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Beside
AlphaE 2015-02-18 3
위상력 잠재력 A+.
또래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잠재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본인이 위상력 자체를 개화시키려는 노력이 없음.
현재 D + 급 차원종도 겨우 처리할 정도의 능력을 보유.
'혈통빨.'
'운 좋은 녀석.'
그게 나, 이세하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어린 시절, 위상력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받아야 하는 특수 교육을 들으면서도, 모든 교관들은 나에게 '그 클로저의 아들이니, 뭔가 다를 거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 기대에 어긋날 수록, 그 생각과 다르면 다를 수록 사람들은 실망했고, 뒤에서 '역시 부모님이 전설적인 클로저라고 하더라도 그 아들까지 특별하란 법은 없다.'라며 수군수군거렸다.
처음에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위해 발버둥 쳤다. 사실 나에게는 그만한 위상력이 잠재되어있기도 했고, 노력을 하면 할 수록 내 몸속의 위상력은 그 노력에 부응해주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었다.
노력해서 그 기대에 부응하면 더 큰 기대가 나를 기다리고,
더욱더 노력해서 큰 기대에 부응하면 더더욱 큰 기대가 나를 기다리고.
8살 즈음이었던가.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사람들의 기대라는 커다란 무언가에 죽을만큼 발버둥 쳐서 손가락 끝으로 그것의 표면을 매만진다고 해도, 그 감촉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머리로 계속 그 기대를 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점점 나에게서 멀어질 뿐이라고.
거기에 동료들은 단지 전설적인 클로저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자기들의 기준에서' 급격하게 성장한 나를 적대했다. 발버둥쳐도 위에는 닿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적대받는 삶. 그 어디에도 마음을 맡길수 없는 끔찍한 공간, 시간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나도 빠르게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이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것에 놀란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나를 설득 해보라고 따져댔지만, 어머니도 내가 클로저라는 위험한 직업을 하는 것을 그렇게 좋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위상력이 없는 나는 정말로 평범한 또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그 즈음해서 나는 게임에 빠져들어갔다.
그 중에서도 나는 rpg게임을 좋아했다.
평범한 사람이 우연한 기회를 얻어 능력을 얻는다거나 하는 소년만화 같은 스토리들은 왠지 모르게 나를 끌어당기기 충분했다. 그 게임 속 주인공들이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내가 강해진다는 느낌이 든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간단하게 강해지는 게임 속 주인공들이 부러웠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게임 속 주인공들이 퀘스트를 클리어할 때 NPC들이 하는 진심어린 감사, 탁월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 임에도 불구하고 질투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는 주인공들의 동료들. 현실의 나는 절대로 얻을 수 없었던 그것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조그마한 액정, 단순한 0과 1의 나열일 뿐인데도 나는 그 세계에 무의식적으로 몰두해갔다.
그렇게 게임에 빠져들어버린 나는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밤이든 낮이든 온통 게임기를 붙잡고, PC를 붙잡고 또 다른 세계로 내 정신을 내던졌다. 부모님이 걱정을 하긴 했지만 수업시간에 하는 짤막한 공부 덕분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리 학교가 공부를 못하는 것인지 성적은 그럭저럭 유지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해라.'라는 말은 있어도 '그만 해라.'라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날, 나는 우연히 프로젝트 검은양의 요원이 되었다.
새로 산 게임을 살 돈이 부족했던 시점이기도 했고, 그 프로젝트에 대해 알아보니 별다른 중요한 일을 맡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나는 그 일을 받아들였다. 물론 관리요원이나 윗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알고 있었겠지만 프로필을 읽었는지 나에게 별다른 기대를 거는 것 같지는 않는듯 했다.
그렇게 적당히 강남을 순찰하는 척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눈이 빈다 싶으면 구석에서 게임이나 하는 삶이 될 줄 알았다.
검은양의 리더, 이슬비를 만나기 전 까지는.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인 데다가 그 녀석이 클로저라는 사실까지 알고는 있었지만, 선천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나와는 다르게 그 녀석은 순수하게 노력으로 강해져왔다는 걸 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녀석의 몸위에 가늘게 새겨진 잔상들이 나에게는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안 순간, 왠지 모르게 녀석이 조금 꺼려졌다.
나와는 극과극을 달리는 녀석이었기 때문인지, 슬비도 나를 그다지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니, 싫어했다. 학교에서부터 내가 게임을 할 때면 달려와 게임기를 압수하는 녀석과 그것에 항의하면서 게임기를 돌려받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는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 녀석과 같은 팀이라니. 이 프로젝트 입안자, 사전 조사 같은 건 엿이나 바꿔먹었냐며 입으로 한참을 씹어댔던 것 같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저 녀석과는 절대로 엮이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지만 그 다짐은 우리 팀이 정식으로 발족한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강남 한복판에 출현한 거대 차원종, 말렉. B급 차원종의 위상력을 가지고 있다 순식간에 A급 차원종으로 변해버린 녀석과 대치하던 나와 이슬비는, 그 녀석이 휘두르는 압도적인 양의 위상력을 머금은 주먹에 의해서 어떤 빌딩 한 구석에 쳐박히고 말았다.
새파란 위상력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한 가운데 흘러내리던 붉은 피들.
아찔한 핏물냄새가 코끝을 찔러대고, 정신이 혼미해져 이대로 죽는건가. 아직 클리어하지 못한 게임이 있었다며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던 와중, 똑같이 전신에서 피를 흘려대고 있던 이슬비가 곧 끊어질 것만 같던 음성으로 나를 갑자기 불렀었다.
"이....세하."
".......왜... 부르냐.... 이..슬비.."
여전하다면서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만 같은 미소를 지은 그 녀석은, 자신이 어떻게 클로저가 되었는 지에 대해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습격해온 거대한 차원종, 그 우악스러운 공격에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자신의 부모님. 그리고 기구하게도 그 순간 개화해버린 자신의 위상력.
그래서 그녀는 노력했다. 자신을 이런 운명에 던진 차원종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자신의 손에 쥐여진 것은 실낱같은 위상력 뿐이었지만 그 실조각이라도 원수들을 벨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도록 그녀는 노력해왔던 것이다.
나만큼이나, 아니 나 이상으로 기구한 운명이라며 나는 짤막하게 그 이야기에 대한 말을 남겼다.
"이세하.... 너는.... 도대체....왜 그런거야?"
"뭘... 말야."
"너는 나랑 다르게.... 위상력이 넘쳐 흐르잖아...? 차원종을 쓰러트릴 능력이 너에겐 충분했잖아..... 넌 왜 언제나 네 자신의 능력에게서 눈을 돌렸던거야?"
"......나는.... 말이야."
녀석의 입에서 피 한 줄기가 주르륵, 하고 흘러내렸다. 배를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밑으로 눈을 살짝 내리자 온통 찢어진 옷 사이에 사람의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난장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쥐어 짜 눈을 감고선 내 이야기를 말했다. 그 녀석이 내가 놀란 것을 모르게 하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녀석은 내 상태를 알지는 못했는지 후, 하고 짤막한 한숨을 내쉬더니 그 흐트러진 분홍색 머리카락위에 덕지덕지 묻은 피를 가만히 매만졌다.
"......세하..야...."
"괜찮냐....?"
"아직.... 멀쩡해..... 저기, 세하야."
"왜. 이슬비."
입가에 침처럼 고인 피를 한 쪽으로 흘리며 대답했다. 그나마 대답이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해진 것을 확인한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지었다.
"....만약, 우리가 클로저가 아니었다면.... 아니, 클로저라는 게 없는 평화로운 세계였다면.... 너와 나는 어땠을까?"
"....글...쎄.... 어려운 질문인데...."
"풋. 그렇지..? 하긴, 다 의미없네..... 여기서 죽으면... 모두 끝이니까. 다음 생에는.... 그런 세계에서 태어나고 싶다.."
하아, 하고 나즈막한 한숨을 쉰 이슬비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눈을 감지 말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내 시야마저 흐려지는 판국에 녀석을 부를 정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저 녀석을 눈감게 할 수는 없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슬비...! 눈 감지...마아!"
"....."
입 속에서 피가 보글보글, 하고 거품이 일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끔찍한 맛을 느끼며 간신히 흐려지는 시야를 틀어놓은 나는 다시 이슬비를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 지는 모르겠다. 아니,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단지 새파래진 시야 사이로 이슬비를 향해 소리칠 수 있다는 사실이 한껏 고마웠다.
"지금 눈 감지마! 현실에서 도피하려하지 말라고! 차원종도, 클로저가 없는 평화로운 세계? 그런게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지금 너랑 내가... 살고있는 세계는 그런..세계가 아니잖아..! 퉷. 우리가 살고있는 곳은 거지같지만.... 진짜 있어서는 안 될 곳 같지만 저 거지같은 차원종들이 들끓는 세상이라고... 평화로운 세계가 아니란 말이야!"
"이... 세하... 너...."
"그렇다고 해서 그 세상에서 도망치는게 해법이야? 눈 감았다 뜨면 평화로운 세계가 있기를 기다리면서 죽어가는게 해법이냔 말이야...! 난 바보니까 어려운 건 몰라. 재능으로 클로저가 되었고, 노력같은 건 쥐뿔도 해본 적 없으니까 그딴 건 모른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 바보같은 나도 그게 아니다 싶은걸 아는데, 네가 그걸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소리를 질렀다.
나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아온 녀석에게.
그리고 나와 너무나도 똑같은 삶을 살아온 녀석에게.
아무 것도 없었기에 외로웠던 너.
모든 것이 있었기에 외로웠던 나.
너무나도 다르지만, 너무나도 같은 너를 난 아직 떠나보낼 수가 없다고... 이슬비!
"거지같은 세상이라면 바꾸면 돼. 저 밖에서 기어다니는 빌어먹을 차원종을 죄다 차원문 너머로 던져넣으면 되는 일이라구..! 바꿀 수 있는 일이잖아. 너에게도 그 힘이 있잖아! 위상력이라는 빌어먹을 힘이라는게 말이야!"
"....바보 같은 소리 마.... 너도 알잖아? 난 지금 죽어가고 있어.... 설사 기적같이 우리가 살아난다고 해도, 기껏해야 훈련생인 내가 차원문을 닫는 클로저가 된다는게 말이나 되냔 말이야..."
이슬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같았다. 하지만 그 입은 아직 아쉬움에, 아직 저 차원종들을 내쫓지 못했다는 분함에 일그러져있었다. 그것으로 좋았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으로, 나는 녀석에게 말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내가 도와줄게...!"
"....!"
"내가, 내가 도와줄게. 내 재능, 너의 노력. 그 두 개라면 어쩌면 가능할거야...! 저 차원종들을 쫓아내는, 진짜 클로저가 되는게 말이야.... 그러니까 죽지마! 뭐든지 도와줄게, 뭐든지.... 내 재능이든 뭐든 너에게 갖다바쳐 줄테니까, 네가 그렇게 바라는 클로저가 되어줄테니까! 제발 죽지말라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이슬비에게 손을 뻗었다.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위상력이 시야를 파랗게 물들였다. 그 사이로 나는 이슬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죽기 싫잖아. 아직 너도 살고싶잖아!"
"...세하....야...."
"나도 살고싶어. 네 녀석이 사는 모습을 아직 나는 보고싶다고!"
"........."
"너는 죽고싶어? 이대로,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싶냔 말이야...."
"....나는.... 나는......"
이슬비는 몸을 뒤척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 끝에서 붉은색 피가 방울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입가가 파르르, 하고 한 번 떨리더니, 푸른색 눈동자에서 물방울이 흐르기 시작하며 뺨에 묻은 피와 섞여 붉은 자국을 만들어 나갔다. 붉은 얼룩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이슬비는 나에게 말했다.
살고싶다고.
이대로 죽고싶지 않다고.
그리고 그대로 뻗은 이슬비의 손을 꼭 쥔 찰나 -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가 날아와, 우리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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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도 있었지."
G타워 꼭대기에서 나는 바람을 맞으며 중얼거렸다. 펄럭이는 요원복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있었다. 한 손에는 게임기, 그 밑에 펼쳐진 강남은 사라진 데미플레인으로 인해 찾아온 평화.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이란 말인가. 최고다, 최고.
"이런 날에는 마지막 남은 퀘스트를 클리어 해줘야지...!"
그리고 손에 들린 PX Vita를 켜 게임을 하려던 찰나 -
팍, 하고 내 게임기를 움켜쥐는 검은색 장갑이 있었다.
"세하! 내가 게임하지 말랬지!"
".....슬비야. 좀 봐달라고.... 어제 데미플레인을 없앴는데, 벌써 일에 찌들라는 거야? 휴가정도는 달라고... 이거 클로저는 근로기준법도 적용 안 되는 거야?"
"시끄러워. 이미 위상력때문에 아스타로트가 수 천마리 뱀을 보내도 자상조차 안나는 주제에."
"그, 그건 너 때문이잖아. 그 날 너 때문에 이렇게 위상력이 개화한 거라고. 그리고 위상력이 강하다고 해서 안 피곤한 것도 아니잖아. 왜, 그 저번에도 밤에 너랑그거하고...."
갑자기 슬비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검은색 가죽 장갑의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그보다 이거 좀 더럽지 않나?
"....더럽잖아. 우씨."
"시, 시끄러워! 그 일을 멋대로 말하려고 한 네 잘못이야. 자, 재해복구로 할 일이 많다구! 빨리... 따라와."
마지막으로 분홍색으로 가득한 얼굴을 한 이슬비는 푸른 눈을 괜시리 나에게서 돌리며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하아. 츤데레 녀석. 이미 검은양에서도 알 사람은 다 안다고.
나는 '파란색으로 변한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일어났다. 무심코 들어올린 눈에 비친 푸른색으로 다시 변한 강남의 하늘은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에휴, 어쩌겠냐. 분위기상 그런 말을 한 내 잘못이지."
쩝, 하고 입맛을 다시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연애라고 해도 이렇게 맨날 시달리는 생활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즐겁다. 왜냐하면 이슬비랑 같이 있으니까. 맨날 틱틱거리다가도 한 번 드러나는 그 미소를 보게되면 얼마나 기쁜지. 그 맛에 이 생활을 하는 거지.
나는 PX Vita를 끄고 주머니에 넣은 후 뒷짐을 진채 이슬비를 따라갔다. 저 멀리서 고개를 돌린 채로 나를 바라보는 이슬비의 표정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이고, 재촉도 심해라.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