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of Striker-이세하 Ep-CUBE Ep-3 무가치한 자학
Sehaia 2018-05-14 1
우리는 왜 넘어지는 걸까? 그렇게 해서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란다.
- 토머스 웨인,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조바심이 난다. 분명 화가 치밀어서 당장이라도 덤벼들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빈틈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힘없이 검을 늘어뜨리고 있을 뿐일 텐데도, 그 어느 곳을 공격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튀어나가려는 발을 단 한 걸음 옮겼을 그 순간에 역으로 검에 베이는 환각이 눈을 쥐어짜고 지나갔다.
얼굴을 쓱 하고 훑고 지나간 감촉이 피가 아니라 식은땀이라는 걸 바닥을 내려다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왜 그러지? 오지 않는 거냐?”
뚜벅. 뚜벅.
한 걸음, 한 걸음, 느리지만 확실하게 녀석은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당하나, 저렇게 당하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분노와 어울리지도 않는 조바심이 혼자 침착하게 내 팔을 들어 올려 불꽃을 쏘아냈다. 섣부른 접근은 위험하다고 수십 번 내린 경고를 몸은 끝내 수용했다.
별로 소용은 없었다.
쾅!
별로 날아가지도 않은 불꽃이 중간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다. 그 한가운데를 꿰뚫고 나오는 보랏빛의 궤적을 본 순간 몸이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움직였다. 살짝 코트를 스치고 지나간 불꽃은 꺼지지 않은 채로 타올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별로 크기 차이도 없는 두 화염이 맞부딪혔다. 그리고 이쪽의 불꽃은 맥없이 사라졌다. 위상력의 농도 차이가 너무나도 현저했다. 전면 승부를 걸었다면 내 모습은 아마 저 불꽃처럼 터져버렸을 것이다.
침착하게 분석을 할 시간도 없었다. 지금까지 느릿하게 걸어오던 녀석이 갑자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듯이 달려오는 녀석의 팔에 힘이 집중되는 것이 보였다. 다만 그것이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메꿀 방법이 보였다.
역시 나를 베이스로 하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힘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봐야 저돌적으로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 내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는 점이긴 하지만, 공격을 시도할 때 대인전이라면 생각보다 빈틈이 많다. 서유리처럼 정돈된 검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그런 악습을 내 복제인 녀석이 갖지 않을 리 없는 것이었다.
곧 휘둘러올 검이나 주먹을 경계하며 자세를 잡았다. 어느 쪽으로 공격을 해오더라도 분명 빈틈은 생길 것이다. 지금 힘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는 그 빈틈을 찌르는 것만이 실낱같은 희망이다. 아니나 다를까, 왼손에 집중된 힘은 녀석이 주먹을 내지를 것이란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명치를 공격하러 올 터다. 언제든 건블레이드로 배를 막을 준비를 하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정확한 반격 타이밍을 잡기 위해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그제야 눈에 남은 잔상의 위화감을 깨달았다.
어......?
손을 편 채로, 쭉 뻗었어?
한 순간, 녀석의 한숨소리를 들은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쭉 뻗은 손은 내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공중을 향해 빙글 뒤흔들었다. 공중에서 힘없이 축 늘어진 몸은 이어서 배를 찔러온 녀석의 검을 막아내는 것도 못할 정도로 무력화되었다. 뜨거웠다. 열기는 식지 않고 계속해서 그 온도를 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뿌리쳐 보려고 해도 목덜미를 붙잡히고 배를 찔린 상태에서는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응축된 보랏빛 불꽃 너머로 녀석의 힘없는 말이 잔향으로 남았다.
“어리석어.”
거대한 폭발과 함께 공중에 붕 뜬 몸은 너무나도 가볍게 날았고, 너무나도 무거웠다. 어느 새에 나와 같은 높이까지 따라온 녀석의 검에선 다시 한 번 보랏빛 폭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영거리에서 배를 뚫은 포격을 막아내는데 힘을 다 써버렸다. 몸을 강하게 날려버린 충격을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벽면까지 날아가 튕겨 나온 몸에는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건블레이드를 붙들고 있었지만, 그걸 들어 올릴 힘조차도 남지 않았다. 파르르 떨린 손에 들린 건블레이드를 녀석은 굳이 멀리 걷어차 버렸다. 저항할 수단도 이젠 손밖에 남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신뢰가 안 가는 지푸라기에 불과했다.
가슴께를 향해서 주저 없이 날아오는 검을 간신히 붙잡고 폭발시키는 가벼운 저항을 했다. 손을 다 베고 지나간 검은 가슴을 찌르진 못하고 그 직전에 간신히 멈췄다. 정말 도움이라곤 되지도 않는 사소한 저항이었다. 지푸라기는 지푸라기에 불과할 뿐.
그 저항이 오히려 녀석의 화를 돋운 것인지, 녀석은 거칠게 검을 내 손아귀에서 뽑아냈다. 손이 더 크게 베여버렸다. 이제와선 아무래도 정말 상관없는 그 사실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였다.
푹.
“무가치해.”
아. 아프네. 이런 통증에도 몸을 떠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조금은 울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눈물을 흘릴 힘조차도 남지 않았지만.
오히려 눈물을 흘려도 이상할 게 없는 건 이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푹. 푹. 푹. 푹.
“무가치하단 말이다! 네놈은! 도대체! 무얼 위해서!”
이 녀석은 왜 화내고 있는 걸까.
고함을 질러가면서 내 전신을 칼로 계속해서 찔러대는 녀석의 모습은 처음 보인 무기력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칼은 분명 나를 찌르고 있을 텐데도, 이 녀석은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흡혈귀같이 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었다.
아.
이게 나인가. 이 녀석이 찌르고 있는 건 분명 남이 아닌 것이다.
가장 멀면서도 가장 가까울, 거울 속의 자신을 계속해서 부술 뿐일 무의미한 행위. 그것을 반복한다. 그것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도, 그걸 그만두지 못한다.
정말, 완전히 복제하고 있다.
계속 찔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세기도 힘든 와중,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위험. 사용자의 정신 붕괴 위험이 감지됩니다. 강제 로그아웃 시퀀스가 진행됩니다.
“흥, 이 정도가 한계인가? 가라. 다시는 이곳에 그 추접스러운 면면을 내밀지 마. 얌전히 모든 걸 놓아버리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다음은 없다.”
다음이고 자시고, 어차피 다 죽여 놓고선, 뭘 다음......
뚝.
시야가 점멸했다. 시야가 재차 점멸했다.
“세하야! 괜찮니?”
어스름하게 흐릿한 빛이 눈앞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보았던 트레이닝 룸과는 다른, 훈련 프로그램 동작실. 귀에 익은 유정 누나의 목소리와 웅웅거리는 기계의 동작음이 시험 종료를 고했다.
“아......예......”
아아, 끝났다. 지옥과도 같은 시간은 끝이 난 것이다. 처음 말렉을 상대하고 살아남았을 때와 같다. 칼바크 턱스를 상대하고도 일어서 있었을 때와 똑같다. 이 허탈하고도 안심되고, 무감각한 감각은 분명 그것이 틀림없다.
난 살아남았다.
팔을 들어 머리에 쓰고 있던 장치를 벗었다. 땀에 절어 축축할 대로 축축해진 이마를 손 끝으로 쓱 훑은 난, 문득 내 팔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멀쩡할 팔에서 시뻘건 피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아니, 멀쩡한 걸까? 그렇게 찔렸는데, 다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이쪽이 현실이, 맞나? 이미 난 죽은 건, 아닌가?
그도 그럴게,
뼈에 새긴 통증이 아직, 전신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아아아악! 끄으으, 으아아아악!”
“위험합니다! 아직 대뇌에 통각 신호가 남아있어요! 지금 억지로 움직이면 신경들이 자괴해버려요!”
“뭐해! 어서 수면제를 투약해!”
“이건 치사량이잖아요! 사람을 죽일 생각이에요?”
“위상 능력자는 치사량이 훨씬 높아! 어서 놓으라고!”
타오르는 격통 속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 이동식 침대에 쓰러진 팀원들이 보였다. 시험은 다들 실패한 듯했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들이 저 고약한 큐브 속에서 무엇과 싸웠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특히 그 중에 한 사람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봐왔을 텐데도, 난 무엇 하나 알 수가 없었다.
이슬비, 넌 도대체 무엇과 싸운 거냐?
이 팀 중에서 누구보다 굳건한 의지를 갖고 있던 넌, 도대체 무엇을 본 거냐?
......
의미......없지.......
주사바늘과 함께 멀어지는 통각과 이성의 너머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홀로 우뚝 서서 날 내려다보았다.
‘그런 인간이, 굳이 살아서, 싸워서, 뭘 하겠다는 거지.’
정말, 난......뭐하고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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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Closenea입니다. 어떠셨는지요? 우울한 감정을 절절히 느끼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번 편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별로 유쾌한 얘기는 아니지요. 우울하신 분이 보면 그 감정이 배가 될 것만 같아 살짝 불안하기도 합니다.
이번 편은 쓸 때 처음 큐브 돌던 때를 회상하면서 썼습니다. 영거리 포격 한 방! 전투 씬을 쓰기 힘든 것도 있고, 시간적으로 여유도 애매해서 정말 쓰고 싶은 걸 쓰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분량이 조금 짧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편은 이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 대담이 될 것이기에, 거기에 조금 더 신경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럼에도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제가 인용해 온 부분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편을 보시기 전엔 제가 여태껏 썼던 소설들을 다시 봐주고 오셨으면 하는, 자그만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