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솔직하지 못한 아저씨와 아가씨
Maintain 2016-03-10 5
"잠깐 좀 괜찮을까요?"
하루 일과가 끝나고, 밤이 내려왔다.
하늘 위에서 보는 밤은, 땅에서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 든다. 불빛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전쟁에서의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아마 나는 후자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다른 애들은 일단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전함이 크긴 정말 크군. 설마 각자 한 명씩 쓸 수 있는 방까지 배치되어 있을 줄이야. 날아다니는 요새... 그 말이 딱 맞군. 거기다 시설도, 내가 사는 그 골방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다. 이런 데라면, 바로 이사가고 싶군.
하지만 아쉽게도, 여긴 내 방이 아니다.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뻐근함을 느끼며 함선 내에 있던 휴게실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들어온 아이들의 목소리와는 다른, 농염하기까지 한 성인 어른의 목소리. 창문에 비쳐 보이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그 목소리에 맞는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이름이 하피...라고 했던가. 본명은 모르지만. 본인도 가르쳐 줄 생각이 없는 것 같고. 나도 그렇지만.
"아가씬가... 앉으라고. 미녀를 옆에 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지."
"고마워요. 저번에도 비슷한 말을 듣긴 햇지만요."
"그랬었지. 그래도 싫지는 않잖아?"
"그건 그렇죠. 그럼, 실례할게요."
나는 머리 위에 얹어놨던 안경을 다시 제대로 고쳐 썼다. 뒤로 돌아있었던 게 다행일까. 이 아가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 안경을 벗은 모습은 보여주기가 껄끄럽다. 예전엔 벗고도 잘만 살았는데.
"굳이 안 쓰셔도 되는데. 안 쓰는 편이 훨씬 인물도 살고요."
"버릇이 들어서 말이야. 이제 이 녀석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기까지 하거든."
"버릇이란 게 무섭긴 하죠. 하마터면 그 안경, 제가 또 슬쩍할 뻔했거든요."
...보였구만. 그래도, 딱히 싫지는 않군...
"지쳐 보이네요. 자요."
아가씨는 우아한 자세로, 내 옆에 다리를 꼬으며 앉았다. 어딘지 아련한 달콤한 향수 냄새가 느껴졌고, 그리고 뺨에 뭔가 차가운 게 닿는다.
"김유정 요원님께 들었거든요. 음료는 이온음료밖에 안 마신다면서요?"
"다른 음료는 내용물의 절반이 설탕이거든. 그래도 이왕 마실거면 조금이라도 몸에 좋은 걸 마셔야 하지 않겠어? 음료뿐만 아니라, 설탕은 몸에 해롭다고."
"후후, 아쉽네요. 나중에 같이 데이트라도 가면 달고 맛있는 걸 잔뜩 먹고 싶었는데."
"...그, 그래? 그 일은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지."
역시, 이 아가씨와 함께 있으면 여러모로 휘둘리는 느낌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파란 이온음료 캔을 받아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그나저나, 별일이네요? 당신이 이런 무방비한 모습도 보이고."
"...그래? 난 평소에도 항상 몸도 마음도 열려 있는 무방비와 관용의 절정을 달리는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접때도 그랬잖아?"
"천만에요. 뭐랄까, 오히려 제가 보기에 당신은 모든 곳에 신경쓰고 경계하는, 그런 사람이라고요. 다른 애들이 당신을 보고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요?"
'그 약쟁이 꼰대... 도저히 방심할 수가 없어. 매사에 이래라저래라, 나한테 잔소리만 해댄다고. 그 정도 일들,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데 말이야. 그렇게 내가 걱정되거든, 다른 녀석들이나 신경써 주란 말이야.'
'제이 씨요? 신중하신 분이에요. 경험도 많으시죠. 다른 때엔 몰라도, 작전에서는 정말 믿을 수 있으신 분이에요. 하지만... 평소에는, 조금, 안쓰러워요. 쉬어야 할 때인데도 쉬지 못하고, 누가 봐도 가벼운 척 연기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죠. 안심과는 담을 쌓은 것 같은, 그런 모습이요.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저씨요? 뭐, 허당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별로 그렇지도 않아 보여요. 아니, 오히려 처음부터 원래 그런 사람이었구나, 요즘은 그런 생각까지 들거든요. 뭐랄까, 항상 어딘가가 곤두서 있는 것 같은...'
"...거 녀석들, 남의 이미지를 그렇게 망치다니."
"글쎄요? 전 처음부터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가벼운 게 가벼운 게 아닌... 그런 사람이요."
"...그건 아가씨도 마찬가지일 텐데. 서로 피차일반이라는 거지."
"동족끼리 서로 끌린다...그런 거겠죠. 그래서 당신이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농담은 그쯤 해둬. 누군가가 마음에 든다...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그런 말로 상처입은 사람도 이 세상엔 있는 법이니까."
나는 빈 음료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아가씨를 등 뒤로 했다.
"아가씨도 슬슬 방으로 돌아가. 밤이 늦었다고. 밤샘은 여성에게 최대의 적이라는 소리도 있잖아."
"걱정 마요. 이래봬도 저도 밤에는 익숙하니까요."
"그래. 그래서 그때 공항에서 내 약봉지를 가져갔던 거겠지. 그거, 다시 돌려줬으면 좋겠는데."
"언젠간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서요. 한 번 가져간 건 놓치지 않는다는 게 저의 신조거든요."
"그럴 줄 알았어. 뭐, 그래도 기대하고 있지."
...뭐,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곤 기대도 안 한다만. 나는 휴게실의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 가기 전에 잠시 체육실에 들려 가볍게 운동을 조금 했다. 이대로 잤다가는, 분명 내일 아침은 근육통과 각종 결림으로 지옥일 테니까. 그걸 대비해서라도, 몸을 조금이라도 풀어 줘야지. ...그나저나...
"쳇, 함선이 너무 넓은 것도 탈이군..."
내 방을 찾느라 몇 번을 빙빙 돌았는지 모른다. 고작 1분도 안 될 거리를 10분이나 찾아 헤맸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어두운 복도에 이정표마냥 유일하게 불이 켜진 방을 찾아냈다. 역시, 불을 켜고 오길 잘했군. 어두운 곳에 계속 있어서 점점 불안해지던 차였는데. 그렇게 안심하며 문을 열자,
"...늦었네요."
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아가씨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의 그 임무복이 아닌, 헐렁한 와이셔츠 한 장만을 걸친 무방비한 모습으로.
"기다리느라 지쳤어요. 여자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다니, 남자로서 별로 멋있는 행동은 아니네요."
"...이봐 아가씨. 아무래도 방을 잘못 찾아온 거 같은데. 아가씨 방은 여기서 두 칸 아래야."
그 무방비한 모습에, 순간 평정심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간신히 숨기면서 대답했다.
"어때요? 잘 어울리죠? 그렇게 얼굴이 빨개지고 피가 새어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네요."
"그래. 너무 갑작스러워서, 코뿐만 아니라 입에서도 피가 터져나올 정도야."
"이걸 가져오길 잘했네요. 자요."
아가씨가 내게 뭔가를 던져줬다. 이건...
"누군가를 귀찮게 하려면 그에 맞는 대가도 필요한 법이겠죠. 그래서 돌려드리려고요."
"고맙군. 사실 이 약봉지가 그때 내 마지막 약이었거든. 지금 바로 먹어야겠어."
하도 약을 입에 달고 살다 보니, 이제는 물 없이도 약은 충분히 먹을 수 있다. 나는 약을 삼켰고, 그런 내 모습을 아가씨는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스르르 누웠다.
"...그럼, 이제 방으로 돌아가지? 볼일은 다 끝났잖아."
"조금만 더 있다가요... 역시, 좋은 침대 위에 누우니까, 잠이 아주 잘 오네요."
"그건 그렇지. 그 침대, 내가 알기론 숙면에 최적화된 침대라고 하니까. ...나 같은 녀석한텐, 별 쓸모도 없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가서 샤워를 하고 나오면, 이 아가씨도 방에 돌아가 있겠지.
"...라고 생각한 내가 바**..."
화장실을 나오면서 자동으로 그 말이 나왔다. 일부러 길게 샤워한 게 오히려 독이 된 건가. 숨소리를 들으니 이미 곤히 잠든 것 같아서 깨우기도 곤란하고.
이를 어쩐다. 나는 최대한 아가씨가 깨지 않게, 조심해서 침대 위에 누웠다. 침대가 그나마 좀 커서 다행이군. 이 아가씨가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도...
"!"
"후훗."
...속았다. 슬쩍 옆을 쳐다보자, 아가씨의 파란 눈과 마주쳤다. 숨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도 가깝다.
"유정 씨만 바라보시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람둥이 기질도 있으시네요. 아까는 그렇게 귀찮은 여자인 것마냥 구시더니."
"아가씨야말로... 이런 몸상태도 안 좋은데다가 나이까지 많은 냄새나는 아저씨의 옆에 잘도 누워 있군. 그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 냉장고 안에 있던 약들, 다 가져가 버릴 거에요?"
태연히 웃으면서 하는 저 말을 들으니, 갑자기 등골이 싸해지는 기분이다. 자동으로 냉장고 쪽으로 손이 간 건 덤이고.
"농담이에요. 저도 알아요... 그 약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들인지."
"알면 다행이지만... 이봐 아가씨. 나도 항상 생각하는 건데, 아가씨가 하는 그 농담들,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런 농담은 정말 무서운 거야."
"...그래요? 전 그런 의도로 말하는 게 아닌데."
"경험이지, 경험. 그런 사람들 많이 만나 봤다고. 그러니까, 아가씨도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조금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어. 그런 거 구분 못하는 사람들에겐, 아가씨의 그 태도는 불신만 쌓을 수 았거든. 그리고 그 불신은...가끔 아주 좋지 못한 일을 불러일으키지."
"그런가요... 후후, 좋은 말씀, 감사해요."
아가씨의 웃음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아참, 그보다 훨씬 중요한 말이 있었지.
"그나저나 이 침대...좀 크긴 하지만 그래도 일인용이거든? 혹시나 자다가 부딫히는 거 싫으면, 방으로 돌아가."
어차피 잠도 제대로 못 자는데다 설마 잔다 해도 사정상 내 잠버릇이 잠버릇이니... 나름 아가씨를 걱정해 줘서 이렇게 말했지만,
"...이봐요, 제이 씨. 그렇게 여자한테 침대 위에서 선택하게 하는 거, 별로 멋없는 짓인 거 아세요? 싫다고 하면... 나쁜 여자처럼 보이잖아요."
...쳇, 졌군. 역시...아직 난 이 아가씨에게 이기기엔 10년도 더 이른 것 같다. 내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린 아가씨에게, 나는 두 손을 들어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도 덕분에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건 다행이라 생각해야겠지. 누군가가 옆에 있는데도, 악몽도 꾸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