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이슬비편: 이슬비의 시점(2)-
Maintain 2015-05-14 6
여느 고등학생들이 다 그렇듯, 우리 학교도 점심시간 전까지의 애들 분위기는 조용하다 못해 거의 죽어가는 수준이다.
물론 행동 패턴은 다양하다. 열심히 필기를 하는 모범생들도 있고, 선생님 몰래 핸드폰을 만지거나 만화책을 보는 애들도 있고, 아예 대놓고 자는 애들도 몇 명 있다. 다만 그 다양한 패턴들이 무색할 정도로 그 분위기는 전부 침체되어 있다는 게 문제지.
나는 저 위의 세 가지 패턴 중에서 첫 번째에 속하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자랑 같긴 하지만 수업 시간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졸았던 적이 없었고, 칠판에 적혀있던 내용 하나하나도 꼼꼼하게 필기를 해 놓았으니까. 사소한 내용이라도, 놓칠 수 없다. 지나가면 그걸로 끝이니.
하지만 그 기록도, 오늘부로 깨지게 될 것 같다. 제이 씨가 지금 여기 있다는 그것만으로, 내 집중력은 이미 흐트러져버린 지 오래였다. 이 아저씨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혹시 사고라도 치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바람에, 벌써 중요한 내용도 몇 개 놓쳐버렸다.
그것만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창밖을 볼 때마다 아저씨의 모습이 보인다. 웃통을 벗은 채 운동장을 몇 바퀴 돌거나, 철봉을 능숙한 솜씨로 탄다거나, 아니면 화단 쪽을 어슬렁거리거나 하는 그 모습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다행이 운동장 한복판에서 무릎 꿇고 아임 프리! 하고 외친다거나 하지는 않으셨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사실이다. 뭔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리고 제이 씨가 오늘 학교에 온 것은, 애들 사이에서도 작은 화제가 된 모양이다. 쉬는 시간마다 여자애들은 제이 씨에 대해서 이것저것 얘기를 하거나, 심지어는 내게 와서 제이 씨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다. 솔직히 그때마다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그저 같이 클로저 일을 하는 동료일 뿐이라고만 대답했다. 친하지도 않은 애들이 갑자기 다가와서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건 솔직히 부담이다.
그렇게 피곤한 4교시가 지나갔고, 드디어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점심 시간이 시작되었다.
점심 시간은, 문자 그대로 치열한 경쟁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 시체나 다름없던 애들이 점심 시간 종만 울렸다 하면 사이킥 무브 뺨치는 속도로 매점이나 급식소로 달려가는 그 모습은, 정말 신기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다. 이 점심 시간이 끝나면 다시 원래의 반 시체로 돌아갈 그 모습을 상상하면 더더욱.
지금 우리 교실도 대부분의 애들이 그렇게 급식소나 매점으로 사라졌고, 나는 아까 했던 약속 때문에 교실 앞에서 제이 씨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 제이 씨가 보인다.
"-그래서 애들이 있죠, 완전 아저씨 얘기 뿐이었다니까요? 아저씨, 인기 많아지셔서 좋으시겠어요?"
"-음. 살아있다는 보람을, 오랜만에 느낀 거 같구나."
"-그래봐야 툭하면 쓰러지는 약골이란 건 변함 없겠지만요...어, 이슬비잖아? 야, 이슬비!"
제이 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유리와 세하를 데리고, 뭔가 즐겁게 얘기를 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살짝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럴 이유는 전혀 없는데도. 그런 나를, 세하가 발견하고 불렀다.
"미안하구나 대장. 많이 기다렸니?"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서, 하고 싶다는 건 뭐죠? 쓸데없는 게 아니면 좋겠네요."
"하하, 내가 설마 유리하고 동생까지 데리고 이상한 짓이라도 하겠니. 애들 망신 시키는 것만은 사양이야. 이 아저씨가 하고 싶었던 건 말이지..."
"안녕하세요, 아줌마!"
"에구, 유리로구나? 우리 유리는 여전히 씩씩하네."
"그럼요! 아줌마가 해 주시는 밥을 먹을 생각만 하면, 입에 군침이 돌아서 버틸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저 오늘도 밥 많~이 주세요!"
"그럼, 그래야지. 옆에 있는 친구들한테도 많이많이 줄게."
뭘 하고 싶어하시나 궁금했었는데, 제이 씨는 우리에게 같이 급식소에 가서 밥을 먹자고 하셨다. 조금은 황당했지만, 아무래도 오랜만에 학교에 오셔서 그러신 거겠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우리 넷은 급식소로 향했다.
급식소. 아마 우리 학교에서 제일 활기찬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 곳을 고를 것이다. 그만큼 점심시간의 급식소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또 학생들의 이야기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그것도 다 급식소 아주머니들께서 음식 솜씨가 좋으신 덕분이겠지. 유리가 저렇게 애교를 부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건 그렇고...옆에 있는 총각은 누군가?"
"아, 이분이요? 오늘 제 친구 면담 때문에 오셨어요. 학부모...라고 하기는 좀 애매한데, 대충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아무튼 그런 분이에요."
"유리 이 녀석.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을 강제로 아저씨로 만들려고 그러니. 뭐,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우리 애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아휴, 물론이죠. 총각같이 잘생긴 사람의 부탁인데, 더더욱 그래야지. 그래, 총각도 밥 먹으려고?"
"음...안 되려나요?"
"안 되기는! 당연히 되지. 내 특별히 반찬도 많이 줄게. 많이 먹고 힘내시라고."
"하하...고맙습니다. 마침 배도 고팠는데 잘 됏네요."
...그렇게 해서, 우리 네 명은 국사 시간에 봤었던 그 고봉밥 사진이 떠오를 정도로 많은 양의 밥과 반찬을 받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참고로 오늘 반찬 메뉴는 생선까스, 된장국, 김치, 현미밥, 그리고 오이무침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이거, 다 먹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구나."
난감하다는 듯이 쓴웃음과 함께 수북하게 쌓인 생선까스를 하나 집어드시면서 말씀하시는 제이 씨. 그걸 놓치지 않고, 유리가 젓가락을 들이댄다.
"아, 혹시 다 못 드실 거 같으세요? 그럼 저 좀 주세요! 저 생선까스 먹고 싶었었거든요."
"아, 그럼 나도 좀 가져갈래요 아저씨. 야 서유리! 너무 많이 가져가지 마라고!"
"이 녀석들아, 그래도 내 몫은 좀 남겨둬라. 아, 대장도 좀 가져갈래?"
"...괜찮아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저 셋에 도저히 끼어들 자신이 없는 내 자신이 조금은 슬퍼진다. 그래도 겉으로 그걸 드러낼 수는 없다. 리더로서의 체면이란 게 있으니까. 그렇게 묵묵히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하...그래, 이 맛이야."
생선까스를 한 입 물어드신 제이 씨. 뭔가, 추억에 잠긴 듯한 추억과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하셨다.
"...꽤나 그리우셧던 모양이네요."
"그럼, 물론이지. 이런 거 먹어본 것도 벌써 십 년도 넘었는걸. 그 전에는 맨날 전투식량만 질리도록 먹었으니까. 거기다 학교도 제대로 다녀본 적이 거의 없었고, 학교에서 급식을 먹어도 혼자 먹는 일이 많았으니까. 설마 이렇게 다시, 그것도 남들하고 같이 급식을 먹어볼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그 말에 우리 셋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제이 씨가 자신의 어릴 적에 대해서 말했던 적은 거의 없었지. 분명 우울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어보니 그 우울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우우...죄송해요 아저씨. 이거, 다시 드릴게요."
"어...저도요..."
"아, 아니야. 미안하구나. 괜히 우울한 얘기를 꺼내서. 마음껏 먹으라고. 그저 좀 그리워서 그랬던 것 뿐이니까. ...어쩜, 그때랑 맛이 이렇게까지 똑같을 수가 있을까. 혹시 지금도 그 300원짜리 생선까스를 그대로 쓰나?"
"...예?"
순간, 그냥 넘어가기는 힘든 말이 들린 거 같았다. ...300원?
"아, 몰랐나? 사실 말이야, 급식에서 쓰는 생선까스는, 한 장당 300원이라고. 3천원이 아니라, 300원."
"켁...진짜요?"
그 말을 들은 유리, 생선까스를 입에 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럼, 물론이지. 거기다 돈까스는 한 장당 500원이고, 동그랑땡 알지? 그건 10개에 1000원이었어. 너희들 급식 먹을 때마다 그런 거 맛이 이상하게 다 똑같았지? 그게 다, 그 가격에 대량으로 들여와서 그런 거야. 대량으로 들여와서, 냉장고에 넣어 놨다가 두고두고 써먹는 거지. 휴...요즘 높으신 분들은 애들한테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주나? 정말이지...먹을 것에 대한 정보 정도는, 확실하게 가르치란 말이야."
"......"
"......"
"......"
...역시 이것도 관록이라면 관록인 걸까.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진실을 알고 나니, 갑자기 입맛이 확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뭔가...속은 기분이야.
"아, 하지만 여기 급식은 맛있구나. 특히 이 오이무침이 참 맘에 드네. 적당히 새콤하고. 이곳 아주머니 음식 솜씨가 참 좋으시구나."
"그, 그쵸? 그렇다니까요! 여기 아주머니, 음식 잘 하신다니까요? 그치 애들아?"
"그, 그럼. 으...우리 엄마가 해 주는 밥 먹다가 급식 먹으면...천국이 따로 없다니까...안 그러냐 이슬비?"
"으, 응? 어, 마, 맞아..."
"뭐, 사실 생선까스 얘기 그거도 이젠 옛날 얘기니까 말이야. 요즘은 학교에 이것저것 예산도 많이 준다고 하니까, 그 300원짜리 얘기도 이젠 옛 말이겠지. 미안하구나, 밥맛 떨어지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은데요. 이미 늦었어요."
...뭐, 그런 얘기들을 나누면서, 우리 넷은 급식을 먹었다. 지금까지는 혼자서만 밥을 먹거나, 유리와 세하랑 먹더라도 얘기에 끼어들지 못한 채 듣기만 했었는데. 이렇게 넷이서 있으니...왠지, 새로운 기분이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절대 싫은 느낌은 아닌, 그런 기분.
"아저씨, 아저씨! 저 조지오 커피 하나만 사주세요!"
"음...오, 한타 룰 스킨 이벤트하는 캔 들어왔네? 아저씨, 전 한타 오렌지맛이요! 야 이슬비 너도 골라!"
"...그럼, 난 딸기우유."
식사를 마치고 다음으로 들린 곳은 매점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인지라, 애들은 아까 전에 비해 많이 빠져나가 있었다. 물론 이것도 제이 씨가 가 보자고 해서 온 것이다. 돈을 내시는 것도 제이 씨고.
"휴...이거, 이번 달은 조금 아슬아슬하게 지내야겠구나. 그건 그렇고, 조금 아쉬운걸? 이제 매점에서 조리 음식은 안 파나 보구나."
"조리 음식? 옛날엔 뭐 만들어서 팔았엇나요?"
"음. 우리 학교 매점에선 그랬었지. 매점 아주머니가 파시던 라면볶음이 꽤 맛있었는데 말이야. 라면볶음도 있었고, 김밥하고 떡볶이도 만들어 팔았었지."
"정말요? 부럽다...우리 학교도 그래주면 좋을텐데."
"글쎄...지금은 좀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 학교 얘기는 아니지만, 옆 학교에서 그거 따라하다가 식중독이 터져서 결국 우리 학교까지 붙똥이 튀었다던 얘기를 들었거든. 그래서 결국 폐지까지 됐고. 그건 그렇고, 요즘은 애들한테 그렇게 캔커피를 파나? 애들 건강에 안 좋게..."
칸피던스라고, 애들 사이에선 맛없어서 잘 안 팔리기로 유명한 비타민 음료를 드시며 제이 씨가 말했다. 제이 씨 말로는, 이건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전통있는 음료라나. 목욕탕 갔다 오면 꼭 한 병씩 마셨다는데. 근데 내가 알기론 그건 바나나 우유 아니었나?
"그건 대체 언제 적 얘기에요? 요즘 애들이 얼마나 커피 많이 마시는데. 그리고 점심먹고 식곤증이라도 이겨내려면, 이거라도 마셔야 돼서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 고생이 많구나.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다는 녀석이 왜 성적은 그 모양인지..."
"우씨, 아저씨! 또 성적 얘기 할래요? 아까부터 자꾸 성적 갖다가 공격하시네?"
"걱정되니까 이러는 거지 이 녀석. 뭐, 인생에 공부가 전부는 아니긴 하지만 말이야. 적어도 우리 대장처럼 수업 시간에 딴 짓 안하고 집중만 하면 충분히 상위권에 들 수 있을걸?"
"그건 슬비가 대단한 거고요. 그런 기념에서 슬비야, 슬비야. 나중에 노트 좀 보여주면 안 될까?"
"어, 노트? 으, 응. 알았어..."
음, 오늘은 나도 노트 정리 잘 못했는데. 어디의 누구 때문에 말이다. 나중에 설명도 잘 해줘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야, 다들 조용히 해 봐. 방송 나온다."
뭔가가 조그맣게 적혀 있는 캔 고리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세하가 말했다. 귀를 기울이니, 스피커를 통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안내방송 전해 드리겠습니다. 2학년 E반의 이슬비양, 2학년 E반의 이슬비양은 지금 보호자 분과 함께 교무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방송 전해 드리겠습니다. 2학년 E반의...
"...흠, 시간이 됐나 보군."
제이 씨가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풀려 있던 와이셔츠 윗단추를 잠그고, 비뚤어져 있던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후, 마지막으로 머리를 정리한다.
"그러게요. 제이 씨, 한 번 믿어 볼게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내 어떻게든 한 번 해 볼 테니."
"...평소의 모습만 보면 영 신용이 안 가는데 말이죠. 그럼, 가죠."
아닌 척은 했지만, 솔직히 긴장은 된다. 나도 이게 처음으로 받는 면담이니까. 물론 나는 선생님이 여쭤보시는 거에 대답만 잘 하면 되고 나머지는 아저씨를 믿으면 되겠지만...아무리 그래도 조금은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다.
"걱정하지 마 대장. 다 잘 될 거야. 이 아저씨가 장담하마."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아저씨는 내 머리에 손을 얹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럼 아저씨, 잘 하세요. 화이팅!"
"실수하지 마요. 이슬비 쟤 화내면 아무리 아저씨라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유리와 세하의 응원을 받으며, 우리는 교무실로 향했다.
네, 안녕하세요. 최대한 빨리 글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또 날씨가 덥네요. 어제 제가 날씨가 춥다고 썼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이 무색하게 오늘은 날씨가 제대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 밤에는 추워지겠죠.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다들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역시 슬비의 시점에서 글을 써 봤습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다시 제저씨의 시점으로 넘어와서 상담을 받는 모습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제저씨가 슬비를 위해 상담하는 모습, 다들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저기 위에 있던 매점의 모습은, 제 고등학교 시절, 즉 실화에서 따왔습니다. 제가 2학년때 식중독 사태가 터져서 결국 폐지가 됐었죠. 아쉬울 따름입니다. 저 생선까스 300원의 소문도 저희 학교에서 나름 유명한 괴담이었고요. 뭐, 그래도 잘 먹긴 했지만요.
아무튼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편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