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릴까요
루이벨라 2016-12-25 19
"♪~"
콧노래를 흥겹게 부르고 있는 유리. 유리의 뺨에는 보기 좋아보이는 홍조가 발그레 피어있었다.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걸까. 언제나 활기찬 유리지만, 오늘따라 더 활기차고 들떠보였다.
"유리야, 무슨 일 있어?"
"까, 깜짝이야!"
살며시 어깨에 올려진 슬비의 손에 유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걸까, 이 아이는. 그 상대가 슬비라는 걸 알아채자 유리는 잔뜩 붉어진 제 뺨을 감쌌다.
"슬비였구나..."
"뭐 들키면 안되는거 들킨 사람처럼 왜 그러니."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혹시 이세하랑 데이트 약속이라도 있어?"
운을 떠보며 던진 한마디에 유리의 얼굴은 삽시간에 새빨간 홍당무가 되었다. 역시 그 이유였구나. 날짜를 되새겨보니 오늘은 12월 24일. 아...크리스마스구나.
세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검은양 팀이 동시에 2가지 임무를 받아 할 수 없이 팀을 둘로 나누어 요 며칠동안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비와 유리, 미스틸은 신서울에 남아있었고 제이와 세하는 대전 쪽으로 임무를 나갔다.
아, 그래서 오랜만에 세하를 만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거구나. 슬비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퍼졌다.
"안 본지 며칠 되었지?"
"한...5일 정도 되었나? 오늘 연락 왔어. 임무가 다 끝나서 오늘 신서울로 올라갈 수 있다고."
"좋겠네."
언제부터 둘이 사귀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처럼 알아챘을 때는 사귀고 있는 상태였다. 봄에는 벚꽃이 핀다, 겨울에는 눈이 온다, 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둘은 어느새 사귀고 있었고 검은양 팀은 그 둘을 당연히 축하해주었다.
다행히 유리와 슬비쪽도 일이 거의 다 마무리가 되어가는 상태였기에 오늘은 일찍 집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유리는 구름이 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릴까?"
말이 아닌, 노래라고 해도 될정도로 이쁜 음색을 띄고 있는 유리의 말에 슬비는 말했다. 글쎄, 일기예보에서는 50% 확률이라고 하던데. 반과 반의 확률. 유리는 살짝 부루둥한 표정을 지었다.
"50, 50이 뭐야...이왕이면 100과 0으로 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고보니 요 몇년간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
눈이 내리는 걸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리는 걸 한번쯤 원했을 것이다. 이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왠지 더 보람찬 하루를 보낼 거 같은 기분이지 않나.
"슬비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좋아해?"
"크리스마스라는 분위기가 나니 나름대로 좋아해."
자료 정리가 거의 끝나갈 때쯤, 갑자기 유리가 쿡 웃었다. 마치 희미했던 기억의 퍼즐이 하나,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른 것처럼.
"그러고보니 생각난다."
"뭐가?"
"처음 신서울로 이사를 왔던 해에,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렸어."
* * *
-와아, 눈이다!
-유리야, 조심해. 넘어져!
그때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잘 몰랐어. 그냥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려서 막연히 좋았던거 같아. 왜, 눈이 내리는 풍경은 예쁘잖아. 그 해에는 눈이 폭설처럼 온것도 아니었어. 그저 크리스마스에 잠시 지나쳐가는 손님처럼 가볍게 내렸지.
그리고 그 해에 처음으로 내린 눈이어서 막 눈을 밟아보고 싶은거야. 그래서 미끄러질수도 있다는 엄마 말씀 가볍게 무시하고 막 뛰어다녔다. 참 기분 좋았어. 뺨은 차가워지는데 왠지 점점 더 놀고 싶은? 그런 기분.
그게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닌데 아직도 그 일이 기억에 남아. 그래서 으레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혹시 다른 이유가 같이 있는거야?"
슬비의 질문에 유리가 씩 웃어보였다.
"그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나한테 동생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어."
그 후로 태어난 동생들은, 말썽을 부리기는 했지만 유리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가족이었다. 동생들이 처음 왔을 때가 떠올랐다. 너무 작아서, 인형인줄 알고 몇번 뺨을 살짝 눌러본 적도 있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는, 유리에게는 특별했던 크리스마스로 기억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사 간 집 옆집이 바로, 세하네 집이었던거 있지?"
"그때부터 알았던거야?"
"아니, 세하 이 녀석이 어찌나 낯을 가리던지 내가 인사를 해도 그냥 본체만체 하고 그냥 가더라고. 그래서 어디까지 가나 보자, 하는 오기로 볼 때마다 인사를 했어. 그러더니 결국은 인사는 해주더라고."
그리고 세하가 처음으로 유리의 인사를 받아주던 날도 크리스마스였다. 인사를 받아주고 한참동안 쭈뼛거리며 있다가 세하는 유리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고 집으로 도망치듯 달아났었다. 세하가 준건 쿠키 봉지였다. 크리스마스 시기였던 만큼 트리며 지팡이 사탕 모양이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모양의 쿠키가 가득 들어있는 봉지였다. 그날 유리는 그 쿠키를 부모님과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옆집 아이가 주었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 일을 계기로 조금은 껄끄럽게 자신을 보던 세하가 조금은 자신과 가까워지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소꿉친구' 관계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야 그때 준 쿠키를 세하가 직접 만든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놀라는 유리에게 세하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난 언제나 쿠키를 구워. 하지만 많이 만들어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라고 세하가 덧붙였다. 그 때 금방이라도 울거 같은 세하 표정을 보고 유리는 곧장 물었다. 그 쿠키 아직도 남아있어? 남아있다는 말에 유리는 지금 집에 가서 마저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유리의 말에 세하는 그제서야 얼굴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 날, 둘이서 쿠키를 잔뜩 먹었더랬지. 그 후로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세하는 적지 않은 양의 쿠키를 유리네 집으로 보냈다. 유리의 동생들이 커가면서 점점 양도 많아졌다. 하지만 맛은, 언제나 변함없이 맛있었다.
조금은 예민해져 자연히 멀어져가는 중학교 3학년 때에도, 고등학교 1학년 때에도 세하는 쿠키를 계속 주었다. 단순한 모양의 쿠키가 아닌 여러 종류의 쿠키(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생강쿠키를 잔뜩 만들어서 주었다. 맛은 일품이었다)로, 점점 진화해갔다.
올해도 쿠키를 주려나. 아니지, 올해는 신서울까지 오는 것도 많이 벅찰텐데 쿠키를 만들 시간이 있겠나. 그저 이 하루를 세하와 같이 보낸다는 것으로도 감사하다고 여겨야지.
* * *
약속 장소에 먼저 와버렸다. 너무 들떠서 도저히 집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약속 장소에는 적지 않은 수의 커플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다정한 모습이었다. 결국 눈은 50% 확률로 오지는 않았지만 형형색색의 전구로 인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영 나쁜 것도 아니었다. 생각보다 춥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폰으로 시간을 보자 약속시간까지는 10분 남아있었다. 너무 일찍 나온걸까?
5분이 지났다. 이제 슬슬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세하는 적어도 5분 전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는, 약속 개념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세하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불길해졌다.
약속 시간에서 10분이 지났다. 차가 막히나. 하긴, 세하가 전화로 그랬다. 차가 막히지 않는다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거 같다고. 오늘은 누구에게나 다 특별한 날이니까...차가 막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띠링- 세하에게서 문자가 왔다. 차가 막혀 늦을거 같으니 어디 카페 같은데라도 들어가서 몸을 녹이고 있으라고. 유리는 알았다, 라고 답을 보냈지만 카페에 들어가지 않았다. 카페 안에서 조용히 앉아서 기다릴 기분이 아니었다. 아, 그래...이게 들떠있는건가?
분명 약속 시간에 많이 늦는다고 했는데, 화는 커녕 서운하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5일 만에 만나는건데. 많이 기다린만큼 화도 나고 서운도 해야하는데 말이다. 아무리 들떠있다고 해도 그와 비례한 만큼 서운함이 느껴져야하는데 말이다.
...아.
그러고보니 내가 세하를 이렇게 기다려본 적이 없었구나, 유리는 깨달았다. 언제나 기다리는 쪽은 세하였다. 약속 시간에 가끔 지각을 하는 유리에게 서운한 말은 커녕, 그냥 작은 꿀밤을 먹이기만 했던 세하였다. 서운했을텐데. 어렸을 때도 그랬다. 자신이 먼저 세하에게 다가가고, 세하는 언제나 피한다고 생각했다. 친해진 이후로는 정반대가 되었다는 걸 유리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걸 알아챈 건 우연이었다. 어느 날, 자신을 집앞에서 기다리는 세하의 모습을 창문을 통해 보았다. 언제까지 있을까, 싶어서 한번 그냥 관찰만 했다. 세하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를 해서 유리 좀 불러달라고, 아니면 초인종을 눌러 유리 좀 나와달라고 하면 되는데, 세하는 미련맞게 기다렸다. 유리가 나올 때까지는 절대 안 갈거 같았다. 그때는 세하가 수줍음이 많아서(어린 시절에도 세하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런거니하고 생각했는데...
...아.
결국 보다못한 유리가 집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낮이어도 겨울 공기는 차가울텐데, 세하의 뺨은 빨갛게 부풀어있었다. 그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세하는 정말, 우연찮게 유리를 딱 만난 것처럼 연기했다. 그리고 봉지를 유리의 손에 건네주었다. 쿠키가 담긴 봉지였다.
...이걸 줄려고 미련맞게 기다린걸까? 왠지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넘어갔지만 훗날 유리는 세하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러자 세하는 '다 보고 있었어?!' 라며 엄청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말이 없던 세하는 대답했다.
-난 기다리는 거 하나는 익숙하거든. 내가 할 수 있는게 기다리는 것 밖에 없거든.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는 거에 익숙했다고 했다. 하염없이 기다리면 언젠가는 와줄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찌나 가슴이 아팠는지. 그래서 자신은 세하를 '절대' 기다리지 않게 해주리라 어렴풋이 다짐했다.
...그런 다짐을 했는데도 세하를 기다리게 만드는 자신이었다. 어우, 부끄러웠다...
세하는 약속 시간에서 1시간 뒤에야 도착했다. 헐레벌떡 오는 세하의 모습이 먼발치서 보이자, 그래도 뭔가 뿌듯했다. 왜 뿌듯한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추운데 카페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냥...카페에서 기다리기에는 답답해서."
쯧, 세하가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세하는 자신이 하고 있던 머플러를 벗어 유리의 목에 감아주었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몸이 많이 차가워졌잖아. 이럴까봐 일부러 카페에서 들어가 있으라고 말을 한건데...응?"
아까부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유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세하가 물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 그냥...뿌듯해서."
"..."
나도 참 바보다, 라고 세하가 중얼거린거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세하가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유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쿠키 봉지. 해마다 세하가 유리에게 주었던 관례와도 같은 그 쿠키 봉지. 유리는 매우 놀랐다.
"그 바쁜 상황에서도 쿠키 만들 시간은 있었어?"
"밤샜지. 항상 하던거라. 아무리 바빠도 올해걸 지나치면 안되잖아."
세하의 옆얼굴이 약간 피로해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나. 잘 포장된 봉지를 투둑 뜯어 쿠키를 하나 먹어보았다. 변함없이, 맛있었다. 세하의 입에다가도 쿠키를 하나 넣어주며 유리가 말했다.
"헤헤, 그보다 오늘은 내가 세하를 기다렸네."
"...미안. 지금 여기는 눈 안오지만 지금 아래쪽은 눈이 잔뜩 오고 있는 바람에."
"어? 그럼 아래는 지금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세하가 있는 대전으로 갈걸, 이라는 유리의 말에 세하는 유리의 코를 살짝 밀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세하가 많이 미안해하는 모습이 유리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자기는 항상 기다리는 쪽이라고 생각하는게 아직도 있나. 유리가 말했다.
"나 화 안 났어. 오히려 내가 세하 기다려서 좋은걸!"
"...이상한 곳에서 좋아하네."
"헤헤..."
세하가 유리의 손을 잡았다. 일단 따뜻한 곳에 들어가자는 제스처였다. 그렇게 걷는데 유리의 뺨에 차가운 것이 톡, 떨어졌다.
"어, 눈이다."
"...그러게."
결국 신서울도 눈이 오네. 주위에서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좋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결국 눈이 내리는구나...잠시 눈 오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이 말을 여태 안했다는 걸 유리는 깨달았다. 명색이 오늘 크리스마스인데 아직도 안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알아채다니! 눈 구경은 들어가서 하자며 세하가 유리를 이끌었다. 세하의 옆얼굴을 보며 유리가, 수줍게 말했다.
"메리 화이트 크리스마스, 세하야."
유리의 말에 세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 말을 들었으니 자기도 대답을 해야하는 게 당연했다. 큼큼, 헛기침을 하는 세하의 모습이 왜 이리 웃기는지. 세하는, 아직도 자기 앞에서 많이 수줍어했다.
한번의 심호흡을 더 하며 세하가 말했다. 따뜻한 금안과 미소를 덧붙이면서.
"너도, 메리 화이트 크리스마스, 서유리."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렸다.
[작가의 말]
크리스마스도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제가 너무 우울하고 시리어스한 주제만 쓸거라...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이번엔 한번 마음먹고 달달하게 써보았습니다.
현실에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 한번 써보고 싶었어요.
(출처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6/6231/) - 이나누님사랑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