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티스트 사제 지팡이
WWHEBB 2015-10-04 0
사진 속에는 보일 듯 말 듯 웃음을 띤 서유리가 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아주 살짝 드러났다. 온 치아가 다 보이도록 크게 웃어재끼는 모습은 여기 없었다. 컬티스트 사제의 지팡이가 10년 후로 보내버린 유리 가족의 사진을 캐롤리엘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반복된 잔해 연구로 복구법을 찾아냈음에도, 그녀는 이 특별한 사진을 포기하기 힘들었다. 스물여덟 살의 서유리는, 둔감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세하는 물론, 동성인 그녀 자신조차도 가슴 뛰게 하는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 있었다.
클로저들이 탐사를 마치고 돌아왔다는 신호가 들어왔다. 캐롤리엘은 사진을 책상 한 구석에 밀어놓고 연구실에서 나왔다. 워프 게이트 방향에서 서유리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언니, 다녀왔어요.”
서유리가 큰 소리로 외치면서 대뜸 뛰기 시작했다. 티끌 없는 생기가 여름 한낮의 열기처럼 주변을 가득 메웠다.
“오, 어서 와요. 다친 곳은 없나요?”
“네. 아무 일 없었어요. 엄청 쉽던데요? 키텐 잔해도 다 모아왔어요.”
“Good- 드디어 컬티스트 사제 지팡이를 완성할 수 있겠네요. 잠시 안으로 들어갈까요?”
캐롤리엘은, 까다로운 실험은 아니었는지, 서유리가 대접받은 커피를 다 비우기도 전에 연구실에서 나왔다.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이전 실험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검붉은 빛이 맴돌고 있었다.
“와, 다 된 거예요? 멋지다!”
“다 유리 양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서유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는지 캐롤리엘에게 물었다.
“언니, 그럼 제 사진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거예요?”
캐롤리엘로서는 어느 정도 예상하던 질문이었다. 그녀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오, 미안해요. 그 사진은 실험 중에 소실됐답니다. 사과할게요.”
“괜찮아요. 안 그래도 그 사진, 조금, 헤헤.”
서유리가 멋쩍은 표정으로 앞머리를 긁적였다. 캐롤리엘이 무슨 말을 더 꺼낼지 고민하고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알람이 울렸다.
*
“그 빛깔은 영 불길하군.”
“아저씨가 저번에 날려먹은 12강……,”
“어허, 동생. 거기까지. 나는 동생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
캐롤리엘이 손에 쥔 지팡이 주의로 검은양 팀 전원이 모였다. 지팡이를 휘감은 검붉은 빛이 일견 불길해 보이기도 했다. 캐롤리엘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지팡이로 비어있는 반대편 손바닥을 툭툭 내려쳤다.
“시작해 볼까요? 실험 대상은 여기 있는 외부 차원의 물질이에요.”
흰 색의, 문어 다리와 비슷한 생김새를 한 손바닥 크기의 무언가가 플레인 게이트의 회청색 바닥을 기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채 애써 옷깃을 여미는 이빛나를 보면, 누구나 그것이 차원간 물질 변환기-통돌이 MK.III가 뱉어낸 또 하나의 차원 폐기물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Umm, 이상하게 생긴 건 사실이지만 분명 살아있어요. 노화의 영향도 받게 되겠지요. 여기 이 컨트롤러로, 노화 단계를, 조금, 만.”
캐롤리엘이 꺼내든 기계식 컨트롤러는 지팡이를 둘러싼 기운 이상으로 두려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접착도 조립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플라스틱 조각으로 구색만 맞춘 구식 다이얼 컨트롤러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붕괴 직전에 있었다. 자리에 모인 요원들은 물론 제작자 본인조차 장치를 보며 민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지팡이 안정화에 집중하느라 컨트롤러까지는 미처 신경을 못 썼네요, 하하…….”
급기야 툭, 소리와 함께 다이얼이 떨어져 나갔다. 모두가 이루 말할 데 없이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캐롤리엘은 입꼬리를 ‘ㅅ’자 모양으로 모으더니, 이내 제 역할을 못하게 된 컨트롤러를 저만치 던져버렸다.
“단순한 노화 실험이니 세밀한 조정까지는 필요 없을 거예요. 저런 기계 장치는, 흥, 정도연 박사님이나 쓰시라고 하죠.”
개인적인 감정이 가득 담긴 말이 튀어나왔다. 별 관심 없다는 태도로 게임에 열중하던 이세하가 멀찍이 물러나 게임기의 메모리 스틱을 빼냈다. 계속 뒷걸음질쳐 거의 워프 게이트 근처까지 간 이세하에게 이슬비가 소리쳤다.
“나가면, 게임기 부숴버릴 거야.”
그 말에 이세하는, 차마 내부 차원으로 워프하지는 못했지만, 여차하면 바로 게이트에 뛰어들 기세로 엉거주춤 섰다. 이슬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세하의 태도가 평소 그의 행실처럼 얼토당토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같은 실험 때문에 게임 데이터를 날려먹은 적이 있지 않았던가. 그녀도 실험이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사 이성적이고자 노력하는 이슬비에게도 점점 검은빛을 더해가는 지팡이의 아우라와 부서진 컨트롤러의 조합은 적잖이 불길해 보였던 것이다.
불안한 얼굴의 이슬비와 저 멀리 떨어진 이세하, 콧잔등에 맺힌 땀 때문에 흘러내리는 선글래스를 거듭 치켜올리는 제이, 갑작스런 라이벌 의식으로 과열된 캐롤리엘까지 모두의 시선이 지팡이 끝과 땅바닥의 괴생물체에게 쏠린 가운데,
“재미있을 것 같아요 누나. 이 사냥감은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요?”
“핫!”
미스틸테인이 불씨를 당겼다. 캐롤리엘은 이상한 기합을 넣으면서 물체를 지팡이로 직접 후려쳤다.
“그것 참, 사용법 한번 원시적이구만.”
기가 찬 듯한 제이의 탄식이 미처 퍼지기도 전에, 지팡이 반경 넓은 범위가 흰 빛으로 가득 찼다. 쓰기 전까지는 까맣더니 왜 쓰고 나니까 하얘지는 건데, 따위의 말이 들리는 걸 보니 세하도 빠져나가지 못했구나, 라고 캐롤리엘은 생각했다.
*
아무 전조도 없이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이 있다. 양치질 중 자신도 모르게 윗어금니만을 서른 번 마흔 번 문질렀을 때, 별 감상 없이 내뱉던 단어의 발음이 몹시 기이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니면 앉은 자리에서 목도리를 수백 코 넘게 짜버렸을 때, 등. 그런 상황의 일반적인 경향은, 대게 의식을 잃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재각성이 이뤄진다는 것과, 앞뒤 상황과 전혀 연관 없는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진다는 것 정도가 있겠다. 캐롤리엘이 또렷하지 않은, 그러나 몹시 불쾌한 기억에서 깨어날 즈음 모여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의식을 되찾았다. 제이가 선글래스까지 벗어던지고 아이들의 안부를 살피고 있었다.
“야, 서유리! 아저씨, 유리가 아직…….”
이슬비의 외침에 캐롤리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리가 깨어나지 못했다고? 유리만? 캐롤리엘은 기억을 더듬었다. 첫 번째 지팡이 실험에서 지팡이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던 요원은 서유리였다. 자신의 미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게 되는 것은, 어쩌면 퍽 심각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잠시 끊어내고, 그녀는 가지고 있던 응급 약품을 꺼냈다.
걱정스런 눈길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가장 처음 이상을 눈치 챈 사람은 이슬비였다. 같은 여자로서 평소에도 서유리의 외모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부분일지도 모른다.
“캐롤 언니, 유리 얼굴이 조금 변하지 않았나요?”
그제야 캐롤리엘은 서유리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굴 구석구석의 이목구비는 이전보다 훨씬 균형 잡혀 있었다. 성장기 소녀 특유의 피부 질환도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무엇보다,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캐롤리엘 자신이 알고 있던 서유리에는 비할 바 없는 성숙함이 느껴졌다.
“누나, 그때 사진에서 봤던 그 유리랑 똑같은 것 같지 않아요?”
이세하의 말에 캐롤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사제의 지팡이는 사진 속의 서유리를 넘어 진짜 서유리마저도 10년 뒤로 보내버렸던 것이다.
스물여덟 살의 서유리는, 무척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