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세하 - 5 (스포 有)
WinterFlower 2017-11-17 0
언젠가 인간의 싸움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싸움의 흔적만이 남은 유니온 타워 옥상엔 그을린 자국,
무언가 뚫린 듯한 바닥뿐이었다. 뉴욕에서도 독보적으로
높은 타워
위였기에 바람이 거칠었다.
둥근 원 모양의 옥상 중심을 한 남자가 걸었다. 바람에
길진 않은 머리가 휘날렸지만, 그가 쓴 노란색 안경
덕분인지 그의 시선은 완고하게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어머 어서 와 제이. 꽤
늦었구나?”
“뭐야 저건…. 대체 누가
저기를…”
옥상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채 제이는 어느덧 창공에
부유하듯 나타난 차원문을 응시했다. 자신의 전우,
데이비드의 폭주와 함께 나타난 차원문 안에서 느껴지는
위상력과 위상력의 힘겨루기는 몇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을
유니온 타워 옥상에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제이는 그제서야 유난히 강해진 듯한 바람이 신세계의
문에서 일어나는 힘 싸움으로 일어난 것임을 깨달았다.
“설마, 저기에?”
제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이마에
어느샌가 식은땀이 흘렀지만, 강풍이 이내 그것을 식혔다.
제이는 한 소년을 찾으러 홀로 나섰다. 그의 흔적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신세계의 문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그것을 재밌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는 백발의 소녀, 더스트가 전부였다.
제이는 부유하는 차원문의 괴현상의 주인공이 데이비드임을
확신했고 그 상대가 누군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는 그는
자기 생각을 스스로 외면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땅을 내려다보며 절망하던 제이는 느닷없이 정면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상하기 짝이 없는 옷을 입은 소녀가 마치
춤을 추듯 한 발자국씩 우아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다
더스트와 제이가 눈이 마주치자 더스트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정답!’이라고 말해주었다.
“어머?”
그 한마디와 함께 더스트는 자신을 공격해온 제이의 반대
방향으로 크게 도약했다.
“소용없어. 이미 세하는 나의 힘을 받아들였다고? 세하에게
힘을 나눠줘서 당장에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네가 목숨을 걸어도
이길
자신은 있어.”
제이의 주먹은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냉정하던 그는 잇몸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이를 악물며 더스트를 노려보았다. 제이는
곧 몸 안에 흐르던 위상력이 흐트러짐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더스트를 잡아먹을 듯 날카로웠지만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모습이 우습다는 듯
더스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았다.
“세하가… 네 녀석의 힘을
받아들였다고?”
“그래. 내 힘의 절반
정도를 나눠줬지.”
“절반? 그 정도를 받아드릴 수 있을 정도로 세하의 잠재
위상력이 높지는 않을 텐데.”
“클론들 알지?”
제이는 더스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우리와 싸워도 밀리지 않는 가증스러운 알파퀸의 클론들이
오리지널에 미치진 못하더라도 그 위상력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그릇이란 말이야?”
“그래서?”
“전부 흡수했어.”
“뭐?”
“세하 말이야, 정확히 일흔여덟 클론의 위상력을 흡수했어.
적은 위상력이지만 그릇만큼은 커질 대로 커진 거지. 그리고
드럼통처럼 커진 그릇에 나의 위상력을 담았을 뿐이야.”
“네 힘을 절반이나 넘겼다는건….”
“그래, 이세하는 이제 인간이며 차원종인 존재야. 인간과는
내장 구조부터가 달라져 버렸어. 힘을 받아들였을 때 비명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너무 짜릿했어!”
“되돌릴 수는 없는 건가?”
“못해.”
“그렇다면 오직 너밖에 되돌릴 수 없는 것이군.”
“못한다니까?”
“… 뭐?”
“나보다 강해진 생물에 어떻게 간섭하겠어? 나의 힘이지만
지금 이세하에게서 힘을 되찾으려 한다면 오히려 내가 힘이
다 빨려 죽을걸? 음… 너희 인간이 먹는, 뭐지…? 그래! 곶감처럼.”
“대체… 세하는 무슨 존재가 되어버린거야… 그 누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네가, 너희가 무슨 수를 쓰지 못할 정도로
강해졌다는 거야?”
제이는 어느새 더스트 옆으로 날아온 애쉬를 보며 말했다.
“우리의 염원을 위해서다. 제이. 너는 잠자코 있으라고.”
“염원?”
제이는 애쉬에게 되물었다. 소녀와 소년은 그런 제이를 보며
꺼림칙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
“조건을 말해.”
이세하의 답에 더스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뚝뚝하게
선 이세하의 주변을 원을 그리며 걷던 더스트는 다섯 번째 걸음을
내딛으며 말을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왕이 되었으면 해.”
“…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는 군단의 지휘자들이야. 하지만 너희 인간이 나라를
세워 천 년이 넘도록 전쟁을 반복해왔던 것처럼 우리들,
차원종도 같은 짓을 반복해왔어.”
“인간에 대해 꽤 많이 공부한 모양인데.”
“적지 않은 만큼. 신기할 정도로 너희 인간과 우리의 역사는
비슷하거든. 어정쩡하게 베낀 그림 마냥.”
“그래서. 어째서 왕이
필요한 거지?”
“차원종을 하나로 뭉치게 할. 거대한 힘이 필요해. 나와
애쉬는 충분히 강해. 너희 인간이, 특히 네가 태어난 한국이란
나라에서 자주 듣던 표현을 쓰자면 상위 0.001 % 정도의
강함을 지니고 있어.”
“그러니까. 그 정도로 강한 네가 다른 집단의 우두머리를
쓰러트려서 차원 세계를 정복하면 될 텐데, 왜 굳이 나의
힘을 쓰려는
거지?”
“강자는 우리가 아니더라도 꽤 있어. 티어매트, 언젠가
부활할 아스타로트, 정신체만 남아 언제 돌아올지 모를 아자젤.
그외에도 메피스토와 바이테스만 나열해봐도 강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거야.”
이세하는 더스트의 말을 경청했다.
“우리의 염원 말이지. 우리는 차원종을 하나로 뭉쳤으면 해.
이름 없는 군단이란 호칭이 필요 없어지도록. 그저 차원종이라는
수식어가 존재하는 세계가 되도록. 하지만 그러기엔 압도적인
힘이 필요해. 나와 애쉬가 경외할 정도로. 그저 힘의 차이로
무릎이 저절로 꿇어질 정도로, 신격화되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그런 힘이 필요해.”
“그래서 나를 선택했다는 거군.”
“우리가 애를 먹어도 이상할게 없는 서지수의, 그보다 강한
잠재력을 가진 네가 이리나의 힘을 흡수했어. 아자젤의
위상력이 원천인 그 힘까지 흡수한 너는 이름 없는 군단의
정점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어.”
“그렇게 차원종을 하나로 뭉치면? 네게
남는 것이 뭐지?”
“적어도 다른 녀석들의 위협을 피할 수 있겠지. 우리는 적잖은
적을 만들었어. 고의로든 타의로든. 그러니 우리는 왕에게
보다 가까운 존재가 되어 권력을 지켜야해. 네가 아니었다면
‘하나’가 되어서라도 이 자리를 지켰을 거야.”
이세하는 조금씩 커지는 신세계의 문을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했다.
임시본부가 있을 방향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자신이 서있는 유니온 타워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차원종은 강자를 따른다 했었지?”
“강한 자가 법이며 질서. 그것이
우리의 사고방식이지.”
“좋아, 되어주겠어. 너희의 왕이.”
“좋은 선택이야. 만일 거절 했다면 필사적인 너에게 한쪽 팔이
잘리더라도 죽였을 거야.”
“… 빨리 시작해.”
*
“젠1장—!”
제이는 텅 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안드로이드가 작동을 멈춘 채 누워있었고 그 철의
시체가 가르키는 방향은 언제나 일정했다. 그것은 신세계의
문의 입구로
향하는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였다.
숨이 차오를 정도로 달린 제이는 어느덧 자신이 그 입구에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제이는 빠르게 앞으로 내딛던
걸음을 멈췄다. 그는 두려웠다. 데이비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세하가, 자신을 잘 따르던 동생 같은
소년이 보금자리를 떠나, 숨이 막힐 정도로 차갑고
고독한 곳으로 향한다는 것이 자해 충동을 일으킬 정도로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의 모범이 되고 지표가 되어줘야
할 어른이었다. 그랬기에 제이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신세계의 문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저 한걸음의 차이였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뉴욕도,
플레인 게이트도 아니었다. 밝았다. 차원압과 전혀 다르게
생겼지만, 인간계와도 전혀 다른 장소였다. 빛이 새어
나오는 열쇠 모양의 무언가가 바닥에 꽂혀있었고 그 앞에
먼발치서 두 사람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제이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제이가 도착했을 즈음엔 한 사람이 바닥에 쓰려져 있었다.
데이비드의 형상을 띄고 있었지만, 피부가 희게 변하고
마치 성경에 나오는 한 인물을 모방한 듯한 모습의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제이의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그 앞, 무신경하게 서 있는 머리가 새하얀 남자를
보며 제이는 손을 뻗었다.
“세…하니?”
“제이형...”
들려온 목소리에 백발의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제이의 바람대로 이세하였다. 하지만 제이의 바람은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 그 모습은”
제이의 말에 이세하는 소리 내며 허무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제이 형. 저는 이제 더는 돌아갈 수 없어요.”
이세하의 머리는 하얗게 새어있었다. 그가 렌즈로 가릴
정도로 혐오하던 금빛 눈동자는 차원종들의 것과 같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이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황이 답답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세하가
원하지 않음에도 새어 나오는 힘이 제이 전신을 마비시켰기에
제이는 과도한 긴장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세하는 곧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그것을 제이에게
던졌다. 제이는 몸이 마비된 듯 굳어 있었지만,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았다. 제이는
이세하가 던진 물건을 보았다.
“요원증…? 너 정말로…”
“그동안 고마웠어요. 유정이 누나한테 그동안 고마웠고
너무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유리한테도, 테인이 한테도.
그리고... 슬비에게도.”
이세하의 등 뒤에 차원의 균열이 일어났다. 제이는 그것이
애쉬와 더스트가
오가던 통로와 똑같이 생겼다고 확신했다.
“세하야!!!”
제이는 몸을 던져서라도 이세하를 막으려 했지만 이세하는
이미 차원문 너머로 걸어갔고 제이가 이세하에게 닿으려는
순간 차원문은 닫혔다.
*
[임시본부]
“적들이 갑자기 전부…”
“멈췄습니다.”
일선에서 적들과 싸우던 검은양 팀과 늑대개 팀들은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며 하나둘씩 쓰러지는 기계병들을
보았다. 곧 창공에 뜬 신세계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았다.
“데이비드가 죽었나?”
“베로니카! 확인해봐, 어서!”
“두 개의 위상력이, 거대한 위상력이 부딪혔어. 그리고….
거의 동시에 둘 다 사라졌어…”
“대체 무슨 일이…”
밤이 깊어졌다. 검은양팀과 늑대개팀은 큼지막한 책상을
둘러싼 채 통신기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근심이 서려 있었고 그중 특히 김유정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천막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그 사내의
얼굴을 본 순간 가장 먼저 그에게 달려간 사람은 김유정이었다.
“제이 씨!”
제이는 자신을 덮치듯 달려오는 김유정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어째서 이제야 오시는 거에요?!! 분명히 통신 장치가
닿지 않은 거리까지 간다면 다시 돌아오기로…”
제이는 김유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부서진
단말기를 보여주었다.
“부서져 버렸어. 이미 어두워져서 귀환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 거야. 미안해, 유정
씨.”
“… 그런데 세하는 어떻게 된 거죠?”
제이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곤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트레이너와 김유정은 제이의 보고를, 유니온 임시본부 안,
모든 병사에게 전했다. 데이비드의 사망 확인, 이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가 환호를 질렀다. 그 날, 임시본부는
떠들썩했다. 불이 들어온 천막마다 소리를 지르고 술을
마시며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어느
한 천막에서 웃음소리가 아닌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승리를 만끽하는 환호성에 묻혔기에,
아무도
그것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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