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모험담 중 일부인 이야기 3-6
한스덱 2018-10-08 0
이 이야기는 실제 게임 스토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게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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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리석은 차원종은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었다.
비유적 표현이 절대로 아니다.
퍽 퍽 퍽
나는 속절없이 쓰러져버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서 엎드린 채로 땅바닥에 오른팔을 망치질 하듯 내리치고 있었다. 푸석한 흙바닥을 튼튼한 건틀릿을 낀 채 내리치는 고통은 물론이며, 속살이 드러난 피부가 내지르는 고통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난 흙바닥에 굴러서 흙장난을 내리치는데도 내 몸에다가 흙먼지 한 톨조차 묻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전혀 괜찮지 않았다.
내 정신은 지금, 내 모든 걸 저주로 바꿔버릴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고통에 몸서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입은 그녀와는 다르게 너무 요란했다.
“이익, 아악, 으아악!”
그녀에게 완패한 나는 철없는 어린아이마냥 울부짖으며 때를 쓰고 있었다. 내가 가꾼 약초들이 내 주먹을 포함한 온 몸에 짓눌려버렸다. 뭉개져버린 약초들에서 풀냄새가 났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나를 멈춰준 건 나보다 더 어른스러운 적이었다.
어느새 내가 서 있던 약초밭의 한 가운데까지 다가온 그녀는 애꿎은 땅과 약초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나는 그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집중을 전혀 할 수 없는 나는 최하급의 신체 능력을 가졌을 뿐이었다. 내가 겨우 멈췄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적당한 힘으로 쥔 내 오른손을 풀어주었다. 족쇄에서 풀려난 나는 더 이상 내 약초밭을 난장판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엉망으로 파헤쳐진 땅 위로 짠내나는 빗물이 쏟아졌다.
“으흐흑…흐흑…”
내 두 눈에서 왈칵 쏟아져나온 눈물은 내 보물 1호와 빌어먹을 마스크 사이의 틈새로 흘러넘쳤다. 그녀는 그런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그 때문에 나는 더욱 괴로워졌지만, 그녀에게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눈물샘을 겨우 잠근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내 행동을 전부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녀가 내밀어준 목발을 겨우 잡은 나는 계속서 내밀어진 왼손도 겨우 붙잡았다. 그녀는 내가 목발과 그 손에 의지해서 다시 일어날 때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완전히 일어난 뒤에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차원 전쟁 중에 어떤 사람들을 구해준 적이 있었어.”
나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발단을 아무 말 없이 들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사람들은 모두 평범한 농부였어. 위상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야.”
나는 그 다음의 전개를 상상할 수 있었다. 전쟁에 휘말려버린 힘없는 민간인이 이야기에서 나올만한 이유는 뻔했으니깐. 그녀는 내가 추측한 시나리오를 따라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느 날, 그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차원종… 아니, 군단의 공격을 받았어.”
이 상황에서 내가 차원종이라는 단어를 싫어할까봐 배려하다니… 나는 그 멸칭을 들어도 아무렇지도, 아니,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는데…
“그 마을은 너무 외진 곳에 떨어져 있어서 클로저들이 출동하기가 힘들었지. 대부분의 클로저들은 사람이 더 많이 살고 있는 도시 쪽에 주로 배치되었으니깐.”
클로저.
차원종이 열은 차원문을 닫기 위해 싸우는, 위상력을 가진 인간 병사들의 호칭. 그리고 군단에게 가장 큰 위협을 주는 존재들의 호칭이다. 인류의 영웅인 그녀 역시 당연하게도 클로저였다. 심지어 차원종의 재앙이라고 불릴만큼 사상 최강의 클로저였다.
나는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미 예상했지만,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 뻔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우리가 그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 덕분이야. 우리 팀이 임무 수행을 위해 이동하던 도중에 그 마을 근처를 지나갔거든. 내 동료 중 한명이 차원문이 열리는 징조를 봤다는 걸 알려주자마자, 우리는 그 마을로 즉시 출동했어. 너무 갑작스럽게 발생한 상황이라 상부에 보고도 못했지만, 우리 팀원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어.”
그들의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어느새 난 그녀의 이야기를 집중하면서 듣고 있었다.
“다행히 그 차원문에선 졸개 놈들…음, 미안. 비교적 약한 녀석들만 튀어나온 덕분에 상황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어.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지. 그 마을 사람들은 우리한테 온갖 말을 해줬어. 정작 우리는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말이야. 우리 팀원들 중엔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없었… 어라, 이건 말하면 안됐는데.”
나는 피식 새어나올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나는 방금 전 까지 내 마음을 좀먹던 분노나 원통함을 이야기 잠깐 들은 걸로 잊어버릴만큼 단순무식한 멍청이였다.
“어쨌든, 우리는 그 감사의 인사였을 말을 들으면서 그 마을을 떠났어. 상부에선 우리들한테 명령도 없이 출동했다면서 시말서를 쓰라고 했지만, 우린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
민간인들을 구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다니… 나는 그 어이없는 경직성에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데다가, 자주 겪어봤던 일인 게 틀림없었다.
“난 그 사람들을 깜박 잊어먹었어.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후에… 아니, 이 부분은 넘어가자.”
그녀는 더 이상 극비 정보를 차원종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난 그런 그녀를 이해했다. 그녀는 오직 나를 위해서 무려 군단장이었던 차원종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으니까.
“이러저러한 일이 있은 다음에 난 전선에서 은퇴했고, 그런데로 잘 살고 있었어. 내 아들이랑 같이 말이야. 아, 네가 내 아들을 봤어야 하는…아.”
자랑스러운 아들 덕분에 한참을 벗어난 방향으로 날아갈 뻔 했던 이야기의 흐름은, 내 눈을 새까맣게 가려버린 고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복구되었다. 난 그녀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조금이나마 더 많이 깨달을 수 있었다.
“흠흠, 그렇게 잘 지내던 어느 날, 난 내가 생각치도 못했던 선물을 받았어. 누군가가 우리 집으로 택배를 보낸거야.”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그 상자를 열어보니 잘 익은 포도가 가득 들어있더라. 그리고 그 밑에는 사진 한 장도 같이 들어있었어. 그 사진 속에는 우리가 구해줬던 그 마을 사람들이 서있었어. 물론 좀 더 늙기는 했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린 나는 그때 그녀가 느꼈을 당황과 반가움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 상상은 내 경험이 아니었는데도 따뜻했다.
“사진 뒤편에는 삐뚤삐뚤한 한글로 적힌 편지가 있었어. 자신들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랑, 그때 나랑 같이 있었던 팀원들한테 그 포도를 나눠달라는 부탁이 적혀있더라… 난 내 아들이랑 같이 그 포도를 배터지게 먹었지. 그 포도는 내가 그때까지 먹어본 포도들 중에서도 가장 달콤했어.”
나는 그녀가 팀원들에게 그 소중한 선물을 나눠주지 않고 아들이랑 독차지해버린 걸 지적하진 않았다. 그녀는 말을 하던 도중에 분명 멈칫했고, 그 찰나의 순간에서 그녀에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나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뻔했다. 그 이야기의 전개도, 결말도 뻔했다. 하지만, 난 그 이야기를 폄하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건 저질러선 안되는 심각한 모욕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준 약초랑 메시지가 그 사람들이 준 포도랑 편지처럼,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날 거야. 사실 그 포도가 네 약초보다 더 맛있었지만, 인간이 아닌 생물이 주는 선물을 받아본 건 그게 처음이거든.”
그녀는 그 뻔한 이야기의 뻔한 교훈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트집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와의 전쟁에서 완패했고, 그녀는 자신의 승리를 마음껏 자랑할 자격이 있었다. 지금 그녀는 종전선언문을 낭독 중이었고, 그 속엔 내가 저지를 뻔했던 전쟁 범죄를 정당방위로 선처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편지 속에는 이런 말도 있더라. 우리들이 마을을 지켜준 덕분에 그 마을의 자랑인 포도밭도 무사했고, 그 덕분에 자신들이 수확한 선물을 전해줄 수 있어서 기쁘다고, 그리고 언제라도 자신들과 우리가 함께 지켜낸 그 밭을 꼭 다시 방문해달라고 말이야. 하지만 나는 사정이 있어서 그 밭을 찾아가지는 못했어.”
그녀는 살짝 뜸을 들인 후,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대신, 난 네가 일궈낸 이 멋진 약초밭을 먼저 구경할 수 있었어. 여기서 난 그 굉장한 약초들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고 말이야. 근데 난 네가 준 선물에 보답도 못했네? 그러니까 그 보답을 지금 줄게.”
난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보답…이요…?”
그녀는 내 질문을 질문으로 되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