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어느 봄날 (4)
수지퓨전콘서트 2016-04-23 2
오늘 아침, 검은양 팀의 회의실에는 한 명을 제외한 모든 팀원이 모였다.
“근데 세하 얘는 왜 안 오는 거야?”
“글쎄, 동생이라면 게임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웅, 아니에요. 세하 형이 게임을 좋아하긴 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한테 피해를 끼친 적은 없잖아요.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요?”
피해를 끼친 적이 없다, 라…….
테인아, 정말 그런지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래.
“진짜, 아주 오기만 해봐.”
“저기, 오늘따라 대장이 텐션이 높은데, 혹시 왜 그러는지 아는 사람?”
“아, 저요~ 사실 슬비가 어제~.”
“와아아아아아악! 말하지 마!”
아무한테도 말 안 하기로 해서 알려준 거잖아!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서 죽일 셈이야?!
“냐하하, 미안~ 깜빡했어~.”
“깜빡했다니…….”
“근데 진짜 왜 안 오는 걸까?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이라도 해줬을 텐데~.”
유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핸드폰이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이세하네.”
“세하야? 빨리 받아봐~.”
“으음, 동생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군.”
결과적으로 말하면, 테인이와 제이 아저씨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세하, 너 지금 어디……! 아, 어, 어머님. 그, 그래요? 괘, 괜찮은 건가요? 네, 네. 아, 알겠습니다.”
“왜 그래요, 누나? 세하 형한테 무슨 일 있어요?”
“정말로 동생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나는 전화기를 살짝 떼놓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팀원들에게 방금 들은 내용을 전달했다.
“……세하 어머님인데, 감기래요. 지금 쓰러져서 못 움직인다는데요.”
“세하가 쓰러져?! 몸은 괜찮대?!”
“아, 응. 지금 약 먹고 자고 있대.”
“쯧쯧, 건강이 제일이라니까. 허구한 날 게임만 하니까 몸이 약해지지.”
“아니, 차원종을 때려잡는 몸을 허약하다고 하는 건 어떨지…….”
게임만 하니까 면역력이 약해졌다는 데는 동감이다.
……그 게임기도 내가 부숴버렸지만.
아직 연결되어 있는 전화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천하기로 했다.
“아, 네, 어머님. 호, 혹시 병문안을 가도 괜찮을까요……?”
“……호오, 어머님이라.”
“냐하하~ 제가 말했잖아요~ 어제…….”
나는 회의실의 책상 위에 있는 빵을 염동력으로 들어 올려서 유리의 입에 쑤셔 넣었다.
어, 어머님…….
방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말했는데, 제이 아저씨 때문에 미묘해졌잖아!
두고 보자…….
유정 언니랑 만나면 두고 봐…….
옆에서 실컷 놀려주겠어!
나는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팀원들에게 물었다.
“진짜, 클로저라는 애가 자기 몸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테인이가 뭔가 불만이라는 듯이 말했다.
“우웅, 슬비 누나는 세하 형한테만 너무 까칠한 거 같아요.”
“에, 에? 아니, 딱히 그렇지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제이 아저씨랑 유리가 끼어들었다.
“아냐, 테인아. 슬비는 진짜로 세하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란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대장은 츤데레지. 동생이 좋아 죽겠는데 표현이 서투른 거야.”
“아니에요!”
나는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테인이는 납득한 듯이 눈을 빛냈다.
“그렇군요! 사실 슬비 누나는 세하 형을 좋아하는 거였어요!”
“그, 글쎄 아니라니까!”
“……그럼 싫어하는 거예요?”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역시 좋아하는 거군요! 잘 됐네요~.”
윽…….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보다 여기서 화를 내면 내 이미지가 진짜 츤데레가 되는 게 아닐까.
더 이상 이 주제를 말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말을 돌렸다.
“저기, 그래서 같이 병문안을 갈 사람은 없나요?”
“호오, 대장이 가는 건 확정인가 보네~?”
“윽……! 티, 팀원을 보살피는 건 리더의 역할이에요……!”
“그래, 그래~ 나는 병문안 빠질게~ 어차피 오늘은 일도 있고, 동생이랑 리더를 방해할 만큼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 그런 배려는 필요 없어요!
……고맙긴 하지만.
“다, 다른 사람들은?”
“우웅, 세하 형이 걱정되긴 하지만 저도 오늘은 테스트가 있어서요. 둘이서 다녀오세요.”
“그, 그래? 그럼 유리랑 나랑…….”
“아, 나도 빠질래~ 열심히 해봐~.”
“유, 유리 넌 왜?! 그리고 뭘 열심히 하라는 거야?!”
“냐하하~.”
그리하야 다시 이세하의 방.
“나, 난 어디서 자면 돼?”
“아니, 진짜 내 방에서 자려고……?!”
어쩌다보니 이세하네 집에서 자고 가는 게 되어버려서,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심지어 이세하 방에서 이세하랑 같이.
좋아하는 남자애 방에서 좋아하는 남자애랑…….
이, 이거 너무 자극이 심한 게 아닐까…….
“자, 자극…….”
“……혼자 뭐라고 하는 거야?”
“웃?!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래서 어디서 자면 돼?”
“원래는 네가 침대에서 자고 내가 바닥에서 자야겠지만…… 아니, 그보다 진짜 여기서 자게?!”
“나, 나도 딱히 여기서 자고 싶은 건 아니거든? 여기밖에 잘 곳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야!”
“아니, 그럴 것 없이 집에 가면 되잖아…… 됐어, 내가 거실에서 잘게.”
“아, 안 돼!”
“……왜 안 되는데?”
왜, 왤까?
나도 모르게 외쳐버렸지만,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빨리, 빨리 생각해 내, 이슬비!
“주, 주인을 쫓아내고 편하게 잘 수는 없어! 난 바닥에서 잘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인다고…….”
시, 신경 쓰인대…….
내가 신경 쓰인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 없다.
응, 이세하가 나쁜 거야.
“손님을 바닥에서 재우는 것도 아니지……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넌 침대에서 자.”
“싫어! 넌 환자잖아? 환자면 환자답게 편하게 자란 말이야!”
“……그것도 그렇긴 한데…….”
나와 세하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 어머님?!”
“……엄마…….”
“밖에서 듣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거라면 좋은 방법이 있단다~.”
……좋은 방법?
“솔직히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그러지 말고 한 번 들어봐~ 언제 엄마 말 들어서 손해 본 적 있어?”
“…….”
세하가 조용히 쳐다보자, 어머님은 눈을 돌리고 딴청을 피우기 시작하셨다.
……많구나, 손해 본 적.
“가, 가끔은 있을 수 있겠지! 그, 그래도 이번에는 진짜 괜찮은 아이디어라구~.”
어차피 이대로는 결론도 안 나고, 나는 어머님의 제안을 들어보기로 했다.
“뭐, 뭔데요?”
"둘이 같이 자면 되잖아!"
“빌어먹을, 이래서 듣고 싶지 않다고 한 거야! 당장 나가요!”
“알겠어~ 나가면 될 거 아니니~ 어디 아들 무서워서 살겠나~.”
“잘만 살고 있잖아! 빨리 나가기나 해요!”
“어휴, 알겠다, 알겠어~.”
어머님은 이번에도 폭탄을 투하하고 가셨다.
어머님이 나가시고 둘만이 남은 방 안은 어색한 분위기가 가득 찼다.
“……신경 쓰지 마. 그냥 내가 바닥에서 잘게.”
“어, 응…….”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살짝 붉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그, 그럼 난 이불 가져올게.”
“아, 그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세하의 방을 빠져나왔다.
“아, 어머님…….”
“이불 가지러 왔지? 여기 있단다~.”
“아, 감사합니다.”
이불을 받아든 나는, 다시 세하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잠깐만, 슬비야. 할 말이 있는데~.”
“네, 네! 말씀하세요!”
뭐, 뭐지?
어머님이 나한테 왜?
고등학생 수준에 맞는 정도만 하라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 아니면 역시 집에 가라는……?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머님이 하신 말씀은 내 생각보다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녹음기, 고쳐놨단다? 내일 가지고 가렴~.”
“……?!”
노, 녹음기?!
어디 갔나 했더니, 이세하가 들고 갔었나?!
아니, 그보다 녹음기를 고쳤다는 말은…….
“호, 혹시 내용 들으셨어요……?”
어머님은 한동안 생글생글 웃으시더니, 이내 흐뭇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설마 우리 아들이 그런 열렬한 고백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단다~ 그걸 녹음한 슬비 너도 그렇지만, 정말 깜짝 놀랬다구~.”
“으, 그, 그러니까 그게…….”
“하지만 슬비 너도 생각보다 대담하더라~?”
“네, 네?”
“설마 드라마보다 우리 세하를 좋아한다고 말할 줄이야~.”
“?! 그,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그것도 녹음되어 있던데~? 걱정 마렴, 세하는 모르니까~.”
“그,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어, 어떡하지…….
좋아하는 남자애의 엄마한테 좋아한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어머님이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렇게 혼자 말하지 말고 세하한테 직접 해보면 효과가 있을 텐데~.”
“그, 그걸 어떻게 해요…….”
“정 부끄러우면 내가 세하한테 대신 전해줄 수도 있는데~?”
“그, 그런 건 됐어요.”
“어라, 그건 어째서니?”
“………조, 좋아한다는 말은 직접 하고 싶으니까요.”
어쩔 수 없어요.
그게 소녀의 마음인걸.
내가 그렇게 말하자, 어머님은 나를 꼭 끌어안으시며 말씀하셨다.
“어쩜 이렇게 귀엽니? 우리 세하한테 주기에는 너무 아까울 정도라구?”
“아, 아우우…….”
어머님께 이불을 받아들고 다시 세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
많이 피곤했는지, 세하는 그새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세하의 잠든 얼굴을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서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
너, 넘어진다!
이대로라면 입술이 닿을지도……!
“꺄악!”
머리가 부딪혔습니다.
그래,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어.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다는 걸…….
머리를 부딪친 충격 때문인지, 세하가 눈을 비비며 부스스하게 일어났다.
……무슨 남자애가 이렇게 귀여워.
적어도 내가 아는 남자애 중에 이렇게 귀여운 애는…….
……테인이가 있었구나.
걔, 진짜 남자애 맞지……?
“뭐야…… 아, 미안…… 깜빡 잠들었나보네…….”
“미안, 내가 깨웠어?”
“아니, 됐어…… 어차피 더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잤고…….”
덥기는, 아직 초봄이라 저녁에는 추운데.
진짜, 쓸데없는 부분에서 배려심이 넘친다니까…….
“그럼 난 내려갈 테니까 침대에서 자……. 이불 가져다줘서 고맙다.”
“아, 응. ……잘 자.”
“……그래. 너도 잘 자라.”
이세하는 몸을 뒤척이면서 바닥에 깔려있는 이불로 내려갔고, 나는 방금까지 좋아하던 남자애가 누워서 자고 있던 침대에 누웠다.
“……이런 거,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엉……? 뭐라고……?”
“아,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뭐야…….”
방금 전까지 여기에 세하가 누워있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킁.”
아, 아니.
딱히 어떤 냄새가 날까 궁금해서 맡아본 건 아니고…….
그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네.
이게 세하의 냄새구나.
응, 익숙하고 따뜻해…….
“……이슬비, 자냐?”
“……핫?!”
따뜻함에 푹 빠져서 정신을 잃었던 나는, 세하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왜, 왜? 아직 안 자.”
“아니, 뭐…… 오늘 병문안 와줘서 고맙다고.”
얘, 얘는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람.
평소에는 그렇게 퉁명스러우면서 이럴 때…….
“뭐, 뭔 소릴 하는 거야. 빨리 자기나 해.”
“응, 정말로 무슨 소릴 하는 걸까…… 그냥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런 거니까, 잘 자.”
“…….”
지, 지금 꽤 괜찮은 분위기 아닌가?
응, 분명히 괜찮은 분위기야.
그, 그럼 조금쯤은 용기를 내봐도 괜찮겠지……?
“저, 저기, 이세하…….”
“어엉……? 왜……? 딱 잠이 오는 타이밍이었는데…….”
새벽 2시.
사람이 가장 감성적이 되는 시간이다.
“호, 혹시 괜찮으면 올라와서 같이 잘래……?”
“…………뭐?”
그렇다면 아주 조금, 한 움큼 정도는 마음을 보여줘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