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브 - 가능성이 구체성을 띌 때 (서유리 편)

프로이트델루시안 2015-07-25 3

솔직히 말하자면 꽤나 기가 막혔다.

아니, 어이가 없다고 해도 좋았다.

기껏 승급시험을 보러 왔더니만, 그 현장에 있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니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차원종이 된 나라니! 뜬금없는 것도 정도가 있잖아!"
"말했을 텐데. 나는 그저 가능성의 하나라고. 하긴, 지금의 네 모습을 보니 나처럼 될 가능성은 심각하게 없어보이지만. 한심한 년."
"우와?! 게다가 말투는 또 왜 그래?! 너 정말 나 맞아? 검은양팀 요원 서유리 맞냐고!"
"……이런 때 찾는 자기의 정체성이 그딴 거야?"

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그렇게 느꼈다.
분명 밀폐되고 가상임에 불과한 공간일 텐데도, 피부가 저릿저릿해지는 감각이 피부를 타고 전신을 파고든다.

"에, 에에…?"
"한심해. 한심해. 정말이지 한심해서 못 봐주겠어. 칼을 잡아. 서유리."
"잠깐?!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빨리 잡는 게 좋을 거야. 3초 이상은 못 기다려주겠거든."

그러나 말과는 달리 눈앞의 자신의 모습을 한 상대는 이미 검을 뽑고 달려들고 있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며, 반쯤은 본능으로 앞을 향해 들고 있던 총을 전탄발사해버리지만, 그 순간 상대가 취한 자세를 보며 글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저건 음속베기이다. 몇 번이고 사용해 본 자신이 아무리 바보라고는 해도, 저걸 사용한 자신을 이딴 걸로 막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못한다.

피한다? 그것도 이미 늦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인 순간, 상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져 있다.

쉬이이익~!!

차가운 쇳소리가 가슴을 때린다. 그것만으로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만 같은 충격을 받았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다.

치이이익~!!

두 번째 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등을 강타한 검격에 맞아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바라본 상대는 뽑아들었던 검을 칼집에다 도로 집어넣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상대가 입을 연다.

"---------"
"……?"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

"우하아~!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게 누가 방심하래? 가상 현실이 아니었으면 병원 신세 10개월 행은 됐을 거랜다! 그것도 이 차원종들로 우글거리는 G타워에서 말이야!"
"우우, 하지만 그래도 그 다음 도전에서는 아무 이상 없이 통과했잖아. 그러니까 좀 봐줘라. 세하야."
"…하아."

자기보다 키도 큰 주제에 애교를 떨면서 은근슬쩍 올려다보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에 이세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 나이가 되도록 이처럼 천진난만에 바보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뭐, 청춘이구만."
"으음~. 하지만 유리 누나 답잖아요."

지켜보던 츤데레, 아저씨, 오토코노코가 한 마디씩을 거든다.

"…방금 뭔가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오컬트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마…라고 하고싶지만, 나도 그랬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그런다고 유리에게 통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뭐지? 차원종의 새로운 정신 공격인가?"
"그럼 큰일 아니에요?! 우왓! 빨리 김유정 누나한테 가야…."
"……? 너희들 왜 그래?"
"이세하. 넌 아무것도 못 느꼈어?"
"뭘 말이야?"
"으읏, 됐어. 유리 너는?!"
"……? 무슨 소리인데?"

마치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냐는 양 방긋방긋 웃어보이는 유리를 보며 그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 소녀는 이게 어울리고, 이게 천성이다.
저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질 날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아스타로트를 쓰러뜨리고 신음할 때, 그들이 나타났다.
두 명의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괴물들.
애쉬와 더스트.

그들은 다 죽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제안을 해왔다.
자신이 쓰러뜨린 녀석을 대신해서 새로운 군단장이 되지 않겠나고.

물론 거절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은 군단장이 아닌, 공무원이기에.

"바보 같아."

그것이 그들의 평가.
인정사정 없었지만, 분명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자신에게는 지켜야할 게 있고, 차원종이 된다면 슬퍼해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런 그들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던 그들은 이내 피식 웃고는 조롱과도 같은 말을 건네며 사라졌다.
그 때, 그 날 큐브에서 본 자기 자신이 떠오른 것은 기분 탓이었을까?



*

"…그래서 지금은 아무런 이상도 없다?"
"과연 평범한 인간이라는 거군."
"아니, 클로저라는 시점에서 평범한 인간은 이미 아니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니 그 이야기는 일단 미뤄두도록 하지요. OOO위원."

그런데 그런 그녀가 왜 지금 이곳에 있는 걸까?
지금 그녀는 이해가 따라가지 못한 머리가 핑핑 도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자신을 비롯한 일행 전부가 지금 이 자리에 소환되어서 빙둘러진 법정과도 같은 곳에 써있는 걸까?
어째서 한 쪽에서는 김유정 언니와 캐롤리안 언니가 필사적으로 종이를 든 채 뭐라고 외치고 있는 걸까?

"차원종의 영향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 때 차원종과 접촉하여 그 힘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설령 반쪽 짜리라고 해도, 원본이 일반인도 아닌 클로저였다면 그 힘만큼은 앞서 보고된 칼바크 턱스나 엠프리스 코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적어도 보호감찰 처분 정도는 내리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나?"

청문회라는 이름 하에 실시된 재판정에서 위원들은 검은양팀 전원에 대한 감시를 지시했다.
필사적으로 항변하는 김유정 언니를 진정시킨 것은, 데이비드 국장님의 실리적이고도 합리적인 어른스러운 이유였으나, 납득하는 자는 누구도 없었다.

세하는 언제나와 같이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면서 묵묵히 들었으나, 그 게임기 화면에는 GAME OVER라는 글자가 떠오르고 바뀌지를 않고 있었고,
슬비는 평소처럼 굳게 다문 얼굴로 진중하게 모든 말을 듣고 있었으나, 그 손의 떨림만큼은 감출 수 없었으며,
제이 아저씨는…, 도중에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테인이는…, 독일에서 왔다는 자들에 의해 데려가졌다.

꽤나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그것이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이기에.



*

"아하하~. 그래도 뭐 최악은 아니잖아~!"
"…그래."
"…그렇겠지."
"……"

기껏 입을 열어 말하는 것에 퉁명스럽게 들려오는 대답.
확실히 지금 상황은 바보인 그녀가 보기에도 결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저 정도까지 축 늘어져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무슨 범죄자마냥 추궁받아 어디에 갇히거나, 어떤 실험체 같은 걸로 끌려가거나, 무슨 처리부대로 떨어져내리거나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 얘들아 유리 말대로 그저 단순한 감찰일 뿐이니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렴."
"…예."
"…그러죠."
"속 편한 얘기로군."

찌릿. 하는 시선이 마지막에게로 향했다.
그런 김유정 요원의 시선을 선글라스로 받아넘기며 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도 될까?"
"제이 씨…."
"아니, 아무 말 하지 마. 그저 지금은 잠시 혼자 있고 싶을 뿐이거든."

드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끝내 일어서는 노란 머리의 그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유리만큼은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에이,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공무원으로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겠죠. 안 그래요. 네에~?"

그 순간, 그녀를 쏘아보듯이 향해지는 두 개의 시선이 있었다.
뜻밖에도 향해진 그 시선의 주인은 그녀와 학교 동기이기도 했기에 저절로 몸을 움츠린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적당히 해!'

당장이라도 멱살을 칠 것만 같은 그들의 험악한 시선 속에서 말없이 제이가 손을 올렸다.

"읏?!"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흠칫, 떨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나 자신이 한 말이 실언이었던 걸까?
자기 딴에는 기운을 복돋아주려고 하는 말이었는 데….

쓰윽, 쓰윽.

"……?"

그러나, 그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올라간 손은 그녀의 뺨을 때리는 대신, 그 머리맡을 헝클듯이 어루만진다.
따스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그런 쓰다듬을 행하면서 그는 말하였다.

"…무리하지 마라."

그리고 그는 문을 닫고 떠났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회복되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걸릴 듯 했다.



*

독일로 돌아갔던 미스틸테인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런 그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테인아. 너……?"
"안녕하세요. 미스텔테인이라고 해요. 과거 제가 여기서 활동을 했다면서요?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려요."
"테, 테인아…?"
"어이, 이게 대체 무슨…."
"……"

믿기도 싫은 일이 벌어졌다.
돌아온 미스틸테인의 기억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점으로 리셋이 되어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김유정 요원은 전화기를 들고 상부에 전화를 걸어 따졌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던 끝에, 상대측 전화기는 데이비드 국장에게 넘어간 듯 했다.
그런 국장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 장소에 있던 모두의 귀에 똑똑히 박히었다.

"미안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뚜-욱. 뚜-욱.

그 말과 함께 끊어져버린 것은 전화만이 아닌 듯 했다.



*

"…뭐라고요?"
"예?!"
"지금 그게 말이나 돼요?!"
"우웅?"

그래도 돌아온 것을 환영하며 다음 날, 자그마한 파티를 열며 어떻게든 웃어보이고 있을 때, 김유정 요원은 경악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이 자리에 없지만, 곧 올 거라고 기대하던 한 명이 끝내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제이 아저씨가"

드르륵, 콰당탕~!!

거기까지 말한 순간, 세하와 슬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고는 문을 열고 뛰쳐나간다.
그런 그들을 막을 정도로 김유정 요원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기억이 사라졌기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이해조차 못하는 미스틸테인을 대신하여 유리가 그녀를 부축하지만, 이내 그녀는 무너지듯이 쓰러지며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힘내세요. 언니! 어떻게든 될 거에요~!"

촤악~!

그러나 그 말만큼은 하지 말았어야 했던 모양이다.
어떻게든 웃으면서 했던 그 말은, 오히려 상처를 한 층 더 깊게 후벼파고야 말았는지, 거칠게 튕겨나온 손에 채이고야 말았다.
자신이 쳐놓고도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 김유정 요원을 바라보며 서유리는 끝까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괜찮다는 말을 하였다.


*

제이의 처분이 결정되었다.
징역 5년형인 모양이다.

그나마도 피해자인 데이비드 국장…, 아니, 이제는 인수인계 절차가 완전히 끝나서 지부장이던가?
그 사람의 용서와, 김유정 요원의 필사적인 항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형기였다.

하기야, 무리도 아니겠지.
대낮에 매스컴이 보는 앞에서 단상 위로 올라가 그 멱살을 잡고는 위상력을 실은 주먹으로 코뼈가 깨질 때까지 후려쳤는 데도 이 정도로 끝났다면 오히려 감사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일까? 전혀 감사의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유리야. 너 뿐이니? 다른 애들은………"

방으로 들어오던 김유정 요원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라는 엉뚱한 죄책감이라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서유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괜찮아요. 곧 올 거에요."

그러나 결국 그들 중 누구도 오지 않았다.


*

검은양팀의 분위기는 급속도로 악화되어갔다.
이미 팀원 중 하나는 영구결번이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계속해서 겉돌았다.

"그 아이는 미스틸이 아니야."
"인정 못 해."

그것이 다른 둘의 반응.

"하지만 미스틸은 아무 잘못도 없잖아!"

그것이 서유리의 반응.

어느 쪽이 맞는지 김유정 요원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어느 편도 드는 것을 포기한 듯 말없이 고개를 숙이면서 나날이 악화되어가는 상황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이 상황을 중재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에도,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이 팀원의 불화를 낳는 것임에 분명하였는 데도 그러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제이 요원의 일을 핑계로 무기까지 압수된 채 무기한 휴직을 명 받았다.
그것이 초래하게 된 결과는 잔혹하였다.



*

차원종이 출현했다.
이번에는 도심지 한복판이었다.
딱히 숫자가 많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나도 뜬금없고, 또 너무나도 안정권이었던 곳이기에 상황을 눈치 챈 클로저 요원들이 출동하기까지는 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
그리고 그 한 시간 동안 죽은 사람들은 천이 넘었다.

어차피 매일 매일이 차원종과 싸우는 일상.
고작 천이 죽은 게 무엇 대수라는 의견도 있을지 모르나, 이 민간인 천 속에 포함된 셋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소녀가 있었다.

"…"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 선 소녀를 본 세하와 슬비는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 지 몰랐다. 미스틸은 아예 죽음이라는 것이 낳는 상황조차 이해 못한 듯 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들은 그 아이에 대한 인식을 수정했다.
그들과 만난 시점으로 리셋된 게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하다.

그나마 부모를 똑같이 차원종에게 잃은 슬비가 대표격으로 가서 위로를 건넸다.

"저, 유리야…?"

하지만 말을 하면서도 딱히 좋은 말은 떠오르지 않앗다.
거기에 자신과는 완전히 똑같지도 않았다.

그 당시 자신은 힘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녀는 힘은 있었다. 다만, 그 힘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일 뿐.

하필이면 무기를 압수당한 그 타이밍에 벌어진 일은 잔혹도 하였다.
그녀 스스로의 몸을 지킬 정도의 위상력은 있었으나, 가족들을 향해 가는 녀석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순수하게 위상력만으로 몰아붙일 정도로 차원종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증명하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으리라.

때문에 씁쓸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슬비는 천천히 걸어가 유리의 곁에 섰다.
두 손을 모아 절을 하고 일어서는 그녀의 뒷모습만으로 그 슬픔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래도 어찌 되었건 앞으로 가서 마주서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라? 슬비 아니야? 와준 거구나. 고마워~!"

…그런 쾌활한 대답이 들려왔다.



*

김유정 요원이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전기에다 대고 거의 윽박지르듯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절박하다 못해 처절했다.

"유리야! 무슨 생각이야?! 당장 돌아와! 거기는 위험하다고!"
"에이, 괜찮아요. 언니! 아, 나타났다! 그럼 끊을게요."
"유리야. 유리야~!!"

그렇게 상대의 전화를 일반적으로 끊어버린 그녀의 앞에는 당연하게도 차원종들이 늘어서있었다.
다만, 그 숫자는 결코 당연스럽지 못하였다.
지금 그녀가 서있는 곳은 열려버린 차원문의 바로 앞이었고, 그곳에서부터 꾸역꾸역 몰려드는 녀석들이 대로를 완벽하게 메워버린 채로 뜬금없이 나타난 인간을 쳐다보고 있었다.

크르르-?

어찌나 이 상황이 황당했으면 가장 이성이 없어 보이는 녀석들에게까지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한 눈에 봐도 천은 가벼이 넘겼고, 만 단위를 노려볼만도 한 숫자를 향해 검 한 자루와 총 한 자루를 쥐어든 채로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비정상 그 자체였다.
더욱이 그 얼굴에 어떠한 비장감 따위는 없이 그저 웃음만이 존재했다면 더더욱.

"자, 그럼 시작해볼까~!"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를 내며 그녀의 검이 뽑히었다.


*

"너 미쳤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한 거야?!"
"에헤헷, 뭐, 살아 돌아왔으니 됐잖아?"
"야, 서유리!"

이세하와 이슬비, 미스틸테인을 비롯한 클로저 요원들이 그곳으로 돌입한 것은 그로부터 30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벌어진 참극은 그들 모두의 두 눈 속에 확연히 새겨져 있었다.

수 백의 시체의 한 가운데에 둘러싸여, 자신을 중심으로 형성된 커다란 원 가운데에서 상처 투성이인 몸으로 웃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아니, 상처 투성이라는 것도 엄청나게 축소해서 말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녀의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려있었다.

그 상태로 대체 어떻게 싸웠는지, 아니 서 있을 수 있었는 지는 몰랐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모습으로 자신들을 보면서 "아, 왔어?"라고 인사를 할 때는 얼마나 경악했는 지….

그러나 그런 그들의 모든 걱정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양, 그 뒤 병원으로 실려왔음에도 태연하게 잘도 저런 뻔뻔한 얼굴로 웃으면서 자신들을 반기고 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들은 몰랐다.
이런 사태 따위는 보고 싶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유리야. 너…."
"에이. 괜찮아요. 이 정도야 그냥 스친 걸요?"

도저히 12시간에 걸쳐 수술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말이었다.

쫘악~!

저도 모르게 손을 들은 김유정 요원이 그녀의 뺨을 때렸다.

"아야야~."

그러나 그것으로 돌려놓기에는 너무도 멀리 와버린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린 순간 전혀 변함이 없는 얼굴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

"지금 뭐라고 하셨죠?!"
"들은 그대로입니다. 이대로 특급 요원의 심사를 허가하겠다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유리는 아직 어린 애라고요!"
"그 어린애가 죽인 차원종의 숫자가 세 자리수가 넘었음에도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눈앞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눈에 보기에도 높아보이는 사람과 김유정 요원이 싸우고 있었다.
주 의제는 서유리의 승급시험 관련 내용.

분명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거늘,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특급 요원이 된다는 것은, 지금의 감시 요원인 그녀와 동급이거나 그보다 위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지금도 전혀 통제가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거늘, 그런 그녀를 위로 올린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렇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통제가 안 된다면, 아예 자유롭게 풀어주고 보다 많은 권한을 주어 싸우게 하자는 것이 위 쪽 분들의 생각이시죠."

그 말이 '어차피 통제불능의 괴물이라면 그냥 풀어주고 싸우다 죽게 만들자'라는 뜻으로 들린 것으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지금 그 말…, 지부장님의 생각인가요?"
"…"

말없이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서유리는 특급 요원으로 승진했다.
이번에는 시험이나 그런 것도 없었다.


*

차원종이 침범해왔다. 죽였다.
차원종이 넘어왔다. 죽였다.

그런 나날들이 반복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홀로 서 있었다.
이세하도, 이슬비도, 미스틸도, 제이도, 지금은 자신의 곁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간만에 들려온 김유정 요원의 전화에 그녀는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 일은 어때?"
"별 일 없어요. 언니~! 언제나처럼 차원종을 처리하는 것 뿐인걸요."
"…"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김유정은 할 말을 잃었다.
뭔가가 잘못 됐다. 그것도 한참 잘못 되었고, 더욱 더 잘못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고칠 수 있는 힘이 자신한테는 없었다.

"아아, 그렇지. 그런데 요즘 세하는요? 슬비는 어떻게 지내요? 미스틸도 잘 지내죠? 아, 제이 아저씨 면회도 슬슬 가봐야 하는 데, 하하~."

전혀 일상적이지 않고, 누구보다도 위험한 삶을 살게 된 소녀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말에 오히려 헛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삼키었다.
그러던 와중에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이건…?!"
"차원종인가요?"

안 좋아진 안색의 그녀를 보자마자 일어선 유리의 얼굴에는 어딘지 기대감 같은 것까지 서려있었다.
그런 그녀에게서 다시금 할 말을 잃은 채, 일단은 핸드폰에 나타난 문자를 확인하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간다.
차원종 등급 S급. 위치는…, 이곳?

콰장창~!!

확인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문이 깨지면서 하나의 인영이 들어선다.
그리고 그것은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주위를 찾더니만, 이내 유리를 응시하였다.

"네가 서유리라는 인간인가?"
"으음, 군단장 급인가?"

일반인인 유정은 숨이 억죄어오는 위상력 속에서 그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유리는 검을 꺼내들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정체불명의 군단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부하들이 계속 죽어나가길래 몸소 나왔더니만, 이건 또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계집이 아닌가? 군단장인 이 몸을 앞에 두고도 그런 반응이라니, 그렇게나 죽고 싶은 건가?"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지 않을까나~?"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검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손을 뻗는 유정이 있었다.

지금은 아스타로트를 죽일 때와는 달랐다.
그 때와 같은 차원종의 힘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까 저건, 저건 막아야 했다.

그러나 뻗은 손은 닿지 않았다.


*

"후, 후…아. 후…후훗."
"
…뭐냐. 이건?"

3분 정도를 이어진 전투의 결과는 너무나도 예상했던 대로 끝났다.
그러나 그 결과의 반응은 너무나도 예상 외였다.

바닥에 널부러진 채 웃음소리를 내는 소녀와, 그런 소녀를 내려다보며 질려버린 듯한 표정을 짓는 군단장이 있다.
쓰러진 유리의 목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피의 양으로 보아, 누가 봐도 차원종 측이 이긴 거지만, 그런 그조차도 마지막 순간에 팔이 잘린 것에는 당황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죽어가는 이 순간에 웃어보이는 이 인간에게 불가해의 감정을 느끼었다.

"…죽어라."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그는 손을 치켜들었다.
저 소녀의 정체가 무엇이고, 어떤 녀석이든 간에 이걸로 끝이다.
자신이 손만 한 번 휘두르면 죽을 것이다.

그러던 그 때, 둘의 사이로 끼어드는 인영이 있었다.

"…?!"
"에?!"

갑작스런 상황에 둘의 입에서 모두 경악성이 튀어나왔으나, 이미 공격을 멈추기에는 늦어있었다.
그 와중에 **온 공격은 그 끼어든 인영의 몸을 멋지게도 두 조각내어 한 쪽으로 내팽개친다.

"유…정 언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멎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핑핑 도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면서 상황을 이해해보려 노력한다.
그 때, 상반신만 남은 채로 쓰러져있던 유정이 입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조금은 정신을 차린 모양이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눈도 감지 못한 채로 그대로 죽었다.
죽어버린 것이다.

"----------------~!!!!"

소리 없는 비명이 그 날 그 장소를 찢을 듯이 울리었다.



*

"유리는?"
"여전히 침묵 중."

그런 그녀를 구해낸 것은 세하와 슬비였다.
차원종 경보를 듣고 바로 출동한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반쯤 죽어가는 와중에도 칼을 잡고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는 유리와, 그런 유리를 질려버린 눈으로 바라보는 군단장이었다.
그 때, 자신들과 마주친 군단장은 어딘지 모르게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오늘은 이만 돌아가주지.'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사라졌다.
그 녀석이 사라진 장소를 향해 손을 뻗던 유리가 그대로 쓰러진 것을 들쳐업고 여기까지 온 것은 좋았다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깨어난 뒤에는 마치 실어증이라도 걸린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무리도 아닐 거라 생각하였다.

현장에는 그들의 관리요원인 김유정 요원의 시체 또한 있었으니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추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번만큼은 침묵키로 하였다.
그것이 결코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

"이런, 이런. 장난감이 완전히 못 쓰게 망가져버린 걸까?"
"그러게 말야. 애쉬. 이건 좀 심각한 걸?"

꽤나 낯익은 얼굴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구였지?

지금의 그녀로서는 눈앞의 두 소년, 소녀가 누구였는지 퍼뜩 기억에 떠오르지를 않았다.
하지만 끝내 뇌의 전산 작용 속에서 한 구석에 집어넣어 두었던 그 기억이 떠오르자, 두 손을 뻗으며 그 멱살을 잡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어라라? 그래도 아직 저럴 힘은 남아있네?"
"정신 쪽은 어떠려나? 어이, 이보세요. 서유리~? 내 말 들려?"

똑, 똑, 똑, 마치 머리에다가 노크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으로 조롱하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면서 둘은 웃고 떠들었다.
그러나 붕대와 깁스로 단단히 고정된 몸은 그 둘을 스치지도 못한 채 공허히 허공을 만질 뿐이다.

"죽…일…거야. 죽…일 거…으으읍!!."
"누굴? 우리를?"
"대체 왜?"

비명과도 같이 소리를 내지르는 그녀의 입을 동시에 손으로 가로 막으면서 둘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
"지금의 너의 불행이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해?"
"잘 생각해 봐. 모든 것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유니온이라고 했던가? 그 녀석들이 한 짓의 결과 아닐까?"
"…!"

입을 막은 채로 녀석들의 말을 들어야만 하던 유리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그것을 보고 그들은 유리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주었다.

"그…렇지, 않…아."
"그렇다는데?"
"어쩜 이리 바보 같을까?"
"자신이 이용 당하는 것도 눈치 못 챈다니 바보 중의 상바보인걸?"
"뭐,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니까 한 번 여기서 널리도록 궁리해보라지~!"
""아하하하하하하~!!""

둘의 웃음소리가 스테레오로 울리는 가운데 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렇게 웃던 둘의 웃음 소리가 딱 멈추는 순간, 그녀는 그 입을 벌리며 멍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아아, 하지만 오늘은 이런 값싼 조롱이나 던지러 온 게 아니었지."
"아아, 맞다 맞아. 하마터면 깜빡할 뻔 했는 걸?"
"…?!"

의아해하는 그녀의 가슴팍을 거칠게 찢으면서 둘이 동시에 손을 갖다댄다.
뜬금없는 행동에 유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지만, 그들은 그런 반응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이 말한다.

"축하해. 서유리 요원~! 다시 한 번 너에게 복수할 힘을 주려고 해!"
"그 멍청한 XXX 군단장한테 제대로 깨졌다면서~! 걱정 마. 우리가 주는 이 힘이면 그 녀석 따위는 가볍게 찢어죽일 수 있을 거야!"
"아아, 이번에는 전처럼 반쪽 짜리가 아니라 완전히니까 걱정 말고~!"
"물론 그 때처럼 도로 가져가지도 않을 테고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 한 번 네가 원하는 대로 날뛰어보렴~!"

그리고 병실이 빛에 휩싸임과 동시에, 어딘가에 모니터에서는 SS급 차원종의 탄생을 알리는 경보가 마치 축포마냥 울리었다.


*


죽였다.
죽이고 죽였다.
죽이고 죽이고, 계속 죽였다.

"너, 너는 도대체…?!"

앞에 그 때, 그 차원종 군단장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공포에 찬 눈으로 바라보며, 두 손을 꼭 모아쥐고 있다.
당장이라도 위상력을 사용해서 공격을 가할 생각이 충만해 보이지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 없었다.
그저 검을 들고 걸어가 그의 목을 친다.

화려한 기술 따위도 필요 없었다.
인간일 때와는 다르게 그 점 하나 만은 좋았다.

댕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굴러떨어진 목이 발치로 굴러갔다.
주위에는 녀석을 따랐을 터인 놈들이 공포와 경의에 가득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만 신경을 쓰지는 않는다.
하긴, 애초에 이게 당연한 거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인간계가 아닌 차원종들의 세계였으니, 이런 식으로 차원종 몇 만 마리가 굴러다닌다고 해서 특이할 게 뭐가 있으랴.

"…하, 하. 하."

꽤나 낯설은 웃음소리가 나왔다.
그것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걸로 복수는 끝마쳤다.
그럼 이제 돌아가볼까?



*


"문은 닫았겠지?"
"그렇습니다. 이걸로 그녀 역시 저 차원에 봉인 될 것이 분명한…"

콰앙~!

그 순간 지휘실에 문을 박살내며 들어오는 둘의 모습을 보고 그들은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구겨진 얼굴을 한 채로 들어온 둘 중 하나가 책임자의 멱살을 낚아채잡고는 소리친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차원문을 닫겠다고?! 그럼 유리는?! 유리는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

알파퀸의 아들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한참이나 상관인 자신의 멱살을 잡는 그의 행동에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말려야 할 팀의 리더가 한 술 더 떠 죽이겠다는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에는 기가 찰 뿐이다.

"서유리 요원은 임무를 끝마쳤다.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차원종의 세계로 건너가서, 이번 침공을 꾀하던 군단장을 성공적으로 처형했지."
"그럼 왜?!"
"그러나 그 스스로가 차원종이 되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지?"

그랬다. 이미 그녀는 인간이 아니게 되어 있었다.
병실에서 만난 애쉬와 더스트라는 그 괴물들이 무슨 짓을 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짓이 끝나고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 그녀의 몸은 이미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다른 무언가였다.

원래대로라면 그 시점에서 제거되야 했을 것을, 본인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또다른 군단장의 처형에 이용하기 마음 먹은 것은 상부의 결단이었다.
그러면서 상부는 단 네 글자로 된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토사구팽.

이 뜻을 모를 정도로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닫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그 차원 속에서 죽어버리라고.

"너 이 자식!!"

퍼억~!! 끝내 자신을 후려치고야 만 소년을 쳐다보며 그는 짜증이 치솟는 걸 느꼈다.
누군 좋아서 이딴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만 같은 그 눈동자를 보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러거나 말거나 검게 변한 하늘은 여느 때보다도 더 불길한 빛을 토해내며 변해가고 있었다.


*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었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문이.

그리고 그렇게 보인 하늘에는 데미플레인과 비슷한 크기의 성이 있었다.
당장에 유니온과 세계 상층부들은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그 때와 다른 점은, 이번에 나타난 성이 떨어져내리는 데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떨어진 장소는 외딴 곳이었기에 사상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 크기와 규모에 압도된 자들은 그 장소를 향해 수만의 군대와 수백의 클로저들을 배치시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도록 그 안에서는 단 한 마리의 차원종도 기어나오지 않았다.
30분 정도가 지나고서야 돌입명령이 떨어졌고, 포위하던 자들 중 일부가 돌입했다.
그리고 그들의 헬멧에 장치된 영상으로 상황을 보고 있던 자들은 경악했다.

전부 죽어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박살이 난 성의 내부에는 죽어 나자빠진 차원종의 시체만이 가득할 뿐, 그 외의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를 위험을 찾아 없애기 위해, 그들은 심층부로, 보다 깊은 심층부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보았다.

"돌아왔어요. 헤헷~."

그런 말을 내뱉으며 웃고 있는 SS급 차원종의 모습을.


*

그 안에 있던 자들이 총을 난사했다. 상부의 지시였다.
그리고 다음에 벌어진 일은 경악이었달까. 당연했달까.

총알이 셀 수도 없이 박혔는데도, 그 소녀의 모습을 한 무언가는 죽지 않았다.
아니,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뭔가가 깨졌다는 듯이 그 입에서 웃음기를 지우고는 읊조렸다.

"아아…, 그래도 기대 했는데…."

대체 무슨 기대를 했던 건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앞에서 돌입한 자들은 탄창을 갈아끼우면서까지 공격을 가하려 들었다.
그 때, 그녀의 손이 한 번 휘둘러졌다.

그리고 영상이 끊기었다.


*

"지금 제정신이야?!"
"유리를 죽이겠다고?!"
"저건 서유리 요원이 아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인간조차 아니야!"

다시금 벌어지는 말다툼 속에서 책임자는 골머리를 감싸쥐면서 눈앞의 두 꼬맹이를 치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한 켠으로 지시를 내려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클로저들을 돌입시켰다.

그런데….

"…바보 같았구나. 나는 정말이지.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
"아아, 그 말 대로였어."
"무엇을 지키겠다고 했던 건지."
"아, 아하하…."

그런 말과 함께 죽어나갔다.
그런 소녀의 어딘지 슬픈 듯한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죽고, 죽고 또 죽었다.
A급 요원이고, B급 요원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죽고 죽어나갔다.

그와 함께 서서히 그녀가 이쪽을 향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 채고,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끼었다.

"다, 다시 투입을?!!"
"…"
"…"

그러나 주위는 썰렁했다.
아니, 앞서 나서려는 자가 없었다.
먼저 돌입한 자들이 제대로 무기 한 번, 스킬 한 번 휘둘러** 못하고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다들 겁먹은 것이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건가?
그러던 와중에 부관이 뛰쳐들어오며 의미불명의 보고를 하였다.

"이세하 요원과 이슬비 요원이 사라졌습니다!"
"…뭐?!"


*

"…"
"…"

둘은 지금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한 때, 자신들의 친구이자 전우였던 소녀의 앞에서 선 채로 그녀를 쳐다본다.

"으음? 아, 슬비와 세하구나. 안녕."

어딘지 힘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안녕. 유리야. 상태는 괜찮니?"
"그럭저럭. 그동안 잘 지냈어?"
"뭐, 우리야 특이한 일은 없었으니까."
"아하하. 그건 그렇구나."
"차원종이 된 몸은 어때?"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아. 그래도 힘 내서 웃어보려고. 하하~."
"아아, 그렇구나. 그런데 말야."

거기까지 말하던 둘이 동시에 입을 맞추었다.

""가식은 거기까지 해 줘. 서유리.""
"…"

그 말과 함께 입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그녀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는 허리에다 손을 올리고 그들을 쳐다본다.

"…너희들도 날 죽이러 온 거구나?"
"…미안해."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세하는 건블레이드를 꺼냈다. 그리고 슬비는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둘의 모습을 보던 유리의 뺨을 타고 물방울이 하나 떨어져내렸다. 하지만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는 어떠한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그럼 시작해보자."

그리고 단 두 명만이 참석한 한 명의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


"…?!!"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주위 역시 꽤나 익숙했다.

"…무슨 일이?"
"가능성이지."

뺨을 타고 흘렀던 눈물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한 와중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누운 채로 위로 올려다본 그녀의 시선에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소녀의 모습이 잡히었다.

그제야 생각이 난 한 켠의 기억들.
음속베기를 당한 뒤의 모든 기억이 전부 백일몽이었다.

"어째…서?"
"네가 그토록 무시하고 부인하던 것이 어떤 경위로 생겨날지 납득 정도는 시켜줄까 해서 말야."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얼굴은 무척이나 쓸쓸해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방금 전까지의 꿈 속에서의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네. 그것을 네 머릿속에 박아주느라 힘은 다 썼어. 아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통보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막을 수도 없이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큐브 밖에 있었다.



*

"축하해 유리야. 성공적으로 임무를 끝마쳤구나! 이걸로 정식요원이 될 수 있어."

큐브의 문을 열고 나온 그녀를 반긴 한 명의 얼굴이 있었다.
꿈 속에서 죽었던, 죽어버린 얼굴이었다.

"…"
"…? 유리야,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고 있었…?!!"

축하의 말을 건네던 김유정 요원에게 그녀는 와락 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안기었다.
그리고는 그 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한참을 울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 지, 알지 못한 유정은 이해조차 못한 얼굴로 눈을 깜빡일 뿐이지만, 그래도 이내 그녀의 머리를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그런 따스한 위로를 받으면서 그녀는 큐브 속의 자신이 그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너는 과연 지킬 수 있을까?"

…지켜보이겠다고, 아니, 그러고야 말겠다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그녀는 목 놓아 울었다.
2024-10-24 22:37:1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