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Voice fails
루이벨라 2017-01-09 6
※ 캐릭터 붕괴주의.
※ 깜짝(?) 엑스트라가 등장합니다.
※ 배경은 군수공장 에픽 이후(아마도?)
※ one's voice fails : 목소리가 나오지 않다
"..."
세하는 말이 적은, 아니 없는 편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을 때만 말을 하는, 그리고 꼭 말이 필요할 때만 하는 사람이었다. 세하의 말동무는 거의 대부분 게임기였다.(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는 그 작은 게임기 화면에 늘 집중하고 있었고, 게임기가 세하에게 말을 걸어줄리가 만무했다. 그렇기에 세하는 언제나, 자신의 말을 아꼈다.
그래서인지 그 날의 사건은 생각보다 팀원들에게 뜨악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거 같았다.
단 한 사람만 뺴고.
* * *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하를 앞에 두고 램스키퍼에 탑승 중인 모든 사람들은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말을 했던 사람(아무리 말이 없어도 인사 같은 거는 한다)이, 갑자기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인사가, '목소리가 안 나와요!' 라니. 그마저도 스마트폰 메모장에다가 쓴 것이었다.
"나참, 이세하. 너, 그런 시시한 장난을 하는게 취미였냐?"
나타가 입꼬리를 비리게 올렸다. 뭐, 바보 제자라면 할만한 장난이지만, 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유리가 나타를 향해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 나도 그런 장난은 안 친다고!
쨌든 나타의 그 발언이 세하에게는 몹시 감정 상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그 표정으로 스마트폰에다가 다시 뭐라고 꾹꾹 타자를 다시 치는 모습은, 도저히 장난이라고 생각되지 않게 진지했다.
-야, 내가 이게 장난치는 걸로 보이냐?! 진짜로 안 나오는 걸 어떡해!
잠시 후, 세하가 내민 폰 메모장에는 그런 글이 적혀있었다. 느낌표를 적절히 사용해서 그런지 세하가 지금 엄청 화가 나 있는 상태라는 걸 대충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나타는 의심의 눈초리를 벗기지 못했다.
"헹! 그러면 진짜인지 아닌지 가장 빨리 확인하는 방법이 있지."
"...?"
꾸욱-
세하에게 천천히 다가온 나타가 아무런 예고없이 세하의 발을 세게 밟았다. 예상 못한 아픔에 세하는 아프다라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대로라면 세하의 입에서는 곧장 비명이 터졌어야했다.
하지만 벌려진 세하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짜인가 보네."
"나타, 세하한테 사과해야하지 않니?"
그제서야 나타는 조금이라도 믿는 눈치였다. 그런 나타에게 슬비가 핀잔을 주었다. 세하가 잔뜩 쎄~한 얼굴로 나타를 보았다.
-야! 무슨 그렇게 측정하는 방법이 어디있냐?! 내 말 못 믿겠다는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믿는다고!"
"...그 이야기가 아닌거 같은데..."
옆에서 유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순간도 잠시, 램스키퍼 안의 공기는 다시 침묵으로 가득 차졌다. 바이올렛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세하 씨의 목소리만 나오지 않는거죠? 이세하 씨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저희한테도 바로 그런 조짐이 보였을텐데 말이죠."
"혹시 세하가 나갔던 작전 구역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는게 아닐까?"
"이, 이세하님은 어제 레비아랑 같이 갱도를 갔어요. 하지만 레비아는 아무렇지도 않은걸요?"
"그러네...이세하, 너 무슨 수상한 일이라도 했어?"
슬비의 잔소리 같은 말투에 세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저, 이곳 시베리아에서 온 뒤로 계속 했던, 평범한 하루였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대략난감이었다. 지금 이 곳에는 전문적인 의학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었기에, 세하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럴 때 캐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구나..."
캐롤리엘도 같이 오고 싶어했지만 최서희의 상태를 보고 있기에 같이 동참하지 못했다고 했다. 유정이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구나.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세하는 당분간 쉬고 있으렴."
"..."
세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좋아하는 게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시무룩한 반응에 모두들 당황스러웠다.
"그럼 오늘도 부탁할게."
"네, 유정이 언니."
"갔다 온 후에 녹즙이나 만들어야겠군."
시끌벅적 사라지는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하의 눈에는 문득 '부러움' 이 스쳐지나갔다.
* * *
금방 좋아지겠거니 믿기는 했지만 세하의 목소리는 며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일상 대화가 불가능한 건 당연지사였다. 스마트폰의 메모 기능으로 인해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졌지만 인간의 말과 인간의 타자 속도는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아무리 타자가 빠르다하더라도 대화 사이에 나오는 공백이 자연히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하는 혼자 있게 되었다. 나도 답답하고 상대방도 답답하는 바에는 차라리 혼자서 있는게 더 나을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세하 옆으로 유리는 임무를 끝내면 다가왔다.
"세하야, 뭐해? 또 게임해?"
"..."
"어레, 너 왠지 조금 심심한 표정이다?"
"..."
세하의 목소리가 안 나오기 전부터, 유리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세하의 옆에서 이렇게 늘 조잘거렸다. 이렇게 보니 여느 때의 세하와 유리의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하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거 같지 않은 모양새였다. 잠시 후, 세하가 스스로 게임기를 껐다. 유리는 커다란 두눈을 깜빡였다.
"...세하야, 왜 그래?"
"..."
살짝 그런 유리를 째려보는 세하.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톡톡, 무언가를 내려적는다.
-넌 내가 목소리 계속 안 돌아와도 괜찮아?
"...응?"
또 한숨. 세하는 그 아래에 마저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넌 내가 말을 못하게 되었는데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라서.
사실 이런 말을 적어서 유리에게 보여주기는 했지만 곧바로 후회되었다. 사실은 제일 안 괜찮은 건 세하 자신이었다. 며칠동안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 뿐인데...자기 혐오가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을 그때그때 바로 못하니까. 그래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약 영영 이렇게 목소리가 안 돌아오면 난...어떻게 살아야하는걸까? 하고 싶은 말은 그때그때 하지 못하고 계속 사는걸까?
세하가 이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옆에서 유리의 유쾌한(푸읍, 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렇게 잠시 웃던 유리는 웃느라 나온 눈물을 살짝 훔쳤다.
"뭐야, 세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의외로 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구나."
'누, 누가 너같은 애 생각 해주었대?'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공교롭게도 나와주지 않았다. 유리가 세하의 얼굴과 마주보며 다시 말을 꺼냈다.
"난 괜찮아. 세하 표정 보면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거든."
"..."
"조금은...서운하기는 하지. 세하 목소리로 내 이름 불리는 거 많이 좋아하거든..."
"..."
그렇구나. 이 목소리로 서유리의 이름을 도대체 몇번이나 불렀던걸까. 세하는 목울대를 쓰다듬었다. 별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세하가 폰 메모장으로 다시 물었다.
-내가 네 이름 불러주는게 좋아?
"...그, 그야 좋지...! 세하 목소리 멋있잖아? 왜, 왠만해서는 그런 목소리로 이름 불러주면 안 설렐 여자애들이 있을..."
마저 말을 하던 유리가 중간에서 멈칫거렸다. 유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무르익어갔다. 옆에 있던 세하도 뭐 때문인지 유리와 같이 얼굴이 급속도로 빨개졌다.
세하는 메모장에다 이렇게 쓰고 유리에게 살짝 보여주었다.
-너도 내가 이름 불러주는 게 좋다는거야?
"..."
이 기분은 뭘까.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갑작스럽게 고백을 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고백을 받은 기분이었다.
세하는 묻고 싶었다. 나 좋아해? 라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단번에 물어볼 수도 없고...이런 상황에 닥치니 목소리가 안 나오는게 더 원망스러워졌다.
도대체 왜 목소리는 갑자기 안 나오게 된걸까. 마치 누가 목소리만 톡, 가지고 사라진 것처럼.
"...좋아해."
어디서 목소리가 들렸다. 가느다랗게, 그리고 그마저도 점점 뒷부분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목소리가. 그게 옆에 있는 유리의 목소리라는 건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아, 목소리가 나오면 좋겠다. 그러면 바로 나도 그렇다라고 대답을 할 수 있을텐데...세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제는 고개를 무릎까지 파묻은 유리의 머리 위로 세하는 살짝 손을 올렸다. 말을 못하니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 밖에.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세하의 손길에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서툴기만 한 세하의 손길이 막 따뜻하게 느껴졌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세하도 자신을 좋아하는구나. 저 옆얼굴이 빨간게 그 증거구나.
좋아한다라는 말을 직접 못 들어도 괜찮았다. 자신을 보는 세하의 표정이나 눈빛 같은 걸로 아니까. 그리고 아마 자기도 세하를 볼 때 그런 똑같은 표정이며 눈빛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기대어 있었다.
* * *
(#Side) - Gatecrasher
"...호오..."
이게 이세하의 목소리란 말이지. 끝내주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목소리는 엄연히 다르구나...
큐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 둘의 입장 차이는 달랐다. 이세하는 실제하는 쪽, 나는 실제하지 않는...
...가짜일뿐, 이라고 서유리가 말했었지.
시뮬레이션으로 입체화되었다던 나의 목소리는...이세하와 똑같긴 했지만 미묘히 다른, 노이즈가 섞인 이 세계에 존재할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자연스러웠다. 한꺼번에 많은 걸 가져올 생각은 없다.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제일 먼저 가지고 온 건 바로 이세하의 목소리였다. 이세하의 목소리는 실로, 환상 그 자체였다. 실제하는 목소리가 내 입에서 또렷이, 그것도 내가 말하고 싶은 그대로 나와주는 걸 확인했을 때의 기분은 끝내주었다. 대신 내가 이세하의 목소리를 가지고 갔으니 이세하는 아예 목소리가...없는 상태이겠지.
이렇게 좋은 걸 이세하만 독점하고 있다는 건 공평하지 않다.
"그럼...이번에는 무엇을 뺏어볼까나~"
기분 좋은 울림이 담긴, 환상적인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갔다.
[작가의 말]
새드일줄 알았죠? 아닙니다. 달달물입니다, 이번엔.
뒷이야기는 알아서 상상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