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어떤 하루(feat. 180517)
루이벨라 2018-05-17 4
"너 케이크 좋아하지?"
"응, 좋아해. 특히..."
"특히, 메이플 시럽이 어울러진 폭신한 핫케이크를 좋아하지."
세하의 대답에 난 눈을 깜빡일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귀신같이 알아낸 거야!? 그제야 내가 제멋대로 세하를 끌고 이런저런 디저트 가게를 탐방하고 다녔다는 게 떠올랐다. 끌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내 나름의 디저트 철학도 세하에게 설교했던 것도 같은데...아아, 그 정도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할 거 같은데. 그런데 세하는 기억력도 참 좋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무표정하게 게임기만 쳐다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섬세한 구석도 가끔씩 있단 말이지!
난 내가 앉아있는 의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아슬아슬하게 의자는 넘어지지 않은 채 균형을 잡고 있었다. 근데 좀 뜬금 없다. 빵을 좋아하냐니. 세하의 질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디저트 가게를 끌고 다녔던 걸 빌어서, 맛있는 디저트 가게라도 발견했나?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세하에게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물어봐?"
"응? 하나 구워볼려고."
"구워본다니...케이크 말이야? 세하가 케이크를 만든다고?!"
"목소리 은근 크다...?"
아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세하가, 이세하 씨가 베이킹을 한다고? 세하가 원체 요리를 잘하기는 한다. 세하의 집에서 초대되어서 몇 번이나 먹어본 내가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 케이크를 비롯한 베이킹을 한다는 건 들어** 못했다.
이거이거, 감이 쓰윽 잡힌다. 슬쩍 윗물을 떠본다.
"헤에...뭐야? 무슨 특별한 날이기라도 해?"
답 안하고 무시할 줄 알았는데 세하는 덤덤하게 답을 꺼냈다.
"오늘 네 생일이잖아."
"...응?"
잘못 들어서 나도 모르게 의문형 말이 나가버렸다. 이런 나의 태도에도 세하는 참을성 있게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오늘, 네, 생일, 이라고."
"그, 그걸 누가 모른데!?"
당황해서 너무 큰 소리가 나갔다. 생일에는 역시 케이크가 제일 먼저 떠오르긴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세하와 나눈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오늘 내 생일이니까 케이크를 구워서 줄게. 말을 엄청 쉽게 해서 케이크가 요술 방망이 뚝딱! 같이 만들어지는 줄 알겠다. 지금 세하의 이 말투는 '비가 오니 우산을 가져왔어.' 와 비슷한 부류의 말투였다.
세하한테 케이크를 받는 게 싫냐고? 그건 아니다. 하지만 왜인지 나 때문에 일부러 무리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세하는 물론 소중한 사람이다. 소중한 사람에게 생일을 축하받는 것만큼 좋은 건 없지만, 이리 켕기는 기분으로 받는 건 싫었다.
차근차근, 하나씩 마음을 정리해 세하에게 다시 물었다.
"세하야."
"응."
"케이크 굽는 거 은근 힘들다?"
"알아."
"안다면 왜 그런..."
수고스러운 일을 하냐고? 뭐야, 세하는 독심술이라도 있는건가. 내가 뒤에서 할 예정이었던 말꼬리를 뺏어서 그대로 되풀이한다. 세하는 마침 하고 있던 게임을 끝냈는지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어서 하는 말에는 살풋,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걱정 마. 경험은 몇 번 있으니까."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이제 되었어?"
아예 빼도 박도 못하게 단호하게,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목소리는 짜증이 약간 섞인 것과 대조적으로 세하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눈매도, 입술선도 유려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후딱 만들어서 가져다 줄게, 라고 덧붙이는 세하에게 난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가서 볼래!"
"나 케이크 굽는 거? 재미없을텐데."
"재미없어도 괜찮아! 그래도 볼래!"
"상관은 없지만..."
힘없이 중얼거리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세하. 무언가를 또 숨기고 있는 걸까? '케이크' 를 구워준다는 건 겉으로 드러난 명분이고,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다라던지...
후에 세하가 말하기를, 그 때 정말 내가 '지루할까봐', 내가 내뱉은 말을 내가 후회할까봐 걱정을 한거라고 했다. 베이킹은 내가 하지 않는 이상은 흥미를 못 느끼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었다. 그 날 본 세하의 손은 앞서 내가 말했던 '요술 방망이' 와 같았기 때문이다.
* * *
세하가 요리를 하는 건 건너편에서 잠깐씩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뒤에서 대놓고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있는데도 세하는 전혀 개의치 않는 행동이었다. 오히려 그렇게 노려보다가는 점점 재미없어질텐데, 라며 멋쩍은 농담도 했다.
한창 반죽을 만들며 세하가 말했다.
"얼마 전에 엄마 생신이셨거든."
"아, 아주머니의? 선물 챙겨드릴 걸."
"됐어. 자잘한 건 신경 안 써도 돼."
"자잘한 거라니...!!"
너무하네, 정말...
반죽을 준비하는 세하의 손을 정확하고 재빨랐다. 정말 본인의 말대로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세하는 불쑥- 또 하나의 고백을 했다.
"컵케이크로 만들 거야."
"컵케이크?"
"이왕 제대로 먹을거면, 여러 가지 취향을 넣어서 먹는 게 더 즐겁잖아."
뜨끔- 그건, 분명 어느 시점의 내가 세하에게 한 말이었다. 계속 나만 당할 순 없었다. 조금 남겨진 반죽을 가리키며 세하가 말했다.
"남은 걸로는 핫케이크를 만들 거야."
"핫케이크?"
"네가 좋아하는 메이플 시럽이 올려진..."
"수플레 핫케이크!"
그 위에 생크림을 올려도 괜찮아~ 세하의 취향은 분명 메이플보다는 생크림이라고 했었다. 세하와 얼굴을 마주보며 같이 웃었다.
같이 웃고 떠드는 사이, 나는 어느 새 세하가 케이크를 굽는 걸 도와주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을 받는데 이 정도의 허드렛일은 할 수 있었다. 찬장에서 많이 먹은 듯한 생크림 통과, 뜯지 않는 메이플 시럽 통을 찾았을 때 난 또 한 번 세하의 세심함에 감탄했다.
노릇하게 구워지는 빵 냄새는 어느 새 공기 중으로 퍼졌다. 갓 구워서 내놓은 빵만큼 맛있는 건 없다. 그 형태에 감탄하며 조금 떼어 먹었다. 옆에서 심사를 기다리는 요리사는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다.
"어때?"
"...맛있어."
평균 이상의 평가평이었는지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같이 시식을 하는 자리를 만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따스한 기운을 마저 내뿜던 핫케이크를 맛보며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대다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세하의 요리 솜씨에 꽂혀 있었지만.
"세하 나중에 빵집 차려도 되겠다."
"클로저 그만두고서 빵집이나 할까?"
"그럼 난 단골 될게!"
세하도 자신이 만든 작품이 꽤나 만족스러운지 계속 먹고 있었다. 생크림이 입가에 묻힌 것도 모르고 먹는 걸 보면 확실히 그랬다. 내가 옆으로 가서 입가를 닦아줄 때까지도 세하는 몰랐던 모양이다. 묘하게 뺨이 붉어진 세하가 헛기침을 했다.
핫케이크의 잔해가 거의 없어졌을 때쯤, 세하는 또 헛기침을 했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단다.
"제일 중요한 말을 빼먹었네."
"무슨 말?"
"생일 축하해?"
"그건 좀 일찍 했어야지!"
맞다. 내가 지금 여기서 세하와 간식(?)을 먹고 있던 이유가 다 거기서 비롯되었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뜨였다.
세하는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특별하게 해줄 건 없는데...그래도..."
"괜찮았어."
"괜찮...았어?"
"응."
평생 내 옆에서 핫케이크를 만들어 줘~ 라는 말을 할 뻔 했다. 내가 환히 웃자, 세하도 덩달아 미소 짓는다. 아...이 완벽한 사람을 어쩌나. 진짜 내 옆에 계속 있어달라고 할까? 정말 순수한 마음이다.
사소한 거 하나라도 기억해주고,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환하게 웃어주는 세하가 참 좋았다. 아까전부터 계속 먹었던 핫케이크처럼 폭신한 구름에 두둥실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쯤, 뜻밖에 내리는 소나기에 세하의 집에서 우산을 빌렸다. 이미 양손에는 세하가 너무 많이 만들어낸(세하 왈, "가족들이랑 넉넉히 나눠먹어." 라고) 컵케이크가 가득했다. 우산을 쥐어주면서 세하는 뭔가를 또 내게 쓰윽- 건네었다. 또 뭐가 남은 걸까. 이건 맘에 안 들지도 몰라...말끝을 흐리는 모습으로 보아 계속 주기를 망설이고 있던건지도 모른다.
그 날 세하가 마지막으로 건네준 작은 꾸러미 안에는 아주 특별하고, 내가 받은 생일 선물들 중에서 최고가 있었다. 그건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너무 소중해서 차마 함부로 끼고 다닐 수가 없었다.
지금도 새거와 다름 없는 상태로 내 책상 서랍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걸 본인 앞에서 다시 꺼내게 된 건 아주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
이 글 제목은 작년 딱 이맘때쯤 쓴 글의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유리야, 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