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김유정편: 좋은 관리요원(1)-
Maintain 2015-07-25 7
시간이란 건 참 신기한 존재다. 짧은 휴식 시간은 그렇게 빨리 지나갈 수가 없는데, 반대로 긴 휴식 시간은 그렇게 느리게 갈 수가 없으니. 좀 쉬게 해달라, 쉬게 해 달라 매일같이 노래를 부르기는 했지만, 진짜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니 좀이 쑤셔서 견디기 힘들었다.
유정 씨 말마따나,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거라고 생각한다. 한 달간의 병가를 받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건만, 지금도 아직 눈만 뜨면 자동으로 요원복에 손이 가게 된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완전무장을 한 채 문을 나서려고 하고 있고. 이래서야 원, 병가를 받은 의미가 없잖아.
한 달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라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생처럼 게임을 하려고 해도 요즘 게임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대장이나 막내처럼 공부를 하려고 해도 이렇게 굳어버린 머리로 뭐 공부할 거리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유리처럼 친구들을 불러서 논다? 하하, 그건 꿈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다. 나는 이렇다 할 만한 친구도 없고, 또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 봐야 몇 되지도 않는 데다 다들 바쁜걸.
이렇게 선택지가 별로 없으니, 결국 남는 건 내 스스로가 해답을 찾는 것뿐. 그래서, 바빴을 때 하지 못했던 걸 이것저것 하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로드워크를 하는 건 조금은 힘들었지만 재미는 있었다. 몸이 아프다고 아예 놀고만 있으면 감도 무뎌지고 건강에도 좋지 못하니까. 한강변을 따라 돌 때마다, 그동안 여기서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구나.
새로운 건강차 레시피를 개발할 때마다 내가 어디의 바텐더라도 된 기분이었다. 새로운 재료로 아예 새 건강차를 만든다거나 기존의 건강차들을 섞어서 효과가 더 좋아지는 건강차를 만든다던가. 솔직히 맛이야 장담 못하겠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기분이랄까. 이걸 애들이 마시고 건강해질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보람찰 수가 없다.
가끔은 내가 아는 사람들을 보러 나가기도 했다. 은이나 채민우 경정에게 수고한다며 주스를 사다 주기도 하고, 빛나가 통돌이를 돌리다가 정체불명의 새까맣고 여기저기 촉수가 돋아난 물질에게 습격당하는 걸 보는 건 꽤나 눈요기가 됐다. 소영이네 가게 분식은 여전히 맛있었고, 김가면이가 불철주야 장사하는 그 모습에는 경외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지금처럼 아이들을 보러 가는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 다들 임무 때문에 피곤할 텐데, 그래도 아이들은 반갑다고 인사해 주며 날 환영해 줬다. 손에 한가득 먹을 걸 사 갖고 온 것도 한 몫 했겠지만.
"그래서 아저씨. 요즘 몸은 좀 어때요?"
햄버거를 먹으며 동생이 내게 물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한 손에는 게임기를 놓치지 않는 그 집중력이 대단하다.
"글쎄. 아직 잘 모르겠구나. 그래도 약은 꾸준히 먹고 있으니, 괜찮아지지 않을까?"
"제발 그래 주세요. 엄마가 이런 말씀 전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빨리 나으렴, 혹시 또 무리해서 쓰러졌담 봐, 내가 가만 두나.'...라고요."
"...그, 그래. 얼른 어떻게 해서든 나아야겠구나."
"그리고 미안하다고도 전해 달라 하셨어요. 아픈데도 찾아가지 못해서요."
"그렇구나... 누님께도 괜찮다고 전해 줘. 그리고 하루빨리 낫겠다고 말이지. ...쿨럭."
...또다. 이놈의 몸은 대체 참을성이란 걸 모르는 걸까. 손바닥을 펼치자, 예의 그 거무튀튀한 그것이 손바닥 한가득 묻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색이 약간은 맑아졌다는 걸까.
"아, 아저씨! 괜찮으세요?!"
대장이 그걸 보더니 기겁을 하며 내 손바닥과 입을 닦아 줬다. 이렇게까지 안절부절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군.
"너무 걱정하지 마... 이래뵈도 점점 낫고 있으니까."
"거짓말 마세요! 이게 낫고 있는 거라고요? 그걸 누가 믿어요!"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그러니 그렇게 호들갑 떨 필요 없어. 알겠지...?"
분위기가 영 좋아지지 않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조용하게 대장을 타일렀고, 대장은 그런 날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유리는...?"
조금 상황이 진정되고 나서, 나는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이렇게 먹을 게 있는 곳에는 언제나 번개같이 나타나던 녀석인데, 왜 아까부터 코빼기도 안 비치는 거지?
"유리요? 아까 아저씨 오시기 전에 유정이 누나랑 같이 나갔는데요..."
동생이 뭔가 불안한 거라도 잇는 건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유정 씨하고? 왜?"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째 걔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 영 표정이 좋지 못해서 나갔는데..."
"그럼... 지금 그 둘이 어딨는지는 모르고?"
"예... 아오, 저도 지금 불안해 죽겠어요. 뭔가 일이라도 터질 거 같아서..."
"그렇단 말이지..."
이렇게까지 말이 나오면 나도 가만히 여기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전부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으니 벌어진 일 아닌가. 나는 마시던 녹즙을 마저 입에 털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시는 거에요?"
"이대로 앉아만 있을 수는 없잖아. 무슨 일 터지기 전에 말려야지."
"걔가 어디 갔는지나 아시고요?"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대충 짐작가는 곳은 있어. 걱정하지 말고, 사 온 거 마저 먹고 있으라고.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 떡볶이가 식기 전에, 유리랑 유정 씨를 데리고 오겠어."
마지막엔 나름 유머라고, 며칠 전에 읽었던 삼국지에 나왔던 대사를 인용했다. 그렇게 자리를 뜨려고 하는 나를 부르는 손이 있었다.
"음? 왜 그래 막내야."
"저기...아저씨..."
막내가 이런 눈으로 날 바라보면 멈추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자, 막내는 내게 뭔가를 건네줬다.
"뭐니 이게?"
"제가 만든 거에요. 가지고 있으면 건강해진대요."
한 손에 들어갈 만큼 작은 크기. 자세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양의 브로치였다. 이거...
"맨드라미?"
"책에서 봤는데요, 맨드라미의 꽃말은 건강이래요. 그걸 가지고 있으면 아저씨도 곧 건강해지실 거에요."
"...하하, 고맙구나 막내야."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고. 나는 막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다음, 밖으로 나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정 씨와 유리가 갔을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지. 나는 데이비드 형의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아, 제이 요원님."
입구에는 전의 그 경비요원이 서 있었다. 꼭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음.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눈치인데?"
"예...그게 말입니다, 실은 아까 전에 서유리 요원님과 김유정 관리요원님이 들어가셨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얼핏 요원님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서..."
"내 얘기? 뭐지? 혹시 사랑의 쟁탈전?"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쯤 두분 다 지부장님 사무실에 계실 테니, 가서 뵙는 게 어떠신지? 아, 허가는 따로 받지 않겠습니다. 제이 요원님은 신뢰할 만한 분이시니까요."
"음, 알겠어. 고맙군."
"별 거 아닙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건강, 잘 챙기십시오."
마지막의 저 말은, 그 나름대로 나를 위로해 주는 거겠지. 완전히 기계같은 녀석은 아니었군. 손을 흔들어 주며, 나는 사무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생각했다. 대체 나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까. 진짜로 그게 사랑의 쟁탈전 얘기라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이야 한없이 0에 수렴하겠지. 그리고 아직 유리는 고등학생이잖아? 미성년자라고? 은이나 민우 녀석한테 은팔찌 선물받는 건 사양이다.
뭐... 사실 대충 무슨 얘기가 오고갔을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다만 그 가능성이 틀리기만을 바랄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좋아, 한 번 가 볼까...
-쾅!
모퉁이를 돌자마자, 세차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움찔해서 뭐지? 하고 긴장하고 있자니, 멀리서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인다. 긴 흑발에, 스타일 좋게 키도 큰 여자아이. 누군지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쪽으로 달려오다가, 나를 보고서는 내 앞에서 멈춰섰다.
"어, 아, ...안녕."
"......"
대체 뭐라고 말을 해줘야 했던 걸까? 유리의 그런 표정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 박력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를 빤히 노려보던 유리는, 그대로 아무 말도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
무슨 일이지? 왜 유리가 그런 표정으로 날 쳐다본 걸까? 마치...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 밑이 잔뜩 새빨개져서.
아니, 사실 대충 짐작은 간다. 하지만 막상 직접 그런 표정을 보니, 예상외로 박력이 엄청나서 말이야. 한 마디로, 쫄았다는 거지.
아무튼 이거... 살짝 골치가 아파질 것 같은 조짐이 보인다. 머리를 긁으며 뒤를 돌자,
"제이 씨..."
누군가를 쫒아가기라도 하려는 듯, 다급한 표정을 짓는 한 명이 있었다.
"여, 오랜만이야, 유정 씨."
"제이 씨가 왜 여기에..."
"나라고 여기 있지 말라는 법 있어? 혹시나 해서 와 봤더니... 뭐, 마침 잘 됐군.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지, 유정 씨."
할 얘기는 많다고, 눈짓으로 유정 씨에게 그렇게 말하자, 유정 씨는 불안감에 살짝 흔들리는 눈으로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 옥상. 지부장님께서 쓰시는 사무실이라고, 옥상에도 이것저것 시설들이 많았다. 신기하구만. 옥상에 산책로라니... 거기에 몇 가지 운동기구와 음료 자판기, 그리고 전망대 비슷하게 신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좌석까지 구비되어 있다. 야경 하나는 끝내주겠는데.
"제이 씨, 하실 말씀이란 건...?"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유정 씨가 쭈뼛대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런 유정 씨에게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아준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일주일에 한 개피 허락된 기회, 오늘 써버려야겠군. 나는 담배 연기를 하늘로 뿜은 후, 말을 이었다.
예,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글 쓸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기분이군요. 빨리 하던 일이 끝나야 할 텐데요. 연재가 늦어지는 점, 미리 사과드립니다.
그래서 글을 좀 길게 썼었는데, 이걸 그대로 등록하려니 너무 내용이 길어져서 읽으시는 분들께 부담이 될 거 같더군요. 그래서 이번 편은 두 편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아직 완성이 덜 된 2편은 조만간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가능하면 내일중으로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밖에 비가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다들 비 맞지 않게 조심하시고, 오늘도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