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 기억속에 묻혀버린.

스펙트리카 2016-11-01 3


<현재>

"저.. 저기 하피씨!"
이슬비 요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에서 들려왔다.

"네? 무슨 일이죠?"

조심.. 조심.. 말 실수 안하게 조심..

예전부터 나타나 트레이너씨에게 그런 말을 들어왔다. 내 말투가 상대방의 신경을 긁는다고..

그럴때마다 난 타고난건 바꿀 수 없다고는 했지만 실은 계속 의식하고 있었다.

특히.. 이슬비 요원이 앞에 있다보니 더욱 그렇게 되었다.


"저기, 하피씨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싶어요."


"...네?"

갑자기 사람을 붙잡고는 대체 저건 무슨 종류의 질문인건지 속으로 질문했다. 속으로만.

아마.. 뭐, 나랑 친해지려고 하는 질문일 것이다.

나야 환영이지. 나야말로 이슬비 요원과 가까워지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가끔 생각하기에, 이렇게 눈치 빠르고 상대의 의도를 금방 파악하는 내가 가끔씩은 싫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내가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세린 요원은 내 이런 부분이 굉장하다고 했지만...


"제 가족이요?"

나는 되물었다. 상투적인 반응이었다.


"네. 하피씨를.. 아카데미 후배로서 좀 더 잘 알아보고 싶어요."


아카데미라... 이슬비 요원이 아카데미를 언급할 때마다 항상 내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다.

아카데미를 떠나면서 아무 미련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틀렸던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바뀐건지. 요즘은 그게 후회스럽다.

때론.. 스릴 대신 안정감이 더 소중하게 느껴질때도 있다.

나답지 않게.


나답지 않지만.. 만약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아카데미를 탈출했을까?


"음.. 제 가족들은.. 전부 좋은 분들이셨죠."

나는 대답을 시작했다.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었다. 그리고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들을 늘어놨다.


"저희 부모님은..."


"... ... 하피 씨?"


"어... 잠깐만요, 이슬비 요원. 그.."


... ... 뭐지? 왜지?

머리가 하얘졌다.

분명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에..


"제 부모님은.. 어.. 어머니는..."


좋은 분이셨다. 항상 날 보며 웃어줬다.

아카데미를 다닐때 항상 나를 배웅해줬다.

나보고 다치지 말고 조심하라고 당부해 주셨다.

아니, 그랬었나?

내 부모님은..

아니, 항상 화난 상태였다.

내가 스릴만 찾는다고 매일 다쳐서 돌아오니까, 항상 화나계셨다.

나를 항상 혼내고.

아니야.

내 부모님은..

내가 위상능력자가 되니까 클로저가 된다는게 너무 불안해서 나를 걱정해주시던..

내 부모님은..


"하피 씨!!"


"네..네. 네?"


"하피 씨, 괜찮으세요? 제가 물어보면 안되는걸 물어봤나요?"


"아, 아니요. 이슬비 요원. 그러니까... 잠깐만요."


내 부모님이 어떤 분들이셨지?

분명 내가 아카데미를 다닐 때, 매일같이 나를 찾아오셔서 내가 그만 오라고 했었다.

아니, 매일같이는 아니었고 한달에 한번?

아냐. 부모님이 나한테 오셨던게 아니라, 내가 집으로 갔었지.

그랬나? 난..


"하피 씨, 제발요."


파르르 떨리던 내 손이 덥석 잡혔다.

이슬비 요원의 손이었다. 따뜻했다.


"하피 씨,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들어가서 쉬세요. 죄송해요."


아니야. 왜 당신이 사과해요.

몸이 안좋은게.. 아닌데...

난 괜찮은데.

지금 쉬어야 하는게 아니라..


"그..."


순간 정신이 들었다.

내 머리 속을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단 한 마디도 나가지 않았다. 못했다.


"네... 이슬비 요원. 미안해요. 조금... 쉴게요."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램스키퍼의 내 개인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내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지?



***



두 시간정도 지났다.

배게에 머리를 박고 수많은 생각들을 했다. 주로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었는데,

전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기억 소거는 아니었다. 기억 소거는 기억을 부분적으로 지울 수 없다.


그러다가 문득, 트레이너 씨에게 물어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함교로 갔다.


"트레이너 씨."


트레이너가 이쪽을 봤다.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지, 하피?"


"트레이너 씨, 제.. 저의.. 가족에 대해 아는게 있나요?"


트레이너 씨가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거지, 하피?"


"그냥, 매일 있는 변덕중 하나라고 생각하세요. 후훗."


"흐음.. 넌 홍시영 감시관의 관리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너에 대해 아는건 없다."


"네?.. 아.."


"... ... 그래도 시간이 나면 네 가족에 대한 자료를 찾아봐주지."


"거짓말 하는거 아니죠? 고마워요, 트레이너 씨."



***



"하피, 너에게 할 말이 있다."


트레이너 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죠, 트레이너 씨?"


"네가 며칠 전에 말했던, 네 가족에 대한거다."


"... 정말요?"

정말.. 놀랐다. 내 머리를 헤집는 수많은 다른 버전의 내 부모님들.

그중 진짜 버전이 뭔지, 내 머리 속을 채우는 이 혼란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 다만, 자료들이 전부 종이 문서로 되어있고, 많은 부분이 누락되어있다."


"네? 왜죠?"


"홍시영 감시관의 사무실에 있던 너에 대한 문서들이야. 홍시영 감시관은 죽었으니, 문서들은 다 벌쳐스의 창고에서 가져온거다. 벌쳐스 놈들이 창고 관리는 못 하기로 유명하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겐 그런걸 아쉬워할 여유같은건 없었다.

빨리.


"아무래도 좋아요. 어서 보여주세요."





<현재로부터 27개월 전>



"당신은 이제 내 개에요. 원래 이름같은건 잊어버려요."


이건 말도 안돼.

내가.

나 프롬퀸이. 지금까지 모든걸 훔치고, 내가 가고싶은 곳 어디든 드나들고, 탈출하고...


"혹시라도 탈출할 생각같은건 하지 마요. 귀염둥이."


회색 머리. 재수없게 생긴 년.

이름이 홍시영이라고 했던가? 여길 탈출하기만 하면 무조건 죽여버릴 것이다.


"어머, 꽤나 무서운 눈빛이네요? 에잇."


"흐으으아아!!"

갑자기 온 몸의 피가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내 몸엔 두 전극이 매달려 있었다.

원래 나같은 위상능력자들은 이런건 아무것도 아닌데..


"벌쳐스가 특별히 제작한 위상력 구속구에요. 어때요? '일반인'들이 받는 고통은 어떤가요?"


"끄으으읏..."

나는 홍시영을 노려봤다.


"개는 주인을 죽일듯이 바라** 않아요. 전압을 더 올려야겠네요."


"나는 개가 아니라, 내 이름은--"


"에잇."

그 '에잇'과 동시에 내 온 몸의 피가 끓어올랐다. 더욱 격렬하게.


"흐아아아!! 으으으--"

온 몸이이... 찢어지고 있어.. 분명 찢어지고 있어....

찢어지고 있어....


"다시 말하지만 당신에게 이름같은건 없어요. 그걸 깨달을 때까지 벌을 받아야겠네요."


"나는... 흐으으윽...!! 나는..."



너무 아파...




***



"많이 아팠죠?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다 당신을 좋은 개로 만들려고 그랬어요."


"... 다 당신을 위해 한거에요."


전부 나를 위한 일..

당연하다. 난 좋은 개가 되어야 하니까.

벌을 받지 않으려면 주인님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이리 와요."


가야 하는건가?


"... 이리 오라니까요?"


가야 한다.

나는 주인님의 품에 안겼다.


"미안해요."

주인님이 내게 사과한다.

내가 뭔가를 잘못했나?


"아니에요. 감시관님."


나의 주인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뭔갈 잘못한건 아닌 것 같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이젠 말을 잘 듣네요. 요 며칠동안은 정말 후... 사나웠는데 말이죠."


"저는 당신의 그림자에요."


"요 이쁜것, 그런 이쁜 말은 어디서 배운거에요?"


주인님은 미소지으며 나를 쓰다듬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나를 쓰다듬던 손도 멈췄다.

그리고 내게 질문했다.


"... 그런데 당신의 이름이 뭐죠?"


내 이름?

내 이름은.. 내 이름이..



"전 이름같은건 없어요. 당신의 그림자일 뿐이에요."


난 내 주인님의 그림자.

나는 없다.




<현재>



"홍시영 감시관님이... "


"그래, 너 자신에게서 너를 뺏어갔지. 네가 가졌던 모든 소중한 기억들까지."

트레이너씨가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괴도 시절과 아카데미 시절 기억은 전부 있는데.."

이해가 될 것 같지만 이해가 안됐다.


"그건 뭐라 할 수가 없군. 원래 사람을 세뇌시키는 작업엔 변수가 많다."


"으음..."

그래도 10분 전보다는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적어도 탓할 사람은 생겼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내 부모님이 누군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고, 왜 내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지? 왜 연락이 안돼지?


"저어, 트레이너 씨, 이 서류들,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일단 천천히, 전부 다 샅샅히 봐야겠다.


"그래. 맘대로 해라."



트레이너 씨의 손에 서류 몇장이 잡혀 있었다.


"트레이너 씨, 지금 들고 계시는 거, 그건.."


"아, 이건 너랑 상관 없는 문서다. 군수 공장에 관한 보고서야."


"아.. 네."

난 서류들을 상자에 담아 들어올렸다.


"아참, 고마워요. 트레이너 씨."





<현재로부터 27개월 전>



"저는.. 당신의.. 개가 되지 않을거에요.. 흐으윽..."

홍시영.. 홍시영.. 홍시영.. 나중에.. 내 손으로... 죽일거야...


"아직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버틸만한가 보네요. 강도를 조금 더 높이죠."


잠깐...

"에잇."


"흐으으윽!! 크윽!.... 읏..으윽..흐으윽..."


"아하하핫!! 자기 몸도 지키지 못하면서, 자길 돌봐줄 주인이 필요 없다는 건가요?"


"흐으으으......"

홍시영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해도 초점이 도저히 맞질 않았다.

눈이 풀린 듯 했다. 아니, 온 몸의 힘이 빠져갔다.


"어때요. 정말 아프지 않아요? 그게 당신이에요. 무력하고, 자기 스스로 하는 선택은 당신에게 고통만 안겨줄 뿐이에요."


"나는.. 괴도.."


"한번 더 기회를 줄게요. 당신은 누구죠?"


"프롬..퀸.. 아카데미 자퇴생.. 연락하는 친구들도 있고.. 가족들... ..."


"가족들?"

홍시영이 말했다.


"가족들은... 가족... 내 가족은..."


"재밌네요. 자기 가족도 기억 못하나요?"

홍시영이 날 보며 웃음을 지었다.


"내 가족은.. 가족은.."

왜 기억이 안나지? 고문.. 고문당해서 그런건가? 고문당해서 그런거야.




"... ...불쌍한 개 같으니."

홍시영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현재로부터 31개월 전>


난 이 아카데미가 정말 싫다.

맨날 날 가둬놓고, 무슨 감옥같이..

거기다가 맨날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충 엿듣기로는 내 위상력이 너무 강해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 내 온 몸에 위상력 억제기를 주렁주렁 매달아놓고서는, 뭐가 더 불안해서 이러는지.

솔직히 나 말고도 위상력 억제기를 달고 사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닌데, 유독 나한테만 이런다.


그것도 그거지만, 그냥 여긴 너무 지겹다.

난 다른 사람을 지키면서 살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위상능력자라는 이유만으로 클로저 요원이 되어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여긴 정말 멍청한 곳이다.


그래서 오늘 아카데미 원장 할망구한테 좀 따질거다.

날 어디든 좋으니 이런 멍청한 곳에서 빼내달라고. 뭐, 성인들 훈련받는 곳이든 뭐든 좋으니

이 유치원같은 곳에서 좀 빼내달라고 말이다.

나같이 천성적으로 스릴을 찾는 사람에게 여긴 너무 답답한 공간이다.



***



"안돼."


"대체.. 아니, 제발요. 제가 지금까지 뭐, 문제 일으킨거 있어요?"

이 ** 답답한 마귀할매같은.


"'아직은' 없지. 하지만 넌 폭탄이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대체 내가 왜요? 이제 위상력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고, 나 말고도 위상력이 강한 학생들은 많잖아요. 왜 나만 특별취급이에요?"


"... ... 특별 취급이라니?"


이젠 시치미까지 떼는군.


"절 감시하는 사람들이요. 제가 모를줄 알았어요?"


"그건..."


"왜요. 제가 무슨 사고를 칠까봐요? 제가 무슨 사고를 쳤는데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사고친적이 없어요. 오히려 다른 학생들이 매일같이 컨트롤도 못하는 자기 위상력으로 사고 일으키고 다녔지, 전 단 한번도 사고친적이 없다구요."


"어쨌든 안된다면 안되는거야. 네가 감시받는 이유는..."


"... ... 이유가 뭔데요? 말을 해봐요!"


"네가 처음으로 위상력을 각성한 날!"

할망구는 말을 하다 말았다.


"... ... 아니. 기밀이야. 그냥 받아들여."


할망구가 나를 문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안 밀릴 수 있지만,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냥 밀려서 원장실 밖으로 나갔다.

**.

부모님이 보고싶다.


위상력을 각성하면 강제로 아카데미에 보내진다.

위상 능력자는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우린 자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나 의지같은건 무시당해도 된다.

난 집에 가고싶은데. 집에 가본지도 오래된 것 같다.


부모님이 보고싶다.

집에 가면 따뜻한 밥이 있고, 요리를 정말 잘하는 우리 엄마가..

아니,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요리를 잘했지.

아니, 두분 다 요리실력은 그저 그랬어.

아닌데. 난 엄마가 해주시던 그 찌개..

아니야. 잠깐만, 난 혼혈이지. 엄마가 외국인이었고..

아닌가? 아빠가 외국인이었나?


..어?




<현재>



"하피, 네게 질문이 있다. 진실은 공개되는게 옳은가?"

트레이너씨가 듀퐁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면서 내게 뜬금없고 이상한 질문을 했다.

이렇게 철학 감성이 있는 사람이었나.


"갑자기 무슨...? 철학 시간인가요?"


"유감스럽게도 지금 장난을 치자는게 아니다. 대답이나 해라."


쌀쌀맞긴.


"그야, 당연히 공개되는게 옳겠죠."


"그럼 만약, 그 진실이 공개될 경우, 사람들을 해치게 된다면 그래도 그 진실을 공개하는게 옳은가?"


최근에 무슨 마이클 샌델 책이라도 읽었나?

난 안그래도 부모님 문제때문에 혼란스러운데 혼란스러운 질문을 하네.


"글쎄요. 그 '해친다'는 것의 범위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음.. 범위를 정해주자면,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는거다. 완전히 무너져버릴 수도 있어."


"정신적인 건강은 중요하죠. 그럼 그 진실은 숨기는게 낫겠네요. 그런데 이런 질문들은 왜 하는거죠?"


"음..."

트레이너씨가 말을 망설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피. 만약, 언젠가 내가 네게 이런 질문을 한 이유를 알게 된다면."



"...날 이해해주길 바란다."




... ... 트레이너씨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현재로부터 84개월 전>


"우리 딸, 오늘도 고생했지?"


아-... 귀찮아. 짜증나.

다른 무엇보다도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한다는게 가장 싫다.

난 아직도 중학생인데, 앞으로 고등학교, 대학교 다 이런식으로 지내야돼?


"웅.."


"엄마가 오늘 저녁으로 너 좋아하는거 해줄게."


"아빠는요? 아직 집에 안오셨어요?"


"방금 퇴근해서 지금 집에 오고계시대."


"딸~ 학교는 어때? 다닐만 해?"


"네, 뭐. 그럭저럭요. 재미없다는 것만 빼면요."


"오늘 선생님한테 중간시험 전교 1등했다는 전화 받았는데, 왜 엄마한테는 말 안해줬어?"


"아- 그거, 그냥.. 딱히 대단한거라고 생각 안해서.."


"아유, 우리 딸. 못하는게 없어. 너무 완벽해서 너무 스릴없는 삶을 사는건 아닌가 몰라."

엄마가 내 볼살을 문질렀다. 손이 따뜻했다.


"그거 칭찬 맞죠?"


"물론이지~."



***



온 가족이 TV 앞에 앉아서 개그 프로를 보고 있다.

난 솔직히 저게 뭔 재미인지는 모르겠고, 그냥 스마트폰으로 친구와 메신저를 주고받고 있다.


갑자기 아빠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우리 딸. 전교 1등했다며?"


또야..

"네.. 뭐.. 했어요."


"잘했는데, 좀 자랑같은것도 하고 좀 그래라. 너무 재미없이 사는거 아니야?"


"와.. 아까 엄마도 비슷한 말 했었는데."


"삶에 스릴이 필요하다고? 결혼 전엔 그 얘기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내가 전교 1등을 했든 말든, 그게 중요한건 아니고.

난 이런 안정감이 좋다. 따뜻한 느낌. 안전함.



"으.. 에?"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응? 왜그래?"

아빠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대답하기 힘들었다.


"욱.. 우욱..."

자꾸 헛구역질이 났다.


"괜찮아? 뭘 잘못먹었나?"


"어디 아파? 아픈 것 같아?"


"잠.. 잠깐만요.. 잠깐.. 흐윽!..."


갑자기 손끝이 타는 느낌이다. 왜지? 뭐지? 병인가? 암인가?


"끄으으윽.."


난 바닥에 엎어진 채 몸을 휘고 있었다. 내 꼴이 웃길 것이다. 그런데 너무 아파서 그런건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아으으...."


"딸, 왜그래? 말좀 해줘."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걱정하는 목소리다. 뭐라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말을 못하겠다..


"으그그... 으으...."


손 끝을 태우던 보이지 않는 불꽃은 곧 온몸으로 퍼졌다. 온 몸이 타는 것 같다.


"아으으..."


"119죠? 지금 저희 딸이 이상해요. 갑자기..."


"..딸!!... .... ..아! 정.... 차려봐... 제발 ...."


모든게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제.... 왜.... .... ....래..... 대체.."



그리고 내 눈 앞이 하얘졌다.


말 그대로. 새하얗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서서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이 온통 난장판이다.

마치 온 벽과 가구가 전기톱에 잘린듯 조각나 있었다.


텔레비전, 비싼건데. 깔끔하게 여섯 조각이 나 있는게 보인다.


무슨 일이 있던거지?

잠깐, 우리 부모님은?


"으엣."


발에 축축한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발을 들어올렸다.


뒤꿈치에 피가 묻어있었다.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자 피가 뒤에서 내쪽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난....


나는..


방금..







<현재>



내 부모님에 대한건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물론 트레이너씨가 내게 준 정보가 도움이 되긴 했지만, 결정적인 정보는 전부 누락되어 있었다.


밖에서 트레이너씨와 쇼그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들의 방어기재는 굉장히 특이하군요."


"요점만 말해라. 쇼그."


"특별히 의도가 있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인간들이 정신적 충격을 버티는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쇼그."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을 조작하기도 하고, 때론 아예 지워버리기도 하더군요. 저희 인공지능은 모든걸 기억할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쇼그. 그 얘기는 하지 마라. 적어도 지금은 하지 마."


"... ...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2024-10-24 23:11:5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