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걸음이 느린 아이
카페인의노예 2016-05-19 9
"야, 차원종! 빨리 좀 오란 말이야!"
"죄, 죄송해요......."
나타님은 오늘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얼마 전부터 나타 님은 저와 함께 임무를 나갈 때면 늘 답지 않으시게 실수를 연발하고 계세요.
예를 들면 한 방에 죽일 수 있었던 목표를 갑자기 놓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게다가 왠지 모르게 조준이 빗나가는 횟수도 더 빈번해졌구요.
거기에 최근에는 검은양 팀 분들과 합류를 하면서 묘하게 더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시는 것 같아요.
트레이너 님의 명령으로 실험실을 한 차례 순찰을 돌았지만 오늘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어요. 깊은 적막감에 휩싸인 이 곳은 걸을 때마다 마치 말로만 듣던 바다 속을 걷는 기분이 이런걸까, 싶기도 해요. 문득 갑자기 궁금하네요. 나타님은 바다를 보신 적이 있을까요?
만약 없으시다면, 같이 바다를 보러 가고 싶지만, 그게 언제가 될까요?
"너 말이야, 왠만하면 나랑 같이 싸울때는 옆 쪽에서 공격해. 니가 내 뒤에 있으면 거슬린단 말야."
"네, 죄송해요."
"그리고 좀 빨리 빨리 걸어! 배고프니까 더 짜증나잖아."
나타님은 계속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발걸음을 빨리 하셨어요. 저도 그런 나타님의 등을 좇아 움직이기는 했지만, 돌아가는 길이 조금은 더 길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어요.
이유는 아주 단순해요. 그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고 나타님과 함께 있고 싶었어요.
저는 나타님과 함께 있는게 좋으니까요.
사실 알고 있어요. 나타님이 싸우면서도 제가 혹시라도 다치지는 않을지 몰래 살피고 있다는 걸. 하지만 저도 나타님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니까. 등 뒤에서 나타님을 지켜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면 훈련이다 뭐다로 바빠서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이 별로 없답니다. 단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은 하루 중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소중하고 각별해요.
"야! 자꾸 그렇게 느리게 걸으면 두고 갈꺼야!"
"죄, 죄송해요."
나타님이 차원종을 싫어한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 자신이 인간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 한답니다.
만약 제가 인간이었다면, 그렇다면 나타 님도....저를 어느 정도는 여자로 봐주시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해요.
물론 지금와서 제가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건 불가능이란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저도 나타 님의 옆에 한 명의 평범한 여자아이로서 있고 싶어요. 나타 님이 겪은 일들은 제가 끌어안고 보듬고 싶어요. 그렇다면, 나타님도 지금보다는 저에게 마음을 더 열어주시지 않을까 해요. 마치 꿈같은 이야기네요.
하지만 이것이 바로 제 꿈인걸요.
"빨리 좀 돌아가자. 왜 그렇게 행동이 굼뜨......."
나타님은 제 쪽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셨어요. 표정을 살피니 뭔가를 보고 크게 놀라신 듯한 얼굴이셨어요.
"나타님? 왜 그러세요?"
"그거 아직도 안 버린거야?"
나타님이 손으로 가리킨건 제 옷에 달려있는 새 모양의 나무조각 이었어요. 예전에 나타님이 신강고에서 주셨던 것이었죠. 제가 조각을 쓰다듬는걸 본 하피 님이 어디선가 가져오신 도구들로-하피님 말씀으로는 휴게소에 있었다고 하셨어요-옷에 끼울 수 있도록 핀셋을 붙여 주셨어요.
"네, 나타님께 받은거니까요. 늘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어요."
"뭐, 뭐야. 그런건 그냥 버리라니까."
나타님은 그렇게 툭 내뱉고는 무심하게 걸음을 옮기셨어요.
나타님의 볼이 살짝 붉어졌던 것 처럼 보인건 제 착각일까요?
알 수는 없지만 전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좋답니다.
***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최근의 나는 이상한 것 같아. 아니, 확실히 이상해.
'왜 이렇게 신경 쓰이지?'
예전에는 저 차원종 계집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어. 그저 꼰대가 특별 취급 해주는 대원이자 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녀석에 불과했지.
저 녀석의 동족들만 아니었어도, 적어도 내 인생이 이 정도로 꼬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차원종을 팀원으로 받다니, 꼰대 머리속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다행히 마침 식당에 아무도 없으니, 생각 좀 더 해보다가 뭐라도 좀 챙겨먹어야지.
"사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뒤를 돌아보니 나를 사부라고 부르는 그 고깃덩이였다. 이름이...... 서유리? 였던가.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식당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여긴 또 왜 온거야?
"칫, 무슨 상관이야."
"그치만 사부, 지금 엄청 심각한 표정인걸? 마치 뭐랄까...... 응, 그래! 꼭 짝사랑 하는 남자애 같은 얼굴이었어."
"뭐, 뭣?"
나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 아니, 이 녀석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거야?
"무, 무슨 헛소리야? 난 그런 생각 같은거 안 했어."
"응? 그치만 사부 표정이 엄청 진지했는걸?"
"시끄러워!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나는 그렇게 일갈하고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어.
내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아무리 좋게 본다고 해도 그저 같은 팀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였는데.
아니, 오히려 처음에는 경멸스러운 존재였어. 차원종이 아니었다면, 차원 전쟁 같은 빌어먹을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 차가운 독방에서 갇혀 지내는 일도,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도 없었겠지. 어쩌면 나도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만드는 그런 일상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몰라.
'분명 자유라는건 그런 거겠지.'
내가 한 번도 손에 쥐어본 적 없는 그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날개를 달고 하늘을 달리는 그런 느낌일까. 책에서는 그것을 여러가지로 묘사하고 있었지만, 역시 알 수 없었어.
지금의 나는 그저 족쇄에 발이 묶인 가련한 짐승에 불과하지 않아. 그저 가시를 잔뜩 세우고, 낮게 웅크리고 으르렁 거리면서 이빨을 내세우면서 남을 겁주는 것 밖엔 할 줄 아는게 없어.
그런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게 가능할까? 상대방이 날 감당할 수 있을까?
'역시, 모르겠어.......'
알 수 없는 감정이 계속해서 소용돌이 치는 것이 느껴졌어. 조금씩 내 안의 자존감을 갉아먹고 서서히 그 검은 몸뚱아리를 키우더니 이내 나의 존재감 마저 집어삼키려고 입을 벌리는 것이 느껴졌지. 내가 있을 곳은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의 벌판이라고, 여지껏 그랬던 것 처럼 내가 누군가를 원하게 된다면 분명 그 사람도 나를 잊게 될 것이라고.
학습된 무력감은 내 어깨를 짓누르고 악몽같은 기억은 끈적하게 내 발에 달라붙어 자꾸만 나를 아래로 끌어내리려 해.
나는 목의 초커를 손으로 쥐었어. 아니, 난 절대 죽지 않을거야. 굴하지 않을거야.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난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싸울거야.
상처 투성이가 되어도 좋아. 내가 자유가 될 수만 있다면 말이야.
***
"왜 그러지? 뭔가 고민이 있는 듯한 표정인데."
"시끄러워. 꼰대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에 앉아있던 나타에게 말을 걸어온 건 제이였다. 깡통죽을 꺼내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고는 있었지만, 사실 이렇다할 맛은 별로 느끼지 못하던 참이었다.
도대체 우리 꼰대는 이런 쓰레기 같은게 어디가 좋다는 건지. 분명 미각이 정상이 아닐거야.
"뭐하면 이 형님에게 털어놓으라고. 너희같은 애들을 위해서 나같은 사람이 있는 거니까."
"쳇, 시끄러워."
나타는 그렇게 일갈하고 숟가락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꼰대 주제에, 잘난척 하지 말란 말야.
난 당신이 속한 그 검은양 팀처럼 약해 빠진 녀석이 아니라고.
"말 못할 고민인가? 설마, 연애 관련 고민이라거나......."
풉-!
'아, 돌직구였나?'
그냥 한 번 던져본 말이었는데. 격한 반응에 오히려 더 당황한 건 제이였다.
"무, 무슨 소리야!"
나타는 입가를 닦을 생각도 못 한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것이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라는걸 전혀 모르는 채.
"후, 잘 들어, 동생. 그런건 길게 끌어봤자 별로 좋을게 못 돼. 차라리 후회하더라도 일단 고백이라도 해 보고 후회를 하는게 더 좋다고."
제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손 끝으로 밀어 올렸다.
"흥, 시끄러워. 그리고 연애 경험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누구한테 조언을 하는거야?"
"맞아. 그건 사실이야."
"뭐, 뭣?"
나타는 적잖이 당황했다. 원래는 잘난척 하려는 모습이 아니꼬와서 그저 도발이나 해보려고 던진 말이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더 잘 아는거야. 바보같이 말도 못하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더 크게 후회하니까."
"......그거, 당신 경험담이야?"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두지."
나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선글라스 너머의 그 눈은 굉장히 슬프고 쓸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간다면 분명 꾹꾹 눌러온 마음을 서툴게라도 전할 수 있을텐데.
널 지켜주지 못했다는 그 후회와, 밤의 창문 끝에 매달린 미련과,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과 그리운 널 다시 한 번 구원할 수 있을텐데.
"당신, 겉보기에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후, 물론 그렇겠지. 나도 나중에 깨달았거든. 그저 좀 더 아픔을 감추는 것에 능숙해질 뿐이야. 어른이란건, 그런 존재야."
"쳇, 역시 어쩔 수 없는 꼰대라는 말이잖아?"
"마음대로 생각해."
제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냥 못 이기는 척 기대도 좋을걸. 지금은 젊은 혈기에 모든걸 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겠지. 그게 결과적으로 단순한 오기라는걸 아직은 배울 때가 아닌데 말야.
너희는 그저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만 하루 24시간을 다 써버려도 모자를 때인데.
"뭐...... 나름 참고는 해 볼게."
"응?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시, 시끄러워! 그냥 혼잣말이야."
나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숟가락을 입으로 넣었다. 괜히 쓸데없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이제와서 내가 다시 누군가와 평범한 관계를 원하는 건, 아니 그 이상의 특별한 관계를 원하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이 아닐까.
나타는 그런 생각을 애써 잊어버리기 위해 애꿎은 깡통죽만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
'그런 말을 들어도, 당장은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타는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레이너의 명령으로 휴게소 주변을 순찰하면서 겸사겸사 차원종 몇 마리를 사냥했지만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도구 하나 없이 길을 찾는 것도 이보다는 더 답답하진 않을 것이다. 생각이 뒤엉켜 머리에선 열이 부글부글 끓고 가슴은 그저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데, 이젠 그만하고 싶어도 더 이상 어떻게 멈춰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생각없이 차원종이라도 신나게 썰면 스트레스가 좀 풀릴텐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처먹을!
"저, 저기, 나타님......."
"뭐야! 뭔데 그래?"
뒤를 돌아본 나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레비아의 오른쪽 무릎 아래쪽에 세로로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 때문이었다.
"뭐야? 너 왜 그래?"
"죄, 죄송해요. 아까 저도 모르게 한 눈을 팔았던 것 같아요."
레비아는 서 있기 힘든지 양 손으로 지팡이를 붙잡고 힘겹게 서 있었다. 사실은 한참 싸우던 도중에 나타를 지키려고 레비아가 몸을 날리면서 차원종에게 베인 상처였지만, 왠지 그 사실을 말하면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화를 낼 것 같아서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다.
"**, 약해빠진 녀석은 이래서 싫어."
"죄, 죄송해요."
'나는 왜 자꾸 나타님의 짐이 되기만 할까.'
레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만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 밖으로 터져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눈물을 보인다면 고작 이걸로 우냐고 또 화를 내시겠지. 분명 내가 못미덥게 보이실 거야. 하지만 그런건 싫어. 나도 나타님께 동등한 팀원으로 인정받고 싶어.
내 능력으로도 당신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는 걸 인정받고 싶어. 당당하게 당신의 곁에 서 있고 싶어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야, 차원종! 뭐해?"
"네, 네?"
레비아의 눈 앞에 보인건 쭈그리고 앉아 등을 보인 나타였다. 등에 차고있던 쿠크리는 이미 양 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대체 뭘 하시려는 걸까.
그런 나타의 모습을 처음 본 레비아는 그저 멀뚱히 그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빨리 업히라고, 바보야!"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트레이너 님께 연락을 취하면 아마도......."
"시끄러워! 꼰대 도움 따위는 받고 싶지 않으니까 이러는 거라고!"
"아, 알겠어요......."
나타는 레비아를 등에 업은 채 터벅터벅 걸었다. 등에 그녀를 업은 탓인지 분명 평소보다 걸음이 느렸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함교로 돌아가기 전까지 좀 더 생각을 해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해야할지 답이 보이지 않아도 좋아. 그냥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볼거야. 난 꼰대랑 달라서 어려운 말도 모르고, 그런건 생각하기도 싫어.
어차피 난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니까. 그냥 지금은...... 이렇게 둘이 같이 걷다 보면, 뭔가 길이 보이겠지. 굳이 그런게 아니더라도 너와 함께 걷다 보면, 돌아온 길을 보면서 '그땐 그랬지' 라며 웃게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저, 나타님? 왠지 얼굴에 열이 있으신 것 같아요."
"시, 시끄러워! 그냥 단순히 더운 것 뿐이야."
나타는 복귀 장소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오늘따라 이 길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fin.
***
거진 5달 만에 다시 쓴 것 같네요.. =ㅁ= 요새 일도 너무 바쁘고 개인적인 짬이 안 나서....으어어.... ㅇ<-<
레비아에게 커플링을 엮어준다면 누가 좋으려나 싶었는데 나타밖엔 생각이 안 나네요.그러한 망상이 결국 이렇게 또 하나의 결과로 나왔습니다
귀중한 시간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p.s 고유진-걸음이 느린 아이 라는 노래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