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바보같은 이야기
세하야이리와나쁜형아아냐 2015-07-26 8
"왜 너만 아파야했던건데? 내가 같이 있어줄 순 없었던거야? 왜 넌... 넌 바보같고, 멍청하고, 미련하고... 정말... 흐으흑..."
그녀가 나를 껴안은 채 울었다, 그동안의 시간을 품은 서러움을 모조리 털어내겠다고 작정한듯이. 그리고 내 마음의 한 구석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어떤 몸짓을 해야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그 어떤 판단도 서질 않았다. 그녀가 안긴 품이 촉촉히 젖어가기 시작했다.
미련하게도 나는 그녀를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단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그녀의 눈물을 가슴팍으로 모두 받아내고만 있었다. 서럽고 힘겹게 우는 소리만이 공백을 가득 메운, 심장이 꿰뚫린 듯이 아픈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항상 강했기 때문에, 늘 한결같았기 때문에 너무 쉽게,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품고 있었던 수없는 시간 속의 중압감들과 따가운 시선들, 무시받고 상처받던 나날들. 그럼에도 꿋꿋이, 함께 달려왔던 팀원들을 향한 그녀의 마음. 그리고...
"너 이세하, 심각하게 부상이라도 입었다가는 복귀하기 힘들었을 게 분명한데도 그렇게 무모하게 뛰어들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했잖아! 사... 살아돌아온 것만이 다가 아냐! 중단해달라고 지시까지 했는데도... 그런 말은 무시해버리고는 혼자서 그렇게... 그렇게 힘든 곳을 헤집고 다니고... 바보... 멍청이..."
품에 안긴 슬비가 그대로 원망을 담아 내 가슴팍을 주먹으로 몇 번을 내리쳤다. 솔직히 조금 아팠지만, 그런걸 내색할 분위기가 전혀 아님은 나도 깨닫고 있었다. 지금은, 그녀의 시간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누군가는 결국 해야만 했던 일이고 끝을 봤어야만 해.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아니,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 걱정 끼쳐서... 정말 미안해."
"네... 네가 죽었으면... 정말 그랬으면... 나, 난 어떻게 해야했던거야? 응? 내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던거야?"
나를 안고 서럽게 울던 그녀가 그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눈물이 마르질 않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 한 구석의 착잡함이 더해갔다. 평소에도 무디다는 말은 정말 많이 듣고 살아왔다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멍청하게 있어야만하는 내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사실, 내가 어떻게 해줘야할지도... 모르겠기 때문에.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내 왼손을 얹었다. 오른손은 그녀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줬다. 그리고 나를 낮춰 그녀의 이마 근처에 더 가까이 나의 얼굴을 가져다댔다. 마음 속으로 백번이고 실례한다는 말을 되뇌이면서,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어색하게 떨리는 감각으로 그녀의 이마를 살짝 건드리고 입술이 자리를 떠나자, 슬비의 눈물이 조금은 잦아드는 것 같은 다행스러운 분위기였다.
슬비가 나를 올려다봤다. 부은 눈가에는 아직 새벽 이슬같이 반짝이는, 안도와 기쁨의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가왔다. 나에게 어떤 감정이 찾아온걸까.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걸까. 내 눈 앞 시야가 그녀만으로 가득차버리는 찰나의 짧은 순간에, 나에게 있어서 그녀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만 했다.
입술이 부딛쳤다. 젖은 입술 속에 슬픔과 기쁨이 모두 녹아있었다. 나도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되는걸까? 나같은 놈이 그녀에게 사랑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 딱히 성실해본 적도 없었던데다가, 좋아하는 것은 게임 뿐이었고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어주거나 감정을 드러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저 흐르는 시간에 맞춰 싸웠고, 다쳤고, 지켜냈고, 놀았고,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던 삶이었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거쳐야했던 수많은 아픔들을 품에 끌어안은채 하루하루 힘겨운 짐과 사투를 벌이는 그녀와는 다른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러했고, 나는 다시 또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맺힌 눈물이 조금은 사그라든 슬비가 아직도 울먹이는 표정으로 세하를 올려다봤다.
"미... 미안해. 그렇지만, 네가 너무 걱... 걱정돼서 힘들었... 단말야."
"......"
"왜...? 무슨 말이라도... 해줄 수는 없는거야 지금? 너한테 나는 그냥... 동료 그것 이상으로는 아직 안 되는거였던거야?"
동료... 그 이상이라는 말인가? 과연 내게 그럴 자격이 있었던가라는 생각이 몰아치고 있었다. 알파퀸의 아들이라는 것 하나로, 잠재력이 뛰어나다는 그것 하나로 이세하의 검은양팀 이야기는 시작됐지만, 그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이세하라는 남자가 과연 이슬비의 옆에서 충분히 어울리는, 함께 하는데 부족함이 없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그리고 그 결론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낙제점.'
"슬비야. 난... 난... 아직 부족한 것 같아. 너한테 항상 불편함만 끼친 걸림돌이었잖아. 미안해. 너한테 충분히 좋은 동료가 되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이세하, 다른 어느 누가 그런 얘기를 하고 그런 생각을 하던 그건 상관 없어. 내가 널... 좋아하겠다는데 그게 무슨 상관인거야 도대체?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걱정하고 울고 안기는건데? 응? 왜? 왜겠냐는거야...!!"
슬비가 다시 나의 품에 안겨들었다. 내 머릿속에 박혀있던 감정의 빙벽이 녹아내렸다. 그녀의 한 마디가 이세하라는 남자의 감정적 한계를 뛰어넘었다. 내 품에 안긴 그녀를 다시 내려다봤다. 벽을 깨고 나온 나의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습을 보던 내 입에서 나온 첫 마디.
"예뻐."
"...?"
"네가... 너무 예뻐. 너무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미치겠어."
"무... 무슨 소리야?"
"스... 슬비야. 미안해. 하지만 진심이야. 네가 너무 좋은데... 왜 지금까지... 말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
"......갑자기 무슨..."
"느... 늦었어? 늦은거야?"
품에 얼굴을 파묻고 표정을 감추던 슬비가, 무언가 작심한듯이 세하의 옷깃을 한 번 세게 붙잡고 내 눈을 마주봤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을 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가 날 올려다봐주고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슬비의 입술을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슬비도, 조용히 그 움직임에 동참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나와 그녀가 서로의 입술을 나중을 위해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함께 웃었다. 폭소하듯 웃는 것은 아니었으나, 은은한 미소와 잔잔한 눈웃음, 그녀가 가진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내 눈에, 내 머릿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고 나와 슬비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품에 안고 바라보다 입술을 맞대기를 반복했다.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는 필요가 없었다. 그녀와 나, 그 순간만큼은 둘 만의 세상이었다.
앞으로 절대 그녀를 다시 울리는 일이 없겠다는 혼자만의 다짐을 했다. 입 밖으로 내어 그녀에게 들려준다고 해도, 그녀는 어짜피 웃어넘겨버릴 것이 분명했다. 클로저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차원종들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원치않는 희생을 경험했어야만 했고, 그것은 비단 그녀 주변 뿐만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도 닥쳤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더 차원종에 대한 복수심으로 차있었지만, 그만큼 더 깊고 아픈 상처를 지고 살아야만 하는 그녀였기 때문에.
"이세하, 지금 무슨 생각해?"
"아, 아니 별거 아냐."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함께 근처 대공원을 찾았다. 차원종의 소란으로 한동안 폐쇄되고 방치되었다가, 최근 다시 복구되어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는 대공원. 그리고 그 공원 속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나와 그녀. 벤치에 앉아서 게임을 하려다말고, 문득 그 혼자만의 다짐을 돌이켜 곱씹었다. 그리고는, 그래도 얼마간은 이 다짐,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 또, 무슨 웃긴 생각이라도 하는거야? 또 너 그 게임 관련된 거 생각하고 있는거야?"
"아 아냐, 정말 아니라니까? 내가 무슨 24시간 365일 내내 게임만 생각하고 살거라고 생각하는거야?"
"응."
"......아니야. 아니라고. 나도 다른 생각 가끔 하고 산단 말이야!"
애써 부인하면서 머리를 긁적이고는 시선을 돌려 하늘을 봤다. 귀여운 참새 몇 마리가 도시 속 공원의 나무 사이로 요란스러운 짹짹거림과 함께 서로 어울려 놀고 있었고, 그 뒤에 펼쳐진 평화로운 하늘이 눈부셨다.
눈부신, 나날들의 시작이 나를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바보같이 행복한 시간들이, 그저 좋아져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