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김유정편: 좋은 관리요원(2)-

Maintain 2015-07-27 15

사무실 옥상. 지부장님께서 쓰시는 사무실이라고, 옥상에도 이것저것 시설들이 많았다. 신기하구만. 옥상에 산책로라니... 거기에 몇 가지 운동기구와 음료 자판기, 그리고 전망대 비슷하게 신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좌석까지 구비되어 있다. 야경 하나는 끝내주겠는데.

"제이 씨, 하실 말씀이란 건...?"

평소답지 않은 모습으로, 유정 씨가 쭈뼛대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런 유정 씨에게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아준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일주일에 한 개피 허락된 기회, 오늘 써버려야겠군. 나는 담배 연기를 하늘로 뿜은 후, 말을 이었다.

"아까 전에 유리하고...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그건..."
"뭐, 딱히 말 안 해줘도 돼. 대충은 짐작이 가니까. ...내 얘기였지?"
"...맞아요. 제이 씨의 출격 문제로 유리와 언성이 있었죠."

이럴 줄 알았지. 녀석도 극성은. 그렇게 직접 나설 정도로 걱정해 줄 만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캐롤한테서 제이 씨의 상태를 들었던 모양이에요... 제가 사무실로 오자마자, 유리가 와서 같이 지부장님께 가자고 말하더군요. 무슨 일인가 싶어서 데리고 갔더니, 유리가 지부장님께 제이 씨의 출격을 한동안 막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이대로 가면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것 같다면서. 이왕 쉬게 해 줄 거면, 차라리 몇 달을 쉬는 한이 있더라도 몸이 조금은 나아지게 해 달라고요."
"...원 녀석도.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하지만 지부장님은 반대하셨어요. 지금 플레인게이트 사태를 해결할 인원 부족과 윗선에서의 지시를 이유로요. ...원망은 하지 말아줘요. 지부장님께서도 굉장히 착잡해하셨으니까. 자기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셨죠."
"이해해. 지부장이라고 해서 그 위에 또 누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그정도 위치면 더 고달픈 일이 많지."
"상황이 그렇게 되니까, 유리가 제게 묻더군요. 언니는 왜 그러고만 있냐고요. 이대로라면 아저씨의 몸은 망가질 게 뻔한데, 왜 도와주지 않느냐면서요. ...할 말이 없더군요. 맞는 말이었으니까."
"...유정 씨."
"하지만 유리가 계속 그러고 있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어요. 어쨌든 유리도 유니온의 요원이고, 지부장님께 계속 무례하게 구는 건 나중에 크게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일단은 나중에 얘기하자고 타일렀는데... 보시다시피, 그렇게 됐네요."

유정 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조섞인 웃음을 지었다. 캔커피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제이 씨."

그네 모양의 좌석에 앉으면서, 유정 씨는 중얼거렸다.

"뭐가? 유정 씨가 미안할 게 뭐가 있다고."
"모든 거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유정 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아래로 돌리고 말았다.

"관리요원이 된 이후로, 저는 항상 아이들에게 온 신경을 쏟았죠. 아직 채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니까. 그런 아이들을 관리요원으로서 항상 최선을 다해 관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탓에... 정작 중요한 걸 신경쓰지 못했죠."

"어떤 책에서 본 적이 있었어요. 어른들의 마음은 먹이 낀 유리와 같아서, 잘 깨질 뿐더러 속도 보이지 않는다고. 제이 씨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항상 겉으로 밝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깊게 다쳐 있었죠. 요원 프로필을 보면서 제이 씨에 대해서 조금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전혀 그렇지 않았네요."
"......"
"저도 캐롤하고 정도연 요원님께 들었어요. 제이 씨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다 제 불찰이에요. 제이 씨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니. 이래서는 관리요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네요. 제가 조금만 더 제이 씨에게 신경을 썼었다면, 제이 씨가 이 지경까지 가는 일도 없었을 텐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그걸 다른 데 신경쓰느라 보질 못했어요. ...한심하죠? 저란 사람."

캔커피를 양손으로 감싼 채 나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유정 씨는, 그녀답지 않게 약한 모습이었다. 유정 씨의 이런 모습을 보니, 아스타로트 사건 당시 한창 상황이 좋지 못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유정 씨답지 않게 약한 모습을 보였었지. 

나는 그때, 그런 유정 씨를 보고 어떻게 했었더라? ...생각해 보면, 그땐 나도 꽤나 객쩍은 짓을 했군. 하지만 어쩐다? 나는 또 그 객쩍었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모를 일을 다시 해야 할 것 같다.

"이봐, 유정 씨."

나는 다 탄 담배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유정 씨의 옆에 앉았다. 

"제, 제이 씨...?"
"이런 모습, 유정 씨답지 않아. 내가 아는 유정 씨는, 이런 모습이 아니라고. 실없는 농담에는 가차없는 딴지를 걸고, 술만 마셨다 하면 사람이 달라져서 온갖 주정을 부리기도 하지. 아, 가끔은 한발에 천만원이란 거금의 총알을 일일이 세어가며 쏘기도 하고."
"...지금이 농담할 상황인가요? 당신이란 사람은...!"
"그리고 뭣보다, 희망을 잃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했었어.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도, 그곳에 한 줄기 희망이 있다면 거기에 매달려 보자고 말이야. 그렇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어. 그리고 그 덕분에 신서울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고."
"...그건..."
"상황이야 다르지만, 유정 씨가 그렇게 자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따지고 보면, 일차적인 책임은 내게도 있으니까. 아무리 남을 잘 챙겨주려 한다 한들, 그 사람이 아예 입을 열지 않으면 뭐가 문젠지 알 턱이 없지. ...물론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앞으로도 말해주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이쪽도 책임이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아픈 걸 계속 숨기고만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도 앞으로 내 몸상태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해. 아픈 건 꽤나 오래 전부터 아파왔고... 그게 요즘 들어서 급격히 악화된 거니까. 아마 더 이상은 약으로도 커버가 안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꾸준히 약은 먹고 있고, 나 나름대로도 더 이상은 악화되지 않게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까 유정 씨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냥 지금처럼... 애들을 잘 보살펴 주면서 하는 일에 충실하면 된다고. 괜찮을 거야."
"제이 씨..."
"유정 씨는 지금까지 잘 해 왔어. 아마 앞으로도 계속 잘 해 나가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정 씨가 자기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리는 평가야. 그러니, 틀림없어. 정말로 유정 씨가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했다면, 이런 말도 나오지 않겠지.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앞으로 오늘처럼 내 걱정 때문에 그렇게 가슴아파하지 말라고. 남들이 보면 꼭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로 오해하기 딱 좋으니까."

마지막엔 일부러 평소처럼 농담으로 끝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유정 씨가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효과가 있었던 걸까. 날 잠시 빤히 쳐다보던 유정 씨는, 풋,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요, 제가 괜히 걱정을 했나 보네요. 제이 씨도 이제 어른이니, 자기의 일은 스스로 잘 할 수 있으시겠죠. 저도 아내로 오해받기는 싫고요. ...다만."

뭘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유정 씨는 내 머리에 두 손을 갖다댔다. 그리고는, 

"유, 유정 씨?!"

당황했다. 이마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 유정 씨가 내 머리를 자기 가슴으로 가져간 것이다. 샴푸 냄새인가. 은은한 향기에 이 촉감까지 더해지니,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가, 갑자기 왜, 왜 이래 유정 씨? 안 하던 짓을 하고. 이제 그만..."
"...가만히 있어주세요."

조용한 말투였지만, 거기에는 상대를 제압하는 박력이 깔려 있었다. 

"제 나름대로의 사과라고 생각해 주세요. 아무리 제이 씨가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도 사과해야 할 게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그러니 그저 지금은... 가만히 있어주세요. 아셨죠?"
"......"

그렇게 나는 유정 씨의 말에 끽소리도 못하고, 한 10분 정도를 그 자세로 있어야만 했다. 뭐... 솔직히 말해서, 싫지는 않았다. 10분 정도 지나자 유정 씨는 팔을 풀었고, 나는 그런 유정 씨에게 말했다.

"...이제 끝났지?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




"그럼, 내가 한 말 잊지 말라고."
"알겠어요.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에요?"
"나도 억지로 무리할 생각은 없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건 사양이라고. 내가 알아서 하지."
"그래요. 그럼, 그 때 뵈요."
"그래, 들어가라고. 난 좀 더 여기 있다가 가도록 하지."

유정 씨를 먼저 보내고, 나는 신서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래... 유정 씨는 지금까지 잘 해 왔다. 아마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느긋하게 신서울을 볼 수도 없었겠지. 그녀는 지금처럼 그녀가 할 일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자, 그건 그렇고."

나도 이제 슬슬 내려가야겠다. 그 전에, 할 일은 마저 끝내야겠지?

"언제까지 계속 숨어 있을 거야? 유정 씨는 벌써 내려갔다고."

아까부터 계속 신경쓰였다고. 뒤도 돌아** 않은 채 말하자, 뒷쪽에서 하이힐 소리가 다가왔다. 

"...언제부터, 눈치채셨던 거죠?"

유창하지만, 영어 억양이 섞인 외국인 특유의 한국어 발음.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이런 억양을 가진 사람은, 딱 한명 뿐이다.

"참전용사의 감을 무시하지 말라고. 인기척 하나만큼은, 눈치 잘 채거든... 심지어 잘 자다가도 누가 다가오기만 하면 저절로 눈이 떠질 만큼."
"...I'm sorry. 전쟁 후유증인가요..."
"캐롤이 사과할 필요 없어. 캐롤 때문에 그랬던 일도 아니니까."

나는 뒤를 돌아봤고, 그리고 살짝 후회했다.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니었어. 

"...약은 잘 복용하고 있어. 음.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No problem. 처방전대로만 복용하신다면,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거에요. ...Anyway,"

조금이라도 꿀리지 않기 위해 화제를 억지로 돌려 봤지만, 캐롤은 내 의도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이봐 캐롤. 조금 표정 피라고. 너... 표정 지독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제이 요원님과 유정 씨의 그런 모습을 몰래 지켜봤으니."

숨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더 무섭다. 딱히 표정이 변했다던가, 그러지는 않았다. 평소처럼, 그녀는 생글생글 웃고 있다. 다만, 다갈색 눈동자 너머로 느껴지는 저 감정은.

"아무튼, 캐롤의 부탁대로 유정 씨하고 약속을 잡았어. 2주일 후였나?"

나는 주머니 속에서 그때 약봉지 속에서 발견햇던 것-쪽지를 꺼내 보여줬다. 살짝 딱딱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도 느껴지는 쪽지. 그 쪽지에 적혀있는 건, 어떤 장소과 시간, 그리고 한 문장이었다. 2주 후, 여기로 유정 씨와 같이 오라는.

"Yes, 그 때라면, 요원님의 몸도 조금은 회복이 되어 있겠죠. 조금은 무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때까지 어느 정도는 몸이 나아야겠죠?"
"...쓸데없는 데서 배려심이 좋군. 하긴, 그게 캐롤다운 모습이지만."
"후후, thanks. 이래뵈도 의료요원이니까요. 의료요원으로서, 아픈 요원은 잘 보살펴 드려야죠. 설령 그 사람이, 저와 어느 순간부터 어떤 문제로 인해 껄끄럽게 된 사람일지라도."

마지막 말엔, 대놓고 가시가 있었다. 저런 걸...뭐라고 부르더라? 에이, 모르겠다. 말하지 말자. 괜히 입 밖으로 내뱉었다간, 뭔 사단을 치룰지 모른다.

"그, 그래. 아무튼 난 들어가 보겠어. 그럼 그때 보자고."
"그래요... 잘 들어가세요, 제이 요원님. 혹시 몸에 어디 이상이라도 생기면 절 찾아오시고요."
"그럴 일이 없길 빌어야지. 그럼."

마지막엔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전쟁에서 A급 차원종하고 맞붙었던 이래로... 이런 긴장감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나가면서, 슬쩍 캐롤을 쳐다봤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자기 가슴에 주먹을 대고 꽉 쥐고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다시 글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배가 살짝 아프군요. 찬 커피를 너무 갑자기 마셔서 그런 걸까요. 끝내는 데로 화장실로 가야겠습니다.

저번에 예고해 드린 대로, 글 2부를 다시 올렸습니다. 나타를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이 캐롤도 꽤나 사연이 있던 사람이었죠. 유정 씨에게 왜 그런 감정을 품었는지, 이해가 갔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이번 글은 캐롤의 질투? 그런 쪽을 컨셉으로 써 봤습니다. 아마 조만간 제저씨와 그 감정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2024-10-24 22:37:15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