘려넣어져ㅡ그걸 쥐고 있는 슬비의 신체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난 언니를 죽일 각오가 되어 있고, 언니는 그렇지 않아. 여기서부터 벌써 승패는 결정난 거야. 왜 망설였던 거지?"
미사카의 말대로, 슬비는 굳이 그 교착 상태를 오래 끌고 갈 이유가 없었다. 그녀의 위상력 컨트롤이라면, 그리고 차원종들과 맞서 싸우며 겪었던 다양한 위기 상황을 통해 익힌 위기 대처 능력이라면 무언가 다른 걸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걸 아는 것처럼 미사카는 슬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슬비가 있는 곳이 게임으로 나와있다고 했고, 마찬가지로 슬비의 이야기도 미사카는 알고 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더욱 더 미사카는 슬비를 이해할 수 없는 듯 했다.
"언니는, 분명 차원종들에게 부모님을 잃었잖아. 그것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유니온의 클로저 양성 시설에 들어가서, 어릴 때부터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던 것 아니야?
나한테 쓰러지면 그 목표를 이룰 수 없을 텐데."
슬비는 순간, 미사카가 이전에 정식 요원으로 승급하기 위한 심사를 봤었을 때 큐브 안에서 나타났던 또다른 자신인 줄로 착각할 뻔했다. 차원종이 된 자신은 그녀를 손바닥 안에 놓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꿰뚫어보고 있었다. 미사카도 똑같았다. 다른 세계에는 슬비 자신의 이야기가 그렇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일부러 떠보는 것 같은 말투는 언제나 슬비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난, 아직 지지 않았어."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이를 악물며 움직인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반항적인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슬비에게, 미사카가 움직이려 했지만 슬비가 한 발 더 빨랐다.
"강제 캔슬!"
츠파팟!
기합과 함께 충격파가 슬비에게서 말 그대로 '터져' 나왔다. 그녀가 서 있던 바닥이 우지끈 하고 내려 앉을 정도의 압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그 여파에 미사카가 휩쓸려 날아간다. 슬비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전력은 이미 그 기백에 눌려 흩어진지 오래다. 거기다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푸른 기운은 슬비가 위상력 개방을 통해 더 강력해졌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게 있으면서도 일부러 방심을 유도한 건가?!'
미사카는 금방 자세를 바로 잡았지만, 충격파에 당했던 시점부터 슬비에게 대놓고 공격 시간을 준 것이었다. 그녀가 도로에 내려앉았을 때에는, 이미 슬비가 거기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뻗고 있을 때였다.
"흐아아아압!"
슬비가 두 손을 꽉 쥐며 모으자, 미사카 바로 옆의 공간이 아지랑이가 낀 것처럼 일그러졌다. 공간을 압축시켜 한 점으로 모으는 슬비의 기술인 '공간 압축'이 사정없이 미사카를 끌어당긴다. 허나, 기습을 두 번 허용해주는 상대가 아니다.
"칫."
파지지지지직ㅡ
레벨 5 초능력자가 만들어낸 전격은, 능력자 본인을 자석처럼 단단하게 땅에 고정시킨다.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끌려들어가지도 않는다.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되려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는 그 모습에 슬비는 진심으로 감탄했지만, 상황은 그녀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게, 내가 노린 거라고!"
'공간 압축'은 슬비가 정신 집중을 해야하지만, 그게 끝나고도 얼마 동안 효과가 지속된다. 미사카는 그녀가 공중에 떠올라서 위상력을 이용하여 소환진을 여는 걸 가만히 눈뜨고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어느새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자가 자신과 주위를 뒤덮은 걸 보면서, 미사카가 혼자 중얼거렸다. 슬비가 손을 뗀 공간 압축의 영향은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자력으로 벗어나기 전에 저 시내 버스가 땅에 낙하할 것이다.
"신서울을 구한 영웅답네."
하지만 시내 버스 도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물체. 미사카의 자기력에 영향을 받는 탓에 그녀가 막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미사카는 곧 있으면 떨어질 버스에서 시선을 돌려, 공중에서 자신을 손가락으로 겨누고 있는 슬비를 바라보았다. 그녀 뒤에는 분홍색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섬광들이 여러 개 막 발사되려는 화살처럼 미사카를 노리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너를 좋아했는데....미안하게 됐어."
딱.
행여나 또 다른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약해질 걸 염려했는지, 슬비는 그 말을 끝으로 지체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쿠콰콰콰콰콰콰ㅡㅡㅡㅡㅡ!
지유유유유유융ㅡ
"헤에....그건, 고백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야, 슬비 언니?"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탓에 시시각각 커지는 것 같은 시내 버스의 그림자와, 멀리 있는 데도 벌써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는 섬광 속에서 미사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슬비는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제대로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귀기울기 전에 굉음이 자그마한 목소리와, 목소리의 주인을 같이 지워버렸으니까.
콰지지직!
수 많은 차원종들을 짓밟고 태워 빛으로 화하게 만들었던 이슬비의 두 개의 결전기. 시내 버스 폭격과 레일 캐논이, 단 한 명의 중학생 소녀를 향해 무자비하게 쏘아진다. 먼저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지면을 향해 돌진하고, 곧 땅에 닿더니 엄청난 소리와 함께 산산히 부서진다. 뒤이어 뜨겁게 달구어진 쇳덩어리가 종이를 뚫어버리는 것처럼, 쏟아져 내리는 빛의 광선들이 낙하의 충격으로 박살난 버스를 조각조각으로 '찢어'버린다. 게다가, 버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엔진과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인 천연가스.
쿠아아ㅡ앙!
소리도 파묻히게 할 정도로 격렬한 폭발이 일어난다. 자신이 상정한 크기를 넘어서는 폭발의 위력에 슬비는 황급히 사이킥 무브로 뒤로 빠졌지만, 그보다도 더 빠르게 퍼져나가는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버렸다.
학원도시의 거리는 이제 전의 모습을 눈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 파괴된 신서울의 모습보다도 더할 정도였다. 어지간한 사고 수준이 아니라, 강력한 지진이 휩쓸고 간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 하나, 무너져내린 벽 밑에서 이슬비가 잔해를 헤치고 몸을 일으켰다.
"....으음."
몸 여기저기가 먼지와 상처투성이고, 폭발의 여파로 인해 옷이 찢어지고 그을렸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슬비는 자신보다는 상대의 생사에 더 관심이 있었다. 막말로 그렇게 해도 안 죽으면 질릴 정도의 공격을 퍼붓긴 했지만, 상대가 상대다. 만에 하나라도 방심을 할 수가 없었다.
"끝....났나?"
그 말을 입 밖에 낸 직후, 슬비는 저도 모르게 픽하고 웃어버렸다. 자신의 꼴이 꼭 그녀가 본 TV 프로그램들, 영화나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에서 악당이 주인공을 쓰러뜨렸다고 생각하며 방심하는 장면과 똑같았던 것이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확실하게 끝장을 내려면 그런 대사를 말하는 대신에 경계심을 풀지 말아야 한다고."
"으아아아?!"
바로 뒤에서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들리자, 슬비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 미사카 미코토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놀란 슬비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미사카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쿡쿡. 슬비 언니, 방금 그 비명, 엄청 귀여웠다고?"
"노, 놀리지 마!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기운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에서 위상력릉 쥐어 짜낸 슬비는 겨우 두 세개의 비트만을 생성시키면서 소리쳤다. 솔직히 이쯤 되면 이길 방도가 거의 생각나지 않아서, 소리만 컸지 자신감은 없었지만서도. 이에 미사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노. 못 빠져나왔지. 그냥 사람이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었겠지만, 난 큐브가 만들어낸 입체영상이잖아? 즉시 사라지는 건 아닌 것 같네. 하지만 금방이야.
언니가 이겼어."
그녀의 말대로, 슬비가 자세히 보니 그 모습은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릿했다. 고장난 TV나 모니터처럼 이따금씩 형태가 흩어지려다 마려는 것을 보아 미사카의 말은 사실인 듯 했다. 그 빈도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미사카에게 싸울 의지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 슬비는 단검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렸다.
"내켜서 하게 된 건 아니었지만, 좋은 승부였어."
"나도~ 게임 속 캐릭터랑 실제로 이렇게 신나게 싸워볼 수 있을 줄은 몰랐네~"
아까 전까지 죽일 기세로 공격했던 적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모습의 미사카였다.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라 대련이라도 나눈 것처럼 태연하게 그녀는 슬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비는 잠시 주저하다가, 악수를 뜻함을 알고 손을 내밀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미사카의 손은 이미 소멸한지 오래였던 것이다.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미사카가 사라진 자신의 손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슬비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미사카는 그런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코 오만하거나 그러지 않고 상냥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 호인이었다. 정말로 친구로 삼고 싶은 사람이었다. 격렬했던 전투가 끝나자, 상황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결론은 그다지 좋지 않게 나왔다.
"......어쨌건 간에, 이 사태를 초래하게 된 건 결국 나 자신인 거구나."
"......"
"미안해..."
큐브 때문이었다고는 해도, 그녀 자신의 '적'으로서 세팅하기 위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평행세계의 '가능성'을 실체화시켜 '상처 입고 나락에 떨어진' 미사카를 불러낸 건 슬비였다. 다시 말해, 슬비가 원래는 해피 엔딩으로 이어지는, 아니 이어질 예정이었던 미사카를 억지로 잡아채서, 지금과 같은 그런 설정의 캐릭터로 만들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것도 훈련 때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남에 의해 더럽혀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거라는 건....'
그 심정이 어떤지 슬비는 감히 헤아릴 수도 없었다. 역지사지. 미사카가 그녀 자신의 세계에서 슬비를 비참한 결말로 이어지도록 이야기를 맘대로 고치고, 그걸 알았을 때 자신의 기분이 어떨 것인지. 그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침울해진 슬비를 위로하려는 듯이 미사카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꼭 그렇지는 않아. 그저 여기에 불려나왔을 뿐이니까. 원래 내 차원 속의 내가 말이야. 언니네 차원 속의 내가 있는 이야기는....어쩌면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겠지. 아니면 이미 나왔는지도 모르고. 소설이나 만화라는 언니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형태로. 우리 쪽에서도 그렇거든. 나, 언니가 나오는 내용의 만화. 아주 재밌게 읽었다고?"
"......!"
"그러니까, 큐브를 나가고 나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줄 수 있어? 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내 이야기를 재미있게 봐주었다면......나중에 내가 어떻게 되는지, 내가 맞이하게 된 결말과는 다른, 조금 더 행복한 결말이 있는지도, 지켜봐주면 좋겠어. 나중에 내가 그 녀석하고 잘 지내는 지도...나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확인해줘."
슬비는 미사카가 자신을 위해서 애써 쓸쓸함을 감추려 해주는 것을 알고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밝아진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계속 슬퍼하는 건 그런 호의를 보여주는 그녀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더 무거워질테니까.
"....알았어. 꼭 그럴게."
"고마워. 너무 자책하지마. 네 탓이 아닌 걸. 큐브가 이렇게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잖아? 힘내라고, 슬비 언니."
"미사카...."
"괜찮다니까? 그리고, 미사카는 내 성이야. 난 조금 더 친해졌으면 좋았을 사이라고 생각하는데, 미코토라는 이름으로 불러줄ㅡ"
자기보다 어린 나이의 소녀에게 위로받았지만, 그런 건 상관하지 않은 채 슬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사카를 품에 끌어안았다. 미사카는 처음에 당황했지만, 곧 눈을 감고 나이는 더 많지만 그녀보단 키가 더 작은 슬비를 꼭 안아주었다. 미사카가 입고 있던 조끼가 약간 축축해질 때까지, 둘은 포옹을 풀지 않았다.
"저기.....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미사카의 귓가에 대고 이슬비가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어리둥절해하던 미사카는, 그 말을 끝까지 듣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뭐야, 언니, 지금 와서 그런 게 궁금한 거야? 하긴, 그럴. 쿡쿡. 그럴 수도 있겠네. 쿡쿡쿡. 쿠쿡."
"우, 웃지 마!"
뭘 물어봤는지 이슬비는 볼을 새빨갛게 붉히며 웃는 미사카를 노려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미사카는 포옹을 풀고도 한참 동안 입을 가리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걸 스포일러한다고 하지? 하지만, 이번엔 예외야. 슬비 언니가 이긴 기념 선물!다 말해주면 재미없으니까, 이것만 말해줄게."
"......."
".....알았지?"
".....우으...."
"후후후. 슬비 언니 정말 좋아하는 구나, 그 사람을. 만화 내용 그대로네."
두 손으로 얼굴을 싸매쥐고 부끄러워 하는 슬비를 미사카는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백마탄 기사처럼, 그녀가 위급할 때마다 달려와서 도와주던 한 소년을 연모하던 때가. 비록 지금은 망가져버렸지만, 한시도 그녀는 그를 마음 속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바로 그 때.
화악
미사카 몸 여기저기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건 슬비가 훈련 동안 쓰러뜨렸던 차원종들이 사라지는 과정과 똑같았다. 입체 영상이 힘을 잃고 입자화하여 끝내는 빛으로 화하는 것이다.
"......이제, 작별인가 보네."
"미코토!"
슬비가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미사카는 가볍게 오른손을 위로 올려 흔들었다. 슬비에게 보내는 그녀의 작별인사였다. 그리고는, 슬비에게서 떨어지려 했으나, 슬비는 그런 미사카를 부둥켜 안았다. 사라지기 전에 그 촉감을 기억해두겠다는 듯이.
"걱정하지마! 그 작가가 너를 그런 식으로 설정해뒀을리가 없어! 분명 행복한 결말일 거야! 지금의 넌 내 불안감을 이용해서 큐브가 멋대로 만들어놓은 너일 뿐이야! 알겠지?"
빛은 점점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미 미사카의 손과 발은 흐릿해져서 그 뒤에 있는 배경이 보일 정도였다. 그럴 수록 슬비는 더욱 더 간절하게 외쳤다.
"사라진다고 해서 슬퍼하지마! 너의 이야기는 내가 꼭 다시 바꿔줄게! 다음번에 다시 만날 때는, 그런 식의 결말로 이어지지 않을 거야! 큐브가 이용할 내 불안감도 없을 테니까! 더 성장해있을 테니까! 끝까지 노력할게! 그러니까ㅡ"
주륵 주륵
미사카의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가득 차고 넘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자신을 죽이려한 사람인데도, 저렇게 진심 어린 걱정을 해준다. 이렇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해주는 사람을, 얼마 만에 만나는 건가. 같은 세계도 아니고 다른 차원에서 만난 사람이 저렇게 말해주었다. 그것도 잊고 있었던 만화와 게임 속의 캐릭터가 자신에게. 싸늘하게 얼어붙었던 마음에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ㅡ기다려줘."
슬비가 말을 마쳤을 때는, 미사카의 몸의 절반이 빛으로 화해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슬비가 안기 위해 벌리고 있는 팔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점점 식어간다.
".....고마워, 슬비 언니. 나도..."
사라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져서 이제는 얼굴 밖에 남지 않았다. 미사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까 고심하다가, 마침내 떠올렸다. 어둠 속에 너무나 오랫동안 잠겨 있었기에, 다시는 지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 표정을.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을 남기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사카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그것마저도 입자화하여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빈 자리에는, 미사카의 것인지, 슬비의 것인지 모를 구슬처럼 반짝이는 물 한 방울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건 어째서인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백그라운드 시뮬레이트 해제. 훈련이 종료되었습니다. 큐브의 잠금 장치를 해제합니다.]
슈우욱
"슬비야아ㅡ"
큐브 걔페 장치가 열리자마자 외마디 소리가 들리더니, 슬비는 자신을 향해 한 관리 요원이 뛰어드는 걸 보았다. 유니온의 검은 양을 맡아 관리하는 김유정 요원은 들어오자마자 두 팔로 슬비를 와락 껴안았다.
"괜찮아, 슬비야?"
"네, 저는 괜찮아요, 유정 언니."
"다행이다. 다행이야....지난 번에 있었던 사고가 또 일어나나 했어.....이번에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가 안심하며 연신 다행이다, 라고 말하는 유정에게 슬비는 빠져나오려 하지 않고 가만히 포옹을 받아들였다. 숨이 조금 막혀서 답답해도 그런 티도 내지 않았다. 밖에서 유정이 얼마나 걱정했는지는 불보듯 뻔했으니까.
"....슬비야? 얼굴이 빨간데? 많이 힘들었니? 영상 전송이랑 통신이 전부 원인불명의 재밍으로 다 끊겨서, 안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라. 이번에도 차원종이 된 네가 또 나온거야?"
"그, 그건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아, 그, 그러니까. 네. 맞아요. 힘들어서...
그런 그녀의 양 볼을 잡고, 어디 예쁜 얼굴에 상처라도 안 났나, 하며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처럼 살펴보던 유정이 묻자 슬비는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다, 곧 달아오른 열로 과부하된 머리를 식히며 대충 유정에게 얼버무렸다.
"....그래. 많이 힘들었을 테지."
물론, 슬비를 오래 봐온 유정이, 눈가에 어린 눈물자국이나, 그녀의 어설픈 연기를 눈치 못 챌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이상 묻지 않고 슬비를 배려해주었다. 슬비는 그것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볼에 홍조가 아직 남아있을 정도의 질문과 대답. 그것만큼은 절대로 부끄러워서 말할 수가 없었다.
더 부끄러운 것은, 미사카가 사라지기 전에 그녀에게 남긴 말이었지만.
*
ㅡ힘내, 슬비 언니. 여기서도 그 커플이 메이저야.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거든. 이건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ㅡ
"....자기도, 카미조랑 잘 되고 싶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침대 위에 선반에 올려놓으며 나는 혼잣말을 했다. 벽지도 새하얗고, 커튼도 새하얗고, 의자를 포함해 침대 매트리스와 이불마저도 새하얀 이 병실은 예전에도 온 적이 있어 익숙했다. 정식 요원이 되고 세하를 만난 이후 쓰러져, 여기로 실려와서 죽은 듯이 며칠을 내리 잤다고 했지. 이번에는 그냥 하루를 푹 자는 것으로 그쳤다. 의사의 말로는 심한 상처는 없어서, 이번 기회에 건강 검진도 겸해서 며칠 정도 입원하면 된다고 한다.
놀랍게도, 내 클로저로서의 능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어 있었다. 미사카 미코토와 그 날 큐브에서 만났을 때 전후의 스테이터스 차이는 상당했다. 때문에 이번 일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유니온 관계자들이 더더욱 관심을 보여서 설명하는데 난항을 겪었다. 진짜 애니메이션 속의 캐릭터가 나와서 싸웠다고 하는 건 믿어주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내 이미지하고도 상관이 있는 문제라서, 그냥 적당히 상상 속의 괴물이 차원종처럼 나와서 쓰러뜨렸다는 것으로 보고했다. 미사카와 나와의 둘 만의 비밀이라 독단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재미있네. 인기도 많은 모양이고....계속 시리즈가 나오고 있었구나."
기운을 차리고 자유 시간이 주어지자, 나는 간호사한테 부탁해서 미사카 미코토가 나온 소설과 만화를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것에 정통한 신강고에 있는 유니온의 감찰요원을 하나 알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매우매우 싫어하는 입장이라서. 같이 접점을 만드는 것 자체가 싫다. 그에게 물어보느니 차라리 내가 읽고 말겠다는 생각에, 마침 지루한 병원 생활동안 차근차근 책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던 레벨 6 시프트 실험의 재개는, 본편이 아닌 외전, 즉 스핀 오프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코믹스, 즉 만화책에서만. 그 만화를 읽으면서 키하라 겐세이가 얼마나 지독한 인간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 미사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도 짐작이 갔다. 옆에 있었으면 정말 노력해서 도와줬을 텐데.
".....아."
그렇게 보다보니, 그 에피소드가 끝나는 부분까지 읽게 되었다. 직접 맞부딪쳐봤기에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미사카의 강함에 대해서 실감하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붙었을 때는 봐주면서 싸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아니면 큐브가 강함을 적당히 조절해서 그녀를 불렀거나. 어쨌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말은, 해피 엔딩이었다.
카미조 토우마와 미사카의 친구들은 키하라 겐세이의 야욕을 저지하고 마침내 미사카를 구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선 그녀가 마음 속에 담아두는 상대인 카미조와 함께 포크댄스를 추게 되며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게 된다. 카미조 토우마란 주인공이 지나치게 둔감해서 그 쪽은 모르는 것 같지만.
"미사카. 보고 있어? 아니면 듣고 있어?"
들릴 리 없는 그녀에게 나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짧았던 첫 만남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로서 존재하고 있었기에,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카미조가 넌지시 말한 두근거리는 말에, 미사카가 얼굴을 붉히면서 당황하는 장면이 펼쳐진 만화를, 난 가슴팍에 안았다.
"카미코토, 나도 밀고 있을게. 완결이 날 때까지, 너희 둘이 맺어질 수 있도록. 그러니까, 응원해주는 거지? 거기서도?"
*
벌컥ㅡ
"야, 이슬비!"
"이, 이세하?!"
"너, 내가 잠깐 파견 나간 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무리하지 말라고 내가 말했잖아. 나 말고도 제이 형이 항상 말하고 있잖아. 너는 우리 팀의 리더야. 너가 다치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다고! 테인이나, 유리, 그리고 제이 형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지? 유정 누나도 그렇고. 널 아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봐."
"...하지만, 사람들을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난 재능도 없으니까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하는 걸...."
"이미 충분히 하고 있잖아. 너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무 자신을 채찍질하지마. 넌 충분히 강해. 어엿한 정식 요원이잖아?"
"그래도, 애쉬와 더스트처럼. 나보다 훨씬 강한 차원종들도 수두룩할거야. 지금은 잠시 평화지만, 힘을 더 길러두지 않으면...."
"내가 있잖아."
"......뭐라고?"
"내가 있잖아! 전설적인 클로저인 알파 퀸의 아들인 내가 있다고! 재능은 차고 넘치지만 노력은 너 발 끝도 못 따라가는 내가 있잖아! 조금은 날 의지해도 괜찮잖아? 안 그래? 처음하고는 달라.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많이 노력했고......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커버해주면 되는 거잖아?"
"세하야...너..."
"....아. 아. 그러니까. 음. 이건 순수하게 전술적인 의미야. 알겠지? 난 접근전 타입이고, 너는 원거리 타입이잖아. 예전부터 해왔던 걸 음. 그래. 복습하는 거지! 같이 싸우면 훨씬 더 효율ㅡ"
........
"......너..."
"언제까지 사람을 기다리게 하지 마....바보..."
*
"야, 찌릿찌릿!"
"꺄악?!"
"너가 범인이었구나! 너가 범인이었어! 매주 월요일, 수요일, 내가 보는 만화잡지가 나올 때마다 사지 않고 편의점에서 서서 읽는 범인이!"
"뭐야, 너가 왜 여기 있는 건데...."
"당연히 만화 사러 온 거지! 그런데, 매번 살 때마다 누가 읽고 꽂아둬서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진 만화잡지를 사야 한다고! 내가 올 때마다 그래서 뭔가 싶었는데, 네가 그런 거였어! 돈도 많으면서 나 같은 서민을 울리는 이런 갑의 횡포는 그만 두라고!"
"그게 갑의 횡포랑 무슨 상관이야, 이 바보야! 나도 매달 10일에는 서점에 간다고!"
"어쨌든 여기 편의점에 오는 가난한 을의 서민을 고통받게 하는 건 변함이 없잖아? 돈도 많으면서 그냥 사서 기숙사에서 편히 읽지 왜 그러는 건데?"
"칫. 그저 부피가 크니까, 사서 들고 가기엔 불편할 뿐이야...."
"하아. 말도 안 돼...."
"....에? 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보면 모르냐? 들어주려 그런다. 부피가 크다시니까. 너, 언제 여기 와? 매주 월요일, 수요일, 맞지?"
"으, 응...."
"좋아. 만나는 시간 정해. 불편하게 여기서 서서 뭐하는 짓이냐.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피해라고, 너. 어디 카페라도 같은 데 가서 편하게 읽자. 너도 그거 보는 거지? 이 만화 잡지는 그게 메인이잖아. 차원종들의 침략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요원들의 이야기. 작가가 한국인인거."
"으, 응....."
"오케이. 돈도 둘이서 나누어내면 되겠네. 뭐, 너가 서서 읽기만 한다면 내가 사면 되지만, 그럼 너덜너덜해지진 않겠지. 자, 가자. 아, 넌 거기서 누가 이어질 것 같냐? 내가 보기에, 세하 슬비가 가장 가능성 있는 것 같은데."
"으, 응.....나도 그렇게 생각해...."
".....너,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얼굴이 빨간데."
"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