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정미슬비] All for you -上-
월하령 2015-06-11 13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들어버린 시야.
“날 방해하려는 거야? 지금부터 거기 있는 재수 없는 것의 숨통을 끊어버릴 작정이었는데.”
그 너머에서 들려온 것은 말살해야만 하는 적의 목소리와ㅡ
“그렇겐 안 되지.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ㅡ소중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으, 으으….’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자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인다. 이쪽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내 그 누군가의 고개가 자신을 향했다.
“걱정 마. 지켜줄게, 반드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향해 믿음직하게 말하고 칼을 뽑아드는 여성.
그런 그녀의 이름을, 겨우 입 밖으로 내밀어본다.
“서……유리…….”
“응.”
망설임 없이 돌아오는 대답.
어째서인지 그 대답에는 미소가 담겨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2XXX년 XX월 XX일. 검은 양 팀 소속, 서유리.
재해 복구 구역-강남에 출몰한 고위 차원종, 개체명 ‘더스트’와의 교전 중 행방불명.]
★
[훈련 프로그램 스탠바이. 최고 난이도 프로그램 작동 개시.]
딱딱한 기계음과 함께 작동을 시작하는 훈련장치.
동시에 나타나는 한 무리의,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차원종들.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차원종인 마냥 인간을 향한 적의를 띈 그것들을 바라보며 분홍빛 머리의 소녀ㅡ슬비는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
[제 7536차 훈련, 개시합니다.]
훈련 개시 신호가 떨어진 순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슬비.
그런 그녀를 향해, 귀에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내는 차원종들의 위상력 공격이 무수히 쏟아진다. 어지간한 클로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법한 위상력의 융단폭격은 보는 사람을 질리게 할 정도로 허공을 빽빽이 수놓는다.
하지만,
“……….”
슬비의 근처에 다가간 순간 제 멋대로 궤도를 비튼 위상력들은, 자신들의 원래 목적을 잊고 그녀를 지키려는 듯 주위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인해 서서히 자신을 둘러싼 선처럼 변해가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슬비는 작게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확산.”
위협적인 바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슬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범위를 늘려가는 위상력의 덩어리들. 그 기세에 휘말려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차원종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슬비는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간다.
ㅡ따악.
공간에 가볍게 울리는 손가락 튕기는 소리. 하지만, 그 소리가 가져온 여파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압축.”
난데없이 차원종이 모여 있는 곳 한복판에 나타난 검은 구체. 아주 찰나의 순간에 생겨난 그것은 순식간에 주위의 공간을 빨아들이며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인력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들어가는 차원종들.
그리고 다음 순간ㅡ공간이 폭발했다.
[크롸아아아아?!]
[캬아아아!!]
철저하게 뒤섞이는 굉음과 차원종의 비명. 한꺼번에 모여들었던 공간이 단번에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가져온 여파는 말려든 것들을 갈가리 찢어 놓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홀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동요하는 차원종들. 그 동요로 인해 생겨난 틈으로, 슬비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케륵?!]
“……적을 섬멸합니다.”
원만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르는 나이프. 정확히 급소를 노린 일격에 차원종은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인지하지 못 한 채 사라졌다. 몇 번 더 나이프를 휘둘러 공간을 확보한 슬비는 아직도 잔뜩 몰려있는 적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뇌까렸다.
“적을…. 차원종을…말살합니다.”
★
“세하 선배 말야, 진짜 멋지지 않니?”
“……하?”
훈련용 큐브 대기실.
반짝거리는 눈으로 열변을 토하는 친구를 향해, 소녀는 썩은 동태눈을 닮은 시선을 보냈다.
“…갑자기 뭔 소리야?”
“그게, 그렇잖아! 그 유명한 알파 퀸 님의 아드님에 완전 미남! 게다가 묘하게 모성애 느껴지게 만드는 면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거꾸로 말하면 완전 어린애 같다는 뜻이잖아….”
실제로 중증의 게임 마니아라고 하니까 완전히 틀린 인식도 아니리라. 오죽하면 작전지역에서까지 게임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헛소문이 떠돌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작전 지역에서까진 게임을 하진 않겠지.
“그런 면이 좋은 거야, 그런 면이! 막 데이트 하면서도 게임에 빠져서 날 제대로 봐 주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난 우선 네 성벽부터 의심하고 싶은데.”
“에?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니 성벽은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라고 하는 순간 잔소리가 기관총마냥 쏟아지겠지.
그런 판단에 입각해서 현명한 선택을 하는 소녀.
그러자 그녀의 친구는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화제를 돌렸다.
“어째서 세하 선배가 검은양 팀의 리더가 아닌걸까?”
“응? 아아, 그랬지. 분명 검은 양 팀의 리더는ㅡ이슬비 선배였던가.”
“맞아. 이슬비 선배. 솔직히 그 선배가 세하 선배보다 잘난 점이 뭐가 있다고….”
“야…! 그런 말을 여기서 하면 어쩌자는 거야!”
“맞는 말이잖아. 명색이 엘리트의 선두를 달리는 검은 양 팀의 리더면서, 실제 위상력은 끽해야 B+ 라는게 말이 되니? 나도 A는 나오는데. 그런 걸로 따지자면 내가 슬비 선배보다 더 뛰어난 거 아냐?”
“……위상력 등급은 단순히 힘의 총량이야. 다루는데 능숙하지 못하면 등급이고 뭐고 소용 없다고. 최정예 팀에서 리더를 맡을 정도면 위상력의 컨트롤은 이미 달인 급이라는 뜻 아니겠어?”
그야말로 정론을 바탕으로 한 소녀의 주장.
하지만, 그녀의 친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려는지 고개를 손가락 하나를 펴더니 좌우로 까딱거렸다.
“달인 급이고 자시고, 힘의 총량이 약하면 이도저도 안 되는 법이다, 뭐~. 아아…나도 검은양 팀에 들어가고 싶은데.”
“신참인 우리가 무슨 수로. 그 팀은 최전선에서 싸우는 정예 중의 정예라고. 우리가 감당하긴 무리야.”
“그래도 기회는 보이니까 그렇지. 거기, 원래 5인 팀이었잖아. 지금은 한 명이 빠져서 4인 체제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친구의 말에 소녀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 진다.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고 바로 위에 선배들이 말한 거, 잊었어? 함부로 말하면 큰일 난다고 그랬잖아.”
“뭐, 어때? 엄연한 사실인데.”
소녀의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친구는 말을 이어갔다.
“몇 달 전에 발생한 사건 때문에 당시 멤버 중 한 명인 ‘서유리’선배가 행방불명된 사건은 공공연한 사실ㅡ.”
“…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네, 너.”
“?!”
대화를 하다 말고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두 사람. 두 사람의 뒤에는 문이 열린 큐브를 등진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ㅡ슬비가 가볍게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이, 이슬비…선배님….”
“……너.”
“아, 네, 네!”
갑자기 자신을 지목하는 슬비의 행동에 놀라는 소녀. 겁에 질린 채 벌벌 떠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슬비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가 봐. 네 옆에 있는 애랑 잠시 볼 일이 있거든.”
“서, 선배! 걔는 그러니까 해도 될 말하고 하면 안 되는 말을 잘 구분을 안 하는 애라서…그, 그래서 실수한 겁니다! 한 번만 용서를!”
“……걱정 마. 아무래도 내 실력이 궁금한 모양이니까, 같이 훈련을 한 번 정도 하려는 것 뿐이야.”
“그, 그치만ㅡ.”
“미쳤니? 네가 하는 훈련을 뭣도 모르는 신입들에게 시키겠다고? 드디어 맛이 갔구나, 너.”
“헤…?”
끼어든 것은 누가 듣더라도 분명하게 날이 선 목소리.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소녀의 눈동자가 조금 전보다 더 커진다.
“우정미 수석 연구원님…?”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 서 있던 것은 기가 세 보이는 갈색 눈동자를 한, 연구가운 차림의 여성.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니온 생체 공학부 전체를 총괄하는 캐롤리엘의 비서로 유니온에 입사한 젊은 천재 연구원ㅡ우정미였다. 특히 검은 양 팀 이외의 클로저들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가 다른 클로저들로 붐비는 큐브 시스템에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연속해서 튀어나오는 거물급 면면들에 당황하는 소녀를 향해, 정미는 딱딱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너. 빨리 네 친구 데리고 돌아가도록 해.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아, 네…네!”
겁에 질린 친구를 데리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소녀. 서서히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슬비의 눈초리가 슬며시 가늘어진다.
“왜 참견하는 거야?”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하니까. 지금 니가 제정신이야?”
“…단순한 훈련 가지고 오버하는 건 너 아니니?”
“단순한 훈련? 요즘은 실제로 데미지까지 입을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훈련을 단순한 훈련이라고 하나봐? 그렇게나 실력에 자신 있으면 너 혼자 하라고!”
“…….”
그 일갈에 말없이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던 슬비는, 이내 고개를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직 클로저들과 친해지지 않았던 거 같은데 . 꽤 드문 일이네.”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나도 네 얼굴 보는 거 그리 반갑진 않거든? 금방 갈 거야.”
“……그래.”
“하나도 안 변했네. 그 기분 나쁜 눈빛.”
“…….”
“그만 하지? 그렇게 혼자 괴로워 해 봐야…이미 늦었으니까.”
“…….”
“…이젠 듣는 척도 안 하는구나?”
싸늘하게 쏘아붙이고 자리를 떠나는 정미. 정미가 사라진 방향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던 슬비의 양 손은, 어느새 상처가 날 정도로 강하게 쥐어져 있었다.
★
“그래서, 또 싸웠다는 건가….”
“……네.”
시내에 위치한 한적한 주점. 앞에 놔뒀던 맥주를 들이킨 검은 양 팀의 관리요원-유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맥주는 놀랄 정도로 차가웠지만 어째 타들어가는 속은 식을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한숨을 내쉬며 연거푸 잔을 기울이는 유정. 한숨을 쉬는 그녀를 대신해 말을 이어간 것은, 옆에 앉아 있던 금발의 미녀ㅡ캐롤리엘이었다.
“정말 미안해요, 이슬비 요원. 우정미 연구원이 요즘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그랬던 거에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길 바래요.”
“…아니에요. 그런 반응을 보이는게 오히려 당연한걸요.”
“그래도ㅡ.”
“정말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걸요, 뭐.”
“오우….”
“그만 해, 캐롤. 두 사람 다 고집 쌘 거 알잖아. 말 해 봐야 소용없다구~.”
“아무리 그래도….”
“됐고! 마셔, 마셔! 마시는게 남는 거니까아~.”
“…….”
서서히 꼬여가는 유정의 말투에 슬비는 이마를 짚었다. 술에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겨우 맥주 한 잔에 취기가 올라오기라도 한 걸까.
“오 마이 갓! 유정씨, 얼굴이 새빨개요.”
“에헤헤…나 안 취했써어어어어…….”
“그 반응은 명백히 취한 사람의 반응인데요….”
“괜차나, 괜차나~. 속이 타들어 가는 거 보다야 나아~. 흠냥…….”
“미안해요, 이슬비 요원. 아무래도 오늘은 유정 씨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요. 먼저 들어가 볼 게요. 저희 몫은 계산해 둘 테니 돈 워리~.”
“네….”
흐느적거리는 유정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캐롤리엘. 그렇게 두 사람이 곁을 지나쳐 가는 순간, 슬비의 귓가에 가라앉은 캐롤리엘의 목소리가 와 닿는다.
“그 날의 일, 저는 역시 이슬비 요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그저 상황이 나빴을 뿐이에요.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요. 그러니까ㅡ.”
“죄송합니다. 그 이야기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슬비. 그런 그녀의 모습에, 캐롤리엘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쓸데없이 참견해서.”
“아니에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럼…….”
조금씩 멀어지는 두 사람 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슬비는 침울한 표정을 하고서 술잔을 집어 입가로 가져갔다.
“상황이 나쁘거나 운이 나빴던게 아니에요….”
잔을 기울이자 목을 타고 넘어가는 차갑고 씁쓸한 액체.
그 씁쓸함을 곱씹으며, 슬비는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제가 약해서 지키지 못한 거라고요….”
지금 어디 있는 걸까.
한 번만 다시 볼 수 있다면…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텐데.
혹시라도 신이 있다면 그런 기적을 내려 줬으면 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슬비는 계속해서 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신은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줄지언정ㅡ절대로 원하는 형태로는 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
플레인 게이트 제 1 탐사구역ㅡ황혼의 가도
[키에에에에에에ㅡ!!]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붉은 맨드란. 녀석의 등에 달려 있던 새빨간 파리지옥 같은 이파리에서 뿜어지던 열기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슬비는 한숨을 돌렸다.
“후우…….”
몇 번이고 차원 압력을 억누르기 위해서 소탕 작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이곳의 열기는 정말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오죽하면 대(對)위상력 장비로 중무장한 특경대 사람들조차 어지간해선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하겠는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도, 무심코 내쉰 한숨조차 뜨거워지는 공간에는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돌아갈까.”
일단 돌아가자. 가서 몸을 씻던 뭘 마시던지 해야 살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슬비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ㅡ비 요원ㅡ이슬비 요원님ㅡ들리십니까!]
“……?”
갑자기 긴급 회선으로 들어오는 연락에 고개를 갸웃거린 슬비는 회선을 연결했다.
“여기는 이슬비. 무슨 일이십니까.”
[비상사태 입니다! 재해 복구 지역으로 지정된 구로의 위상변곡률이 미쳐 날뛰고 있어요!]
“네?”
[빨리 출동해 주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팀원들에게 연락은?”
[아직 맡은 탐사구역의 탐사가 끝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연결 된 분이 이슬비 요원님이라서…우선 현장으로 출동해 주십시오! 다른 분들에겐 연락되는 대로 현장 투입을 요청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곧 출발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쾌적하게 몸을 씻기엔 아직 이른 것 같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찝찝함과 느닷없이 발생한 트러블을 원망하며, 슬비는 몸을 날렸다.
“ㅡ해서 와 봤는데.”
현장에 도착한 슬비가 마주친 것은 차원종도, 혹은 유니온에 적대하는 조직도 아닌 ‘적막함’이었다.
“……뭐지?”
현장에 오기 직전, 재해 복구 본부의 위상변곡률 감지기에 측정된 데이터가 정확하다면 구로 지역의 상황은 심각, 그 자체여야 했다. 지난번 강남이 초토화 되었던 사건 당시 지하에 숨겨져 있던 헤카톤케일에 의해 측정되었던 위상변곡률은 차원종 수십만 마리에 달하는 분량.
하지만 이번엔 더 심각한, 최소 백만 이상에 달하는 분량의 수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로는 차원종들로 인한 대기의 오염이나 파괴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알 수 없는 사태에 의문을 가진 채, 위상변곡률 측정기를 의지해 구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슬비였지만 차원종은 고사하고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는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슬비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폐쇄된 구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위상 억제 열차 안의 좌석이었다.
“후우….”
아무도 없는 열차 안에서 쉬는 건 이상한 기분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슬비는 좌석에 등을 기대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경치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반쯤 파괴 된 채 달리는 열차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원하다.”
땀에 젖은 목덜미가 바람에 마르는,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듯 감미로운 감각.
그 감각에 심취해 가는 도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든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기분, 좋아 보이네.”
“…?!”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커지는 눈. 놀란 눈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ㅡ그곳에는 그토록 재회하고 싶었던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오랫만이야, 슬비야.”
"너, 너…!!"
허리까지 충분히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웃을때 살짝 보이는 귀여운 덧니.
슬쩍 드러나는 고양이 같은 분위기.
틀림없다. 이 사람은ㅡ.
“서유…리?”
“뭐야, 설마 몇 달 못 봤다고 친구 얼굴까지 잊어버린 거야?”
“그럴 리 없잖아!”
보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환각 따위가 아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분명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서유리, 본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슬비는 유리를 끌어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 슬비야…?”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옷은 또 왜 이렇고….”
“어? 아…이건 사정이 좀 있어서ㅡ.”
“됐어…. 말 안 해도 괜찮아. 무사했으니까 됐어…….”
그래. 무사하면 된 거다. 방어력이 높은 정식 요원복은 어쩌고 검은 나시 차림의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으면 어떤가. 조금 체온이 낮은 것 같으면 어떤가. 애용하던 장비는 어디다 뒀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ㅡ이렇게 살아서 다시 만났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왜 연락을 안 하는 건데….”
“사정이 있었다니까…. 그보다, 행방불명 상태였던 친구를 만나자 마자 바로 잔소리라니…역시 슬비는 슬비구나. 안심했어.”
“그, 그건 네가 쓸데없이 걱정을 시키니까…!”
“에이, 너무 화 내지 마. 기껏 시간 내서 만나러 왔는데, 기쁘지 않은 거야?”
“그야 당연히 기쁘ㅡ…어? 시간 내서 온 거라고?”
갑자기 의문이 고개를 든다. 대체 무슨 시간을 내서 온 거라는 거지?
“혹시 유니온에서 극비 임무라도 맡긴 거야? 그럼 지난 몇 달간 소식이 없었던 것도 그것 때문ㅡ.”
“그런 건…아닌데 말이지.”
“그럼 뭔데? 시간을 내서 오다니….”
계속해서 이어지려는 슬비의 추궁. 그 흐름을 끊어낸 것은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는 거친 울음소리였다.
[키르르르….]
“!? 차원종!”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차원종의 느닷없는 출현. 곧 이어서 연달아 출몰하는, 같은 종으로 보이는 차원종의 무리들. 놀라서 반사적으로 전투태세에 들어간 슬비는 유리의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슬비야….”
“걱정 마. 이번에는 내가 지켜줄게. 반드시…!”
스스로를 향한 다짐과 적을 향한 명백한 적의심이 뒤섞인 눈빛을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차원종을 향해 보내는 슬비. 그런 그녀의 눈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차원종은, 이내 슬비의 뒤에 있는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ㅡ.
[시간입니다….]
ㅡ명백한 인간의 언어로 말했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고위 차원종….”
차원종 중에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개체는 어김없이 고위 개체, 혹은 그에 준할 정도로 골치 아픈 등급의 적으로 분류된다. 만약 뒤에 서 있는 녀석들이 지금 말을 꺼낸 녀석과 동등…아니, 그에 준하는 존재라고 판단한다면 전황은 절망적이다.
‘그래도…!’
지켜야만 한다. 어떻게 다시 만난 소중한 친구인데, 다시 잃은 순 없었다.
그런 결의를 다지는 슬비의 앞을 가로막듯 유리가 뒤에서 걸어 나온다.
“…….”
“뭐 해! 위험하다니까! 너 지금 무기도 없잖아!”
“괜찮아.”
“괜찮지 않아! 싸울 수도 없으면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빨리 내 뒤로…!”
다시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 앞을 가로막는 유리의 오른팔에 잠시 멈칫한 슬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슬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거, 뭐야?”
“…….”
어느새 유리의 손에는 불길한 자줏빛의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나머지 한 손에는 애용하던 권총과 닮은ㅡ검과 마찬가지로 자줏빛을 띈 한 자루의 권총.
양 손에 무기를 들고 슬비의 앞을 막아선 채, 유리는ㅡ.
“미안.”
ㅡ그렇게 사과했다.
“미안…이라니. 무슨 소리야, 너!”
“…….”
[뒤에 있는 인간에게서 아군을 향한 명백한 적개심을 탐지. …배제하겠습니다.]
유리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손에서 붉게 빛나는 검을 뽑아 드는 차원종의 무리들. 그런 차원종들 앞에 선 유리는, 지극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집어넣어. 내 친구야. 실력이 좋아서 너도 1 : 1로 이기긴 힘들걸?”
[아군입니까?]
“아마…아닐 거라고 생각해.”
[그럼 배제하는 것이 더 이롭다고 판단됩니다. 명령하신다면 지금이라도ㅡ.]
“집어넣으라고 했던 거 같은데? 불복하겠다면 널 먼저 베어버리겠어.”
[……실례했습니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대화.
그 일련의 장면을, 슬비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유리가…아니, 인간이 차원종과 대화를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차원종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간혹 애쉬나 더스트처럼 대화를 하는 일은 있어도, 차원종이 인간에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을, 슬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ㅡ아니, 전례는 있었다.
강남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 전 A급 요원 김기태가 적에게 투항하고 강남을 침공할 때 아스타로트가 그에게 내려준 차원종들이 분명 그에게 복종했었지. 하지만 그것은 아스타로트의 명에 따른 것이지 김기태에게 복종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차원종이, 그것도 인간의 언어를 쓰는 고위 차원종이 굴복한다면 그것은 단 하나ㅡ.
“유리야…. 설마…?”
ㅡ자신보다 더 강한 차원종에게 복종하는 경우 뿐.
아연실색하는 슬비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유리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정말…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