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03/세하유리] 먼저 손을 내밀어줄게 second
SummerDia 2019-06-03 8
※ 개인적인 캐릭터해석 주의 + n년 후
※ 과거 설정 살짝 날조
※ 세하유리 요소 가미
※ 이전편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4663/
타앗-
높이 점프하기 위해서 가볍게 도움닫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가벼운 소리였는지 스쳐지나가는 바람이 있었다면 바람 소리겠거니 하며 흘겨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하는 잠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두둥실 떠올라가는 풍선을 바로 잡기 직전의 유리가 보였다. 운동신경이 위상력에 각성하기 전에도 출중했던 유리의 운동신경을 안 그래도 또다시 감탄을 하게 되었다. 만약 유리가 배구를 했어도 분명 성공한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의 절경을 자랑하는 풍경이었다.
“우와...”
“멋지다...”
바로 옆에 있던 아이들도 유리의 이런 모습에 감탄을 해버렸다.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솔직하다. 곧장 눈앞에서 벌어진 기인 열전 같은 풍경에 박수를 치며, 대단하다며 유리를 추켜세웠다. 유리는 약간 쑥스럽기는 했는지 뺨을 긁적이며 남자 아이의 손에 자신이 잡은 풍선을 꼭 쥐어주었다. 아이들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잘 배웠는지, 유리에게 연신 고맙다며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몇 번을 그러고 나자 낯선 어른의 소리가 들렸고, 아이들은 곧장 그쪽으로 뛰어갔다. 아마 부모가 그 남매를 찾는 모양이었다. 유리는 사이좋게 같이 뛰어가는 남매 – 서로의 손을 잡지 않은 저마다의 손에는 풍선이 들려있었다 –를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세하가 앉아있는 벤치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유리는 세하가 자신의 손에 있는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서 스쳐지나가는 아이들과 작은 소동을 벌인 것을 못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세하는 다 보고 있었다. 세하는 다만 필요 이상으로 과묵하고, 신비주의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은, 그에 대한 적절한 답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대화를 먼저 이끄는 것은 유리, 말도 가장 많이 하는 것도 유리.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다. 유리는 세하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며 말꼬리를 틀었다.
“있잖아, 내가 아까 했던 풍선 이야기.”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것은 유리가 잠시 자리를 뜨기 직전에, 나누었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이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유리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심증은 곧 확신으로 바뀔 수 있었다. 그 탓에 세하는 아까 전의 이야기를 연이어서 한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런 속과는 달리 겉에서는 아주 유연하게 게임 버튼을 조작하고 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아까처럼 건성뿐인 대답조차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유리가 대략적으로 설명하는 옛날이야기는 이러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풍선을 받았는데, 그렇게 좋아했던 기억은 남아있는데, 그 풍선을 결국 어쨌는지 기억은 나지 않아. 웃기지?
약간의 웃음기가 담긴 그 목소리에는 정말 ‘별 거 아닌’ 희미한 기억을 읊조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서 세하는 약간의 섭섭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리가 별안간 끝난 줄로만 안 그 이야기를 또 꺼내는 것이 아닌가.
세하는 의아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았나?’
“있잖아, 아까 내가 했던 풍선 이야기...”
“...”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에 대해 세하는 일절 반응하지 못했다.
세하는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건성을 듣고, 시간이 지나면 절대로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유리의 예측과는 달리 세하는 아주 똑똑히 새겨들었고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유리보다 훨씬 전부터, 아주 선명하게.
세하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유리는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세하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기에. 그걸 꾸준히 붙잡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세하는 유리를 보자마자 유리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곱씹고 또 곱씹었는지는 어린 시절에는 잘 알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유리 본인과 기적 같은 재회를 가지기 직전만 해도 알지 못했다. 유리와 다시 만나고, 유리의 환한 미소를 오랜만에 보자니 세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첫눈에 반하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에게 꾸밈없이 미소를 지어주며, 먼저 손을 내밀어준 그 아이에게. 자신의 손에 선명한 다홍빛을 남기고 간 그 아이에게.
* * *
세하에게 따돌림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것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최소한의 나이이던 시절부터, 아니면 그 때보다 훨씬 어렸던 시절부터. 세하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당시의 세하는 어린아이다운 끈질긴 희망 따위를 잘 믿는 편이었다. 즉, ‘누군가 나와 그래도 같이 어울려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끈덕지게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포기하지 않았고, 그 탓에 몸은 물론 다른 곳마저 자질구레한 상처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그 시점에는 그 희망을 거의 믿지 않게 된 시점이었던 거 같았다. 그래도 아이들이 노는 것은 보고 싶어서 어린이용 후드를 깊게 뒤집어쓰고, 구석에서 아이들을 관찰하는 행동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을 뿐인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아이들의 손에는 저마다 형형색색의 풍선이 들려있었다. 조금 시선을 돌리니 어떤 남자가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고 있었다. 풍선을 가지게 된 아이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세하는 당연하게 자신도 풍선을 가지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마지막 아이까지 풍선을 받는 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풍선은 마지막으로 줄을 선 아이 것까지만 딱 남아있었다. 마지막을 풍선을 받은 아이는 자신이 오늘의 행운이 좋은 것에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세하는 살짝 손을 그러쥐었다. 그 시점의 어린 세하는 포기도 적당히 할 줄은 알았기에 풍선 따위 포기하면 그만이었는데...
-...
그날따라 겹겹이 쌓여온 무언가에 울분이 차버렸는지 쉽게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늦게 놀이터에 나타나고, 가장 먼저 놀이터에서 사라지는 세하가 그날은 끝까지 놀이터에 남아 있었나보다. 세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둑하게 저문 뒤였다. 집에서 걱정을 하겠다는 생각에 숨어있던 곳에서 발을 디디자마자,
-어...?
-...?
매우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한 여자 아이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가끔씩 아이들의 무리 속에서 돋보이던 활달한 여자 아이였다. 세하는 여자 아이를 낯설어하지 않았지만, 여자 아이는 세하와 초면이었다. 그렇게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러가는 중에 본 여자 아이의 손에는 아까의 풍선 나눔에서 받은 풍선이 들려있었다. 노을이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빨갛다는 말을 넘어서 붉게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 아이는 오늘 처음 세하를 보았지만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아이의 시선도 세하처럼 자신의 앞에 있는 아이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과 다르게 손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여자 아이는 두리번거렸다. 무엇 때문일까.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이야기. 여자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 했지만, 곧장 세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풍선이 들린 손을.
처음에는 그 의미를 몰라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세하에게 여자 아이는 재촉했다.
-자, 너 가져.
-...진짜?
이런 호의, 이제까지 받아본 적 없었다. 또래에서든, 어른들에서든. 세하는 오늘 처음 겪어보는 일들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무엇이든지 처음 겪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이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세하는.
진짜라고 묻는 세하에게 아이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긍정의 반응에 세하는 조금은 주춤거렸지만, 아이가 들고 있던 풍선을 기어이 자신의 손에 그러쥐었다. 작은 줄에 의해 자신에게 머물러있는 풍선은 그 어떤 색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풍선 주위에 광원도 맴돌았었다.
세하는 처음 받는 호의였지만, 그에 대해 어떤 반응을 취해야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책을 보면서 열심히 배운 것도 있었고, 언젠가 –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 꼭 말해보고 싶었던 것이었기에.
-...고마워.
-...
고맙다는 말에도 여자 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여자 아이는 지금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거 같았다. 여자 아이가 바라보던 것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너 말이야...
-응...?
-눈에 태양이 담겨져 있어!
-...!
여자 아이의 그 말에 세하는 자신이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타인에 앞에 섰다는 걸 깨달았다. 서둘러 고개를 숙이는데, 그런 세하에게 여자 아이의 천진하고 순수한 감탄이 들렸다.
-나, 눈에 태양이 담긴 아이 처음 봐! 멋지다!
-...멋지다고?
-응! 그리고 예뻐!
-...
세하는 풍선을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여자 아이의 얼굴은 아까 전부터 ** 않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 아이는 이때까지 만난 아이들 중에서 특별했다. 세하에게,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건넨 걸 보면.
-우리, 다음에는 같이 놀자!
-...?
-꼭이다? 나랑 약속!
놀자니, 그걸 지금 나한테 꺼낸 말이야? 심지어 약속까지 하잔다. 약속...꼭 지켜야하는 것. 어린 시절의 세하는 그렇게 배웠다.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고 같이 놀자며 다음을 기약하는 아이는...친구는 처음이었다.
세하는 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하의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여자 아이는 저쪽에서 엄마가 부른다면서 황급히 가버렸다. 하지만 제 엄마에게 가면서도 세하가 있는 뒤를 돌아다보며 ‘꼭! 약속했다?’ 라며 하는 걸 보면 여자 아이는 세하가 약속을 수락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세하는 해가 꼬박 넘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신비한 경험을 하나 한 거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심장이 재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 질리도 없었고,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느낄 리 없었다. 그 아이와 맞닿았던 손은 굳어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때가 유리와 세하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세하가, 유리에게 푹 빠져버린 날이기도 하고.
* * *
그 다홍색의 풍선을, 세하는 아주 소중히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사고가 나서, 풍선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밝은 다홍색의 풍선은, 그 뒤로 찾을 수가 없었다. 집에 오기 직전까지 꼭 잘만 쥐고 있던 풍선을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냈다는 것에 세하는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래서 유리가 풍선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유리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모든 걸 다 알고 기억도 잘 했지만, 차마 먼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면 유리는 자신이 세하의 손에 꼭 챙겨준 풍선을 어쨌는지에 대해 물어 볼 것이고, 그 기특한 마음을 바람의 장난으로 그만 떠나보내고 말았다는 무책임한 말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작 풍선 하나인데, 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세하에게는 특별했다. 어린 시절의 후드를 깊숙이 써야만 했던 세하에게도, 지금의 서유리의 남자친구라는 역할로 있는 세하에게도.
유리가 어린 시절의 후드를 뒤집어쓴 자신에 대한 묘사를 끝낼 무렵, 세하는 생각했다.
자신은 왜 이렇게 겁쟁이일까. 아니, 유리와 관련된 일에만 유독 겁쟁이가 된다. 유리는 세하에게 말했다. 태양을 눈에 담고 있다고. 태양? 아니다. 세하에게 태양은 오히려 유리였다. 가까이 있지만 차마 그러쥐어볼 수 없는 것. 만지려고 손을 뻗으면, 차마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이.
이세하 바보, 멍청이...자신을 끊임없이 자학하던 와중에 버튼 하나를 잘못 눌려서 기계적으로 잘만 움직이던 게임을 끝내고 말았다. 직후 세하는 이렇게 말했다.
“아, 꼬여버렸네.”
“...”
어색하지 않기 위해 꺼낸 말이었는데, 그게 유리를 위한 것이었는지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후자의 성격이 좀 더 강하지 않았을까? 세하는 아예 게임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옆에 있는 유리는 아직도 세하와 타고 싶은 놀이기구가 잔뜩 남아있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세하의 추측은 잘 맞았는지 유리는 세하의 손을 먼저 잡았다. 그리고 세하를 이끌며 이렇게 말했다.
“자, 가자!”
“...응.”
아직까지도 유리에게 이끌려가는 이 상황이 세하에게는 훨씬 익숙했다. 그런데 조금만 용기를 내봐도 세하가 먼저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아직까지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 직후의 이야기, 유리가 모르는 이야기가 남아있기에. 그로 인한 약간의 죄책감 때문에. 그것이 일종의 벽을 만들고 있었다.
유리와 함께 지내다보면 그 벽도 서서히 무너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쉽지는 않았다. 만사가 잘 안 풀릴 때에, 세하는 작게 어느 얼굴 모를 익명의 사람 탓을 해본다.
‘그 때, 잘 전해준다 했으면서...’
그 사람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풍선, 잘 전해준다면서...결국은 그러지 않았잖아...결국 세하는 유리의 마음을 잃어버린 꼴이 되었다. 지금의 유리는 그 사실을 모르지만, 알게 된다면 세하에게 실망할 것이다. 그건 세하가 세하 자신에게 용납할 수 없었다.
두둥실-
“...?”
유리에게 이끌려가는 와중에 하늘에 무언가가 보여 잠시 고개를 들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유리가 세하에게 건네주었던 그 풍선이 순간 보였다. 그 풍선이 그 풍선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건, 어떤 류의 강한 이끌림이었다.
“...”
‘아마 오늘...’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Bonus!>
“이세하.”
“...응?”
한적한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느지막이 일어난 두 사람 – 세하, 유리 – 은 소파에 앉아서 자기 할 것을 하고 있었다. 유리는 소파에 정자세로 앉아 잡지 따위를 읽고 있었고, 세하는 그런 유리의 무릎을 베개 삼아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스스럼없는 두 사람의 분위기, 이 때문에 유리는 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 나른한 분위기 때문에, 스쳐지나가듯이 말했던 거 같았다.
“나, 지금 키스하고 싶어.”
“...어.”
먼저 제안을 꺼낸 이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던 탓일까? 세하의 대답 또한 감정 하나가 별로 담기지 않은 무미건조한 상태였다. 혹여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도 아니었다는 것이, 세하도 유리처럼 분위기에 휩쓸렸다는 걸 증명하듯이 대답을 한 직후에는 별 반응이 없던 세하가,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상반신을 벌컥 일으킨 걸 보면, 꽤나 뜻밖의 말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세하가 다시 물었다.
“지금?”
지금 당장 하자고? 그에 대한 유리의 답은 일관성 있었다.
“응, 지금 당장. 롸잇 나우.”
“...”
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옆에서 아직도 잡지에 열중하고 있는 자신의 여자친구, 연인, 애인...여러 개의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유리에 대해서. 유리는 한없이 솔직하고, 꾸밈이 없고, 그렇기에 눈이 부시다. 무엇이든지 망설이는 법이 없고,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진득하게 지는 사람...세하는 아마 유리의 이런 점을 보고 좋아했던 거 같았다. 추측형의 문장인 것은 이미 알아차렸을 때는 ‘서유리’ 라고 하는 비가 옷을 흠뻑 젖게 할 정도로 푹 빠져버렸기에. 한 번 자각하고 난 감정은 모가 난데는 없으나, 제법 충동적이었다. 유리를 앞에 두고 자제심을 가지가고 중얼거린 적도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이 세하에게는 오히려 기쁠 상황이긴 하나...세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솔직하지 못한 편이었다. 만약 마음이 조금만 더 약한 사람이었다면 울보라는 별명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그에 반해 유리는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솔직한 편이었다. 머뭇거리는 세하를 살짝 흘겨보던 유리는 읽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가왔다. 서로의 숨소리가 느껴질 수 있는 거리만큼. 그 상태로 유리가 하려던 것은...
쪽-
일부러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가볍게 입술을 맞추는 유리의 태도에 세하는 굳어버렸다. 이렇게 거리가 가깝다면 자신의 이 미칠 듯이 두드려대는 심장 소리를 유리에게 들킬까봐,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거 같았다. 어쩔 줄 몰라하며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리는 세하를 보며 유리에게 말했다.
“이럴 때의 세하 얼굴 귀엽네.”
“...내 얼굴이 뭐가 어때서...”
“아니, 난 그런 세하 표정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쉽게 보여주지 않는 그 표정. 유리 외의 사람 앞에서의 세하는 의외로 무표정했다. 눈매가 날카로워서 정색을 하면 정말 화난 사람처럼 보이는 세하는, 그에 반해 유리와 단둘이 있을 때에는 표정이 다채롭고 풍부해졌다. 이 점을 유리는 참 좋아했다.
유리가 물었다.
“세하야, 키스...한 번만 더 해도 될까?”
“...”
세하는 살짝 입술을 매만졌다.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맞닿은 것뿐인데, 유리의 온기가 입술에 여상히 남아있는 듯 했다.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사람이 조금만 욕심을 내봐도 되겠지, 라는 마음도 안 들지 않았다. 세하는 서툴기는 하나 유리 앞에서는 되도록 솔직해지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었다.
세하가 유리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얼굴 윤곽이 그제야 좀 더 잘 보인다. 나른한 늦은 오후의 햇볕 때문일까. 유리의 얼굴은 평소보다 밝고, 살짝 뺨이 상기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세하가 유리에게 가까워졌을 때, 시간은 멈춰버렸다. 아니, 두 사람만 시간이 멈춘 것이라고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늦은 오후의 시곗바늘은 한없이 느리게만 흘러간다. 게다가 정적인 모노톤 배열의 세하의 자취방. 오후의 시간대는 느릿하게 흘러가는 그림자를 통해 시간이 얼마나 경과를 했는지 알려준다. 두 사람은 속으로 똑같이 생각했다. 이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추면 좋겠는데...라고.
한참을 부대끼던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유리의 뺨은 이제 보기 좋게 상기된 수준이 아니라 열이라도 있는가 싶을 정도로 붉게 변해 있었다. 그건 세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순간 타오른 감정이 연소되는 것을 느끼자 어색해진 유리는 반은 농담조로, 반은 감탄조로 이렇게 말했다.
“키스...많이 늘었네?”
“...어쩌다보니.”
세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아마 무슨 대꾸를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세하를 올려다보며, 세하의 옆얼굴을 쓸어내리며 제안했다.
“키스...또 할래?”
이번의 세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술 사이로 또 다른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작가의 말]
1.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편이 마지막편입니다.
2. 저번 유리 생일 때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느낌의 세하 생일축하소설입니다. 이번에는 시간 내에 썼네요.
3. <Bonus!> 는 리포트만 쓰다가 오랜만에 소설쓰는거라 아까 새벽에 가볍게 워밍업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