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배신자 서유리
무상성 2015-12-19 11
분명히 마른 하늘이었는데 창공을 뒤덮어버린 거대한 데미 플레인과 함께 거친 빗물이 신서울에 쏟아져 내렸다. 그 빗물을 타고 흘러내린 차원종들이 도심곳곳에 뿌리를 내리며 먹잇감을 찾아 날뛰기 시작했고 간신히 작동하는 방어 터렛 2개가 시끄러운 경보음을 울리며 자신의 머리위에 있는 데미 플레인을 요격하기 위해 수많은 미사일을 쏘아보냈지만 그것이 채 닫기도전에 투명한 위상막에 사라져 애꿏은 도시위로 불비를 내렸다.
폭발음과 뒤섞인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뒤늦게 울리는 대피 사이렌이 한대 뒤섞여 듣기싫은 불협화음을 이루어냈다.유니온이 데미 플레인의 요격을 위해 제작한 특제 미사일 탄도가 쓰여지기도전에 아스타로트가 선수를 쳤다. 뒤늦게 유니온이 신서울에 남은 클로저들을 급파해 퇴로라도 확보하려고 했지만 이미 통제불능의 상황에서 그들이 할수있는거라곤 눈앞에 나타난 차원종에게 죽지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방법뿐이었다.
급히 연락을 받고 특경대의 본대가 강남에서 출발했지만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땅에 발을 내린 수많은 양산형 크리자드들의 가슴팍에 달린 눈에서 쏴대는 빔이 도시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여가고 있었다. 비를 따라 도시가 무너져가고 있었고 부족한 인원수 때문에 흩어진 검은 양 팀의 스트라이커인 이세하는 거칠게 건 블레이드를 크리자드의 가슴팍에 박아대며 빗물사이를 뛰어나가고 있었다.
사이킥 무브조차 쓰지못할정도로 빼곡히 들어차는 차원종들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그는 자신의 무기를 높게 들었다 땅으로 꽂았다.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들어간 건 블레이드의 총구가 거칠게 푸른화염을 땅속에서 토했다. 어마어마한 힘에 지형이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졌고 그 사이로 올라온 푸른불꽃들이 게걸스럽게 차원종들을 집어삼켰다.덕분에 자신의 앞에 길이 열렸고 그는 비바람 사이로 뛰어올랐다.
잠시동안 찾아오는 격통에 두눈이 불타는것 같았다. 처음으로 겪은 막대한 위상력 손실에 머리의 중앙부분이 같은 팀원인 제이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눈동자는 좀 더 회색에 가깝게 탁해졌고 격하게 손발이 떨렸지만 그는 최대한의 힘으로 좀더 먼 거리를 사이킥 무브로 이동했고 곧 그가 도착한 곳은 유니온의 본사였다. 이미 차원종의 손길이 거쳐갔는지 입구에는 요원과 차원종들의 핏물을 비가 씻겨내고 있었다. 지금당장 이세하에게 중요한건, 차원종들이 노리는 유니온에있는 막대한 정보가아닌 단 한 사람이었다.
그저 조금 더 남을 돕기위해 이곳에 온 사람, 알게 된지 얼마되진 않았지만 정말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 우정미! "
이세하의 외침이 약간의 위상력을 타고 건물내부에 울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 반응한것은 그가 찾는 그녀가 아닌 엉뚱한 차원종 무리였다. 7층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차원종들을 뒤에 달고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연구실은 6층, 거대한 꽈배기형 계단에서 이세하의 고독한 싸움이 시작됬다. 게임을 하던 버릇 때문인지 항상 자신이 처리한 차원종의 수를 세던 이세하는 이제 몇 놈을 해치웠는지도 잊어버린채 핏물을 뒤집어써가며 그저 뭉개고, 넘어뜨리고, 쏘았다. 한 번 깊게 퍼낸 우물은 금새 바닥을 드러내려고 했고 어느 새 6층 로비의 입구까지 올라온 이세하의 모습은 피를 뒤집어 쓴 모습에서도 뚜렷히 구분될 정도로 변색되있었다.
아직 저항의 인원이 남아 있었는지 연구실 안쪽에서 고함소리가 들렸지만 선명한 칼날소리에 의해 사그라들었고 그 뒤를 이어 믿지 못하겠다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신강고에서 한 번 들어봤기에 알수있는 소리, 우정미의 비명소리였다.그에 즉각 반응한 이세하가 거칠게 몸을 튕기듯 뛰어갔다. 한참을 뛰어 돌아간 복도끝에 있는 강철로 만들어진 연구실안은 이미 예리한 칼날에 의해 문이 박살난 상태였고, 입구에는 금방 죽은 듯한 요원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 애타게 찾던 우정미가 작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며 자신의 피가 새어나오는 복부를 작은 손으로 부여잡은채 비맞은 새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다름아닌 그녀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차원종이아니었다. 어느정도 예상했다는 눈치였지만 역시나 믿지 못하겠다는 감정이 이세하의 얼굴에 떠올랐다.
" 서유리.. "
마치 애쉬남매처럼 눈밑에 새겨진 붉은 문양과 전과는 묘하게 다른 분위기가 그녀는 이미 인간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총은 어디다 내다버렸는지 검 한자루만 덜렁 들고 있는 서유리가 이세하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 그로기 상태에 빠진 그에게 쥐어짜내듯 우정미가 말했다.
" 안녕..이세하. "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가슴속이 먹먹하던 이세하는 바스러져가는 우정미를 품에 안았다. **가는 숨소리가 좀 더 명확하게 이세하의 귀에 들렸다.말 조차 할 힘이 없었는지 그녀의 피 묻은 손이 이세하의 요원복을 부여잡았다. 살려달라는건지, 아니면 늦게 와서 원망을 하는건지 알 수없는 감정이 그녀의 손에 맺혀있었다. 예전에 신강고에서 약속했었더랬다. 무슨일이 있어도 지켜준다고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처럼 손을 놓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려 먼길을 달려왔지만 이미 그녀는 세상에서 발을 떼려고 하고 있었고, 자신에 대한 책망감에 눈물이 이세하의 뺨을 가로질렀다.
한동안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던 그녀의 손이 간신히 올라와 흘러내린 그의 눈물을 닦았다. 눈물자국 대신 가늘게 그녀의 핏자국이 이세하의 얼굴에 남았고,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쉬던 우정미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긴 것은, 원한의 말도, 감사의 말도아닌 그저 한줌의 작은 미소였다.땅으로 떨어져가는 그녀의 손을보며 마치 시간이 멈춘것 같았다.슬픔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와 머리가 뜨거웠고 그녀의 자국을 지워내려는듯이 눈물이 힘차게 다시 그곳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짧은 이별의 상념은 곧 자신의 목덜미로 들어온 예리한 날붙이에 의해 차갑게 식어내렸다.
".. 배신자는 너였구나. "
어째서 그 거대한 데미플레인이 그 복잡한 차원 게이트를 뚫고 나오는데 왜 유니온에선 감지조차 못한걸까, 왜 갑자기 멀쩡한 방어 터렛들이 작동불능 현상을 일으킨걸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저 서유리일줄은 그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궁금했다.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유리에게는 절대로 그런 능력이 없었다. 힘 밖에 쓸줄모르는 이제 막 정식요원이 된 햇병아리가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일들들 저질렀을지 이세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서유리가 유쾌하게 웃었다.
" 정말 의외지 세하야?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수가 있었는지. "
비가 더 거칠게 내리기 시작했다. 윙윙거리는 바람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렸다. 서유리는 통쾌하다는듯이 우정미의 주검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 애쉬의 정신공감 능력이 모든 일을 준비하고 실행했지, 그놈과의 계약으로 차원종이 된다면 그놈이 공유하는 힘을 몸에 받아들일수 있으니깐. "
" 대체 언제 차원종이... "
그녀의 말대로라면 훨씬 전부터 그녀는 차원종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째서 차원종 경보기에도 걸리지않고 팀에 섞여 있을수가 있었을까.그의 의문에 대답을 제시하듯 그녀가 자신의 목에 채워진 목걸이를 톡톡쳤다.
" 원래라면 애쉬의 힘으로 너희를 속일 예정이었지만.. 요원시험을 볼때 지급받은 내 전용 위상력 억제기가 엉뚱하게도 차원종의 기운까지 억눌려 버리더군, 조금만 신경쓴다면 절대로 들킬일이 없었지, 그리고 애초에 나를 의심할 사람도 없었잖아? "
마지막 말에 가시가 들어있는듯 했다.
".. 왜 항상 나는 무시받아야되는건데? 그게 당연한듯이 나에게 말하고 , 배제당하고 , 양보해야만 하는건데? "
" 진정해 서유리 "
" 왜 너까지 양보해야만 되는건데!? 저 애가 말했어.. 우린 친구니까 자기랑 너를 잘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그 때 바보처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정말 역겨워서..한심해서 참을수가 없었다고!! "
다소 예상하지 못한 말에 격동하는 그녀를 말려보려고 했지만 이미 흥분에 휩싸인 서유리가 다짜고짜 그를 공격해왔다. 잠시동안 잊고있었던 건 블레이드의 감촉이 그녀의 검을 막아내며 살아났다.
"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왔어, 이제 방법은 많지 않아. 너를 제압하고 차원종으로 만들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뿐이야."
다시 한 번 횡으로 거칠게 갈라지는 그녀의 검격을 간신히 막아냈다. 엄청난 근력이 실린 공격에 이세하의 팔이 후들거렸다.그녀는 힘으로 이세하를 밀어내며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눈이 하얗게 탈색된 그의 머리칼에 머물렀다.
" 어차피 나를 죽이고 이 상황에서 운좋게 벗어나게 된다고해도 돌아간 너를 반기는건 이미 힘을 잃은 폐기물에 대한 처분이라는걸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제이 오빠를 봐, 힘을 잃은자가 유니온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왔는지 너도 잘알고 있잖아? "
마치 서유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만 같아서 이세하는 눈을 질끈감았지만 귓속으로 파고들어오는 그녀의 말까진 잘라내지 못했다.
"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취급하는진 내가 잘 알고있어, 다 앞에서 착한척, 모르는척 굴지, 마음속으론 쓰레기취급하면서 말야. "
결국 힘에서 밀린 이세하가 건 블레이드를 놓치고 우정미위로 쓰러졌다. 차갑게 식은 우정미의 몸위에 머리를 뉘인 이세하가 가늘게 숨을 쉬었다. 여기까지 오는데에만 해도 너무 많은 힘을 써서 아무리 그 대단한 알파퀸의 아들이라고 해도 이미 위상력은 바닥을 보인채 회복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곧 그의 목덜미 밑으로 서유리의 칼날이 들어왔다.
" 어때? 나와함께 차원종이 될건지 아니면 이대로 죽을건지... 선택해. "
마치 마지막 선택지는 자신도 원하지 않는 듯 서유리의 말끝이 흐려졌다.이미 탁하게 변해버린 이세하의 눈에는 서유리가 비치지 않았다.항상 웃고 떠들며 이겨낼거라고 생각했던 나날들이 있었다. 이슬비 , 테인이 , 유정누나 , 제이형 , 서유리 , 그리고 우정미... 영원할것만 같았던 순간도 끝이었다. 마지막 말을 고르듯 이세하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 죽여.. "
그 말에 서유리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협박과 회유를 해도 이 고집쎈 남자가 뒤돌지 않을거란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그녀였기에 칼을 쥔 손이 망설임으로 떨렸다. 하지만 일말의 망설임과 함께 떨어진 그녀의 칼날이 정확하게 이세하의 가슴팍을 꿰뚫었고 윽-하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이세하의 몸이 들썩였다. . 죽어가는 그에게 서유리가 물었다.
" ..어째서 죽는걸 선택한거지? "
하지만 이세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힘들게 몸을 돌려 마치 우정미와 포개지듯 누운 그가 숨이 꺼지기전에 한말은 ' 미안하다 ' 였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도 모르는 그말이 서유리의 거칠게 가슴을 후벼팠다.마지막까지 그의 마음 한구석에 조차 들어가지 못했다는게 그녀의 가슴을 갈갈이 찢었다.
창 너머 밖으로 한줄기 빛이 직선을 그리며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모든걸 마무리하기 위한 빛이었다. 서유리는 한동안 그 빛을 쳐다보며 도망치지도 맞서지도 않았다. 그저 싸늘한 주검사이에 서서 빛이 땅에 닿기까지 그것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