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레비 - 도구
에베레베렙 2016-02-21 4
" .....ㅈ..저기...세하...님....이러시면....안 돼요...읍..!"
검은 머리의 사내가 하얀 백발을 가진 소녀의 턱을 붙잡았다. 엄지손가락으로 턱의 피부를 밀어 그대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밀린 턱의 피부 때문에 살짝 튀어나와 다물려 있는 소녀의 입술은 차원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인간의 입술이었다. 그는 그 위에 그림자를 겹쳤다. 땅을 채우던 둘의 그림자는 겹쳐져 오랜 시간 떨어질 줄 몰랐다.
" ......푸하.....!"
" ....후우...... "
레비아는 말문이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검은양과 늑대개의 합동작전 도중. 돌연 나타난 이 사내에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램스키퍼의 구석진 통로였다. 사내는 레비아를 벽으로 밀치더니 팔꿈치를 벽에 기대 이러쿵저러쿵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렇다. 바로 그 벽치기였다. 레비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더더욱 당황했고, 연이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의해 뇌가 한계에 이르렀다. 그 행동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으나, 그 행동들을 실제로 당해보니 꽤나 당황스러웠던 것이었다.
" 왜 안돼? "
" 저는....그러니까.... "
두뇌에서 원하는 말을 뽑는 것이 이렇게 힘들던 일이었나? 갑작스러운 사건에 의해 멘탈이 반 이상 깨져나간 그녀에겐 당연한 소란이었겠지. 이런 일들을 갑작스레 당한 레비아는 정말로 혼란스러웠다. 누구라도 갑작스레 당하면 혼란스럽겠지만, 레비아는 특히 더욱 심했다. 누군가의 애정, 연심이라고는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었으니.
" ...ㅈ..전...차원종이니까요. "
" 무슨 상관 있어? "
그의 말에 소녀는 솔직히 기뻤다. 레비아를 거쳐간 사람들은, 다들 그녀를 차원종이라고 부르며, 멸시하고, 불쾌감을 한껏 드러냈다. 물론 그 중에는 일부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해준 사람도 일부 있었지만, 말 그대로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랑'이란 것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 형용할 수 없이 기뻤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런 감정을 철저히 숨겨야만 했다.
" 저..전....위험해요...그리고...저에게 사랑받을 권리 같은 건... "
" 있어. 있단 말이야. "
갑자기 그가 레비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한쪽 손은 허리를 감싸며, 한쪽 손은 등을 감쌌다. 강하게 끌어안았지만 그렇게 아픈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은은히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더 기분 좋았다. 보드라운 편에 속하는 정식요원복의 옷감때문이 아니었다. 옷감보다도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또한 따뜻했다. 살갖처럼 부드럽고도 따뜻한 느낌이 레비아의 몸을 뒤덮어갔다.
" ....세하 님....... "
" 나 너 좋아해. "
그런데 어째서 그가 소녀를 좋아하는 것인지, 소녀로선 알 길이 없었다. 세하와 레비아의 접촉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어쩌다 한번씩 복도에서 마주치고, 인사를 하고, 대책회의에서 마주치는 것이 전부였었다. 정말로 그 외의 접점은 없었다. 아니, 있더라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다. 게임하던 세하에게 레비아가 다가간 횟수 2번. 꾸벅꾸벅 졸던 레비아를 세하가 깨운 횟수 1번. 나란히 앉아 회의를 들은 적 1번. 총 4번. 그 정도의 접점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 왜 저를 좋아하시는 거예요.... "
"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
" 전...인류의 적인 차원종이라고 말씀드렸어요. "
" 상관 없다고. "
껴안았던 것을 풀어 그녀를 자유롭게 놔 준 청년이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 네가 차원종이라는 거.....신경 안 써. "
그가 그녀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한동안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대던 그의 손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런 쓰다듬에 흠칫 놀란 레비아가 반사적으로 세하의 흑진주처럼 반짝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올려다본 그의 눈동자에는 앞에 차원종을 둔 인간의 차가운 경멸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둔 남자의 따스한 감정만이 느껴졌다.
그도 또한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보라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 그가 내려다본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혼란만이 느껴졌다. 그녀의 머리속에서는 이 감정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말아야만 하는가라는 생각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그녀의 머리 속을 채우고 있을 터였다. 이윽고 떨리는 동공을 가진 채로 그녀가 말했다. 그 자그마한 입으로 단어를 하나하나 말해가며 문장을 내뱉었다.
" .....그럼....전 당신의 도구가 되면 되나요. "
" .....아니. 넌 내 도구가 되는 게 아냐. "
그의 손이 움직였고,레비아의 몸이 움직였다. 얼굴이 가까워지고,둘의 숨결이 맞닿아졌다. 레비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워지기를 원했다.
이윽고 거리는 한층 더 가까워져 그녀의 귀에 그의 숨결을 닿게 만들었다. 그녀의 귀에 그의 숨결이 내뿜어졌고, 차가웠던 그녀의 귀는 벌겋게 달아올랐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는,그녀의 볼을 넘어서,그의 얼굴에도 자리를 잡았는지.
그의 얼굴도 벌겋게 물들어,사랑을 처음 해 보는 아이의 얼굴처럼 수줍어졌다.
" 그리고 우린 서로의 도구가 되는 게 아냐. "
그녀의 귀에 그의 속삭임이 울려퍼졌다. 그것은 마치 메아리처럼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 우리는 하나가 되는 거야. 내가 네게 내 맘을 말하고,네가 내 맘을 받아들여 준다면 말야. "
그의 얼굴이 멀리 떨어짐과 동시에,그녀의 귓가에 맴돌던 속삭이는 목소리도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속삭임이 사라져 허전한 마음에 숙이던 얼굴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이마에 따뜻한 살결이 닿았다. 촉촉하고 부드라운 그 감촉은. 실로 따뜻했다. 흩어지던 그의 속삭임이 다시 모여들었다. 그 단어들은 모이고 모여서, 한 마디를 만들어냈다.
" 사랑해. "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화려한 미사여구가 따라붙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름다웠다. 그녀가 겪어온 인생에 깃든 모든 얼룩들을 닦아낼 듯 깨끗했다. 그녀의 인생에 묻은 얼룩들은 찌들고 찌들어 닦아낼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 한 마디는 얼룩들을 모두 닦아내 주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잘 웃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쳐졌다. 그 웃음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 .....고마워요....고마워.....요.... "
흐느끼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는 그녀를 본 그의 입술은.
" .....저도...저도...사랑해요....세하 님..... "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fin.
헤헤 제목이랑 연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