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Frieren 2024-12-08 2
[들어가기 전 사담]
1. 넥슨 클저 공홈에 올리는 마지막 글(새로 단장한 홈페이지에도 2차 창작 게시판 있으니 거기에서도 가끔씩 글을 올리겠죠)
2. 아실 분은 아시겠지만, 서지수 성우님이 프리렌 성우도 하신 것에 대한 미미한 성우 장난 글입니다.
3. 사실 2번에서 언급한 주제로 『장송의 서지수(가칭)』 중편을 쓰려고 했는데 사이트가 바뀐다는 소식에 여기에 올리는 건 시기적으로 애매해서 그냥 플롯에는 없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공홈 글 투고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4. 당연하지만 서지수 x 세하 아버지 요소 있습니다.
BGM : https://youtu.be/4MmKui7axr4
-뭘 하고 있는 거지, 서지수?
“응? 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 거야.”
-기도?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서지수의 대답에 루시펠은 도리어 더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이에 서지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반대로 루시펠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차원종의 세계에서는 기도를 올리지 않아?”
-네가 말하는 ‘기도’라 함은, 지금 네가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 행위를 뜻하는 건가?
“맞아.”
루시펠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이윽고 천천히 생각한 끝에 그가 내놓은 답변은 루시펠답다면 다운, 영 엉뚱한 대답이었다.
-나는 본 적 없지만, 그런 손동작으로 싸울 수 있는 차원종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데.”
-한 번 너의 그 행동을 따라해 보았다. 뭐랄까, 정신이 한 곳으로 집중을 시키는 기묘한 동작인 거 같다.
“너답다면 너다운 대답이네.”
서지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앞선 그의 대답은 도저히 인간이 할법한 사고방식은 절대 아니지만, 그 엉뚱한 면모가 서지수는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제 아무리 인류를 사랑한다고 해도, 직접 인류의 삶을 체험해본 적 없는 루시펠에게 있어서 인간들의 행동 하나하나는 마치 미지를 개척해나가는 느낌처럼 인류의 모든 것들이 새로울 것이다.
특히, 이렇게 서지수의 옆에 붙어있게 된 이후로는 루시펠의 그러한 면모는 더욱 도드라졌다.
서지수 피셜, 자신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고생 – 만약 이 이야기를 옆에서 서지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혈연적 관계에 있는 어떤 누군가가 들었더라면 크게 경악할 만한 발언이었다 - 이었다. 서지수에게 있어, 그런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정말로다가 흔하디 흔한 여고생의 생활일 뿐일 텐데, 그런 서지수에게 있어서 일상이나 다름없는 것들을 할 때마다 매번 신선하다는 듯이 구는 것이 정말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일례로 쇼핑을 한다든지, 인기 있는 디저트 가게에 들러서 특제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든지, 학교에서 반 대항 피구 경기를 한다든지 등등. 정말 별거 아닌 일상들뿐이었다. 차원종이 침공한 이후로도 전선이 아닌 곳에서 위상력에 각성하지도 않고 살아가던 서지수에게 있어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던. 그 정도로 서지수에게 있어서 그건 그만큼 흔하고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시펠의 저 반응이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위상력에 각성하게 된 이후로 루시펠은 언제든지 서지수의 옆에 존재했다. 그렇게 물리적으로 밀착하고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대화 같은 것도 나눌 때가 많아졌다. 가끔씩 그의 입을 통해 간단하게 전해 듣던 루시펠의 삶은 고달프고 외로워보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던 와중 서지수는 문득 깨닫고 말았다. 루시펠은 대부분 싸우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그가 언제나 서지수에게 했던 자신의 이야기는 늘상 누군가와 싸운 이야기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걸 자각하고 나니 서지수는 루시펠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물론 어느 때는 너무 집요하게 자잘한 것까지 다 알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주 가끔씩은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으로 인해 서서히 변해가고 있는 루시펠을 보면 묘한 감정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아직 확정지을 수는 없다만, 그래도 루시펠을 향한 긍정적인 감정이니 서지수는 그러한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척, 외면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오늘 루시펠에게 가르쳐줄 것은 기도인 모양이다.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를 ‘추모’하는 방식이었지만.
“내가 왜 기도를 올리고 있냐면, 음…… 그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야.”
-기린다고? 그것은 또 무엇이지?
“기린다는 건 음…… 말로 설명하기 어렵네. 아무튼 그 사람을 계속 기억하는 거야. 기억하면서 내가 계속 살아갈 원동력을 얻어가는 거야.”
-그렇군. 또 새로운 걸 배웠군.
“혹시 차원종에는 이런 풍습이 없는 거야?”
-‘누군가’를 통해 살아갈 원동력을 얻기에는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지 않지.
“그래, 그랬었지…….”
그러니까 항상 그쪽 세계에 있었던 당신은 싸우고만 있었던 것이겠지.
이어 루시펠은 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도 하다.
“와, 방금 그 발언을 들으니 당신과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어.”
-거리를 느꼈다고? 그럴 리가, 너와 나는 지금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달라붙지는 마……!”
형체가 없어서 막 여기서 더 달라붙는다고 밀착되는 느낌이란 건 없었지만, 뭔가 기분이 좀 그랬다. 서지수의 이상한 행동 – 루시펠의 시점에서는 – 에도 의아한 것도 잠시, 루시펠은 마저 헛기침을 하고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너희의 언어로 설명하자면 모든 차원종이 그런 것은 아니고, 고위급 차원종들 중에는 더러 영혼의 잔재가 남아있는 한, 이를 통해 부활을 할 수 있지.
“횟수 제한 같은 건 없어?”
-제한이라 함은 다시금 부활을 시키기 위한 ‘조건’이 제한이라고 볼 수 있지. 그 조건들은 항상 일정치 않기 때문에.
루시펠의 말에 의하면 그저 조건만 잘 맞아떨어지면 차원종들 중 고위급 개체들은 영원에 가까운 수명을 가졌다는 소리였다. 물론 루시펠은 ‘더러’ 라는 말을 앞에 붙였다. 무조건 인류에서 지정한 고위급 차원종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영원히 산다는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쓰러뜨릴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아예 쓰러뜨리지 못한다는 전제의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건 이때의 서지수에게는 아직 조금 많이 두려웠다.
그리고 루시펠의 차분한 설명을 들은 서지수는 이걸 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럼…… 당신도 그래?”
여기서 말한 저의는 ‘당신도 그들처럼 영원히 살 수 있어?’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루시펠은 이상하게도 이런 부분은 예리하게 잘 알아차리는 편이었다.
-인류가 ‘빛’을 지니고 있는 한, 나는 영원히 존재할 터.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물어보는 거지, 서지수?
“그냥…….”
서지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결국 실토했다.
“언젠가 내가 죽어서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당신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겠구나 싶어서.”
-…….
“그럼 그 때의 당신은 계속 날 기억해줄까, 라는 생각을 문득 해버리고 말았어.”
-서지수.
루시펠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에 울려 퍼졌다. 그가 위로해주길 바랬건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서지수에게 있어서 상당히 차갑게만 들렸다.
-벌써부터 그런 걸 생각하기에는 아직 들이닥치지 않은 일일뿐이다.
루시펠의 저 선고는 그런 일, 결국 자신만 골똘하게 생각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서지수는 조금 허망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극단적인 기대 수명의 차이는 아주 당연하지만 이런 갈등(?) 요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중에 저렇게 수명 차이로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선배로서 충고해줘야겠다. 뭐,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은 서지수 자신 혼자뿐일 테지만. 살짝 엉뚱하게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지만
“그 대답 또한 당신답다면 당신답네. 그런데 사람은 가끔씩 그런 생각도 하고 살아. 단적인 예로, 나는 당신보다 오래 살지 못해. 제한된 수명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그게 당연한 거야. 당연하다는 서지수의 말에 루시펠은 조금 움찔거렸다. 루시펠은 또 나름의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것이 앞선 것과 달리 조금 부정적인 쪽으로 작용한 거긴 했지만.
“훗날, 그런 날이 온다면 당신이 나를 계속 기억해주면 좋겠어. 서지수라고 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 말이야.”
-……정말 기억하기만 하면 되나? 그것뿐인가?
“응.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그래서 지금 기도하는 법을 당신에게 설명해주고 있잖아.”
어느 사이 다시 합장하고 있는 서지수의 손을 본 루시펠은 방금 전 서지수가 말해줬던 단어를 어렵사리 떠올렸다. 아무래도 차원종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누군가를 추모한다는 것에 대한 관념이 희박한 탓이었으리라.
-기도하는 법?
“응. 나는 지금 이 도시를 훌륭히 지켜낸 동료들에게 진심을 다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거야.”
지금 서지수와 루시펠이 서 있는 곳은 분명 한때는 번성했을 것이 분명한, 허나 차원종의 침공으로 인해 기어코 폐허가 되어버린 현대 문물의 어느 도시였다. 도시의 이름이 뭐였더라…… 이 도시로 오기 전에 베로니카한테 분명하게 전해 들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외국어이기도 하고, 발음 자체도 생소한 모양이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차원종이 한 번 훑고 간 자리의 상흔은 어느 나라의 도시든지 간에 거의 비슷했다. 처참하게 무너진 건문들의 잔해, 그리고 그 앞에 뿌려져 있는 꽃들. 꽃들은 삭막하기만 한 도시의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이곳저곳에 피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지수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자신의 동료가, 이곳에 존재했었음을 말이다.
한편, 루시펠은 서지수의 말에서 전혀 다른 부분을 짚고 있었다.
-일면식이 있었던 자들인가?
“아니.”
-그럼에도 서지수, 너는 그들을 ‘기억’하고 싶은 건가?
“당연하지. 당신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말이지, 절대 단순하지 않거든.”
서지수는 건물 잔해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형형색색의 꽃다발 뭉치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너희 차원종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상관없는, 아무런 관계도 아닌 사람들이겠지만 우리 인류는 달라. 그들 중에는 분명히 이런 전장을 겪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전장에 섰던 이유는 지키고 싶었던 게 있었기 때문이겠지.”
-지키고 싶었던 것이라…….
“당신하고 똑같아.”
서지수는 제법 날카롭게 그 부분을 지적했다. 인류가 명명한 위상력이라는 힘. 그것이 루시펠이라고 하는 존재가 자신의 몸을 찢어내면서까지 주는 힘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서지수는 싸울 수 있는 힘을 줘서 고맙다는 마음보다는 경악하기만 했다. 그렇게 해서까지 우리를, ‘인류’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한없이 자신만을 희생할 뿐인데 후회 따위는 일절 없는 듯한 그 깨끗한 의지가. 그리고 그 의지를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다는 것에서 서지수는 루시펠을 처음으로 ‘인류’와는 다른 존재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당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을 기억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을 인류가 모르는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차원종의 세상에서보다도 더 복합적이고, 표현하는 방식 또한 가지각색일 것이다.
-너의 말을 듣고 보니 우리 또한 훌륭한 전사를 기억하는 일이 아주 드문 건 아닌 것 같군.
단지, 인류와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직접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뿐. 애초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인류와 달리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것들이 적립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었던.
서지수의 친절한 설명을 다 듣고 나니 루시펠도 계속해서 기억하고 싶었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어머니. 아주 오랜만에 생각나는 존재였다.
그러는 한편, 또 한 가지 기묘한 감정에 흽싸였다.
서지수 또한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자신이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기억하고 싶었다.
그제야 루시펠은 서지수가 했던 말의 저의를 어렴풋하게나마 – 인류의 관점으로 – 알 수 있었다.
-누군가를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그런 의미로군.
“그래? 이제 이해했어?”
-서지수, 네가 말한 대로 아주 먼 훗날에 나만이 남겨져 있는 세상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널 기억하겠다. 내가 선택한 최강의 전사인 너를.
그 뒷말만 없었으면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소정의 목적은 달성한 거나 다름없으니 서지수는 그 부분은 넌지시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루시펠의 인간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앞선 발언들에 대한 서운함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루시펠은 – 서지수의 눈에만 보였지만 – 두 손을 모았다. 단순히 두 손을 손바닥이 마주보게끔 모은다는 건 아주 쉽게 따라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루시펠은 생전 처음 하는 행동인지라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러면 되는 건가?
이렇게 하는 게 정말로 맞는 건지 서지수에게 재차 확인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 그런 것이 확실했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런 루시펠을 향해 서지수는 오늘 처음으로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야기도 나눴던 적이 있었지…….’
그때를 회고하던 서지수는 조금은 슬퍼보였다. 그때의 루시펠은 아직은 좀 딱딱한, 구체적인 묘사를 굳이 하자면 이론만 답습한 실전에는 약한 그런 느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 서지수가 답답하면서 이것저것 다 알려줬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헤어지기 직전의 루시펠은 조금 감정 표현이 서툰 인간과 거의 비슷해졌었다.
‘결국 내가 그이보다 더 오래 살게 되었다는 게…….’
루시펠이 영원을 사는 존재라는 걸 알았을 때에는 패기 있게 저런 고백을 하였다만, 역시 사람 사는 일은 모르는 법인가 보다.
그이를 더 이상 관측할 수 없게 된 이 세상이, 아주 조금은 쓸쓸해지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이가 지키고 싶은 세상과 사람들은, 서지수한테도 일맥상 통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에 했던 가정처럼 된다고 해도 – 서지수가 먼저 루시펠의 곁을 떠나게 된다는 전제 – 루시펠은 지금의 서지수와 똑같이 이 세상을 지켰을 것이다.
‘결국 끝까지 바보 같기만 한 남자였어.’
세상 나이를 조금 더 먹은 지금의 서지수가 보기엔 호구도 그런 호구가 없었다. 퍼주는 것에만 익숙한 남자. 욕망이라는 조각을 전혀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수도승 같기만 한 남자. 하지만 그렇다고 열망이 아예 없지는 않았던 남자.
그런 남자를 서지수는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를 사랑하게 된 마음은, 그런 희생만 하는 사람의 끝이 결국은 불행보다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제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만…….
그냥 첫눈에 반했던 건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자신도 모를 때가 많으니까.
사실 그때 루시펠에게 미처 질문을 던지지 못한 것이 있었다.
사후 세계. 흔히 말하는 천국을 믿냐는 질문이었다. 그럼 루시펠은 이렇게 되묻겠지. 천국은 뭐지? 특유의 잔잔한 그 얼굴로 말이다. 그 얼굴이 아직도 생경해서 서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혼자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옆에 누군가가 있었으면 갑자기 웃어버리는 서지수를 무척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봤을 것이다.
만약이긴 하지만, 믿고 있으면 좋겠다.
왜냐면 나는 믿거든.
그래서 나중에 꼭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은 아니더라도, 그러한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역시, 다시 만나게 된다면 조금 쑥스러울려나.”
이유는 그러했다.
그와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서지수는 물론, 어쩌면 루시펠도 은연중에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0여 년 전, 남극에서 운명의 문을 지켜야 한다면서 갑작스러운 이별을 하게 되었을 때도 둘은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 그냥 상황이 급박하니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한 거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테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거였다고 한다면 서지수는 지금 계속해서 그 순간만을 생각하며 후회만 곱씹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후회보다는 역시 그 사람답다, 라는 생각만 드는 것을 본다면.
그래서 훗날 언젠가, 그를 다시 만난다면 서지수는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낼 것이다.
안녕, 루시펠.
그럼 그때, 그는 어떤 얼굴로 서지수를 맞이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