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불안감 -1
Maintain 2017-04-05 1
"...휴..."
또 악몽이냐. 침대에 누운 채로,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냈다. 그나마 이것도 나아진 거다. 예전에는 튀어나듯이 일어나더니, 익숙해지니까 이젠 그러지는 않으니까.
시계를 봤다. 새벽 3시. 지금이라면 누구한테 전화한들 받아주는 사람은 없겠지. 담배라도 한 대 피울까, 대충 웃옷을 걸치고, 바로 바깥인 옥상으로 나갔다. 옥탑방이란 게, 이런 점에선 좋다니깐.
문을 열자, 꽃샘추위라는 기상안내의 말처럼 봄치곤 아직 서늘한 공기가 느껴진다. 잔뜩 흘렸던 땀이 공기에 말라붙어, 조금은 춥기까지 하다. 나는 옥상 한 켠에 마련한 벤치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신 다음 숨을 내쉬자, 하얀 연기가 어두운 신서울 하늘에 천천히 흩어져 간다.
"조용하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안한 새벽의 신서울. 바로 얼마 전에 전세계적 규모의 큰 사건이 있었는데도, 지금 이 야경을 보고 있으니 그때 그 일들이 마치 꿈인것만 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평화란 게 참 무서운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몇 번이고 죽을 뻔하고 세상이 뒤집힐 뻔해도, 평화는 그 모든 걸 금새 잊게 해 주니까. 세상 그 모든 마약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평화라는 건. 합법적인 데다, 약빨도 죽여주지.
물론 어느 시대에든 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평화에도 전혀 익숙해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
저번에 동생하고 같이 했던 어떤 게임이 생각난다. 어떤 한 도시에서 시장의 딸이 납치되자 그 남자친구와 그 남자친구의 동료, 그리고 시장이 도시를 지배하던 악의 집단을 박살낸다는 이야기.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권선징악형 게임이지만, 동생이 알려준 그 게임의 후속작 설정이 기억에 남았다. 그 남자친구는 여자친구도 구해냈고 도시의 평화도 가져다 주었지만, 오히려 그 평화가 독이 되는 바람에 싸움을 하던 때를 잊지 못하고 계속 범죄를 일삼다 결국 전과자가 되어 버리고 여자친구도 떠나 버렸다는 씁쓸한 결말이었지.
동생은 내게 그 얘기를 하면서 말했었다. 평화란 것도, 이렇게 보면 참 나쁜 거 같다고. 그리고 아저씨는 이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이다. 그때는 웃으면서 당연하다고 해 줬지만, 이제 와선 동생에게 거짓말을 한 거 같아서 뒷맛이 씁쓸하다. 자기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알게 모르게 꽤 날카로운 구석도 있단 말이지.
싸움에 중독되어 버린 사람이라. 아쉽게도 바로 내가 그 남자친구 같은 사람이다. 전쟁이 싫다, 더 이상 싸우는 건 싫다. 이렇게 남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뭔 소린가 싶겠지만.
물론 지금도 싸우는 건 정말 싫다. 전쟁 때의 기억은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혹시나 그런 전쟁이 다시 터져서 나보고 나가라고 하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다. 단언할 수 있다. 더 이상 그때의 그 기억을 반복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진짜로?
하지만, 내 마음 속 한 구석은 그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요즘 들어, 부쩍 다시 악몽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꿈속의 나는, 어떤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언덕이라고 하기엔 좀 높은 그것은, 차원종 인간 가릴 거 없이 시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시체들의 상태는 하나같이 끔찍할 정도여서, 두개골이 부서진 건 기본이고 도망가려다가 붙잡힌 모양인지 손톱이 죄다 빠져버린 채 공포에 질린 채로 죽은 사람도 있었고 얼굴이 함몰되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차원종도 있었다.
손에선 축축함과 통증이 동시에 느껴졌다. 손을 바라봤다. 빨간색과 보라색이 섞인 듯한 기묘한 색깔의 방울이 장갑에서 떨어졌다. 그걸 보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공포? 아니, 그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공포였다면, 그때의 나는 왜 웃고 있었겠는가. 그것도 귀에 걸릴 정도로 입이 찢어지는 웃음을. 그 웃음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악몽에서 깨고 마는 것이다. 혐오스러움과 한 구석에 섞여 있는 약간의- 희열 때문에.
분명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결심해서 다시 싸움터로 돌아왔다. 하지만, 요새 그런 꿈을 꾸면서 정말로 내가 그래서 돌아온 걸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오면서 내가 차원종을 얼마나 죽였지? 아니 뭐, 차원종이야 구제도 못 할 순도 백프로의 괴물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그럼 테러집단이라고는 해도 거기 있던 사람들은? 그때의 나는 그 녀석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됐건 민간인들이 하마터면 큰 피해를 입을 뻔했으니까.
거기에 그 후에 있었던 일들도...데이비드와 싸우는 것도 모자라 그 과정에서 유니온이 생각보다 더 썩어빠진 곳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고, 뭣보다 그 클론 건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싸웠다. 일단 싸우면, 뭔가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일은 이제 한동안 없을 거다. 일단 사태의 근원이었던 데이비드도 죽었고, 테러리스트들도 대장을 잃었으니 해산은 당연한 후속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늑대개 팀과 형도 일단은 사면이 되어서 양지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분명 그건 다행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뭐일까.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물론 아직 일이 끝난 건 아니지만, 이 불안감은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분명 난 그때 결심했다. 싸움이 끝나도, 적어도 저 썩은 유니온이 아이들에게 손을 뻗치기 않을 때까지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고. 그런데, 단지 그것 뿐이었을까? 내가 계속 남은 이유가?
싸우는 건 싫다,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가 다시 싸움터로 돌아오고 여기까지 온 건, 결국 난 그 게임의 남자친구마냥 싸움이 주던 그 무언가에 중독되어 버려 그런 게 아닐지. 지금의 이 평화가 불안하게만 느껴지는 것도, 그 무언가를 충족하지 못해 밀려오는 그런 게 아닐까.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그 다짐은, 사실상 그냥 싸움에 취해 버린 내가 내세운 핑계일 뿐이었던 걸까. 가슴 한 켠에 초조함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다시 한 모금을 빤 순간,
"-앗뜨!"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통증 때문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런. 몇 모금 빨지도 못했는데. 한 모금만 더 필까. 다시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고 불을 붙이
"아얏"
뭔가 손을 치는 바람에, 나는 라이터를 놓치고 말았다. 뭐지 싶어서 라이터를 주으려고 했지만,
"-지금 너의 몸상태론 한 개비 이상의 담배는 무리다. 자중하길 바란다."
그 라이터는 누군가의 발에 짓밟혀 부서지고 말았다.
"바로 어제 산 라이턴데, 이건 좀 너무하잖아..."
"스트레스를 풀고 싶으면 담배가 아닌 다른 걸 찾길 바란다. 담배는 가뜩이나 좋지 못한 너의 건강을 더욱 해칠 뿐이니까."
쳇, 단호하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내 라이터를 밟고 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린아이지만, 어린아이치곤 지독할 정도로 무표정인 붉은 눈의 소녀를 말이다.
"좋은 아침이다. 클로저 제이."
"아직 지금은 새벽이지만 말이지. 티나...맞지?"
소녀- 늑대개의 대원 중 한 명인 티나는,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