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오세린편- : 제저씨의 시점(3)

Maintain 2015-05-04 8

"저기...여보세요? 오세린 씨?"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은 늦어졌다. 아까 그런 광경을 봤던 게 생각보다 타격이 컸던 모양이다. 누가 보는 사람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그 자세로 걷느라 고생 좀 했다고.

그렇게 여러 의미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아까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는 않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헤헤...선배님...오셨어요...?"

내 침대 위에, 세린이가 누워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엎드려 있었다. 배게에 얼굴을 파묻고,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다. 

"저기...세린아?"
"헤헤...선배님...저...선배님 오시면 피곤하실까봐...침대 덥혀 놧는데...저 잘했죠...?"
"그, 그래? 그건 고마운데..."
"정말요...? 그럼 저... 조금만 더 덥히고 있으면 안 돼요...? 따뜻해서...일어나기 싫은데..."

앙탈이라도 부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세린이는 배게에 얼굴을 부비면서 몸을 꼬았다. 그 탓에 가뜩이나 짧은 치마가 말려 올라갔고, 거기다 자세도 자세인지라 하얀 스타킹을 신은 다리의 허벅지 부분은 거의 다 드러났고, 조금만 더 올라갔다간 속옷도 보일 거 같다. 

이. 이거 위험해. 벌써 목구멍 너머로 뭔가 찝찔한 쇠맛이 올라오는 기분이다. 아니, 목구멍뿐만 아니라, 콧속에서부터도 올라오는 거 같은데? 

"저기...세린아? 너  지금 조금 이상한 거 같은데...일단 진정하고..."
"헤에...? 뭐가 이상해 보이는데요...? 저 이상한 짓 한 거 아무것도 없는데...히잉..."

역시 뭔가 이상해. 저건 내가 알던 세린이의 모습이 아니야...조금 더 가까이 가 보니, 얼굴이 빨갛다. 숨도 확실히 뜨겁고. 마치...술이라도 취한 것 같은...

"...아, 설마."

불길한 마음에 주방으로 향했다. 아까 막내랑 대장이 한 얘기가 떠오른다. 그 설마가 설마로 남길 바랬지만.

"역시나..."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아까 대장이 기겁한 게 이거 때문이었나. 큭, 속쓰리네. 아까도 말했지만, 저거 아끼고 아껴 놨던 돛대였는데. ...아니, 이게 아니고.

"괜찮나, 세린이? 이거 마시고 진정 좀 하라고."

나는 냉장고에서 건강차를 꺼내 한 잔 따르며 말했다. 숙취 해소엔 이게 최고야. 견디셔? 녀명? 그런 거 필요없어. 이 건강차 한 잔만 있으면 일주일치 숙취도 한 방에 해소된다고. 

"히잉...싫어요...그거...엄청 맛없을 거 같단 말이에요..."
"...솔직히 맛은 장담 못하지. 하지만 건강을 위해선 쓴맛 정도는 참을 줄 알아야 하는 게 어른이야. 그러니까 참고 마시라고."
"싫다니까요... ...그보단, 에잇!"
"-어라?"

갑자기 팔이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살짝 돈다는 느낌이 들었고, 정신을 차리니 난 어느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다행이 그 전에 건강차를 침대 옆 서랍에 올려놔서 엎어버리는 참사는 면했지만.

형광등 빛에 잠깐 눈을 찡그렸지만, 그 빛을 덮어버리는 그늘이 있었다. 세린이가, 내 위를 덮어버리듯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헤헤...놀랬죠? 저, 그래도 조금은 할 줄 아는 것도 있다고요."
"너...많이 취했구나."
"네, 맞아요. 저 취했어요. 제가 그러니까 이러고 있죠."
"알긴 아는구나. 그럼 이거 놔 주지 않을래? 그렇게 손목을 꽉 쥐면 관절염이 심해진다고."
"죄송해요. 그건 좀 힘들 거 같네요. 이러지 않고서는...할 말도 못 할 거 같으니까."

할 말이라. 그래서 세린이 이 녀석 표정이 이렇게 진지했던 건가. 내가 아는 세린이라면 짓지 못할 저 얼굴을 보니, 나까지 긴장하게 된다. 그나저나, 술의 힘을 빌려서야 말할 수 있는 거라면 대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일까. 내 기억으론, 보통 저런 말치고 가볍게 넘길 만한 말은 없는데 말이지.

"있죠 선배님. 저, 선배님을 존경해 왔어요."

조금은 강한, 하지만 확실히 긴장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세린이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전 선배님이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는 하나도 몰라요. 제가 선배님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선배님이 울프팩에서 싸우셨을 때의 모습하고 지금의 모습 뿐이죠.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선배님은 강하신 분이라고."
"내가...강하다고...?"

하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안하지만 세린이, 뭔가 착각해도 한참을 착각한 모양인데, 난 전혀 강한 사람이 아니야. 아니, 예나 지금이나,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약해빠진 녀석일 뿐이지."

내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려니, 사실이긴 해도 굉장히 씁쓸하다. 하지만, 이 녀석의 착각을 깨워 주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씁쓸함은 감내해야겠지.

"전쟁 때의 모습? 그거 다 잘 편집된 내용일 뿐이야. 실제로는 도망친 적도 많았어. 진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지. 작전에 투입됐다가 전우들을 골로 보내버린 적도 많았고. 나는 그저 알파퀸...누님에게 의지만 했던, 막말로 누님 옆에서 꼽사리만 꼈던 약해빠진 꼬맹이었을 뿐이야." 

전쟁 후에 유니온의 실험체로 굴러졌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건 나 스스로도 별로 말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세린이에게는 큰 충격이 될 테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지.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다시 유니온으로, 검은양으로 돌아오긴 했지. 하지만...지금의 나는 뭐지? 몸도 성한 데 하나 없고, 걸핏하면 피만 토하거나 쓰러지기만 하고. 애들에게 도움은커녕 짐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지금도 고작 독감 하나에 쩔쩔매서,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있잖아. 아까 아이들 표정 봤어? 다들 피곤함에 쩔어서, 다들 집에 돌아가면 그대로 지쳐 쓰러지듯 잠이 들겠지. 내가 있었으면 조금은 힘이라도 덜 들게 해 줄수 있었을 텐데. 난 전혀 그러질 못했지. 이 정도면, 완벽한 보호자 실격 아니고 뭐겠어. 전에 퇴물이란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녀석 말이 맞았군. 이 정도면 흠 잡을 데 없는 완벽한 퇴물이야."

말을 하면서 조금은 후련한 기분도 들었지만, 속으로는 아차 싶었다. 몸이 아프다고 평정심까지 잃어버린 건가. 평소보다 많이 말을 해 버린 데다, 나도 모르게 감정까지 내비치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세린이 이 녀석의 능력이 뭔지 아니까 그런 걸지도.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거짓말은 통하지 않겠지. 차라리 잘 된 걸지도. 어줍잖은 거짓말으로는, 이 녀석이 내게 가지고 있었던 환상을 깰 수 없을 테니까.  

"이제 알겠지? 난 존경할 건덕지라고는 하나 없는, 쓸모라고는 하나 없는 퇴물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예, 잘 알았어요. 하지만...어쩌죠? 전 계속 선배님을 존경할 거에요."

이런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체...어째서?

"그래요, 선배님은 어쩌면 약한 사람이고, 퇴물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런 약한 사람한테 도움을 받았던 사람도 많다는 생각, 해 ** 않으셨나요? 울프팩이 알파퀸 외에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팀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울프팩의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며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아요. 선배님도 예외는 아니고요. 선배님이 목숨을 걸고 싸우신 덕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믿으실지 아니실지는 선배님에게 달렸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그리고 선배님은 말이죠, 지금도 충분히 훌륭한 보호자에요. 선배님이 전쟁 후에 무슨 일을 겪으신 건지는 잘 모르지만...그런 몸으로 다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돌아온 것만도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그런 데다가 선배님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하시고, 전혀 힘든 내색도 하지 않으려고 하시죠.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아이들도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선배님의 부재에도 한마디 불평도 없었던 거고, 선배님의 병문안을 와 준 거겠죠. 보호자가 형편없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건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까."
"..."
"선배님은 있죠, 가끔 보면 조금은 답답해요. 충분히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조차도, 다른 사람들의 공으로 그걸 넘겨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깎아내리시니까요. 저도 제 자신이 싫은 때가 많으니까 이런 말씀을 드릴 입장은 아니지만...적어도 선배님은 충분히 존경받으실, 그런 훌륭한 분이라는 것만은 알아주셧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선배를 존경하는 사람은...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도요..."

술에 취한데다 말을 많이 해서 지친 건지, 아까보다 살짝 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세린이는 그대로 내 가슴 위에 무너져 내렸다. 샴푸 냄샌가, 왠지 모를 좋은 향기가 코를 찔렀고, 그런 내 시선이 느껴진 건지 세린이는 살짝 젖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래 독감에는 충분한 수면과 적당한 휴식이 필요한 법이라고 들었는데. 하하, 이래서야 독감이 더 심해져도 할 말 없겠네. 뭐, 대신 땀을 충분히 흘렸으니 괜찮으려나. 확실히 몸은 가벼워진 기분이다. 이 정도면 오늘 밤은 충분히 기분 좋게 잘 수 있겠네. 살짝 좁긴 하겠지만.

"존경한다...라."

그런 소리를 들은 게 얼마만이더라. 다시 생각하니, 왠지 부끄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아마 세린이가 이 웃음소리를 들을 리는 없겠지. 술에 취해서 곤히 자고 있으니까. 후...다시 한번 더, 세린이 녀석이 좋은 후배라는 걸 깨닫게 되는 하루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다시 글을 올립니다. 
시험준비 때문에 계속 글이 밀리게 되네요...계속 바쁘게 사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되면 글을 쓰지 못하게 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ㅠ글도 어째 점점 더 짧아지는 기분이라 또 아쉬워지구요. 이래저래 아쉬운 기분만 잔뜩 생기는 거같아서 조금은 속상하네요.
예, 오세린 루트, 이제 다음편이 에필로그네요. 예고했던 대로, 오세린 루트가 끝나는 대로 이슬비 루트로 넘어가려 합니다. 원래 슬비 생일날에 맞춰서 쓰려고 했지만, 시간이 전혀 나지 않았네요...아쉬울 따름입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에필로그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어린이날 되세요.
2024-10-24 22:26:3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