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울어
루이벨라 2018-12-09 4
※ 짧음주의
-울어.
-...
아마 그 때 당시에 세하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을 것이다. 굳이 숨어서 우는 행동에 기가 차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마음껏 울지 못하는 유리를 보며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세하는 한 번 더, 목소리를 꾹꾹 눌러 담아 유리에게 말했다.
-울으라고.
-...
-그렇게 참으면 병 된다.
무뚝뚝하지만 유리를 걱정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었다. 유리는 억지로 삼킨 눈물이 다시 나올 것만 같아서 입을 앙 다문 채 더듬더듬 말했다.
-나...우는 모습...정말 못생겼는데...
-우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어?
다른 이유라. 사실 그 ‘이유’ 라는 것 때문에 유리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타인에게 그걸 알려주자니 사소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평소의 유리라면 그냥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조금 전의 토해낸 감정이 그런 사소한 것에서도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예민해져 있었다. 즉, 그 때의 유리는 무언가를 실토해내기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쭈그려 앉은 유리가 손가락으로 땅에다가 아무 그림이나 그렸다. 원 모양이 계속 이어지는 걸 보면 말을 하는데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닌 듯 했다. 그래도 유리는 고맙게도, 참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지금 다들 힘들잖아. 힘든데 나라도 씩씩해야지...
유리의 당연하다는 말에 세하는 의문을 가졌다. 뭐, 저렇게 자기 힘든 게 당연하다는 듯이 묵묵히 받아들이려는 사람이 있을까. 정말 섣불리 다가가기 망설여지게끔. 세하가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책임 의식 어디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거야?
-책임 의식?
-그래, 책임 의식.
유리는 눈을 깜빡였다. 책임 의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당연한 건줄 알았다. 아빠가 힘들어할 때, 엄마가 한숨을 쉴 때, 참담한 표정의 코치님을 볼 때 등등...유리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울상인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래서 웃고, 웃고, 웃고, 또 그렇게 웃고...!!!
어느 샌가 숨어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것조차 죄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거 너무 성격 좋은 거 알아?
-칭찬인거지?
-칭찬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칭찬만으로 끝낼 생각 아니라는 건 알아둬.
세하가 유리의 옆에 앉았다. 아마 이야기를 길게 할 심상인 모양이다. 흰색의 요원복이 흙에 묻을 텐데도 세하는 영 개의치 않아했다. 무심하긴 하지만 쿨한 세하를 볼 때마다 유리는 세하가 참 자기 자신을 가지고 사는 듯 했다. 주변 상황이 변할 때 세하는 나름 침착해 보이니까. 그 말은 주변에 곧장 휘둘리는 자신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세하가 운을 띄웠다.
-그러고 보니 난 네가 웃는 얼굴 외의 표정을 본 적이 별로 없는 거 같아.
표정이 풍부하다고 생각을 해왔는데, 잘 따져보면 대부분 웃는 얼굴로 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것이 웃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하가 가장 좋아하는 유리의 장점 중 하나였다. 웃음이 너무 이뻤다. 자기와는 다르게 티 없이 맑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그게 억지로 해내려고 노력을 한 것이니, 더더욱 놀랍기까지 하다. 유리가 중얼거렸다.
-난 이렇게 살아야 해.
-살아야 해? 누가 그걸 정해줬어?
-어...그러니까...
그러게. 누가 그걸 정해준 것도 아닌데 왜 그 틀 안에서만 살려고 했을까? 유리는 크게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 당황한 유리의 표정에 대충 파악이 된 세하는 여느 때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한 마디만 더 할 뿐이었다.
-목적지로 가는 데에 한 가지 길만 있는 건 아니잖아.
-...
-조금 더, 느긋하게 풀어도 되는데.
꽉 조여 있으면, 힘들잖아. 걸을 때마다 숨도 차오르고. 쉽게...지쳐버리기도 하지.
참으로 상냥하다. 따듯한 허브티를 입에 가득 머금고 있는 기분이다. 그만큼 너무 따스하고...모든 걸 털어놓게 되어버려서...그만 세하의 품에서 울어버리고 말았다. 세하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은 뻘줌한 지 조금은 품에서 떨어지려고 하는 유리를 꼭 붙잡아주고 등도 토닥여주었다.
세하의 품은 참 강인하고 따스했다. 유리가 느낀 세하의 이미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속 시원하게 다 울고 난 유리가 코를 팽 풀며 세하에게 물었다.
-나 우는 거 역시 못생겼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기분은 좀 나아졌어?
-응...그런데 울고 나니까 조금 출출해.
-이거라도 먹을래? 초콜릿.
세하에게 있는 의외의 사실. 이 아이, 매운 것 못지않게 단 것도 매우 좋아한다. 마침 단 것이 먹고 싶었던 참이라 유리는 염치 불구하고 세하에게서 초콜릿을 받았다. 한 조각 작게 부숴 트려 입 안에 쏙 넣어본다.
다크 초콜릿이 아닌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달달함이어서 기분이 훨씬 풀렸다. 자연스럽게 미소가 입가에 감도는 유리를 보며 세하가 말했다.
-이제 정말 괜찮은 거지?
-응. 고마워...나 짐이 된 기분이야.
-그런 거 가끔은 풀어놓아도 된다니까.
-세하는 무척 듬직하네.
그거 칭찬인 거지? 응, 칭찬이야. 농도 가볍게 풀 줄 알고 잘 되었다. 세하는 웃었다. 역시, 유리가 웃는 얼굴을 보는 게 더 좋았다. 세하가 쓰라린 제 자상을 숨기며 생각한 것이었다.
* * *
“그 일 기억 나?”
“그랬던 적이...있지.”
잔잔하게 눈웃음을 띄우는 유리의 물음에 세하는 어물쩍 넘어갔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니 유리가 부엌 식탁에 앉아 세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꽃받침까지 예쁘장하게 하면서 자신을 기다려준 유리가 참 고마웠지만 지금 세하에게는 한창 열렬하던 시절의 추억 회상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 아니,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곧 불어 닥칠지도 모르는 불안한 미래가.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갑자기 꺼내?”
지금 짓고 있는 호선이 미소처럼 보이길 바라며 세하가 물었다. 그에 대해 유리가 말했다.
“지금 세하가 울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이번에는 세하가 놀랄 차례였다. 동그랗게 뜬 세하의 금안을 보며 유리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때의 세하도 아마 저 비스무리한 걸 보았을 테지. 그래서 드는 생각은? 착잡하고 걱정이 되었다.
“무슨 소리야.”
세하는 자신의 입가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유리는 그거에서도 엄청 예리했다.
“억지로 웃지 마. 그거 내가 몇 년 전에 했던 거잖아. 난 이제 졸업을 했는데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그러기 있기야?”
“...”
그럴 수도...있지. 아니, 그 때의 세하도 이렇게 가면을 쓰기 급급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은 변한 게 없다. 그리고 꾸준히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유리가 눈이 부실 정도로 부러울 뿐이다.
“꽤 예리한 관찰력이네.”
“같이 얼굴 보고 산지가 어느 세월인데.”
“그래, 지금의 내가 울고 싶어 한다고 치자. 그러면 넌 무엇을 해줄 건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리가 청량한 어느 봄의 아침햇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안아줄 거야. 세하가 훨씬 커서 내가 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꺼이 내어줄 수 있어.”
“...”
“토닥여도 줄 거야. 세하가 진정이 될 때까지. 그리고 그 다음은...”
“초콜릿?”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는 너무도 천진한 그 태도에 웃음을 순간 터트려버렸다.
봐라, 이거 내가 다 해주었던 것이지 않은가. 역시, 보고 배운 사람을 따라하는 건가? 그래도...막상 해주면 싫지 않을 거 같았다. 지금의 세하는 유리의 말대로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었으니까.
세하는 걸치고 있던 코트를 의자에 걸어 놓았다. 꽉 죄고 있던 넥타이도 느슨하게 풀었다. 세하가 고개를 까닥이며 손을 뻗었다.
“자, 그러면 이제 나 위로받을 준비 다 된 거야?”
“응.”
좋다, 이제 마침 눈물도 훌륭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유리가 원하던 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세하가 덩치가 더 커서, 그만 세하가 유리를 안아버리는 것이 되었다는 것. 그래도 좋았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유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세하가 속삭였다.
“나 우는 거 못생기면 어쩔까.”
“세하는 뭘 해도 다 잘생겼으니 걱정하지 마.”
“응, 고마워.”
그냥 모든 게 다 고맙다. 하나하나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