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모험담 중 일부인 이야기 3-8
한스덱 2018-10-1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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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동굴 속에 있었다.
같이 나가자고 큰 소리치긴 했지만, 그 일은 제법 많은 각오가 필요했다. 기회는 단 한 번 뿐인데다가 실패하면 그 뒤는 없었다. 게다가 지수는 지금 배가 고프고, 난 그 빈 속을 든든하게 채워줘야할 의무가 있다. 이건 내 능력의 도움을 받아서 지옥을 돌파해야 하는 지수를 위한 일이고, 지수의 다리의 도움을 받아서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시시한 다툼이 끝난 뒤, 나는 내 밭에서 자라난 약초들 중에서 최고의 효능을 가진 아이들만 골라냈다. 나는 원래 내 아이들을 정성껏 돌봐주고 최대한 아껴쓰는 원예가이다. 방화미수범이 하는 말이라 믿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난 내 아이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이 하루가 지나면 난 내 아이들을 더 돌봐줄 수가 없다. 탈출에 성공해도, 실패해도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래서 난 내 약초들을 망설임없이 쑥쑥 뽑아냈다. 이 아이들의 주인은 엄연히 나고, 내가 여기서 무사히 나가야 약초밭도 다시 일궈낼 거 아닌가?
난 내가 채집한 약초들을 담는데 쓰는 바구니를 가지고 있었다. 악초밭이 있는 방 벽에서 자라는 덩쿨을 엮어서 만든, 내 시간과 노력을 제법 투자받은 수공예품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깜박 잊어먹은 정도가 아니라, 챙겨온다는 생각 자체를 안했다. 그래서 나는 무대의 뒷정리를 도와주는 관객의 손을 빌렸다.
커다란 화환을 만들어도 될 만큼 수북한 악초다발을 받게 된 지수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자기 뱃속으로 들어갈 아이들이니 사랑스러울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비싼 값을 불러도 절대 살 수 없는 귀하신 아이들만 한가득 품고 있다. 콧노래를 안 부르는 게 더 신기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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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흠, 흐음~”
…지수가 흥얼거리는 가락을 노동요로 삼은 나는 다음 일을 시작했다. 잔뿌리 하나 남기지 않게 세심하게 다뤄야하는 약초 채집과 마찬가지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말이다.
저수지 앞에 선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잔잔했던 수면 위로 커다란 물방울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나는 그 10 L 는 족히 넘을 물방울을 허공에다가 가득 긷은 다음, 볼일을 끝낸 약수터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내 손에는 한국의 신 수도를 3 일 정도는 멀쩡히 돌아가게 만들 만큼의 에너지가 있다. 약수통 없이 물을 긷는 일 정도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지수는 약초들을 모두 챙겼고, 나는 내 삶을 다시 챙겼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품에 가득 안은 채 약초밭을 떠났다.
“그 능력, 되게 편리해보이네.”
“에너지만 있다면 말이죠. 당신 덕에 수고가 덜었네요.”
“그러고보니, 너 평소에는 에너지를 어떻게 모으는 거야?”
“빛을 전기로 전환합니다. 제 침실이랑 약초밭의 벽 보셨죠?”
“아하! 근데 그 정도 빛 만으로는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모으지는 못할 거 같은데?
“전 주변의 에너지를 전기로 전환하는 잠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빛이 가장 많은 장소에다 침실을 마련했죠.”
“…그런 걸 잠버릇이라고 불러도 되려나?”
“당신처럼 이를 박박 가는 것보다는 실용적이지 않습니까?”
“음? 너 언제 내가 자는 모습을 봤… 아, 나 의식을 잃었을 때도 이를 간 거야?”
“네, 메아리가 울릴 정도였죠. 그리고 ‘세하야’라는 잠꼬대를 정확히 17 번 들었습니다.”
“이야, 역시 내 아들이야. 꿈 속에서도 꼬옥 안아주고 싶다니깐?”
“…다른 인간이었으면 방금 제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 생각보다 취향이 독특한가 보군요?”
“내 아들 사랑하는 게 뭐 어때서?”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보통 인간들은 잠을 잘 때 인형을 품에 안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근데 당신은 인형을 다른 용도로 쓰나 보죠?”
“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리고 난 인형이 없는데?”
“그럼 당신 윗 옷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그 조그마한 곰 인형은 뭡니까?”
“아! 그걸 깜박 잊고 있었네. 그 물건, 사실은 인형이 아니야. 너도 알 텐데?”
“음… 평범한 인형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죠. 인간들은 자신의 인형에게 ‘사랑해’ 같은 말을 하지, 욕설을 퍼붓지는 않으니까요. 아, 그게 소문으로만 들어본 저주 인형인가요?”
“… 나 대체 무슨 잠꼬대를 한 거야? 아니 그것보다, 거기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아, 다 온거야?”
우리의 실없는 대화는 약초밭보다 훨씬 윗 층에 있던 어느 방에 들어간 덕분에 중간에서 끊겼다.
이 방은 우리가 같이 봤던 그 어떤 방보다 더 작았다. 뭐, 같이 봤던 방이라고 해봤자 3 개 뿐이지만. 하지만, 이 방에는 앞의 방들보다 훨씬 더 많은 도구들이 있었다. 다양한 크기의 그릇들, 제법 날이 선 식칼, 물을 담기에 딱 알맞게 생긴 항아리, 내 침실의 침상처럼 벽에서 튀어나와있는 조리대 등등…
여러분이 이미 짐작하셨을 이 무생물의 낙원의 정체는 바로 주방이다. 방 안의 도구와 벽은 모두,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질리게 본 푸른색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아, 그리고 방의 형태가 원의 중심을 가른듯한 모습이라는 것도 이 주방의 특이사항에 포함되었다. 주방 도구들은 반원을 그리는 선에 줄을 맞춰서 서 있었다. 그 반원의 반지름은 정확하게 3 m .였고 말이다. 어디서 봤던 길이이지 않는가?
지수는 약초들을 조리대에 올려놓았고, 난 그때까지 내 옆에 둥둥 떠 있던 물방울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항아리에다 모두 쏟아부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나는 원의 중심에 정확하게 발을 맞춰 섰다.
그리고 물을 긷을 때보다 정신을 좀 더 집중했다.
이 소설의 주요 장르는 요리가 아니므로 자세한 묘사는 생략하겠다. 그냥 넘어가긴 뭣하니까 조금만 묘사를 하자면, 이 주방엔 가스레인지, 압력솥, 오븐에 심지어 전자레인지까지 있었고, 모든 도구들은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나는 요리를 제법 잘 하는 편이다.
약초 요리 풀 코스가 15분만에 완성되었다. 주방은 비좁고 산만한 편이라 식사는 이 동굴의 제일 윗층에 있는 내 침실에서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지수는 양 손에 그릇을 하나씩 잡고, 나는 7개의 그릇을 허공에다 둥둥 띄워놓았다. 내 능력도 이젠 많이 식상해졌으니, 수프가 가득 담긴 뜨거운 그릇을 양 손에 하나씩 잡고선 국물 한 방울 안 흘리며 침실까지 종종걸음으로 이동한 지수의 균형 감각과 식성에 감탄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