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슬비] 어느 봄날 (2)
수지퓨전콘서트 2016-04-21 5
"……나갔지?"
회의실을 나간 이세하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말했다아아아아아-!
말해 버렸어어어어어어어-!
어떡하지? 어떡하지?
분위기에 휩쓸린 것도 있고, 나랑 단둘이 있는데 게임만 하는 걸 보니까 화가 나서 그런 것도 있고!
어떡하지? 진짜 어떡해?
이, 이세하가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이면 어떡하지?
아니, 실제로 그런 의미지만!
그런 의미로 말한 거긴 하지만!
한참을 혼자서 (속으로)날뛰다가,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물건을 꺼냈다.
"녹음은 잘 됐을까……?"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물건은 유정 언니한테 전달 받은 소형 녹음기.
설마 이걸 여기에 쓰게 될 줄은…….
뭐, 결과적으로는 이득을 봤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까 하마터면 들킬 뻔 했지.
이세하 걔는 이상한 부분에서 눈치가 빠르다니까.
"평소에는 둔감하기만 하면서……."
약간의 어리광이 담긴 목소리로, 입술을 비죽 내밀고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제대로 됐으려나…….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아.』
완전 제대로 됐잖아!
시, 심장이 두근거려…….
"하, 한 번만 더 들을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금 녹음된 음성을 다시 한 번 재생했다.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아.』
"……………………핫?!"
위험해, 위험해.
하마터면 정신을 놓을 뻔 했어.
이 게임 폐인 둔감남.
내가 시켰다고 해서 그런 고, 고백같은 말을 꺼리낌없이 해대고 말이야…….
게다가 별 어려움도 없이 대충 내뱉었어!
나만 두근거리는 거 같아서 분해!
뭔가 엄청나게 분하다구!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아.』
아니, 딱히 더 듣고 싶어서 다시 재생한 건 아니라구?
잘못 눌러서 그런 것 뿐이니까!
그보다, 다시 들어보고 나서야 알았는데 이건 여러가지 의미로 위험하네.
제이 아저씨나 유정 언니한테 들키면 차라리 낫지.
혹시 유리한테 들키기라도 했다간…….
"아깝지만, 지우는 수 밖에 없겠네……."
……그 전에, 한 번만 더 듣고.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아.』
하, 한 번만 더…….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아.』
"나, 나도 드라마보다 네가……."
아우우우우!
아니야!
방금 건 아니야!
아우우, 미쳤나 봐 진짜!
녹음기에 대고 뭐라고 떠드는 거야!
"……."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뭔가에 홀린 듯이 녹음기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아.』
"……나도, 드라마보다 네가 좋은 것 같아."
"야호~ 슬비야~!"
염동력으로 녹음기를 띄우는 데 1초, 창문을 열면서 2초, 밖으로 내던지면서 3초!
마지막으로 창문을 다시 닥으면서 4초.
완벽한 임기응변이었어…….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리에게 웃으며 말했다.
"응, 유리야. 안녕?"
"어, 음…… 방금 뭔가 던지지 않았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뭔가 잘못 본 게 아닐까?"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은……."
"분명 잘못 본 거야."
"아, 응. 알았어……."
어떻게 얼버무리긴 했지만, 아까운 짓을 해버렸네.
두고두고 들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니, 아니야!
그 게임폐인의 달콤한 말 따위 들어서 뭐하게!
……한 번만 더 듣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녹음기가 날아간 창 밖을 내다보았다.
분홍빛 벚꽃잎들 사이로, 검은 머리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
"아, 쟤 세하 맞지? 방금 복도에서 만났는데~ 근데 뭘 줍고 있는 걸까?"
나는 창문을 열고 몸을 던졌다.
"스, 슬비야?!"
안 돼, 절대 안 돼.
이세하가 저걸 들어버리면, 자기가 한 말을 내가 녹음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리면……!
"이세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응? 뭐야……? 우와와와와와왁! 진짜 뭐야?!"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이세하는, 그제서야 날 보고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를 지른다.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면서도, 떨어지는 나를 몸으로 가뿐하게 받아서 품으로 끌어당긴다.
……생각보다 몸이 크네.
그, 그보다 이거, 말로만 듣던 공주님 안기 아니야?!
굳이 거울을 ** 않아도 얼굴이 새빨개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생각보다 좋은 느낌이네……."
"난 전혀 좋지 않아. 부탁이니 빨리 일어나기나 하시지."
하웃?! 입으로 튀어나와 버렸나?!
"나오라니까."
"아, 응."
……더 안겨 있고 싶었는데.
내가 품에서 나오자 이세하는 옷을 툭툭 털면서 묻는다.
"대체 뭐 때문에 저기서 여기까지 날아온 거야?"
"……어?"
맞다, 녹음기!
주위를 둘러보자, 저 멀리에 부서진 녹음기가 굴러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으, 한 번 더 듣고 싶었는데…….
그래도 다행인가…….
어차피 부서졌으니 별로 상관도 없겠지.
"녹음기가 떨어져서."
"……녹음기? 아아, 저거 말인가. 뭔가 부서져 있어서 주워보려고 했는데, 네 거였냐?"
"응, 내 거야."
"그러고 보니, 너 왜 떨어진 거야?"
"방금 말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위상력을 쓰면 날아다닐 수 있잖아? 왜 떨어진 거냐고."
"윽……!"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네.
진짜, 이런 데서만 눈치가 빨라요…….
너한테 안기고 싶어서 그랬다고 할 수는 없고, 으음…….
……!
"함부로 위상력을 쓰면 안 되는 거 몰라? 위급 상황이 아니면 가급적 위상력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아."
"아니, 충분히 위급 상황이었다고 본다만……. 그보다, 너 회의실에서 커피 탈 때 염동력으로 타지 않냐?"
"……난, 가급적이라고 말했어."
"아, 그러냐……."
뭐, 이제 딱히 볼일도 없고.
다시 올라가야겠다.
……한 번 더 듣고 싶다.
또 물어보자니 좀 그러네.
"그럼 난 집에 간다."
"아……."
붙잡고 싶었지만, 딱히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저 뒷모습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아."
이세하는 한참을 걸어가더니, 외마디 탄식을 내뱉고는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야?! 뭔데?!
"이, 이세하! 왜 그래?!"
"……부서졌어."
"괜찮아! 내 녹음기는 괜찮으니까!"
"그게 아니야! 내 게임기가 부서졌다고!"
"……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세하가 들고있는 게임기를 자세히 보니, 확실히 액정과 본체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왜, 왜 부서졌는데?"
"몰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 아."
"짐작 가는 데가 있어?"
"……."
이세하는 아무 대답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묘하게 부끄럽다.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몰라서 물어?"
"아, 알면 왜 물어보겠어."
"이슬비, 내 게임기는 멀쩡했어."
"너를 받아주기 전까지는."
아, 음, 그렇구나.
나를 받아주면서 게임기를 떨어트린 거구나.
……그건, 뭐라고 해줄 말이 없는데.
"……미안해."
"……."
"하, 하나 사 줄까?"
"……얼마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어, 얼만데?"
………그렇게 비쌀 줄은.
"지, 진짜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됐어."
……?
뭐야, 얘.
"……왜?"
"……화 안 내?"
"……뭐?"
"펴, 평소에는 내가 게임 좀 그만하라고 하면 짜증부터 냈잖아. 근데 오늘은 부수기까지 했는데 왜 화를 안 내?"
"야, 내가 언제 짜증을……."
이세하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 많은지, 말을 하다가 중간에 멈췄다.
"……진짜 화 안 내?"
"안 내. 그러니까 쫄지 말고 빨리 올라가기나 해."
"왜 안 내는데?"
"……."
내가 질문하자,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입을 다문다.
……얼굴은 왜 또 빨개져?
"왜 화 안 내냐니까?"
"……화를 안 내도 난리네."
"대답이나 해. 너 혹시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거든."
"그럼 왜 화를 안 내는 건데?"
"……."
또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내가 계속 빤히 쳐다보면서 시선으로 압박하자, 그제서야 내 시선을 피하면서 입을 연다.
"아, 아까 말한 게 있으니까."
아까 말한 거……?
아까 말한 게 뭐지?
으음…….
"아."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아.
이세하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나도 덩달아서 부끄러워졌다.
아마 이세하 만큼이나 나도 빨개져 있을 것이다.
어떡하지,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해.
지금 내 얼굴, 이상하지 않을까…….
"뭐, 그, 그런 거니까."
"아, 응……."
그렇게 대화가 흐지부지 끝나려고 할 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녹음기는 부서졌고, 이세하가 했전 그 말은 들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아, 아까 말한 게 뭔데……?"
"어?!"
"아까 말한 게 뭐냐니까!"
"아니, 그, 기억 안 나?!"
"안 나! 아까 뭐라고 말했는데!"
"으으……!"
말 해!
빨리 말하란 말이야!
"나, 나는……!"
"……!"
"나, 나는 게임보다 네가 좋다고……!"
후와아아아아………….
몸이랑 마음이랑 둘 다 녹아버렸어…….
달콤한 말 한 마디에 넘어가 버리다니…….
……나 혹시 엄청 쉬운 여자인가……?
아니, 아냐.
이건 이세하가 나쁜 거니까, 응.
녹음기가 부서져버린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음에 유정 언니한테 하나 더 받아야지.
"나, 나도 드라마보다 네가 좋으니까!"
"어, 응……."
"쌤쌤이지?!"
"그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걸……."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 나는 애써 비웃음을 흘렸다.
"헤, 헹~ 너한테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안 기쁘지만~."
"아,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야."
"……."
"……."
"…………이세하."
"……왜."
"선택권을 줄게."
"……뭐?"
"시내버스랑 시외버스, 어느 쪽이 더 좋아?"
"뭐?! 야, 잠깐만! 야!"
"아아, 마을버스 쪽이야? 그럼 원하는 대로 해줄게."
"야! 위상력은 위급 상황에만 쓰라며!"
위급 상황이야!
소녀의 순정이 위급 상황이라고!
"죽어버려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아악!!"
이세하에게 실컷 버스를 퍼부은 뒤, 회의실로 돌아간 나는 나와 이세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유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낱낱이 실토하기 전까지 집에 가지 못했다.
……근데 녹음기는 어디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