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신부
외국인코스프레 2015-05-17 2
2020년 5월 15일.
세간에선 스승의 날이라는 기념일로 인해 들떠있을 시간이겠지만, 초급 클로저 팀인 검은양은 여느 때와 같이 조용했다. 여지없이 임무로 시간을 보내었기 때문이었다.
검은양 팀이 학교에서 지낼 때의 선생님께는 각자 선물을 주었고 그뿐, 그들에게 있어서 스승의 날은 평범하게 흘러갈 하루에 불과했다.
한 소식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웨딩 화보 촬영이요?”
가장 먼저 소식을 듣고 반응을 보인 것은, 검은양 팀의 관리요원인 유정이었다. 장발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반문하는 그녀에게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검은양 팀의 눈앞에는, 평균을 훨씬 웃도는 허리둘레를 가진 남자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네, 그래요. 초급 클로저들로 이루어졌음에도 강남을 구해내는 등 많은 활약을 선보이고 있는 검은양 팀에게 특별 요청된 일이랍니다. 이름하야 5월의 신부 계획!”
유정의 말에 의기양양하게 대답한 남자가, 마지막을 한껏 강조함으로써 말을 끝냈다. 마지막 멘트는 남자가 즉석으로 지은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검은양 멤버중 몇은 ‘네이밍 센스 하고는’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유니온의 감시요원이었으나 영상 촬영담당으로 좌천된 남자, 박심현이 갑작스레 들고 온 소식. 일순 조용해진 방 안에서, 앳된 목소리가 다시금 대화를 열었다.
“근데, 왜 5월의 신부라는 거죠?”
“후후, 좋은 질문이에요 서유리양.”
손을 뻗어 올린 유리의 질문에,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자신의 안경을 올려 쓰는 박심현. 이내 평소의 그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유창함으로, 유리의 질문에 답한다.
“정확히 나온 얘기는 없지만 가장 유력한 유래로는 예전 신화에서, 술을 관장하는 신인 디오니소스가 매년 겨울에 죽었다가 부활하는 시기가 5월이라고 한답니다. 이런 생명의 태동의 이미지를 주는 주신을 기리기 위해, 마을을 대표하는 처녀와 총각을 뽑는 둥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죠. 지금 말하는 5월의 신부는 그 유래라고 한답니다.”
“헤에…그렇군요.”
심현의 말에 납득하는 유리. 사실 장문과 역사는 일단 거르고 보는 그녀의 머리엔 제대로 된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친다. 그런 유리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웃음을 지은 박심현이, 다시금 주변을 돌아본다.
“그렇게 돼서, 화보 촬영에 참여해주실 남녀 한 쌍이 필요하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무언가를 기다리듯 다시금 말을 끊는 심현. 그런 그를 보며 삼십대인 제이나, 고등학생인 세하나, 어린 미스틸은 각기 그게 뭐 어쨌냐는 둥 고개를 갸웃거리지만, 정작 다른 쪽은 사정이 달랐다.
“그, 그거 제한이 있는 건가요?”
한 발짝 전진하며, 다급한 기색으로 말한 것은 유정이었다. 그에 그녀를 제외한 다수가 의외라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지만, 슬비만은 유정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혼자 납득하였다.
박심현의 제안은 남자들에겐 그저 그런 행사일지는 몰라도, 여성에겐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자들은 평생에 한 번만 입는 웨딩드레스에 꿈같은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실제로 꿈이든 뭐든 상관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느낀다면야.
그러나 박심현은 그런 유정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듯, 무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능, 촬영 자체는 검은양 팀에게 요청이 들어왔지만, 정작 참여할 역은 이미 정해져 있거든요.”
“저, 정해져 있다고요?”
눈이 화등잔만 해진 유정의 말에 답하듯, 그녀에게서 떨어진 박심현의 시선은 두 명의 남녀를 향했다.
“네. 신랑 역은 이세하군이, 신부 역은 서유리양이 했으면 좋겠다는 상부의 요청이 있었거든요.”
“네? 저요?”
“나, 나라고요?!”
박심현의 말에, 놀람과 의아함을 섞은 반응을 보이는 세하와 유리. 그런 그들에게 긍정의 표시를 나타낸 박심현이, 이내 낮은 한숨과 함께 가만히 서 있던 슬비를 슬쩍 보며 말한다.
“저로서는 이슬비양이 그 역을 맡는 것을 기대했지만요. 작은…하여튼 그것도 그 나름의 수요가 있는데 말이죠, 하여튼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모른다니…”
“박심현 요원님, 아무리 요원님이라 해도 그 이상의 발언은 용납하지 않겠어요.”
“아, 알겠다능…아니, 알겠어요….”
서슬이 퍼렇게 선 채 심현을 노려보는 슬비. 그런 그녀를 보니, 여기서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간 근처에서 운행하던 버스라도 갖다 박을 기세였기에 곧바로 입을 다무는 심현이었다.
이내 화제를 바꾸듯, 몇 번 헛기침을 한 심현이 다시금 방금 지목했던 두 명을 돌아본다.
“그렇게 됐는데, 두 분은 촬영에 협조하실 건가요?”
“그런데, 그 촬영은 언제 하는 거죠?”
“네, 촬영은 이번 주 일요일인 5월 17일에 할 예정이랍니다.
여전히 시선은 게임기에 향한 채 질문하는 세하였고, 재빨리 심현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 반응을 보인 것은, 옆에서 가만히 듣던 유리였다.
“5월 17일…이요?”
“네. 주말이라 좀 꺼리겠지만, 괜찮을까요?”
유리의 반응이 심상찮은지, 심현이 조심스럽게 의사를 물어봤다. 유리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5월 17일은, 유리의 생일이었으니까.
시간상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어쩐지 딱 맞아떨어지는 그 우연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는 유리였다. 그런 유리에게 다시금 대답을 요구하는 심현이었고, 딴 생각을 하던 유리가 그에 황급히 대답한다.
“네, 네? 전 상관없는데!”
“…아니, 난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유리는 긍정적인 대답을 한 데 비해, 얼굴에 귀찮다고 써 놓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세하였다. 그런 그를 보고는 난처해하는 심현이었지만, 이내 안경을 고쳐 쓴 그가 눈에 이채를 띠며 말한다.
“그런가요? 아쉽게 됐네요. 업무로 인한 추가 수당은 물론, 잘 되면 보너스까지 지급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자, 잠깐, 잠깐만요!”
혼잣말하듯 내뱉은 박심현이지만, 그의 말 속에 있던 특정 단어들을 놓치지 않은 유리가 재빨리 소리쳤다. 이내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자 당황한 유리가, 그녀답지 않은 곁눈질로 누군가를 돌아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엔, 가만히 앉아 있던 제이가 보였다.
세하가 하기 싫다면, 제이가 신랑 역을 맡을 수는 없을까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순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유리. 언제부턴가 자신도 모르게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것을 눈치 챈 사람은 극소수였고 그 중에 제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곤란한데요, 신랑 역이 있어야 화보 촬영이 진행될 수 있을 텐데. 이세하군, 정말 안 하실 건가요?”
“으음….”
그렇게 심현과 세하가 대화하는 사이, 유리가 다시금 제이를 본다. 당연히 입 밖으로 자신의 생각을 꺼낼 수는 없었기에, ‘참여해주세요!’ 하는 심정을 담은 눈빛을 팍팍 보내었다.
자신의 생일날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웨딩 화보 촬영이라니,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이는 비단 유리뿐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바라는 이벤트일 것이다.
활발하고 거리낌 없는 성격에 간과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유리 역시 한창인 소녀였으니까.
그리고 제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만든 건강쥬스를 들이킴으로써 유리의 바람에 대한 대답을 보내었다.
‘…….’
눈에 띠게 얼굴을 찌푸린 유리가, 자신의 옆에 있던 세하의 팔을 빠르게 잡아챈다.
“세하야! 하자, 응?”
“뭐, 뭐야. 너까지 왜 이래?”
“이런 기회 좀처럼 없잖아! 돈도 벌고 추억도 만들고! 일석이조 아냐?!”
그렇게 말하면서, 세하에게 억지로 팔짱을 끼는 유리였다. 마음이 착잡한 상태였기에 본인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두 개의 흉기에 팔을 압박당하는 세하가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대로 있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았기에, 빠르게 유리의 팔을 뿌리친 세하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달라붙어.”
“그, 그래…결정한 거지?”
세하의 대답이 떨어지자,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시금 제이를 흘끗 보는 유리였지만 여전히 제이는 묵묵부답이었다. 그에 다시금 눈살을 찌푸린 유리가, 매몰차게 시선을 돌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싫으면 말아라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유정을 돌아본다. 유리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정이 제이에게 어떤 심정을 품고 있음을. 그것이 자신과 같은 감정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 제이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방금과 같이, 유정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 안심한 유리가, 세하와 함께 심현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한편, 유정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세하가 촬영을 내키지 않아하고, 유리 또한 제이가 하기를 바라는 눈치여서 어떻게 될까 가슴을 졸였지만 다행히 제이는 이 일에 대해선 전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작 웨딩 촬영일 뿐인데 어떠냐고 묻는다면, 유정은 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여자의 자존심? 그 정도일까.
여하튼 상황은 좋게 풀린 것 같았고, 이에 대해 유정이 조급해할 이유는 없었다. 어째선지 자신을 빤히 보는 슬비의 눈빛이 거슬렸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심현의 설명을 듣고 있는 유리였다.
여전했다. 여전히 활발하고 곧잘 웃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신경이 쓰였다. 유정 또한 알고 있다, 유리가 제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그렇기 때문일까, 평소와 같아 보이는 모습임에도 분명 달라보였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기분이 들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 날의 일정이 끝났다.
5월 17일 일요일, 아침.
다섯 명이 둘러싼 테이블의 한 쪽에 위치한 유리가, 자신의 앞에 놓여 진 케이크의 촛불을 힘 있게 불어 꺼뜨렸다. 요란한 폭죽 소리와 함께, 커다란 거실을 가득 메울 박수 소리가 퍼져 나갔다.
박수소리가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현재 탈모가 진행 중인 유리의 아버지였다.
“생일 축하한다, 우리 이쁜 딸!”
“아이 참, 아빠도!”
나이든 관계든 다 내팽개친 채 소리치며 유리를 껴안으려 하는 아버지. 그에 쑥스러워하며 몸을 내빼는 유리였다. 유리의 어머니는 다소곳이 앉은 채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 유리야.”
“네, 엄마. 그리고 다들 정말 고마워요! 아빠는 좀 떨어지고요!!”
그렇게 아버지와 딸이 한바탕 수선을 떨고 있을 때, 나머지 두 가족이 유리에게로 다가왔다. 유리의 두 동생이, 포장된 상자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줌…아니 누나, 생일 축하해. 이거…”
“가, 같이 준비했어.”
“오, 너희들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종이를 보니, 익숙한 그림체가 보였다. 단번에 그 그림을 알아낸 유리가, 해맑게 웃으며 그림을 가리켰다.
“아하하! 이거 나야? 잘 그렸네!”
유리의 말에, 동생들이 수줍은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동생들의 머리를 힘 있게 쓰다듬고는, 양 팔 가득 껴안는다.
“그래, 그래. 고마워, 우리 귀염둥이들~!”
“으응….”
“앞으로도 잘 부탁해, 누나.”
“근데 카레는 좀 안 했으면 좋겠어!”
“요 녀석들이?!”
그렇게 말하며 유리를 밀어내는 동생들. 그에 발끈한 유리가 동생들의 머리에 주먹 돌리기를 시전 한다. 일순 닭살 돋는 분위기가 연출되나 싶었지만, 그 한 마디로 다시금 평소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런 그들을 흐뭇해하며 보던 어머니가, 시계를 보고는 말한다.
“유리야, 슬슬 가야하지 않겠니? 오늘 약속이 있다고…”
“아차차, 맞네! 다들 빨리 먹자!!”
그에 흠칫한 유리가, 다시금 신의 자리에 앉는다.
일요일임에도 유리가 검은양 팀의 대기실로 온 것은, 촬영 장소가 이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웨딩 촬영이라는 점은 소탈한 그녀에게도 상당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문고리를 잡고 힘 있게 비틀었다.
그 순간, 불쑥 하고 모습을 드러낸 소년이 작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누나,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해, 유리야.”
미스틸의 말을 시작으로 유정의 축하가 이어지고, 근처에 있던 검은양 팀의 멤버들이 모여들었다. 갑작스런 연출에 당황하던 유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친다.
“너, 너희들?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네! 오늘이 생일이잖아요? 촬영 때문에 제대로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끝나고 파티도 할 거에요!!”
그렇게 말한 미스틸을 시작으로, 멤버들이 각자 선물을 전달했다. 어느새 놀라움은 기쁨으로 바뀌었고, 거듭 감사를 표하는 유리의 옆에 선물이 쌓여갔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제야 차이를 알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응? 제이 아저씨는?”
“…아저씨는 일이 있으셔서 잠시 자리를 비우셨어.”
유리의 물음에 답하며 다가온 세하가, 자신의 선물을 전해준다. 그에 유리가 고마움을 표하고, 그 때를 기다렸는지 어느새 나타난 박심현이 그 통통한 손으로 박수를 치며 신호를 보내었다.
“자, 시간이 다 되었다능! 어서 옷을 갈아입도록 해요!”
“아…네!”
심현의 알림에 황급히 대답한 유리가, 쌓여 있던 선물들을 들어 올렸다. 내용물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금은 일이 우선이기에 재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세하의 옆을 지나친 유리가, 어정쩡하게 서 있던 그를 보며 소리친다.
“자, 세하야! 어서 옷 갈아입으러 가자! 촬영해야지!!”
“어? 어어…그래.”
힘없는 대답에 의아해진 유리였지만, 곧바로 자리를 떠난다. 그 모습을 보던 세하가 뭔가 생각하는 듯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멀찍이 서 있던 유정을 돌아보았다.
“…이러면 되는 거죠?”
“그래.”
세하의 물음에 나직이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정이었다.
잠시 후, 조심스런 발걸음과 함께 유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유리의 모습을 본 모두가, 제각각의 반응으로 감탄했다.
“와, 누나 정말 예뻐요!”
“음. 정말 잘 어울려, 서유리.”
“이런 옷도 잘 소화해내는군요! 역시 굉장하다능!!”
그런 그들의 찬사에, 혀를 쏙 빼물며 쑥스러워하는 유리였다.
단정하면서도 포인트를 준 헤어에, 눈처럼 하얀 드레스는 치마가 펑퍼짐하지 않고 그녀의 활달한 성격을 나타내듯 앞이 트여 있었다. 그에 맞추어,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듯 분홍색 리본이 장식되어 있었다.
물론 단순히 옷이 날개라고 해서 반드시 좋아 보일수는 없는 법이다. 좋은 옷엔 좋은 옷걸이가 필요하듯, 유리의 앳된 미모가 그만큼 더 드레스를 빛나 보이게 하는 것이겠지.
말 그대로, 오늘의 주인공다운 모습이었다.
미스틸을 비롯한 몇 명이 호들갑을 떨어 제 풀에 창피해진 유리가, 이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본다. 함께 화보를 촬영할, 자신의 파트너를 찾기 위해서였다.
“응? 세하야, 넌 왜 안 갈아입었어?”
여전한 사복을 입고 있는 세하를 보고는 의아해하는 유리. 그런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는, 한 손만을 뻗어 유리의 뒤를 가리키는 세하였다.
그에 맞추어 유리가 자신의 뒤를 돌아보자, 이내 그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날 처음 본 제이의 모습은, 평소와 같은 복장이 아니라 턱시도를 맵시 있게 입은 새신랑과 같았다.
“에…아저씨가 왜 그걸 입고 있어요? 세하는…”
“…얘기 못 들었어? 아니, 뭐. 동생이 일이 있다고 해서 말이지. 부득이하게 내가 대타를 맡게 됐어.”
“대타…라고요?”
반문하는 유리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면목 없다는 듯 뺨을 긁적이는 제이.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미안하게 됐어, 동생. 마음에 안 들면 지금이라도 내가 건의해볼 테니…”
“아뇨!”
제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외침이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예상외의 반응에 화들짝 놀라는 제이. 그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재빨리 손을 뻗은 유리가 제이에게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어서 가요!”
“그, 그러지.”
거침없이 자신을 끌고 가는 유리에게, 별 저항 없이 끌려가는 제이였다.
가만히 그들을 보던 박심현이, 몸을 돌려서는 촬영을 준비하는 직원들에게 신호를 보내었다. 이제 시작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땅이 **라 한숨을 내쉬는 심현. 이내 고개를 든 그가,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유정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뒤로 물러선다.
그런 반응에 아랑곳 않고, 예의 미소와 함께 유정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박심현 담당자님. 제 무리한 부탁을 들어 주셔서.”
유정의 말에, 심현이 다시금 한숨을 쉬며 자신의 안경을 고쳐 썼다.
“하아…갑자기 그런 부탁을 하셔서 놀랐었다고요…예비용 샘플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네, 다행히 촬영에 지장은 없었네요.”
그렇게 말하며, 직원들과 함께 준비를 하고 있는 유리와 제이를 돌아보는 유정. 그런 그녀를 골똘히 보던 심현이, 살이 잡힌 머리를 갸웃거리며 질문한다.
“그런데 서유리양에게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는 거였나요? 파트너가 바뀌었다고…”
“…그 편이 나을 거라 생각되어서요.”
심현의 물음에 바로 대답한 유정이, 다시금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저 포근한 미소일지 모르나, 심현에게는 어딘지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목례하며 유정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박심현 요원님, 협조해주셔서 감사해요. 이것으로, 전에 경비로 피규어인지 뭔지를 구매 하셨던 일은 불문에 부쳐드릴게요.”
“아, 아하하…잘 부탁드립니다, 머엉….”
단칼에 심현의 얼을 빼놓은 유정이, 다시금 촬영 풍경을 돌아보았다.
이런 분위기였구나, 하고 살짝 감탄되었다.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촬영 모습을,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실제로 보니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확실히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아닌 두 명이 이곳에서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몰랐다. 이것이 후회할 일인지, 축하해줘야 할 일인지.
애초에 자신이 한 일 자체가 의문이었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걸까? 단순한 오지랖일까? 유리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아무리 갈등을 한다 한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었다.
심호흡 한 번, 고개는 꼿꼿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유정이, 다시금 두 명의 모습을 찬찬이 감상한다.
“네, 좋아요! 다음은 이 자세 부탁드릴게요! 서유리양, 표정 조금만 더 풀어주세요!! 제이 씨는 좀 더 부드러운 느낌으로! 네, 좋다능! 아, 아니…좋아요!!”
카메라 셔터가 요란스럽게 터지고 있는 사이에서, 새신랑 새신부 마냥 잘 차려 입은 제이와 유리가 한껏 자세를 잡고 있었다. 막상 해보니, 마냥 즐거운 추억이 되겠구나 싶지만은 않았다. 생각보다 제한이 많기도 하고,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이렇게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으니까.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어쩐지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기에 누구도 불만을 토하지는 않았다.
“…미안하게 됐어, 동생.”
“네?”
박심현의 요청에 맞추어 자세를 잡던 중, 슬쩍 유리에게 말을 거는 제이. 의아해하는 유리에게, 지나가듯 말을 잇는 그였다.
“…오늘 생일이잖아? 옷을 급하게 갈아입느라 말이지. 선물은 일단 준비해 뒀으니, 촬영이 끝나고 주도록 할게.”
“…아뇨,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제이의 말에, 작게 고개를 젓는 유리.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제이가 유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제이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있던 유리는, 일순 머뭇거리다 뭐가 웃긴지 쿡, 하고 웃었다.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이미 그녀의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를 껴안는 유리였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흥미로운 듯 눈을 빛내는 사람, 저게 뭐냐는 표정으로 의아해하는 사람, 깜짝 놀라며 경직되는 사람, 의아해하는 사람, 그리고…경악하는 사람.
“뭐, 뭐 하는 거냐능! 자세가 완전히 다르잖아요! 어서…”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틀어졌음을 깨달은 심현이 곧바로 제지하려 하지만, 이내 그 눈빛이 변한다. 다시금 그가 오랜 세월 쌓아온 다섯 가지 덕이 빛을 발하며, 그의 시선이 제이와 유리가 아닌 옆에 있던 카메라맨을 향한다.
“…아, 아니다, 저 구도 좋네요! 카메라맨 일단 촬영하세요! 어서!!”
“아, 네, 넵!”
갑작스런 심현의 돌변에 당황하면서도, 다시금 촬영을 시작하는 직원들. 번쩍거리는 플래시와 요란한 소리를 내는 카메라들 사이에서, 제이가 아직까지도 자신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유리를 내려다본다.
“…저, 동생?”
“…….”
제이의 부름에, 유리는 대답하지 않은 채 얼굴을 붉히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구도로 신랑이 신부를 업는 연출이 주어졌다. 그에 몇몇은 제이의 몸을 우려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유리를 업어 드는 제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업히자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유리. 그런 그녀에게, 제이가 여전히 시선은 앞을 향한 채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어이쿠, 동생. 조금 무거워진 거 아냐?”
“뭐예요,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며, 제이의 등을 소리 나게 치는 유리. 그에 한순간 휘청거리는 제이였지만, 곧바로 다시 균형을 잡았다. 그에 너무 세게 때렸나? 하고 조금 자책하는 유리였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금 제이의 등에 몸을 기대었다.
평소에는 몰랐지만, 너무나 넓고 포근하다고 생각되었다.
‘어릴 때 날 업어줬던 아버지의 등이 이런 느낌일까?…아니, 비슷하지만 달라.’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젓는 유리. 사실 그 답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제이는 자신에게 있어서…
“…아저씨.”
“응?”
제이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려 했지만, 금세 그 생각은 지워지고 다른 말로 바뀌었다.
“…아니에요, 벗는 쪽이 더 낫다고요, 안경.”
“…그래? 그거 고맙군. 별로 자신 없는 얼굴이었는데 말이지.”
제이의 대답에 웃으며 슬쩍 몸을 일으키는 유리. 한껏 목을 돌린 그녀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아직은 말할 수 없다. 상황도 상황이고 지금은ㅡ잠시 휴전 중이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은 먼저, 눈앞에 있는 벽을 넘어서야 했다.
적은 맞지만, 싫지는 않은 그녀를.
유정을 돌아보고는 씩- 하고 이를 보이며 미소를 짓는다. 그것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볼 수 있던 유정이었다. 그렇기에, 유정 또한 그에 맞추어 무언의 미소로 화답했다.
ㅡ안 질 거예요!
ㅡ나도 그래.
이 정도면 될까? 하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유정이었다.
“…괜찮은 모양이네요?”
유정의 옆에 서 있던 슬비가, 슬쩍 떠보듯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를 돌아본 유정은, 의미심장한 눈웃음과 함께 대답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뇨, 역시 드라마구나 싶어서요.”
유정의 말에, 높낮이 없는 어조로 답하고는 다시금 시선을 돌리는 슬비. 팝콘이 있으면 딱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금 유리와 유정을 번갈아 보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에 맞추듯, 방금 전부터 열심히 소리치고 있던 심현의 외침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상당히 지쳐 있었지만, 그 얼굴엔 성취감이 덧보이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 마지막으로 신랑이 신부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구도에요! 할 수 있겠어요, 제이 씨?!”
그렇게 지목을 받은 제이가, 유리를 슬쩍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후우, 하기 싫어도 해야겠지.”
“오, 괜찮겠어요, 아저씨? 전에 강남에서 허리가 아프다고 하셨잖아요?”
“숙녀 한 분도 들지 못해서야,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지. 움직이지 말라고, 동생.”
유리의 놀림에도 아랑곳 않고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유리의 허리를 슬쩍 안는 제이. 이내 그가 힘을 주자, 맵시 있는 유리의 몸이 마치 하늘을 날듯 붕 떠올랐다.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감탄을 내질렀다. 유리 또한 색다른 기분에, 양 팔을 벌려 비행기마냥 자세를 취하고는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의 눈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이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런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유리가, 다시금 나직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응?”
“정말, 최고의 생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유리. 평소에도 자주 보여주던 웃음이었지만, 그 느낌이 다름을 알 수 있던 제이였다. 이내 그 또한 유리의 미소에 답하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의 ‘자칭’ 상큼한 미소가 아닌, 그 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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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홈에서 여러 그림과 만화를 보며 떠올린 내용입니다.
유리는 사랑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