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만약 제저씨가 안경을 벗는다면. -김유정편: 프롤로그-

Maintain 2015-06-26 19

요즘 애들이 하는 말 중에, '꿀빤다'는 말이 있다는 것 같다. 나야 뭐 막말로 꼰대에 노땅이니 요즘 애들 하는 말은 잘 모르지만, 아무튼 대충 그 꿀빤다는 의미는 '굉장히 편한', 뭐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사실 그래서 몇개 더 찾아보다가, '꿀보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고생은 별로 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은 그런 위치, 대충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유니온에도 그런 '꿀보직'들이 몇몇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그 꿀보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른바 '높으신 분들'이었다는 게 함정이지만. 하는 건 없으면서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는, 전형적인 윗머리들의 모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누님은 그런 윗머리들을 경멸하다 못해 거의 혐오하셨었지. 생각난다. 어느 날 몇몇 젊고 예쁜 클로저 요원 누님들과 같이 높으신 분들을 뵈러 갔었지. 평소와는 다르게 굉장히 잘 차려입고서. 무슨 '접대'를 해야 한다나. 그때는 아직 어렸기에 몰랐지만, 아마 그건 단순한 접대가 아닌, 그런 쪽의 의미였겠지. 잔뜩 뭐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겠고.

다행이 누님은 별 험한 일 당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셨지만, 거의 몇 달을 우울하게 지내셨다. 가끔 가다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그러면서 내게는 넌 나중에 커서 절대 그런 어른이 되지 마라, 내게 입이 닳도록 충고하셨던 게 생각난다.

하지만 그렇게 더러운 빛이 있으면 깨끗한 그림자도 있는 법. 그렇게 높으신 분들께서 꿀을 빠시는 동안에도, 거의 쉬지도 못하고 뼈빠지게 굴러다녀야만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당시 유니온의 밑바닥 대부분이 그렇게 굴러다녔지만. 물론 보상은 제대로 받은 적은 거의 없었고.

아, 물론 모든 엘리트들이 그렇게 앉아서 꿀만 빠는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최전선에서 말단들과 함께 굴러다녔던 엘리트 요원들도 있었고, 또 그들의 생활을 어떻게 해서든 보장해 주려는 행정요원들도 있었다. 다행이 내가 있었던 울프팩의 사람들은 그런 부류였고. 누님께서 말씀하셨다. 약자라고 절대 그들을 깔** 마라, 네가 저들에게 잘 해주면 저들도 언젠가는 너에게 큰 보답이 될 거다, 라고.

뭐, 그리고...살짝 화제를 돌려서, 자의건 타의건 그 빛과 그림자 사이에 낀 중간관리직은 항상 서러운 법. 그 서러운 중간관리직의 대표주자가 바로 관리요원이었다.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유니온이 항상 위상능력자만 뽑는 곳은 아니다. 아니, 사무직이나 기타 등등 펜대를 굴려야만 하는 일들도 많고, 그래서 위상력은 없지만 각 분야에서 날고 긴다는 인재들이 유니온에 많이 자원을 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당연히 그들의 목표는 승진. 작게는 국장에서, 크게는 지부장, 어쩌면 그 이상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겠지. 물론 그러기 위해선 이른바 '실적'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들 열심히 일했었다. 차원전쟁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요원들을 보조해준다는 사명감도 있었겠지만.

하지만 그런 그들도, 관리요원만큼은 정말 가기 싫어했었다. 차라리 다른 곳에서 과로로 쓰러지면 쓰러졌지, 다들 관리요원만큼은 정말 가고 싶지 않아했지. 뭐, 아마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전쟁 때 관리요원으로 파견...그건 거의 사지로 가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물론 전쟁 초기에는 많은 이들이 자원을 했다. 아마도 사명감에 불타오른 치기어린 행동이었겠지. 하지만 그 사명감도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위험한 환경과 상상을 초월하는 업무량, 그리고 자기가 관리하는 요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간다는 정신적인 문제로 금방 **버렸다는 게 함정이지만. 데이비드 형 말로는 자기 관리요원이었던 시절에 한 1주일 정도 잠을 못 잤던 적도 있었다나. 그리고 몇 번 차원종들 때문에 죽을 뻔도 있다고 했고. 쾌활한 척 말은 안 하지만, 아마 우리 팀이 와해된 거에도 굉장히 고통스러워 하고 있겠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관리요원은 유니온 사무직 내에서 제일 기피받는 보직이 되어 버렸고, 그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다. 큰 전쟁은 끝났지만, 차원종들은 계속 나타나고 있고, 그 말은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자, 여기요. 일주일 치 약이니까, 식후 30분마다 복용하시는 거 잊지 마세요."
"음. 알겠어. 아무튼 매번 고맙군 캐롤." 

캐롤에게서 약을 받아 주머니에 챙겼다. 애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 안했지만, 요즘 들어서 어째 몸이 점점 더 약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다른 애들이 집으로 간 후에, 몰래 캐롤의 사무실로 찾아가 진단을 받았다.

아마 위상력도 얼마 없는 이런 비루한 몸뚱이로 그 차원압 강력한 플레인게이트에 출입하는 게 문제가 되었던 거겠지. 최근에 점점 더 각혈하거나 현기증이 날 때가 많아진 것도 그 탓일 거다. 매번 출격할 때마다 이것저것 약물로 어떻게든 땜빵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의료요원에게 정확한 약을 타는 것만 못하겠지. 그래서 캐롤을 찾아갔고, 약을 얻은 것이다.

"...휴. 점점 더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네요. 요원님의 몸도, 위상력도."

차트를 살펴보던 캐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에요. 아마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만..."
"뭐... 그 정도는 이미 각오했어. 그래도 굴릴 수 있는 몸뚱이, 더 굴려 먹어야지. ...한 대 피운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 아껴봐야 뭐가 더 나아지겠나. 오히려 이런 몸뚱이, 굴릴 수 있다면 더 굴려 먹어야지. 나 하나 고생하면, 그만큼 애들은 더 편해질 테니까. 

"다른 애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줘. 애들 성격에 어떤 반응 나올지 눈에 선하니까."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다들 걱정하고 있으니까. 다른 요원들 뿐만 아니라 요원님이 

아는 다른 분들, ...그리고 유정 언니도요."
"...유정 씨가?"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허를 찔린 기분이다. 아무 말 않고 캐롤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유정 언니는 요원님의 관리요원이시니까요. 관리요원으로서 자기가 관리하는 요원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야 그렇지. 그렇지 않다면 관리요원 실격이야."
"그렇죠.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조금은 다른 게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해서요."
"...다른 거?"
"그게 어떤 건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무튼 언니도 요원님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주세요. 비록 플레인게이트에는 오지 못하셨지만, 통화할 때마다 계속 요원님의 안부를 묻고 계시니까. 아, 물론 다른 요원분들 안부도 같이 묻고 계시지만."
"그렇군..."

하하, 이거 영광이군. 그 유정 씨가 날 그렇게 신경쓰고 있었을 줄이야.

"뭐, 말이라도 나온 김에 언제 한번 직접 찾아가 볼까? 생각해 보면, 요즘 유정 씨와 얘기해 본 지도 꽤 됐고 말이야."
"만약 그렇게 되시면 제 안부도 좀 전해 주시겠어요? 언제 한 번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어지네요."
"그러지. 그리고 만약 술자리라도 나게 되면 나도 좀 껴 달라고. 양팔에 두 미녀를 끼고 술 마시는 거, 남자로서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다고."
"후후, 과연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요. 약 챙겨먹는 거, 잊지 마시고요."
"걱정 마. 약 관리 하나만큼은 자신 있으니까. 그럼."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복도 바닥에 담배를 비벼끄며, 조금은 서둘러서 나왔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느긋하게 얘기할 수 있었는데.

뭐, 사실 유정 씨 얘기 때문에 조금 불편한 것도 있었으니. 캐롤이 유정 씨한테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고. 아마 캐롤이 그런 얘기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뭣보다 저번에 캐롤의 그런 모습을 봐서 그런지, 하반신에도 좀 부담이 가기도 했고. 

아무튼, 이왕 말 나온 김에, 뭐라도 하나 사 들고 유정 씨를 만나러 가 봐야겠다. 어차피 집이야 천천히 가면 되고, 유정 씨는 아마 지금도 데이비드 형과 함께 서류 정리에 머리를 싸매고 있을 테니까. 격려차 해서 들려 봐야지.





예, 안녕하세요. 굉장히 오랫만에 글을 올리네요. 요즘 이것저것 바빠서 글 쓸 시간이 별로 없었네요.
결국 이렇게 김유정 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생각해 보면 잘도 여기까지 글을 썼네요. 이제 슬슬 이 시리즈도 끝이 나려나 봅니다. 
원래는 김유정편 이전에 단편을 몇 개 쓸까 했는데, 아무래도 이 편까지는 쓰고 난 후에 단편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김유정 편을 먼저 올리게 됐습니다. 거기다 제가 개인 사정으로 앞으로 글 쓸 시간이 많지는 않다는 것도 있고요. 그래도 이번 김유정 편과 앞으로 남은 글은, 최대한 길게 쓰고 싶습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2024-10-24 22:29:0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