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김유정편: 갑작스런 초대-
Maintain 2015-06-28 10
"여, 고생이 많구만."
"제이 요원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음. 데이비드 ㅎ...아니, 지부장님을 찾아왔는데. 혹시 지부장님 지금 계시나?"
"예. 사무실에 계십니다만. 전해드릴 용건이라도?"
"별 건 아니고, 혹시 지금 좀 만나뵐 수 있나 싶어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한 번 지부장님께 여쭤 보겠습니다. ...예, 가능하시답니다. 따라오십시오."
흠, 지부장님의 위세는 역시 대단하군. 한 번 만나려고 해도 이렇게 삼엄한 경비를 뚫어야 하다니. 국장이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형네 사무실에는 굉장히 오랫만에 들리는 것 같다. 하긴, 아스타로트 건 이후에 지부장으로 승진된 데다가 또 재해복구 건으로 해결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많아졌으니. 언제 한번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약속도, 결국 계속 뒤로 미뤄져 버렸고.
"여기입니다."
"음, 수고했어. 고생하라고."
"감사합니다. 그럼."
사무적이다 못해 기계같은 느낌마저 드는 경비 요원을 보내고, 나는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음, 들어오게. 연락은 받았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사무실 문을 열었다. 역시나...라고 해야 하나, 사무실 안은 온갖 서류로 가득했다. 서류가 7, 방이 3이라고 할 수 있겠군. 특히 책상은 빈 틈도 없이 서류 뭉치들로 가득 메워져 있어서, 얼핏 보면 꼭 서류가 말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여, 오랫만이야 형."
"그래, 오랫만이군. 재해복구 건 이후로는 처음인가?"
"그래. 그동안 꽤 바빴던 모양이야. 형이나 나나."
"그러게 말이네. 지부장이 되서도, 쉴 틈이 없군..."
서류 뭉치 사이로 보이는 형의 얼굴은, 꽤나 초췌해져 있었다. 관리요원 시절 이후로 저런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그만큼 바쁘단 뜻이겠지. 높으신 분인데도 쉬지도 못하고.
"가끔은 좀 쉬라고. 무리하지 말고."
"그야 그렇지만,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하하. 그런데, 손에 그건 뭔가?"
"아, 이거? 방문하는데 맨손으로 오면 쓰나. 격려차 해서 없는 돈 털어서 사 왔지."
손에 든 선물을 창가에 놓으면서 말했다. 뭘 사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고른 건 주스하고 과일 바구니였다. 어디 병문안 가시냐고 묻는 판매 점원의 말이 좀 신경쓰이긴 했지만, 뭐 비타민 챙기는데 이것만큼 더 좋은 게 어디 있겠나. 피곤한 데는 이런 비타민C가 많이 들어간 걸 먹는 게 최고라고.
"하긴 뭐, 지금 몸 상태는 거의 환자나 다름없으니. 고맙네. 잘 먹도록 하지."
"그래 달라고. 안 그러면 사온 사람 민망해지니까. ...흠, 그건 그렇고."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째 한 명 더 보여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흠, 이상하군.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
"아, 혹시 김유정 요원을 찾는 건가?"
"요즘 바쁘게 지내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왜, 잠깐 화장실이라도 갔나?"
"며칠 휴가를 보냈네. 요 근래의 사태에서 제일 고생한 게 김유정 요원 아닌가. 특별히 일주일 정도 휴가를 보냈지."
"그래? 그거 부럽군. 나도 휴가 좀 썼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나뿐만 아니라, 기왕이면 애들도 같이."
"나도 그렇게 해 주고는 싶지만... 휴, 이해해 주게. 플레인게이트 건으로 유니온의 높으신 분들이 잔뜩 신경이 섰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현 인력에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자네들 뿐이고."
"뭐, 그럴 줄 알았어. 빨리 어떻게든 사태를 끝내야지. 그래야 애들도 맘 편히 쉴 수 있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이제 여기서 볼 일은 대충 끝냈으니.
"벌써 가려는 건가?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지."
"괜찮아. 형도 바쁘잖아. 바쁜 사람 계속 방해하는 취미는 없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자네...유정 씨를 만나러 가려는 거 아닌가?"
"뭐, 아니라곤 말 못하겠군. 나도 유정 씨 고생한 건 잘 알고 있으니까. 답례 기념으로, 같이 식사라도 하러 가야겠어."
"자, 자네 설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하고 책상을 박차며 일어나는 형.
"혹시 자네, 식사를 핑계로 유정 씨한테 뭔가 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니겠지...? 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시고, 그리고 그걸 핑계로...!"
"수, 수작은 무슨!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깜냥도 아니고. 아니 그나저나 형, 왜 갑자기 그렇게 과민반응을 해? 형, 혹시...또?"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다면, 열한 번을 찍어보라고 하지. ...하지만 세상엔, 열한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도 있었어."
"...아..."
"그런데, 자네는 이런 내 앞에서 유정 씨와 식사를 하러 간다고 말을 했지. 자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워워, 진정해 형. 내 장담하지. 유정 씨한테는 손끝 하나도 안 댈 거라고. 그래도 영 못 미더우면, 감시원이라도 한 명 붙이던가."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어 보겠지만... 손끝 하나도 대지 않는 걸세, 알겠지?"
"거 참, 알겠다니깐... 내가 그렇게까지 못 미더운 거야, 형?"
내가 이 정도로 신용불량자였다니. 진짜 앞으로는 좀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한 30분을 형을 설득하면서 생각했다.
"...흠..."
그런 관계로, 사무실에서 나왔을 땐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시계를 안 차고 나와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여섯시 정도는 됐을까. 이거...앞으로 형 앞에서 유정 씨 얘기는 하지 말아야겠다.
-꼬르륵...
꼴사납게, 뱃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거 오늘 하루종일 거의 먹지도 못했군. 플레인게이트에 아침 일찍부터 출격하느라 오늘 먹은 거라곤 선식 한 잔에, 방금 전에 조금 먹은 과일과 주스 뿐이었으니.
뭐, 이렇게 된 거 일단 집으로 돌아갈까. 유정 씨도 지금 부르기엔 시간도 좀 늦은 것 같고 뭣보다 쉬고 있는 사람을 함부로 부르는 것도 실례일 테니.
그리고 기왕 돌아갈 거, 마트에서 이것저것 좀 사 가자. 새로 개발한 녹즙 레시피도 실험해 볼 겸해서 야채도 좀 사 가고, 오늘 먹을 찬거리와 술도 좀 사 가야지. 검사를 받은 날엔 이것저것 먹어 줘야 마음이 좀 풀린다. 그 날 이후로 내 몸을 검사하는 날은... 그 사람이 그럴 짓을 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잔뜩 긴장하게 되니까. 긴장을 풀기 위해서는, 알코올과 그에 맞는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다.
"어디 보자..."
그래서 도착한 마트. 시간이 시간대라, 사람이 많았다. 이거... 솔직히 좀 부담인걸. 사람 많은 데는 별로 안 좋아한다고. 지금도 내게로 오는 시선도 신경쓰이고. 빨리 살 것만 사고 나가야겠어. 어디 보자, 일단 야채 코너가...
"어라? 제이 씨?"
깐 당근과 흙당근 중에서 뭘 골라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낮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유정 씨 아냐? 여긴 어쩐 일이지?"
"그건 제가 묻고 싶네요. 제이 씨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세요?"
"보시다시피. 녹즙 재료로 쓸 당근으로 깐 당근과 흙당근 중에 뭐가 더 건강에 좋을지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지. 그러는 유정 씨는?"
"저녁 찬거리 사려고요. 휴, 간만에 반찬 좀 만드려니 이것저것 사야 할 게 많네요."
"고생이 많군. 그나저나, 소식 들었어. 휴가라며?"
"지부장님 덕분에요. 그렇긴 한데... 저도 어지간히 일 중독이 됐나 봐요. 무심코 손이 서류나 무전기로 간다니까요? 습관이 무섭다더니. 후후."
"너무 무리하진 말라고. 주어진 휴가, 잘 써먹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할 텐데요. 일주일은 생각보다 짧으니까요. ...아, 그건 그렇고."
유정 씨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조금은 안절부절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왜. 뭐 할 말이라도?"
"뭐, 다른 건 아니고... 저, 혹시 시간 되신다면..."
"시간? 시간이야 많은데. 나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 혹시...데이트 가자고?"
"데, 데이트는 무슨! 그런 거 아니에요. 그저... 혹시 시간 되신다면... 저희 집에 오셔서 식사라도..."
-쿨럭
"꺄악! 제이 씨, 괜찮으세요?!"
"거, 걱정 마. 갑자기 그런 얘기를 들어서 살짝 충격받은 것 뿐이니까. ...그나저나, 갑자기 왜?"
"요새 얘기도 얼마 못 했으니까... 플레인게이트 건 때문에 제이 씨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하고도 떨어져 지내고 있고. 애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듣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플레인게이트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분들의 소식도요."
"뭐, 다들 잘 지내고 있긴 한데... 좋아. 알았어. 여기서 대충 말하는 것보단 한 자리에 앉아서 자세히 얘기하는 편이 더 좋겠지. 초대, 응해주지. 고마워 유정 씨. 덕분에 밥값도 굳겠네."
"아니에요. 자, 그럼 마저 장 볼거 볼까요? 이거... 기합 단단히 넣어야겠는데요? 갑자기 손님 초대라니."
"기대하고 있지. 요리실력 좀 보자고."
그 이후에, 우리는 장을 보며 이것저것 얘기도 했다. 그나저나...겉은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속은 좀 불안한걸.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가는 게 대체 몇 년 만이더라...? 어렸을 때 누님 집에 몇 번 갔던 거 빼고는 이번이 처음이니...
예, 안녕하세요. 오늘도 글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날씨가 많이 덥군요. 건강관리에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엔 도통 글을 쓸 시간이 잘 나지 않는군요. 오늘 같은 경우도 글을 더 길게 쓰고 싶었지만, 도통 시간이 나지 않아 적은 분량이 되고 말았습니다ㅠㅠ 언제 시간이 나면 이 짧은 분량을 만회할 수 있게 긴 글을 써 볼 예정입니다. 짧은 분량이지만, 그래도 재밌게 읽어 주셨으면 하네요.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 다시 뵙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