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어느 봄날 (3)

수지퓨전콘서트 2016-04-22 5

"뭐였던 거야, 진짜."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 앉은 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흑역사를 하나 생성하고 회의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땅에 뭐가 떨어져있어서 몸을 숙였다가 올려보니 하늘에서 이슬비가 떨어졌었지.

뭐냐, 하늘에서 이슬비가 내리네.

......품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라 놀랐다.

평소에 내 게임기를 압수해가는 모습을 보면 절대 작게는 안 느껴지는데.......


"......귀여웠었지."


핫?!

나도 모르게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끼익, 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방문 사이로 히죽대고 있었다.

빌어먹을, 듣고 있었던 거냐!


"우리 세하도 벌써 그럴 나이인가~."

"어떤 나이인데!"

"어머, 다 알면서 물어보고 그래~ 상대는 누구일지 궁금해지네~. 아, 하지만 상대라고는 해도 유리랑 슬비밖에 없나? 엄마 생각에는 아마 슬비가 아닐까 싶은데~."


역시 알파퀸이다.

이쯤되면 다 알면서 날 놀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야.

기분이 미묘해졌다.......

이럴 때는 게임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행복을 안겨 주자.


"아."


부서졌었지, 게임기.

본체와 액정이 처절하게 부서져있는 게임기를 바라보니, 방금 있었던 일이 또 생각나 버린다.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다고......!


죽어버리고 싶다.

아니, 죽여버리고 싶다.

구체적으로는 30분 전의 나를 죽여버리고 싶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던 걸까.

이슬비의 미묘했던 표정이 생각난다.

아니, 하는 쪽도 부끄럽고 당하는 쪽도 부끄러운 걸 왜 시키는 건데!

게다가 '너한테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기쁘지 않지만!'은 뭐냐!

기쁘지 않으면 애초에 시키지를 말란 말이다!

뭐냐, 너? 그거냐?

요즘 유행한다는 츤데레야?

금발 트윈테일도 아닌 주제에 츤데레 같은 짓 하지 마!

어느 게임에도 핑크머리 츤데레는 없다고-!

그런 게임은 나와봤자 잘해야 애니메이션화 정도겠지!

2016년 하반기 클로저스 애니메이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게임기 파편 사이에 낯선 물체가 보였다.


"이건...... 녹음기?"


그러고 보니 이슬비가 녹음기를 떨어트려서 찾으러 왔다고 했지.

대체 뭐가 녹음 되어 있길래 몸까지 던진 거지?


"......엄마."

"왜~?"

"이거, 고칠 수 있어?"

"뭔데 그러니? 응? 웬 녹음기?"

"고칠 수 있어?"

"고칠 수는 있지만...... 어디에 쓰려고? 애초에 왜 이렇게 망가진 거니?"

"모르겠는데."

"흐음~ 그래, 뭐~ 조금만 기다리면 바로 해줄게~."

"땡큐, 엄마."


아니, 딱히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이왕이면 돌려줄 때 멀쩡한 게 좋지 않겠어?


엄마가 녹음기를 고치러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아서 TV의 전원을 켰다.

게임기 아니면 TV라.

뭔가 다른 취미를 만드는 편이 좋을까.

마침 TV에서는 사랑과 차원전쟁 재방송이 나오는 중이었다.

그렇게 열렬하게 추천해 줬는데, 한 번 보기라도 할까.


"......재미 없어."


놀라울 만큼 재미가 없었다.

아니, 진짜로 놀랐어.

대체 이슬비는 이런 스토리가 어디가 좋다는 걸까.......


내가 충격과 공포에 빠져 있는 사이, 그새 녹음기를 다 고쳤는지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세하야, 녹음기 다 고쳤어."

"고마워, 엄마. 안에 뭐 녹음된 거 있었어?"

"글쎄에~?"


뭐야, 저 기분나쁜 웃음은.

히죽거리는 게, 뭔가 숨기고 있는 표정인데.......


"......안에 뭐 있었어?"

"아니? 아무 것도 없었어~."

"......그럼 됐어. 땡큐, 엄마."

"아니, 나야말로 땡큐지~."

"......무슨 소리야?"

"글쎄, 무슨 소리일까?"


찝찝함이 남아있는 상태로,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어차피 게임기도 없고, TV는 재미가 없고.

온게임넷에 뭔가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이미 자리에 누워버려서 일어나기가 귀찮다.

됐어, 오늘은 그냥 일찍 자자.......



다음 날, 이른 봄의 빗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벚꽃, 다 떨어지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일으킬 수 없었다.

어째서?!

아니, 애초에 정신도 번쩍 들지 않았다.

의식은 몽롱하고, 눈도 떠지지 않는 상태.

애써 몸을 일으켜서 침대 밖으로 나가보려 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건 아마도 감기인 것 같다.

으음, 딱히 감기에 걸릴만한 일은 하지 않았는데.

그야말로 소설 같은 전개다.


나를 깨우러 온 엄마는 침대에서 앓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말했다.


"어머, 혹시 사랑의 열병?!"

"아니야!"


아픈 몸을 부여잡고 절박하게 태클을 날렸다.

환자한테도 인정사정 없구나, 우리 엄마.

......설마 진짜로 그건 아니겠지?


"엄마, 나 아파서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연락을 해야겠는데......."

"으음, 진짜로 상태가 나빠보이네. 엄마가 대신 연락 할 테니까 그냥 쉬고 있어."

"응, 엄마...... 땡큐......."


이러니저러니 해도, 엄마는 엄마구나.......






라고 생각했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평소와 같은 내 방.

한 가지 다른 점이라고 하면, 지금 내 눈 앞에서는 내 방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핑크색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 저기, 이세하. 괜찮아?"


괜찮지 않아.


"......그래서, 이 상황은 뭐죠?"

"뭐긴 뭐야, 병문안이지~!"

"응, 엄마를 믿은 내가 바보였어......."


못 간다고 연락을 해달라고 했더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엄마에게 시선으로 설명을 요구하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말한다.


"아니, 엄마가 부르거나 그런 건 아니다~? 세하 네가 너~무 아파서 오늘 회의는 빠져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병문안을 온다 그런 거야. 뭐, 조금 과장해서 말한 것 같긴 하지만~."


확신범이냐!

빌어먹을, 다음부터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연락을 해야겠어.......


"그럼 방해꾼은 이만 퇴장해줄게~."

"에, 에?! 어, 어머님......!"


당신, 저질러 놓고 그냥 가버리는 거냐.......

방금 그런 일도 있었던 터라,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분위기가 미묘해진다.

그보다 어머님이라.

......나쁘지 않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슬비가 나를 째려본다.


"클로저라는 주제에 자기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하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거 참, 미안하게 됐네......."

"됐어, 그런 말 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모, 몸은 좀 괜찮아?"

"전혀...... 아침이랑 비교하면 오히려 악화됐어......."


아니, 그보다 너 이미 말한 주제에 그런 말 하려고 온 게 아니라니.


"마, 많이 안 좋은 거야?"

"몰라, 병원 안 가봤어......."

"그, 그래......? 밥은? 밥은 먹었어?"

"귀찮아서......."

"그, 그럼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죽 해줄게!"

"아니, 괜찮......."


이슬비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보다 이거, 소금이랑 설탕을 착각하는 패턴 아닌가.......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니, 이슬비가 양손에 쟁반을 들고 들어온다.

양손에 쟁반이 있는데 문은 어떻게 연 거냐......

뭐, 염동력이겠지.

아까 버스도 그렇고, 나한테는 막 쓰지 말라고 했으면서.


"......위상력, 막 쓰지 말라며......?"

"위, 위급 상황에는 괜찮아."


지금의 어디가 위급 상황이냐.

내가 그렇게 묻자, 이슬비는 뺨을 붉히고 대답한다.


"네, 네가 위급 상황이잖아......."

"......그, 그래."


뭐야, 뭐야 이거?!

부끄러워!

무진장 부끄럽다고!

줄여서 무끄러워어어어어어!

그런 말을 막 하지 말란 말이다!

두근거리잖아!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심장까지 두근거리잖아!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의외로 난 쉬운 남자일지도.......


"......자."

"......어?"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숟가락을 보고,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한다).


"......아, 하라고. 입 벌려."

"......!"


지, 지금 그 무끄러운 행위를 하겠다는 거야?!

아니, 이건 진짜로 심장에 안 좋아!

이미 무끄러운 수준이 아니라고!

이건 엄청나게 부끄럽다!

엄끄러워!


"아, 아니,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고, 고집 피우지 말고 빨리 입 벌려. 팔, 아프단 말이야."

"아, 그래....... 읍."

 

결국 먹어버렸다.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의 이 상황 때문인지 죽에서는 약간 달콤한 맛이 났다.


"다, 다음......."

"야, 잠깐...... 읍."


말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입에 죽을 밀어넣는 이슬비.

나는 입 안에 가득 찬 죽을 겨우 삼키고 나서 말했다.


"야, 이슬...... 읍......!"


제발 말 좀 하자!

아니, 그보다 삼키기도 전에 더 먹이지 마!

야, 그만, 그만!

넘친다고!

입 밖으로 튀어나오게 생겼다고!

수, 숨이 안 쉬어져!


하마터면 다윈상을 받을 뻔한 나는, 빈 죽그릇을 책상에 올려놓고 이슬비에게 질문했다.


"근데, 병문안인데 너 밖에 없냐......?"

"어?! 아니, 그, 뭐랄까...... 제이 아저씨랑 미스틸은 급한 일이 있다고 했고, 유리는......."

"서유리는 뭐?"

"모, 몰라, 묻지 마......."

"엥? 모른다니?"

"모, 모른다면 모르는 거야!"


아니, 짜증을 낼 것 까지는.......


"난 괜찮으니까 슬슬 돌아가도 되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슬비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말을 더듬는다.


"에?! 아, 아니, 팀원을 보살피는 건 리더의 역할이니까......."

"그래도 밤이 늦었는데......."

"우, 우으......."


바로 그 때, 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면 되지!"

"당신, 뭔 소릴 하는 거야!"

"그, 그래도 되나요?!"

"이, 이슬비 너까지 무슨......!"


너, 이런 캐릭터였냐?!

아니였던 거 같은데?!

초반에는 가장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설정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하지, 방이 거실밖에 없는데, 손님한테 거실에서 자라고 할 수도 없고. 평소 같았으면 세하 방을 주면 되지만 지금 세하는 아파서 그럴 수도 없고......."


이봐, '평소 같으면'이라니.

나, 혹시 주워온 자식인가?

응, 농담이다.


"저, 저는 거실에서 자도 상관 없는데요!"

"안 돼~ 손님을 거실에 재우는 건 내가 용납 못 해~."

"아니, 고민하지 말고 그냥 지금 집에 보내......."

"아, 그래! 둘이 같이 자면 되겠네!"






""?!""




"그럼, 침대는 하나 뿐이니까 열심히 해 봐~."


뭘 열심히 해보라는 거야!

당신은 아들이랑 아들 친구가, 그것도 여자인 친구가 같은 방에서 잔다는 데 걱정되지도 않아?!


대형 폭탄을 투하한 엄마(라고 쓰고 웬수라고 읽는다)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말했다.


"맞다, 슬비 너, 아까 죽 만들 때 소금 넣어야 되는데 설탕 넣었더라."




......죽에서 달콤한 맛이 났던 건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나.







2024-10-24 23:01:0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