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송은이편: 2-2장: 기시감, 그리고 상처-
Maintain 2015-04-10 11
놀이공원에는 몇 년만에 가보는 거였더라. 한창 그런 데 놀러갈 나이였을 땐, 놀이공원 대신 전쟁터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지.
하다못해 수학여행이라도 그런 데나 갔으면 좋았을 텐데. 가는 데라곤 맨날 역사유적 탐방이었고. 뭐...생각해 보니, 그 전에 학창생활에 대한 기억도 별로 없군.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였을까. 맨 처음에 은이한테 여기서 놀자고 말했을 때, 솔직히 내심 후회했다. 이 나잇살이나 먹고, 나이에 안 맞게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성한 곳 하나 없는 다 낡고 닳은 아저씨가, 아직 한창 앞길 창창한 젊은이들 사이에 끼어들다니. 주책맞고, 방해된다. 나란 녀석.
그래도 막상 와 보니, 그래도 잘 한 건가. 속으로 안심이 된다. 나도 어느 정도 즐겁긴 하지만,
"아, 아저씨! 다음엔 저기 한 번 가 봐요."
내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끌고 가는 은이는, 정말 즐겁다는 듯 밝게 웃고 있었다.
벌써 두 시간째. 이 정도면 지칠 법도 하건만. 그럴 기색도 없이 놀이공원 이곳저곳을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아예 놀이공원을 정복할 기세다.
"헥, 헥...이봐, 은이. 이제 조금 쉴 수 있을까? 삭신이 쑤셔서 버틸 수가 없다고."
그런 은이를 따라주지 못하는 이 몸이 원망스럽다. 왜 이럴 때만이라도 힘을 내지 못하는 거냐, 내 몸.
"에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직 멀었다고요. 오늘 하루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즐길 거에요."
"이, 이봐. 그래도 골골대는 아저씨 입장도 조금은 생각해 줬으면 한다만."
"으이구, 알았어요. 그럼 딱 한 군데만 더 하고 쉬어요. 마침 점심 시간도 다 됐으니까, 끝나고 바로 점심이나 먹자구요."
흥이 깨져 버려서겠지. 토라진 표정으로 은이 녀석이 향한 곳은 오락실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락실도 꽤 오랜만에 와 보는군. 테트리스로 오락실 신기록을 세운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켁, 그게 대체 언제적 게임이에요? 물론 요즘에도 계속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저거에요 저거."
은이가 가리킨 게임은, 총으로 좀비들을 잡는 일명 슈팅 게임이라는 거였다. 과연 특경대. 총을 다루는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건가. 애초에 은이 녀석도 총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녀석이기도 하고. 제니퍼 잭슨 3세였던가? 그런 무식한...아니, 풍만한 녀석이 취향이랬지?
"마침 자리도 비었네요. 아저씨도 같이 할래요?"
"미안하지만 사양하지. 나 같은 녀석은 방해만 될 테니. 그리고 총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언젠가도 말했지만, 전쟁 때 하도 총에 많이 맞아 봐서 말이야. 직접 잡아본 적도 몇 번 있고. 그래서 총에는 약간 거부반응 같은 게 있다. 내색만 안 할 뿐이지.
"알았어요. ...아무튼 무드를 모른다니까."
"음? 지금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이제부터 조심하세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심히 불안해지는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은이 녀석은 게임기에 돈을 넣었다.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꽤나 잘 만들어진 산탄총 모양 조종기를 손에 든 은이 녀석, 뭐랄까, 갑자기 표정이 돌변했다. 뭔가...광기에 차오른 표정? 근데 왠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건, 기분 탓이겠지?
"꺄핫! 신~나게 놀아볼까?!"
...그걸 시작으로,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은이 녀석이 쏠 때마다 팔다리와 머리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리는 좀비들이 불쌍해졌다. 거기다 '총알 받아라~'라던지, '죽어라!' 라던지, '각오해!!!' 같은, 꼭 총쏘는 거에 환장한 사람마냥 별의별 대사를 다 하는데... ...그냥 버리고 도망가 버릴까. 속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오늘 하루는 은이 녀석하고 어울려 주겠다고 다짐했는데. 이 정도 창피함은 즐겨 주는 게 예의겠지. 그래서, 게임이 끝나고 내게 돌아온 은이에게, 칭찬도 할 겸 엄지를 들어올리며 이렇게 말해줬다.
"하하하, 제법이로구나 은이야!"
"어...사, 사형?!"
나는 그냥 칭찬만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격투자세를 잡는 은이 녀석. 어째서?! 그리고 그 사형이란 사람은 또 누구고?
"그, 글쎄요? 왠지 그 말을 들으니까, 뒤통수를 조심해야 할 거 같아서..."
자기도 영문을 모르겠는 건지, 자세를 잡은 그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전에 어디서 만났었나?"
"그, 글쎄요... 저도 잘..."
여러모로 기시감을 느끼며, 우리는 왠지 어색해져서 빠르게 오락실에서 퇴장했다. 아, 참고로 나중에 동생한테 들은 건데, 이 날 은이가 세웠던 최고 기록은 오락실의 전설로 남았다고 한다.
"역시 놀이공원에서 점심은 패스트푸드 아니겠어요?"
점심 시간. 근처 벤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솔직히 은이가 싸 준 도시락을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패스트푸드였다. 원래 같으면 몸이 안 좋으니 사양해야 하지만, 어쩔 수 있나. 그냥 먹어야지. 먹은 만큼 약도 같이 먹어 주면 되겠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햄버거를 한 입 베면서, 나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앗다. 날씨 한 번 참 좋군. 적당히 따뜻하고, 구름도 거의 없다. 이런 날에 이렇게 노는데, 기분이 즐겁지 않다면 이상하겠지.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편하고 기분이 좋아서야 되는 걸까. 나 같은 남자한테, 이런 건 너무 큰 사치가 아닐까 싶어서. 이렇게 일상의 평화를 즐길 자격이 되는 걸까. ...에이, 안 돼, 안 돼. 또 우울한 생각이 들고 말았어. 오늘 같은 날은 즐거운 생각만 들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부정적인 거야. 나란 녀석은.
"날씨 한 번 좋군. 안 그래? 은..."
그래서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고 싶어서, 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은이한테 말이라도 걸면, 뭔가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은이의 얼굴을 ** 말걸,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은이는 어느 한 곳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부러운 듯, 혹은 질투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쫒아가 보니,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웃고 떠들며 즐겁게 얘기하고 있었다. 평소의 나라면 요즘 애들은 참 발육도 좋네, 치마도 짧고. ...라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겟지만, 왜 은이가 저런 표정을 지은 건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나로선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통돌이 마왕 그 녀석...이건 그 녀석이 봉인되며 마지막으로 남긴 꼬장인 건가.
"부럽네요, 저 애들..."
하지만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는 은이는, 왠지 넋두리라도 하듯 말을 이어갔다.
"아저씨, 저는요, 저런 평범하게 웃고 떠드는 애들이 부러워요. 저는 저랬던 적이 거의 없거든요. 고등학교 때도 졸업도 못하고 바로 아프간으로 가야 했고...그 전에도 이것저것 훈련 때문에 친구들하고 사귈 시간도 거의 없었어요. 거의 항상 혼자만 다니고...내색은 안 했지만, 많이 외로웠죠."
그래. 이 녀석, 고등학교 졸업도 못하고 바로 아프간으로 갔었다고 했지. 거기서도 엄청 굴러다녀야 했고. 항상 밝게만 행동하던 녀석한테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알고 난 이후론, 전처럼 녀석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내 자신이 조금은 겹쳐 보여서 그런 거겠지...
"아프간에 가서야, 친구라면 친구라고 할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특히 유능한 부하들을 만났던 건, 정말 저한텐 큰 위로가 됐었죠. 힘들 땐 서로 위로해주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해 주고...정말 좋은 녀석들이었는데.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게 됐네요... 전쟁 끝나면 다같이 모여서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그랬었는데. 같이 놀러가자고 했던 녀석들도 있었고. 아예 저한테 데이트 신청까지 한 녀석도 있었다니까요. 그런 녀석들을 한 순간의 실수로 먼 곳으로 보내버렸죠...전 리더 실격인가 봐요..."
"..."
"아무튼 그렇게 살았으니까, 당연히 오늘처럼 놀이공원 같은 데 가는 건, 꿈도 못 꿨어요. 갈 시간도, 같이 가줄 친구도 없고. 아저씨를 힘들게 한 건 죄송해요. 하지만 이해해 주세요. 저도 이렇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우리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낼 뿐. 하지만 속에서부터 밀려오는 이 씁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려서 전쟁터에 가고, 같이 있던 부하들을 잃고, 친구는 없고...**, 이래서야, 꼭 내 과거를 내가 그대로 보는 거 같잖아.
"그럼...다시 가 보자고. 기왕에 찾아온 기회를, 이렇게 시간낭비하면서 보내긴 싫을 거 아니야."
그래서, 내가 먼저 녀석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나는 이럴 때는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힘들 땐 먼저 남자 쪽에서 다가오는 법이라고, 내가 배운 지식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나는 침울하게 앉아있는 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빤히 쳐다보던 은이 녀석. 살짝 미소짓고는, 내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을 잡을 일은 없었다.
"꺄악-!"
"으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서 사람들이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도망쳐 오고 있었다. ...이거이거. 아무래도 우려햇던 일이 일어난 거 같군.
-삑!
마침 타이밍도 맞게, 유정 씨한테서 무전도 들어왔다. 무전기를 켜자, 유정 씨의 목소리가 들려왓다.
"아, 제이 씨! 다행이에요, 금방 연락 받으셔서. 상황이 상황이니 바로 말씀드릴게요. 지금 놀이공원 쪽에 차원종이 나타났어요."
"흠..혹시나가, 역시나였구만."
"예? 지금 혹시 그 근처에 계신 거에요?"
"쉬는 날이기도 해서 좀 놀러나 가볼까 했지. 걱정 마. 이럴 줄 알고 장비는 제대로 챙겨 왔다고."
아, 물론 은이랑 같이 왓다는 말은 뺐다. 그냥 말해도 되겠지만, 왠지 말하면 골치가 아플 거 같아서.
"그렇군요. 아무튼 이번에 출현한 차원종은 C급이긴 하지만, 수가 제법 많아요. 다른 애들은 다른 곳에 나타난 차원종을 없애러 갔으니까, 지원은 특경대 분들에게 맡기기로 했어요."
"음, 그래. 애들도 참 고생이군. 알았어, 임무 다 끝나면 연락하지. 좀 있다가 보자고."
"그래요. 제이 씨, ...조심하세요."
"걱정 고마워. 그럼, 이만."
-삑!
"아저씨, 혹시..."
"그래, 그 혹시가 역시다. 은이, 슬슬 몸 풀어둬. 언제 다시 찾아올 이런 기회를 날려버린 차원종 녀석들에게, 쓴 맛을 보여주자고."
"좋아요. 그럼 가 보자고요."
휴, 차원종 놈들...이젠 사람도 제대로 못 쉬게 만드는구만. 나는 한숨을 쉬며 품에서 코어를 꺼내 손에 끼었고, 은이 녀석은 무전기를 통해 특경대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나름 성우장난을 쳐 봣네요. 송은이 성우분이 롤에서 징크스 및 티모 성우를 맡았다는 건 아실 분은 다 아시는 비밀이죠. 그리고 제이와 송은이는 블소에서 동문관계로 만났던 적이 있고요.
아무튼 이번에도 재밌게 봐주셨으면 하고, 2부는 다음 편으로 끝날 예정입니다. 3부 겸 에필로그에서는...음...살짝 재밌는 전개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다음편도 기대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