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어느 봄날 (7)

수지고등학교 2016-09-07 2

……뭐해?”

……아니, 발이 꼬여서.”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 타이밍에서 넘어질 수가 있는 걸까.

정말로, 기껏 내딛은 한 발짝이었는데.

 

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가만히 있자니, 이슬비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해, 빨리 일어나.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내 눈앞에 갑자기 끼어 들어온 작은 손 하나.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코앞에 있는 이슬비의 얼굴에 어젯밤의 모습이 오버랩 되고 말았다.

가까스로 이슬비의 손을 잡고 일어선 나는, 먼지가 묻은 옷을 툭툭 털고 애써 평정심을 가장하며 말했다.

 

……빨리 가자.”

, . 근데…….”

, ? 빨리 가자니까?”

아니, …….”

.”

 

아직 손을 잡은 상태였다.

한손으로 잘도 옷을 털었구나 싶다…….

황급히 손을 놓고 고개를 돌리자, 자유로워진 내 손을 이슬비가 다시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왜 이러는 건지 눈빛으로 질문하자, 이슬비는 앙 다문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 그냥 이러고 가.”

……?”

네가 너무 뒤처지잖아! 됐으니까 그냥 이렇게 하고 가자구!”

 

그렇게까지 뒤처지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부끄러움만 견딘다면 나쁠 게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슬비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어제 내렸던 비 때문인지 벚꽃잎들이 바닥에 깔려있는 길거리를 걷다보니, 길 한쪽으로 액세서리를 팔고 있는 가게가 보였다.

항상 걷고 있던 길이지만, 저런 가게를 보는 것은 신기하게도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게임을 하면서 걸었지만, 이슬비와 손을 잡은 상태로 걷고 있으니 시야가 이쪽저쪽 움직이며 갈피를 잡지 못해서, 주위가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회전하던 시야는, 이윽고 이슬비의 머리에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슬비는 항상 검은 리본만 묶고 다닌다.

리본을 묶어서 자기 암시라도 거는 걸까.

하얀색은 여동생 모드, 검은색은 사령관 모드 같은 느낌으로.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슬비도 한창 꾸밀 나이다.

저런 쪽에 관심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

지난 생일 선물도 제대로 못 챙겨줬고, 이참에 하나 사줄까…….

……내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 이쪽.”

? 우리 집 그쪽 아닌, …… , 어디 가는 거야?”

됐으니까 따라 오기나 해.”

 

맞잡은 손을 끌어당기면서, 이슬비의 저항을 애써 무시하고 나는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온통 분홍색이었다.

이쪽 벽도, 저쪽 간판도, 심지어는 조명까지 모든 것이 분홍색.

뭐지, 이 못된 고양이 같은 곳은.

절대로 혼자는 들어오지 못할 것 같다.

, 하지만 왠지 테인이랑은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이슬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굳이 사줄 필요 없는데.”

사준대도 싫다 그러네. ……, 이거 예쁜데, 어때?”

……, 하얀색은 별로야.”

, 필요 없다는 것 치고는 자기주장이 강하다?”

…….”

농담이니까 고르기나 해. 병문안 답례니까.”

고르라고 해도, 이런 곳은 처음 와보고…….”

 

그럴 것 같긴 했다.

그럼 내가 골라주는 수밖에 없나.

하얀색이 싫다고 하기에, 나는 이슬비가 매고 있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에 분홍색 하이라이트가 들어간 리본 한 쌍을 집었다.

 

이쪽으로 와봐.”

?”

됐으니까 와봐.”

 

나는 이슬비를 내 쪽으로 끌어당긴 후, 한쪽에 묶고있던 리본을 살짝 당겨 풀어버렸다.

 

갑자기 머리는 왜 풀어?”

가만히 있어봐.”

 

들고 있던 리본을 이용해 분홍빛 머리를 양쪽으로 나눠 묶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자주 보이지만 현실에 있으면 이상할 것 같은 헤어스타일 랭킹 1, 트윈테일이다.

참고로 조사는 나.

 

나는 리본에서 손을 떼고, 결과물을 정면에서 보기 위해 이슬비를 내 쪽으로 돌렸다.

 

…….”

……네가 멋대로 해놓고, 그런 표정 짓지 말란 말이야.”

아니, 무서울 정도로 잘 어울리네, …….”

 

애초에 성격이 그쪽인데, 머리 모양까지 저렇게 하니까…….

 

……완전, 츤데레의 정석이잖아.”

누가 츤데레야!”

 

, 아무리 그래도 이런 머리를 하고 돌아다니기는 좀 그런가.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슬비, 좋아하는 색 있냐?”

……청색.”

흐음, 청색이면 파랑인가? ……? 분홍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이런 머리인 줄 알아?”

, 그랬지. 그럼 이런 건 어때?”

……머리핀?”

, 앞머리 꽤 길잖아? 임무 중에도 거슬려 보이던데.”

……그걸 다 보고 있었어?”

, 어쩌다보니…… , 별로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이걸로 산다?”

 

머리핀을 들고 계산대로 가려고 했더니, 이슬비가 다시 내 손을 잡아당겼다.

 

으음, 이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지만…….”

……들지만?”

, 너도 앞머리 길잖아.”

 

그 말을 듣고 앞머리를 만져보니, 확실히 꽤 길긴 했다.

곧 있으면 눈을 가릴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조만간 미용실에 가든지, 서유리한테 잘라달라고 해야겠다.

 

그렇긴 하네. 그렇다고 내가 머리핀을 할 수는 없잖아?”

아냐, 남성용 머리핀도 있어. 저번에 서유리가 보여줬거든.”

……그래서?”

사줄게. 받기만 하면 미안하니까.”

아니, 애초에 이건 병문안 답례…….”

, 내가 사주는 건 못 받겠어?”

그런 게 아니라, 앞머리는 조만간 자르면 그만…….”

사준다잖아! 사준다고! 사준다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러더니, 이슬비는 가게 안쪽에서 남성용 머리핀을 꺼내왔다.

꽤 빨리 찾았네.

처음부터 저걸 사려고 찾고 있던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속도다.

그보다 저 머리핀, 분홍색이다.

 

왜 하필이면 분홍색인데?”

, 분홍색이 어때서?”

아니, 어떻다는 게 아니라…….”

……마음에 안 들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그냥 쓰면 되잖아.”

하아…….”

 

기껏 사주겠다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받아서 서랍에 넣어 놓으면 되겠지.

가끔 밤에 게임할 때만 쓰자.

던전 돌 때 앞머리가 거슬리니까.

 

물건을 계산하고 가게를 나오면서, 나는 이슬비에게 신경 쓰이던 걸 물었다.

 

계산할 때 봤는데, 넌 왜 만 원이나 내냐? 난 오천 원이었는데. 뭐 더 샀어?”

, 사긴 뭘 사. 남성용이라 비싼 거겠지.”

……그런 거라면, 내가 미안해지는데.”

……네가 미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쓰고 다녀, 그거.”

이거, 진짜 쓰는 거냐……?

나도 쓰잖아, 싫어?

"너랑 내가…… 아니, 알겠다, 알겠어……."

 

생각해보면 기껏 사준 건데, 서랍에 처박아 놓는 건 미안하다.

게다가 만 원짜리고…….

일단 집에 가서 머리에 써본 다음 거울을 보고 나서, 밖에서 쓰고 다닐지 말지를 결정하자.

 

그런 다짐을 하며 걷고 있는데, 옆에 이슬비가 보이지 않아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 뒤쪽에 가만히 멈춰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슬비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너 거기서 뭐해? 빨리 와.”

 

그렇게 말해도 가까이 올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아서, 결국 내가 다시 돌아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이슬비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이세하.”

응?

 

나를 부르면서 손을 내민 이슬비는, 내가 멍하니 있자 답답한 듯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뭐하냐?

……!

 

계속해서 손을 붕붕 휘두르며 무언의 항의를 하는 이슬비에게,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그건 마찬가지였는지, 이슬비는 고개를 돌리면서 화를 내듯 말했다.

 

손 비었다고, 손!

…….”

 

고개를 돌리고 손만 내민 그 모습에, 나는 살짝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이제 정말로 봄이라는 사실을 알리기라도 하듯, 맞잡은 손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길가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물웅덩이, 그 위에 떠있는 꽃잎들.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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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으로 이어집니다.

아마 조만간 쓰지 않을까 싶네요.

그보다 정말로 오랜만에 쓰는 "어느 봄날" 시리즈인 것 같습니다.

혹시 너무 오랜만이라 까먹으신 분들은 "어느 봄날 (1)"부터 다시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읽으시는 분이 계시다면 말이죠.





2024-10-24 23:11:12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