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김유정편: 취중진담(1)-
Maintain 2015-07-31 6
남은 2주도, 하루하루 똑같은 나날들이었다. 로드워크, 건강차 개발, 사람들 만나기.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건 그것들이 내가 다 좋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겠지.
그렇게 매일을 보내면서 약을 먹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 몸은 나아진 기분이었다. 각혈도 조금은 잦아들었고, 가끔 할 때마다 나오는 피는 제법 색깔이 맑아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무리하면 안 되겠지. 아마 한번만 더 몸이 악화되면 그때는 약으로도 무리일 테니까.
그렇게 약과 일상으로 반복되는 매일매일이 지나갔다. 아, 아예 변한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 2주 동안, 한 가지 공부를 시작하게 됐거든. 별로 쓸데없는, 막말로 잡지식에 불과한 공부지만, 그래도 2주 후에 있을 약속을 위해서 한 가지 책을 보며 공부하기 시작한 게 있었다. ...내 머리가 그동안 얼마나 굳어 있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하긴 뭐, 책하고는 담이 아닌 댐을 쌓았으니. 들여다볼 시간도, 이유도 없었고.
뭐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배우는 기쁨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이걸로 그날 가서도 어느 정도는 대단해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유정 씨와 캐롤이 그쪽 지식에 빠삭하지 않을 거라는 가정 하에서는. 아마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여긴가..."
약속한 날짜. 나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약속 장소가 내가 사는 곳에서 조금 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게 된 거다.
역에서 나와 마지막으로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살펴본다. 뭐랄까, 저번에 대장 학부모 면담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정장을 입은 내 모습을 보니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항상 요원복과 활동하기 편한 헐렁한 사복만이 전부였던 내가 이런 모습이라니. 지금도 사실 답답해서 벗어버리고 싶다. 특히 넥타이가. 목에 뭔가가 걸쳐지고 조여지는 느낌은, 정말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때 쪽지에 이렇게라도 입고 오지 않으면 들여보내주지 않을 거라고 적혀 있었으니. 그때 한 번 입고 다시 입지 않았던 양복을 이렇게 입게 되다니. 역시 사람은 그래도 준비라는 걸 해 놓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더 생각했다.
뭐, 이만한 번화가를 걷는 것만으로도 이 양복을 입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긴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번화가란 젊은 사람들, 그러니까 애들이 삼삼오오 걸어다니며 쇼핑이나 군것질을 하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뭐, 거기도 번화가는 번화가 맞긴 하지. 정확히는 내가 아는 그곳도 번화가는 맞지만, 지금 여기는 이른바 '부자들의 번화가'라는 느낌이다. 서민들을 감히 발 디디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할 그런 곳이랄까. 사실 나도 지금 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게 무슨 왕궁에 구경 온 서민같은 기분이다.아무튼 나는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고, 한 5분쯤 지나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높다..."
G타워도 높기야 했지. 하지만 이건 정말... 정말 높다. 국내 최고층 호텔이란 말이 괜히 붙여진 타이틀은 아니었군. 나는 살짝 긴장해서 안으로 들어갔고, 꼭대기 층에 있는 약속 장소-호텔 바로 향했다.
"호텔 바라..."
바에 아예 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한 잔에 7~8천원씩 받아먹는 그 가격 때문에 거의 가지 못하는 것뿐이지. 약값만으로도 생계가 흔들리는 마당에 그런 거금을 술에 바칠 사치를 어떻게 부리랴. 그리고 개인적으로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고급주보다는 가볍게 한 잔 걸칠 수 있는 맥주나 소주 같은 게 더 취향이기도 하고. 사실 오늘 돈은 내 박봉을 고려해서 캐롤과 유정 씨가 내 주기로 했으니까 간 거지, 안 그랬으면 당장에 약속 장소를 옮겼을 거다. 여기보다 훨씬 가격이 싼 동네 포장마차 같은 데로.
하지만 이렇게 푸념만 해서 뭐하랴. 이미 난 이곳에 도착했고, 이제 약속장소를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고급스럽게 빨간 융단이 깔려 있는 복도가 보엿고 그 복도 끝에는 두꺼운 목제 문이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뭐라 말하든 바깥에는 그 비밀을 알려주지 않겠다는 듯이.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영화 속에서나 볼수 있었던 클래식한 바의 모습이었다. 두꺼운 목재로 만들어진 카운터, 찬장을 가득 채운 온갖 종류의 술, 보는 것만으로도 경력이 느껴지는 나이 지긋한 바텐더, 그리고 살짝 어두운 조명과 그 조명에 잘 어울리는 은은한 재즈풍 음악. 그 음악이 나오는 게 그 보기도 힘들다는 주크박스라는 걸 봤을 땐 깜짝 놀랐다. 이런 게 우리나라에 있기는 했구나, 하고.
왜 캐롤이 잘 차려입고 오라고 햇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분위기에 질려 카운터 쪽을 어슬렁거리고 있자니, 나이 지긋하신 바텐더 할아버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 오셨나요?"
"아, 예... 다름이 아니라, 오늘 누굴 여기서 만나기로 햇는데..."
"아, 손님이 바로 그분이셧군요. 만나 뵙기로 하신 분이, 혹시 저 아가씨이신가요?"
바 한 구석을 가리키는 할아버지. 그곳에는 눈에 익은 여자 한 명이 있었다.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여성용 정장과 어두운 곳에서도 눈에 띄는 금발. 그리고 그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다갈색 눈동자.
"여, 캐롤."
"Oh, 오셨군요 제이 요원님."
벌써 몇 잔 한 걸까, 캐롤의 얼굴이, 살짝 빨개져 있다.
"벌써 마시기 시작한 거야? 아직 다들 오지도 않았는데."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건 재미없으니까요. 심심하기도 하고."
"그야 그렇지만... 그나저나, 유정 씨는?"
"조금 늦는다고 연락이 왔네요. 아직 서류 정리도 덜 끝나고, 뭣보다..."
"뭣보다?"
"지부장님을 좀 떼놓고 온다네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거 때문에 좀 걸릴 모양이라나 봐요."
"...하하..."
형도 참 끈질기다. 열한 번 찍어서도 안 되면 열두 번을 찍으라는 건가. 뭐, 어차피 실패할 테지만. 미리 위를 해 주자.
"그럼, 나도 한잔 걸쳐 볼까... 걱정하지 마. 싼 걸로 마실 테니까."
"Oh, 돈은 상관없어요. 살 때는 확실하게 사는 게 제 신조라서요. But,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걱정 마. 오늘을 대비해서 2주간 철저히 금욕생활을 했으니까. ...정말 힘들었어."
내 생활의 낙 중에서 두 개가 한꺼번에 금지를 먹었다. 이것보다 더 힘든 게 뭐가 있으랴.
"후후, 고생하셨어요. 그래도, 갑자기 한꺼번에는 안 되요?"
"알았어, 알았어. ...그럼."
이 날만을 고대했지. 나는 바텐더 할아버지를 불렀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온더락으로 마실 만한 위스키, 뭐 없을까요?"
"온더락이라면... 버본 어떠신지요? 마침 오늘 새로 들어온 녀석도 있고요. 독한 게, 손님도 마음에 들어하실 겁니다."
"그럼, 그걸로 부탁드립니다."
주문이 끝나자마자, 할아버지는 능숙한 솜씨로 두꺼운 텀블러에 둥근 얼음을 넣고, 거기에 위스키를 부은 후 천천히 젓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잔에 스푼이 부딫히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앵간한 위상능력자라도, 저 정도 경지에는 오르지 못할 거 같군.
"자, 드시죠. 와일드 터키 101 프루프, 온더락입니다."
"아, 예. 고맙습니다. ...프루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당황했다. 프루프? 뭔가의 단윈가?
"Oh, Proof라는 건 그 술의 세기를 나타내는 미국식 단위에요. 한국어로 바꾸면 '도수'가 되겠네요. 저 Proof의 숫자를 반으로 나누면 한국식 도수가 되죠."
"그렇군... 알려줘서 고마워, 캐롤. 55.5도인가 그럼. ...독하군."
오늘을 대비해 나름 술공부를 조금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몰랐군. 나는 온더락을 받아 입에 가져갔다. 입에 대는 순간부터 독한, 하지만 향긋한 곡물향이 코를 간질였고, 한 모금 마시자 목줄기를 거쳐 차가운 불줄기가 몸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저번에 유정 씨네 집에서 먹었던 그 위스키와도 비슷한, 하지만 확실히 그보다는 훨씬 독한 매력이 있었다.
"...맘에 드는군."
"하하, 그거 다행이군요. 왠지 손님께선 이런 거친 걸 좋아하시는 분 같으셔서 추천해 봤습니다만..."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물론이죠. 그리고 이 늙은이의 눈에는, 왠지 손님께선 이것저것 다 겪으신 베테랑처럼 보이십니다. 또 그 모든 걸 겪으면서 많이 지치신 거 같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그걸 내색 하나 하지 않으시고, 혼자서만 짊어지려고 하시는 분 같으십니다."
"...어떻게 그런 걸 아시죠?"
"일종의 경험이죠. 이 바닥에서 이 나이를 먹을 때까지 일하면, 온갖 손님들을 많이 볼 수 있으니까요. 특히 그 손..."
"손이요?"
나는 내 손을 바라봤다. 오늘은 딱히 핑거밴드도 하지 않았는데? 굳은살과 흉터야 많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 일을 하다보면 많이 보게 되는게 손님들의 손이라서요. 손님 나이분들 되는 사람들 치고 그 정도로 거친 손을 가지신 분도 흔치 않죠. 참전을 했다던지, 뭔가 사선을 넘나드는 고생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손은 가지기 힘들죠. 이 늙은이는 손님께서 무슨 사연을 가지셨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손님께서 제가 드리는 술로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면,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비밀 이야기를 들어도, 모른 척 해드릴 자신도 있고요. 바란 곳은, 그런 곳이니까요."
"......"
정곡을 찔린 듯한 기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바로 관록이란 걸까...
"후후, 만만치 않으신 분이죠? 제가 그래서 일부러 여길 고른 거에요. 여기 오면... 왠지 마음속에 숨겨놨던 말들도 꺼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Cheers, 건배 한 번 하시겠어요?"
"그러지. 유정 씨가 오기 전에, 마실 건 마셔 두자고. 유정 씨가 오면 금방 자리를 떠야 할 테니까."
"Right, 맞아요. 언니는 술은 좋아하지만, 잘 마시지는 못하니까요. 언니가 오기 전까지, 먼저 몇 잔 더 할까요?"
"...그래서 언니가 말이죠, 그런 말을 했었어요."
"유정 씨도 참. 꽤나 욱하는 성격이었구만."
유정 씨가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형도 참, 오늘은 필사적인가 보네. 유정 씨가 오기 전까지 한두 잔만 마시자고 했는데, 벌써 세 잔을 바닥을 보일 때까지 유정 씨는 오지 않았다.
그때 그 옥상에서의 싸했던 분위기가 웬말이냐는듯, 캐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건 꽤나 즐거웠다.
아마 유정 씨라는 공통의 화제가 있기 때문이겠지. 지금은 캐롤에게서 유정 씨의 학창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참이다. 자꾸 자기한테 집적대는 남학생을 '찼다고'...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유정 씨도, 학창 시절엔 꽤나 한 성격 했던 모양이군.
"유정 씨가 왜 여태껏 애인을 못 사귀는지 대충 알 거 같군... 성격을 좀 죽였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싶은데."
"언니도 항상 푸념하곤 했었죠. 왜 난 남자한테 인기는 없고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은 걸까 하고요. 저도 그 여자애들 중에 하나였고."
"솔직하게 인정하는군. 하긴 전에 옥상에서도 그랬었지. ...이런. 벌써 다 마신 건가."
세 잔째의 온더록이 바닥을 드러냈다. 나름 천천히 마셨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마침 다 마신 참인데. Then, 이번엔 제가 한 잔 주문해도 괜찮겠죠? 제이 요원님도 마음에 드실 거에요."
"그러라고. 뭘 주문할 건지 기대하고 있지. 아, 너무 단 건 참아 줘. 다량의 설탕은 몸에 안 좋으니까."
"No problem. 클래식한 칵테일을 주문할 거니까요. 달긴 하지만, 요원님 입에도 맞을 거라고 자신하죠."
뭘 주문하려는 걸까. 캐롤은 바텐더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스카치 위스키 4, 드램뷔 1."
캐롤의 말을 듣고 살짝 움찔했다. 저 제조법으로 만드는 칵테일은 분명...
"자, 나왔습니다."
곧 칵테일이 만들어졌고, 한 잔이 내 앞에 내밀어졌다. 제법 코부터 떨어져 있는데도 확 퍼져오는 달콤한 냄새의 연한 금빛의 칵테일.
"...무슨 생각이야?"
"이제부턴 조금은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어서요. 그러기엔 이 칵테일만큼 좋은 것도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칵테일에 대해 공부를 조금 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다. 칵테일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어서, 상대가 자기한테 어떤 칵테일을 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뜻을 알 수가 있다고.
그래서 확신했다. 이제 진짜로 심각한 이야기로 흘러가겠구나. 이 녹슨 못...'러스티 네일'이란 이름의 칵테일을 내게 준 것을 보니.
예 안녕하세요. 오늘도 글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딱히 후기를 쓸 내용이 없군요. 다만 이번에도 글이 다소 길어진 관계로, 저번에도 그랬듯 글이 몇 편 나눠질 예정입니다. 한 세 편 정도가 예상되는군요. 슬슬 김유정 편도 끝이 나고, 이제 마지막 편을 슬슬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